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 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 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에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bygrace.kr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bygrace.kr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 earth), 곧 ‘’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심화

1.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

bygrace.kr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bygrace.kr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의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AC.15는 바로 그 선언에 이어 매우 중요한 내용을 하나 더 밝힙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합니다.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5의 중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아버지를 천국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분으로 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4에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AC.14에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했을 때,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15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곧바로 덧붙이는 이유가 그것을 막아 줍니다.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아버지를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별도의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 않고 주님 자신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가 선택한 본문은 요14:6, 8-11입니다.

 

빌립은 주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십니다. 이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AC.15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다고 말하는 근거를 주님의 말씀 자체에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요한복음의 각 표현에 별도의 상응이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왜 이 말씀을 인용했는지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 AC.15의 주장과 직접 연결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따로 계시지만 천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식의 설명도 AC.15의 표현과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이유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14와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4에서는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온 천국에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AC.15에서는 천국 전체가 그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 단락은 서로 이어져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말할 것인지 그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주님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은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가?’,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질문들입니다. 이것들은 스베덴보리의 주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AC.15 한 단락이 그 모든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그 이유는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요14의 주님 말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AC.15를 해설하면서 곧바로 주님의 영화 과정 전체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내용은 관련 본문이 나타날 때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천국 전체가 그렇게 안다는 말을 근거로 천사들이 이 사실을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지까지 추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5는 천국의 인식 방식이나 천사들의 지각 구조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14AC.15의 관계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14주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AC.15그러면 아버지는?이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단락을 통해 창세기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해설하기 전에 자신이 말하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 둡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의 글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15의 핵심은 결국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그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과 아버지는 서로 떨어진 두 분이 아니라 하나이십니다. 이것이 AC.15가 직접 밝히는 핵심입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bygrace.kr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

이어지는 모든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분뿐이시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를 것을 명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the Lord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the Lord.

 

해설

AC.14는 앞에서 이어져 온 거듭남의 상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명칭 하나를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가운데서자신이 주님이라고 할 때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먼저 분명히 밝힙니다.

 

그 대답은 명확합니다.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만입니다. 따라서 이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별도의 설명 없이 주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14는 어떤 특정한 창세기 구절의 속뜻을 해설하는 단락이라기보다 앞으로 사용될 용어를 미리 정해 놓는 성격이 강합니다. 독자가 주님이라는 말을 막연한 신적 존재나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그 대상을 명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이 표현에 우리가 별도의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에서 사용할 명칭을 이렇게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 이유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분만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국에서 여러 주들 가운데 가장 높은 한 분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마28:18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다만 AC.14에서는 그 교리적 의미를 더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천국에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시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요13:13으로 확인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라고 불렀고, 주님 자신이 그 호칭을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AC.14의 문맥에서는 이 성경 구절을 그 이상으로 확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앞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임의적인 명칭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불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성경적 용례를 확인하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여러 단락에서는 주님의 신성과 인성, 영화,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 등 훨씬 깊은 주제들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AC.14 안으로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AC.15부터 주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어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그 본문이 말할 때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이번에 창1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지키고 있는 원칙과도 잘 맞습니다. 한 단락에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담으려 하기보다, 그 단락이 말하는 만큼 충분히 읽고 다음 단락의 몫은 다음 단락에 남겨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AC.14 자체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첫째, 앞으로 주님이라고 할 때에는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킵니다. 둘째,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십니다. 셋째,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님 자신도 제자들이 자신을 라고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하셨으며, 부활 후 제자들도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AC.14는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한 독법의 기준을 세워 줍니다.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주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명칭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서 이미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 한 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AC.14가 앞으로 이어질 모든 글을 위해 먼저 밝혀 두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주님 예수 그리스도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겠다고 말

bygrace.kr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bygrace.kr

 

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번째 상태까지만, 다른 이들은 번째,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개의 연속적인 상태로 제시했습니다. 이어 AC.7부터 AC.12까지 첫 번째 상태에서 여섯 번째 상태까지를 차례로 개괄했습니다. 이제 AC.13에서는 그 설명 끝에 매우 짧지만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여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간결하게 나누어 말합니다. ‘오늘날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며,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상태까지 이릅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먼저 주의할 것은 AC.7-12에서 설명한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동일하게 끝까지 통과하는 자동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상태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로 제시하면서도, 곧바로 모든 사람이 그 마지막 상태까지 실제로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일종의 정해진 프로그램처럼 이해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으로 첫째에서 둘째, 둘째에서 셋째로 올라가 결국 여섯째에 도달한다AC.13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각 상태에 이르는 사람의 수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AC.13을 근거로 각 사람의 현재 영적 단계를 우리가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외적인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몇 번째 상태인지 알 수 있다는 판별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거듭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이 번째 상태까지만 이른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첫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는 AC.7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AC.13에서는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 사람들의 구체적인 심리나 생활 모습을 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도 AC.13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인지, 더 어려운 시험이 있기 때문인지, 사람이 중간에서 물러나기 때문인지 이 단락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를 그럴듯하게 보충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는 말은 AC.12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며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뜻밖에도 일곱 번째 상태를 언급합니다. AC.6에서는 여섯 ’, 곧 여섯 개의 연속적인 거듭남 상태를 말했고 AC.7-12에서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3에서는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덧붙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바로 앞 AC.12의 마지막 문장과도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이어지는 글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AC.13에서 일곱 번째 상태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영적 개념과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보다 더 나아간 일곱 번째 상태를 언급하며,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은 언제나 대부분 번째 상태에 머문다는 보편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는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시대 모든 인간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 ‘어떤 이들’, ‘다른 이들’,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수치나 비율을 제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듭남의 각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의 정확한 통계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깊이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AC.13이 앞의 개요 전체에 더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AC.6-12만 읽으면 여섯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질서로 제시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그 순서를 따라 여섯 번째 상태까지 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13은 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든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의 상태들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첫째, 둘째, 셋째 등의 숫자는 단순히 신앙생활의 연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래 신앙생활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높은 상태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AC.13은 그런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숫자들을 사람의 서열표처럼 사용하는 것도 본문의 목적은 아닙니다. ‘나는 다섯째 상태이고 사람은 둘째 상태다라고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거듭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3의 엄중함을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이것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문장이 왜 그런 현실을 보여 주는지, 사람은 왜 어떤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 각각의 경우에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AC.13 한 단락은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AC.13은 오히려 여섯 상태의 개요 끝에 하나의 제한선을 그어 줍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하게 완성되는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 대부분은 번째 상태에 이르고, 이후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점차 적어져 여섯 번째 상태에는 적은 이들만, 일곱 번째 상태에는 거의 아무도 이르지 않는다.

 

짧고 다소 엄중한 말이지만, 바로 이 한 문장이 AC.6-12의 개요를 실제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제한이 됩니다. 거듭남의 상태에는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 질서의 마지막까지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AC.13이 이 자리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입니다.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bygrace.kr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이 본문을

 

물과 물 사이의 궁창, 분별이 시작되는 둘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bygrace.kr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bygrace.kr

 

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bygrace.kr

 

 

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08(D1)

 

2641, 3. 창1.3, 2026-03-08(D1)-주일예배(창1,6-8, AC.24-26), ‘둘째 날, 두 번째 상태’.pdf
0.50MB

 

 

 

주일예배(2026/03/15, 창1:9-13, AC.27-29), '셋째 날, 세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

bygrace.kr

 

주일예배(2026/02/22, 창1:3-5),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단 한 문장입니다. ‘저녁’, ‘아침’, 그리고 의 의미는 앞서 창1:5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하고 곧바로 다음 절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별다른 내용이 없는 단순한 참조 문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은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이미 설명된 상응의 의미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1:5에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했고, 1:8에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첫째 날과 둘째 날이라는 시간의 진행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창조의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저녁’, ‘아침’, ‘도 단순한 하루의 시간대를 넘어 영적인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됩니다.

 

앞서 창1:5에 대한 설명에서 저녁은 선행하는 상태 일반을, ‘아침은 뒤따르는 상태 일반을 나타내며, ‘은 상태 자체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둘째 날의 끝에서도 같은 말들이 다시 등장하자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새로 설명하지 않고 앞의 설명을 그대로 참조합니다. 첫째 날에서 사용된 상응의 원리가 둘째 날이라고 해서 갑자기 다른 뜻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저녁을 언제나 단순히 악하거나 어두운 상태, ‘아침을 언제나 밝고 완성된 상태라고만 고정해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저녁아침이 자연계의 시각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거듭남 가운데 서로 이어지는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태가 지나가고 그 뒤를 새로운 상태가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 곧 하나의 영적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AC.26에서 이것을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가장 자연스러운 답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라는 한 문장은 독자에게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가지고 계속 읽으라는 안내 역할을 합니다. ‘저녁’, ‘아침’, ‘이 앞으로 반복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정의할 필요 없이, 앞서 밝혀진 상응을 바탕으로 각각의 날에 해당하는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작은 독법 하나를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한 번 설명한 뒤, 뒤에서는 그것을 반복하여 자세히 풀기보다 앞의 설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짧은 글을 만났을 때 여기에는 내용이 없다고 지나치기보다, ‘앞에서 설명한 어떤 의미를 여기에서도 계속 적용하라는 것인가?를 확인하며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AC.26은 바로 그런 연결점입니다. 첫째 날에서 밝혀진 저녁’, ‘아침’, ‘의 의미가 둘째 날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며, 창세기의 들이 자연적 시간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상태들을 담고 있다는 앞선 설명을 다시 붙들게 합니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독자가 앞에서 얻은 해석의 열쇠를 놓치지 않고 다음 상태로 넘어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bygrace.kr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앞선 AC.24에서 제시한 거듭남의 중요한 원리를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시며, 사람이 아직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 심지어 감각의 오류와 욕정까지도 사용하여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5는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 역시 바로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44:24가 인용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문자적으로 읽으면 천지 창조를 말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에도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24에서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과 연결했으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면 주님께서 그 안의 잘못된 것들을 모두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AC.25는 놀랍게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사42:3을 인용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그리고 이 말씀을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오류욕정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류와 욕정 자체가 좋은 것이므로 그대로 보존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단번에 파괴하여 다른 존재로 바꾸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미 설명했듯이, 거듭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통하여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것을 통하여 올바른 것으로 인도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AC.25가 직접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불완전한 동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면서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게 하지 않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굽히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굽히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현재 상태를 무시하고 강제로 선한 사람을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들을 통하여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AC.24에서 천국의 아르카나라고까지 한 내용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 주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류와 욕정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사42:5가 이어지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내시며라고 다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AC.25가 사42:3과 사42:5를 이어 인용하는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주님의 방식과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는거듭남의 일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인간을 단순히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시면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44:24에서는 여호와께서 홀로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신다고 하고, 42:5에서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펼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의 근원과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AC.24-25의 흐름은 오히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에게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AC.25에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창조의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거듭남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무시한 강제적 파괴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붙드시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이끄시고 굽히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사42장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AC.25에 인용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오류와 욕정을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우리를 버리거나 단번에 부수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상태에서부터 우리를 이끄셔서, 마침내 사람에게 속한 것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삶을 이끌도록 하십니다. AC.25가 보여 주는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인도입니다.

 

심화

1.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

bygrace.kr

 

 

 

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bygrace.kr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이 속하는 차원과 쓰임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

bygrace.kr

 

 

 

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bygrace.kr

 

AC.23, 창1:5, '날'(day)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living soul)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가축을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닌 것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를 단순히 사랑의 단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먼저 신앙이 사랑을 만들어 내고, 사랑이 뒤따라 행동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 분명한 것은 이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떨어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앞의 상태들과 비교하면 여섯 번째 상태의 특징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9의 세 번째 상태에서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고, AC.11에서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고 생기 있는 것들을 산출했습니다. 이제 AC.12에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연결됩니다. 다만 AC.12는 개요이므로 여기서 짐승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뒤에서 창1의 여섯째 날을 본격적으로 해설하면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다섯째 상태에서 이미 생기를 지닌 것들이 등장했고, 여섯째 상태에서도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것들이 산출된다는 흐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식물에 이어 물고기와 새가 나타나고, 다시 땅의 생물과 사람이 등장하는 순서가 거듭남의 상태들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AC.12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은 이제 영적 인간이 되며, 그를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상의 모든 교리적 의미를 한꺼번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제시하는 것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을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는지, ‘모양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뒤의 관련 본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형상을 단순히 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분명합니다. 1하나님의 형상은 여기서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상이란 정확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다라고 하나의 정의로 고정하기보다, AC.12가 제시하는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영적 인간에게 두 종류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영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 생명입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그의 음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음식이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몸이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AC.12에서 그것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입니다.

 

다만 이것을 이제 진리 공부와 선행이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다고 너무 심리적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은 영적 생명이 그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영적 생명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연적 생명도 존재합니다.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영적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몸과 감각에 속한 자연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것 역시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말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내적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로,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도 모든 자연적 즐거움 자체를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각각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AC.12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이미 영적 인간이 되어 형상이라 불리지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설명을 끝내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고,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에는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너무 앞서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아무런 갈등 없이 본능적으로 선을 행한다’, ‘신앙은 이제 완전히 사랑에 흡수된다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은 이 한 문장만으로 모두 확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 그가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지배권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AC.12는 사랑이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존재한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어 마침내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의 영적 인간과 그 후의 천적 인간 사이에는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구별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상태를 곧바로 거듭남의 완전한 종착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지만, 아직 싸움이 있으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AC.12 자체가 그 뒤에 천적 인간의 상태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 다음에 일곱째 날이 있다는 사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금 여기서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는 여섯 번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 뒤에도 사랑이 지배권을 얻기까지 싸움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12를 통해 우리는 거듭남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미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단계가 있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불붙는 단계가 있었으며, 생기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는 영적 인간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영적 인간에게도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함께 있으며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단순한 외적 행동의 변화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함으로써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문장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상태까지 이렇게 짧게 열어 보여 줍니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

bygracetistory.tistory.com

 

 

 

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bygrace.kr

 

AC.11, 창1 개요,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