AC.1해설을 읽다가 ‘신적진리’(Divine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원문 자체에는 ‘Divine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의어떤단어를신적진리라고번역한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말한신적진리는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인간의이해속에있는것이고,그것이사람을변화시키기시작할때비로소신적진리가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심화4)
AC.1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스베덴보리의원어에서는층위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는 먼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1원문에는 우리가 해설에서 사용한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AC.1의 ‘층위’를 어떤 하나의 영어 또는 라틴어 단어의 번역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에서 ‘단계’또는 ‘층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는 영어 번역에서 ‘degree’, 라틴어에서는 ‘gradus’입니다. 특히 서로 질적으로 구별되는 단계들을 설명할 때 이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천국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베덴보리가AC.1에서`gradus`라고썼고우리가그것을층위라고번역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존 설명처럼 AC.1의 ‘층위’의 원어가 곧 ‘degree’, 더 엄밀히는 ‘discretedegree’라고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AC.1해설에서 ‘층위’라고 한 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차이를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한국어입니다. 이후 다른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gradus’나 그 밖의 관련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자리에서는 각각의 원어와 문맥을 따라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번역 작업에서 꽤 중요한 원칙입니다. 해설을 위해 사용하는 한국어 개념과 스베덴보리 원문의 전문용어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층위’가 스베덴보리 사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고 해서 그 단어가 등장하는 모든 해설의 배후에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원어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원문에 ‘gradus’가 등장할 때는 그 문맥에서 ‘단계’, ‘층위’, ‘정도’가운데 무엇이 가장 적절한지 따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1의층위에대한원어가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은 조금 뜻밖입니다. ‘AC.1에는그에직접대응하는원어가없다’입니다. ‘층위’는 우리가 해설에서 사용한 표현이며, 스베덴보리의 단계 개념을 대표하는 중요한 원어 가운데 ‘gradus’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구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앞으로 라틴어 원문까지 함께 대조하며 AC를 번역할 때 훨씬 안전한 출발점이 됩니다. (AC.1심화3)
AC.1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에게층위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서로 다른 단계와 질서의 구별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겉 사람과 속 사람, 지상과 천국을 단순히 같은 종류의 것이 조금 더 높아지거나 낮아진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후기 저작에서는 연속적 단계와 불연속적 단계의 구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층위’라는 한국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를 설명할 때 유용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1원문 자체가 ‘층위’라는 전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1은 외적인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해설에서 사용한 ‘층위’는 우선 이 차이를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해설어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단계 교리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AC.1이 이미 자연적·영적·천적 단계의 완성된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오히려 ‘층위’라는 말을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된 두 책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속뜻을 문자적 의미의 조금 더 깊은 해석 정도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의 말씀 안에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는 이후 AC를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AC.1에서 ‘층위’라는 표현은 하나의 유용한 안내어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단어 자체를 AC.1원문의 전문용어로 생각하지 않고, ‘겉글자에서보이는외적인것과그안에존재하는내적인것을구별하여이해하기위한해설상의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그어 두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실제 단계 교리가 등장할 때 그 개념과도 혼동하지 않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AC.1심화2)
AC.1에서 ‘religious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belief’,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faith’가 아니라 ‘belie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AC번역에서 ‘faith’는 기본적으로 ‘신앙’, ‘belief’는 ‘믿음’으로 구별하기로 한 원칙을 따르면, ‘religiousbelief’는 ‘종교적인믿음’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이라고 번역하면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차이가 한국어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1의 이 한 표현만으로 ‘religiousbelief’의 신학적 범위를 지나치게 크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체계만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에서 신성을 인정하는 종교적 믿음까지 모두 포함하는지, 또는 ‘faith’와 ‘belief’사이에 스베덴보리가 언제나 일정한 전문적 구별을 두는지까지는 더 많은 용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1은 아직 그러한 구별을 설명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 안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넓게 열거하는 서문의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원문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faith’가 나오지 않았는데 익숙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로 ‘신앙’으로 바꾸지 않고, ‘religiousbelief’를 ‘종교적인믿음’으로 옮겨 두는 것입니다. 이후 AC를 읽으며 ‘faith’와 ‘belief’의 실제 용례가 충분히 쌓이면 두 단어의 관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사용을 따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1심화1)
AC.45와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상응을 단순한‘영적암호표’처럼 생각하면‘물=진리’, ‘나무=지각’, ‘짐승=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그러나 실제로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자체가 좋은 예입니다.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짐승은 인간의‘애정’과 관계됩니다.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곰,늑대,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암송아지,양,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따라서‘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겔34:25에서는‘악한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따라서‘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이자연물의정확한정답은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이자연물이인간의어떤영역과관계되며,지금이문맥에서는그영역이어떤상태에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짐승의 경우에는‘애정과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온순한지 해로운지,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구절이니까좋은뜻,부정적인구절이니까나쁜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나의 구절만 보고‘짐승은애정을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같은짐승이어떻게선한애정도악한애정도뜻할수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사람의애정(affections)을뜻한다는사실,곧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는사실은말씀의많은구절을보면분명한데요,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이렇게여기서전반적으로‘용들’(whales),‘과수’(fruittree),‘짐승’(wildanimal),‘가축’(beast),‘기는것’(creepingthing),‘나는새’(fowl)가함께언급되는데,이것들이사람안의살아있는원리들을뜻하지않는다면,여호와를찬양하라는부름을받을수없었을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tree,” “wildanimal,” the “beast,” “creeping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가축’(beasts)과‘땅의짐승’(wildanimalsoftheearth),또‘가축’(beasts)과‘들의짐승’(wildanimalsofthefield)을조심스럽게구별합니다.그럼에도사람안의선한것들은‘가축’(beasts)이라합니다.마찬가지로,하늘에서주님과가장가까운이들도‘생물’(animals)이라하는데,에스겔서와요한계시록에서모두그렇게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animalsoftheearth,” and “beasts” and “wildanimalsofthefield.”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또한복음이전파되는이들도‘피조물’(creatures)이라하는데,이는그들이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주3. 여기이단어는‘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아닌, 흠정역(theauthorizedversion)에서처럼‘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정확하게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준’(ζοόν, z¯oon)과, 라틴과영어의‘애니멀’은서로정확히대응하며, ‘생물’(alivingcreature)이라는의미에맞기때문입니다. 원전(theoriginal)해당구절들에서사용된단어는준이며, 만일‘비스트’ 사용을의도했다면썼을법한테르(θήρ, th¯er)나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living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씨와짐승의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씨는정확히무엇이고짐승의씨는정확히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두려워하지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앞에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인간안의살아있는것들을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있는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짐승은선한애정입니까,악한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그짐승의성질에따라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질서잡힌높은애정이고들짐승은본능적인낮은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살아있는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존재’라는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가까운하늘의존재들조차생물이라고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온천하에다니며만민에게복음을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creature’, 곧 ‘모든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창조되는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인간의애정을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단어를보았으니뜻은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2, ‘만유의 주 앞에’와, 찬67,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입니다.
오늘은 창1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4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30번에서 4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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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체와 생명의 움직임, 질서와 활력이 드러나는 날들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다만 분량 관계상, 여섯째 날 본문인 창1:24-25, 글 번호로는 AC.44-45만 다루고, 그 앞 부분인 넷째 날, 다섯째 날 본문은 원고나 블로그 형태로 주중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는 분량이 많네요. 주일예배 시간 관계상 맨 뒷부분만 다루었지만, 앞부분은 일상 중 꼼꼼히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거기 정말 보석 같은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읽으실수록 뭐랄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뼈가 충실해지고, 근육이 붙는 걸 느끼실 겁니다. 그것은 영혼의 주춧돌이 반석 위에 놓이는 것으로, 그 결과 영육 간 아주 건실한 빌딩이 높이 세워져 갈 것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5
태고시대를살았던사람들은이해와의지에속한것들을이렇게상징으로표현했습니다.그래서선지서들,그리고구약말씀전체에서보면늘서로다른동물들을가지고같은걸표현하는데요,짐승에는두종류가있습니다.해롭기때문에악하다하는짐승들이있고,해를끼치지않기때문에선하다하는짐승들이있지요.이때사람안의악들은곰이나늑대,개같은해로운짐승들로,그리고반대로선하고온순한것들은암송아지나양,어린양같은짐승들을가지고표현하는것이지요.여기이본문에서말하는‘짐승’(beasts)은선하고온순한짐승들이며,따라서애정들을뜻합니다.이는이본문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대해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은‘땅의짐승’(wildanimalsofthatearth)이라고하는데,이것들은욕정(cupidities)과쾌락(pleasures)을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animalsofthat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시대사람들이이렇게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살던원시인들이동물그림으로생각을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악’, 또는 반대로 ‘짐승=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온순한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있는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자체는 여기서 ‘동물이움직이므로애정도인간을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을 ‘그땅의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본래중립적이므로없앨필요가없고방향만바꾸면된다’거나, 반대로 ‘몸과관련된모든쾌락은악하므로제거해야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4, 25)
AC.44
사람은땅과같아서,신앙의지식(knowledges)이먼저그안에뿌려지지않으면어떤선도산출할수없습니다.그래야무엇을믿어야하고,무엇을행해야하는지를알수있기때문입니다.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말씀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말씀을듣고도행하지않는것은,믿는다고말하면서도그믿음에따라살지않는것과같습니다.이런경우에는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게되고,그결과마음이나뉘어,주님께서다음말씀에서‘어리석은사람’(foolish)이라하신사람들에속하게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이해에속한것들은앞서보인것처럼‘물들이내는기는것들’(the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과‘땅위의새들’(thefowlupontheearth),그리고‘하늘의궁창에있는새들’(uponthefacesoftheexpanse)로,그리고의지에속한것들은여기‘땅이내는생물’(the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과‘가축’(thebeast)과‘기는것’(thecreepingthing),그리고‘땅의짐승’(thewildanimalofthatearth)으로각각가리키고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nd also by the “fowlupontheearth,” and “uponthefacesofthe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thing,” and also by the “wildanimalofthat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것에서행하는것으로가야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땅’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는 ‘아는것보다행하는것이중요하니지식은별로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분리되어서는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과 ‘모래’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행하지않습니다.’ 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말하면서믿는대로살지않는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생물을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내는기는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것’, ‘땅의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속한것’과 ‘의지에속한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것과행하는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것을열심히실천하면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왜이책은계속선과진리,이해와의지,사랑과신앙같은이야기를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행함이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