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필연적인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 특히 창세기 1–11장은 성경 전체의 기초 구조를 담고 있는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전적으로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영적 삶과 교회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설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자연스럽게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특히 창세기 1–3장은 매우 독특한 본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 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단순한 우주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본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며, 창세기 2장은 태고교회의 상태를,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그가 창세기에서 시작했는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창세기 첫 장들은 성경 전체의 영적 구조를 보여 주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부분의 속뜻이 밝혀지면, 이후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 해설을 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1–11장의 문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이 이후의 역사서와는 매우 다른 고대의 문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태고교회의 문체라고 부릅니다. 이 문체는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담은 상징적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만 보면 역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 이야기에는 나무, 강, 뱀, 열매 같은 상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의 신화적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인간 마음의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는 상징적 기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해석하면 성경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창세기가 인간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창세기 앞부분은 바로 이 흐름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처음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리고 이후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 체계를 설명하는 책을 먼저 쓰지 않고, 성경 해설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성경의 맨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특징적인 선택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리 체계를 먼저 설명한 뒤 성경을 해석하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성경의 속뜻을 따라가면서 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해설 속에서 인간의 거듭남, 천국의 구조, 사랑과 신앙의 관계, 상응의 질서 등 거의 모든 핵심 교리가 조금씩 나타납니다. 즉 이 책은 단순한 창세기 주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기초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Arcana Coelestia’라는 라틴어 표현은 ‘천적 비밀들’ 또는 ‘하늘의 비밀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경 문자 안에 숨겨져 있는 천적 의미들을 하나씩 밝혀낸다는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라, 말씀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유를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의 시작에서 인간과 교회의 영적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이미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Arcana Coelestia’를 읽을 때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창세기 해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읽다 보면 인간의 영적 삶 전체에 대한 설명이 펼쳐집니다. 결국 이 책은 창세기 해설을 통해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안내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35, ‘스베덴보리는 왜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별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을까?’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가운데서도 특히 창세기 1–11장을 매우 중요하게 본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고대 이야기의 기록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영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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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3, ‘스베덴보리는 왜 55세가 될 때까지는 이런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스베덴보리가 왜 55세가 될 때까지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며 종교적 삶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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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왜 55세가 될 때까지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며 종교적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의 인생 전반부는 거의 전적으로 학문과 과학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학, 천문학, 광산 공학, 해부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매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스웨덴의 광산청에서 오랫동안 기술관으로 일했고,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당시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50세가 되기 전까지의 스베덴보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그의 인생을 하나의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 세계의 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했습니다. 광물, 기계, 인체 구조, 우주의 구조까지 폭넓게 탐구했습니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자연 세계가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상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자연 세계가 질서 있는 체계라면, 그것이 더 깊은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준비 과정은 그의 철학 연구입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탐구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훗날 그의 신학 체계에서 핵심이 되는 ‘사랑과 지혜’라는 개념의 기초가 됩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갑자기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동안 인간과 자연의 구조를 연구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는 또 하나의 준비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The Journal of Dreams’을 보면, 50대 초반의 스베덴보리는 깊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욕과 교만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려는 노력을 합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학문적 탐구의 시기가 아니라 영적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이런 내적 변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1745년 런던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연 과학 연구를 계속하지 않고, 성경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수많은 신학 저작을 집필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작품이 바로 ‘Arcana Coelestia’입니다.

 

왜 하필 55세였을까요?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것을 특별히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에 의해 허락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학문적 준비입니다. 자연 세계의 질서를 깊이 이해한 사람만이 자연과 영계 사이 상응 관계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 경험입니다. 그는 긴 인생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와 인간 마음의 복잡함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셋째는 내적 정화입니다. 꿈 일기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교만과 욕망을 깊이 돌아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이루어진 시점이 바로 그의 5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스베덴보리의 인생을 두 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연계의 학자’로서의 삶이고, 두 번째는 ‘영계의 해설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두 단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학문 연구가 없었다면 후반부의 신학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 갑자기 아무 준비 없이 일을 맡기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에 걸쳐 삶의 경험과 지식을 준비하게 하시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사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삶도 바로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55세는 늦은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한 시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내적으로도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남은 인생 대부분을 영계의 질서와 성경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방대한 저작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SC.34, 스베덴보리는 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사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창세기 해설, 곧 ‘Arcana Coelestia’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보면, 이 선택은 매우 의도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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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2, 스베덴보리의 일기, ‘The Journal of Dreams’ 소개

스베덴보리의 ‘The Journal of Dreams’는 분량이 아주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흐름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원래 출판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개인 일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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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The Journal of Dreams’는 분량이 아주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흐름이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원래 출판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개인 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개의 ‘핵심 장면’을 알고 읽으면 훨씬 또렷하게 이해됩니다. 이 일기는 단순한 꿈 기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학자에서 영적 저술가로 전환되는 내적 과정을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장면은 ‘강렬한 자기 성찰과 회개의 시기’입니다. 일기의 초기 부분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내면 상태를 매우 엄격하게 점검합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교만, 명예욕, 학문적 자부심 등을 반복해서 돌아봅니다. 특히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은지 깊이 고민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그가 신학 저술을 시작할 때 항상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나 학문 때문에 영적 통찰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 안의 교만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기록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장면은 ‘꿈과 상징적 체험의 증가’입니다. 일기 중반부로 가면 스베덴보리는 점점 더 강렬한 꿈을 경험합니다. 이 꿈들은 단순한 일상의 꿈이 아니라 매우 상징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어떤 꿈에서는 어둠 속을 걷다가 빛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꿈에서는 높은 산이나 길을 오르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이 꿈들을 단순한 환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내면에서 ‘자연 세계와 영적 의미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훗날 그가 성경을 상응과 표상의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는 배경이 이 시기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습니다.

 

세 번째로 매우 중요한 장면은 ‘내적 갈등과 두려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베덴보리의 영적 체험을 이야기할 때, 마치 처음부터 확신에 찬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꿈 일기를 읽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기록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인간적인 장면입니다. 훗날 거대한 신학 체계를 남긴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이 겪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로 주목할 장면은 ‘내적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들’입니다. 일기의 후반부로 가면 스베덴보리는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기록합니다. 특히 성경에 대한 관심이 매우 강해집니다. 이전까지 그는 주로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했지만, 이 시기부터 성경의 의미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는 내적 충동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변화는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중요한 장면은 ‘학문에서 신학으로의 전환’입니다. 꿈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그는 이전까지 자연의 질서를 연구해 왔지만, 이제는 ‘말씀의 질서’를 연구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전환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바로 ‘Arcana Coelestia’가 집필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꿈 일기를 ‘스베덴보리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을 때 기억하면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기록은 완성된 신학이 아니라 ‘영적 준비 과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혼란스럽고 감정적인 표현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매우 독특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한 단계씩 변화해 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훗날 ‘Heaven and Hell’이나 ‘Arcana Coelestia’에서 보이는 차분하고 체계적인 설명 뒤에 어떤 내적 여정이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특별한 능력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 안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과정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의 후대 저술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 곧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라는 사실을 이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SC.33, ‘스베덴보리는 왜 55세가 될 때까지는 이런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스베덴보리가 왜 55세가 될 때까지 영적 사명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며 종교적 삶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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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1, ‘사후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을 다시 만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먼저 떠난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에 대해 비교적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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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먼저 떠난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에 대해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후 영들의 세계에 들어가면, 지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처럼 마음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과는 비교적 쉽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계에서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기준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거리나 환경, 사회적 상황 때문에 서로 떨어져 지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방향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기억하는 관계라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만남이 실제로 일어나며, 서로 매우 기쁘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초기 경험 가운데는 ‘재회의 기쁨’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만남이 반드시 영원히 같은 상태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영들의 세계는 앞서 말했듯이 ‘중간 과정’의 세계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속 사람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만약 서로의 내면 방향이 비슷하다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이 서로 크게 다르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공동체로 가게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설명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는 천국을 단순히 ‘가족이 다시 모이는 곳’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랑과 선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혈연보다 ‘사랑의 성향’이 더 중요한 연결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해 같은 선을 사랑하고 같은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끼리 가장 깊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설명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조금 아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천국의 관계가 지상의 관계보다 훨씬 깊고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혈연이나 환경 때문에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천국에서는 서로의 사랑과 마음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의 공동체를 ‘참된 가족’과 같은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부부 관계 역시 사후 세계에서 계속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단순히 지상의 결혼 상태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진정한 사랑과 영적 일치를 이루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만약 두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성향에 맞는 공동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 세계의 관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지상에서의 관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어느 정도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경험이 실제로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의 중심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설명은 지상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줍니다. 만약 사후 세계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이 사랑의 방향이라면,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사람의 겉모습이나 지위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읽다 보면 사후 세계 이야기가 단순히 미래의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의 다음 장이라고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SC.30, ‘사람은 사후 어디에서 깨어나는가?’

사람이 죽은 뒤 어디에서 깨어나는가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입니다. ‘Heaven and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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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은 뒤 어디에서 깨어나는가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입니다. ‘Heaven and Hell’과 ‘Arcana Coelestia’에서는 이곳을 인간이 사후에 처음 머무르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먼저 이 영역에서 일정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영들의 세계’는 막연한 안개 같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와 활동이 있는 실제 세계처럼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의 환경은 지상 세계와 매우 비슷하게 보입니다. 집과 거리, 모임과 대화가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경험이 자연스럽고 연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간 세계, 곧 중간 영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드러남’입니다. 지상에서 살 때, 인간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어느 정도 섞여 있습니다. 사회적 규범 때문에 속 마음을 숨기기도 하고, 겉으로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겉모습이 점점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진짜 사랑과 성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의 ‘속 사람이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은 보통 몇 단계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처음 단계에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살던 모습과 거의 같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생각과 행동도 비교적 비슷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겉 사람의 요소들이 줄어들고, 속 사람의 본모습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이 무엇을 진짜로 사랑하는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왔는지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 일어납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존재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성향의 영들과 함께 모이게 되고, 자기중심적 욕망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은 역시 비슷한 성향의 존재들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강제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을 ‘장소’라기보다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가 편안하게 느끼는 환경이 달라집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과 협력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평안을 느끼고, 자기중심적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경쟁과 지배가 중심이 되는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삶의 방식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 중간 세계의 또 다른 역할은 ‘정리’입니다. 지상에서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이 여기서 다시 정리됩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더 깊이 배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깨닫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각 사람의 내면 상태가 점점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간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상태가 분명해지고, 어떤 사람은 더 긴 과정을 거칩니다. 그는 대략 수십 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기간의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속 사람이 완전히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이 설명이 중요한 이유는, 사후 세계를 두려움이나 심판의 순간으로만 이해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사후 세계가 인간의 삶을 억지로 바꾸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지상에서 살아온 방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그 방향이 더 또렷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상에서의 삶이 왜 중요한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지상은 선택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사랑할지, 어떤 기준으로 살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그 선택이 점점 고정된 상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삶을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기’라고 설명합니다.

 

 

 

SC.31, ‘사후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을 다시 만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먼저 떠난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에 대해 비교적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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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9,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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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곧바로 영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Heaven and Hell’와 ‘Arcana Coelestia’에서 매우 분명하게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 곧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는 중심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몸이라는 옷을 벗는 것’과 비슷하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몸이라는 외적 도구를 내려놓을 뿐, 사람 자신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이 숨을 거두면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상황을 깨닫게 된다고 기록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는 천사들이 새로 온 영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매우 따뜻하게 묘사합니다. 천사들이 새로 온 사람에게 평안한 상태를 주고, 두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며, 점차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조용한 전환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죽은 후에도 인간의 모습과 성격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갑자기 다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방식, 사랑하는 것, 성격의 방향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만 육체 대신 영적 몸, 즉 영체로 살아가게 된다는 점만 다릅니다.

 

이 영적 몸은 물질적인 몸과는 다르지만, 형태와 기능은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사람들도 눈, 귀, 얼굴, 손 등 사람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 더 미세한 영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후의 상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 머무른다고 설명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속 사람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상에서 겉으로 숨겨져 있던 생각과 사랑의 방향이 점차 분명해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존재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됩니다.

 

이 점이 스베덴보리 설명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보내지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사랑과 성향이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삶에 끌리고, 자기 사랑과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상태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는 세계라고 설명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죽음의 그림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죽음을 긴 잠이나 무의식의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가는 것처럼, 삶의 형태가 바뀌지만, 존재 자체는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에서는 죽음이 끝이라는 느낌보다 ‘연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삶은 지상에서 시작되어 사후 세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입니다. 육체의 삶은 그 여정의 첫 단계일 뿐이며, 이후의 삶은 그 방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단계라고 설명됩니다.

 

 

 

SC.30, ‘사람은 사후 어디에서 깨어나는가?’

사람이 죽은 뒤 어디에서 깨어나는가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입니다. ‘Heaven and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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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8,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영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이해할 때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계를 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하나는 꿈이나 환상 같은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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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이해할 때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계를 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하나는 꿈이나 환상 같은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신비 체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방식은 그 둘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영계를 ‘상상 속에서 본 것’이 아니라 ‘감각이 열려 실제 세계처럼 인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감각 구조부터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두 가지 인식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 감각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영계와 연결될 때 작동하는 감각입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이 두 차원과 연결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 두 세계 가운데 자연계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물질계만 실제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영계 역시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은 본래 그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이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감각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상상이나 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감각 영역이 열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를 볼 때도 몸은 그대로 자연계에 있었고, 동시에 영계의 존재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두 세계에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물질계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영계가 더 근본적인 세계라고 설명합니다. 자연계는 그 세계의 표현이거나 결과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나 영들을 보았을 때 그것을 흐릿한 환영처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여러 저작들, 특히 ‘Heaven and Hell’에서는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그는 천사들과 대화했고, 그들의 사회와 생활을 관찰했으며, 인간이 죽은 후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신비 체험처럼 묘사하지 않고, 관찰 보고처럼 매우 차분하게 기록합니다. 마치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 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설명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은 사실 우리가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장면을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합니다. 물론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눈, 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식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감각을 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자연 감각 외의 다른 인식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명할 때,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라디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 속에는 많은 전파가 있지만, 라디오 수신기가 켜지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수신기가 맞춰지면 갑자기 소리가 들립니다. 전파가 그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식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영계는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허락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잠시 허락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영계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영계를 보는 것은 특별한 사명과 관련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살아가야 할 길은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잠재해 있던 또 하나의 인식 차원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상태에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 자체보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질서와 진리를 설명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가 무엇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는가’입니다. 그의 목적은 신비 체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성경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SC.29,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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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7, ‘왜 거듭남은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가?’

‘왜 거듭남은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행동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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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저도 그들과 말할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사람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생각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습니다.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 안에서도 처음과 마지막에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 그의 모든 주장은 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주님으로부터 허락받았다고 주장하며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 이후 영혼들의 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몸을 가진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은 지상에서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처음 영이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souls after 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 천국을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 있는 신앙 없는 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 창세기의 속뜻을 배워 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 스베덴보리에게 가르쳐 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 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그것을 어떻게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 신적 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심화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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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심화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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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전체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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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AC.1-3의 원리로 본 창1'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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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그러나 내적 의미가 없다면 아무도 이것을 결코 없습니다. 예로 창세기의 장들을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로는 세계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최초로 창조된 사람 아담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글들에서 모든 것이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아르카나는 지금까지 번도 계시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밝혀질 것입니다. 장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인간의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며, 특별히는 태고교회를 다룹니다. 실제로 장에는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안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서문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며, 문자만으로 본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창세기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장들의 속뜻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창세기 첫 장들은 천지의 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등 인류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이 문자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지우는 데 있지 않고, 그 문자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카나’, 곧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열쇠가 바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AC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빛이 있으라하시고, 물을 나누고, 마른 땅이 드러나며, 식물이 나고,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동물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창조되는 순서는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영적으로 무질서한 인간을 단계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창조는 과거에 있었던 자연계의 창조라는 문자적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의 창조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거듭남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점에서 창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AC의 속뜻 안에서 한 인간 안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AC.4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를 덧붙입니다. 창세기 1장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인간의 거듭남일반적으로다루지만, ‘특별히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오직 개인의 심리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형성을 보고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교회의 역사는 서로 무관한 두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진리는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질서와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되는 영적 창조의 질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되면서, 특별히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형성된 상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라는 말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주 오래된 교회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특정한 명칭입니다. 그는 창세기 초기의 사람들에게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영적 상태가 있었으며,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에덴동산, 아담, 하와, , 가인과 아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교회의 상태와 변화와 쇠퇴가 차례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아직 태고교회의 모든 특징을 미리 배울 필요 없이, ‘창세기 초기 이야기가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태고교회의 영적 역사도 담고 있다는 정도를 우선 붙잡으면 충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1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 전체가 대략 거듭남을 상징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날과 물, 궁창과 땅,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서까지도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AC.6부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표현 하나하나를 그렇게 읽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표상상응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자연계의 빛이 영적인 빛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창세기의 빛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응한다고 봅니다. 이 상응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는 데 표상이라는 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속뜻은 독자가 문자에 마음대로 의미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주장하는 상응과 표상의 질서를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거듭남을 다룬다고 해서 오늘 나의 경험을 창조의 각 절에 임의로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빛은 나에게 이런 느낌이고 바다는 저런 경험이다라는 식의 주관적인 상징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다릅니다. AC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용례와 영적 질서를 따라 각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곳을 인용하고, 앞뒤 AC 글들을 계속 연결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을 때 개별 상응을 고립시키지 않고 전체 문맥 안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으로 읽는다고 해서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질문을 AC가 모두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현대적인 의미의 우주론이나 지질학적 연대를 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펼쳐 보이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AC를 읽을 때에는 창조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과 창조 이야기가 말씀의 속뜻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우선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AC.1-4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AC.2는 그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AC.4는 마침내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은 속뜻에서 새로운 창조,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특별히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AC.4는 앞으로 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여행의 안내판과도 같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만 묻지 않고 말씀은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지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함께 묻게 됩니다. 바로 그 질문을 가지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첫날로 들어가게 됩니다.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말입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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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 접하면 ‘상징’이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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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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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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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듭남은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행동이 조금 좋아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거듭남은 인간의 삶의 중심이 바뀌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이 중심이 있는 곳이 ‘속 사람’이기 때문에, 거듭남도 속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겉 사람만 바뀌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화를 억제하고, 남을 돕는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변화는 분명히 중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변화가 오직 겉 행동에만 머문다면, 속 사람은 아직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남을 미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직하지만, 속으로는 기회를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진짜 변화라기보다 ‘겉의 정리’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이런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자기 이익이나 자존심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점점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의도는 행동의 바깥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무의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가 좋지 않다면 가지에 붙은 열매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와 줄기에서 올라오는 생명에 의해 결정됩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도 달라집니다. 속 사람의 변화는 뿌리와 같고, 겉 사람의 행동은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변화는 뿌리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겉 삶은 세상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만, 속 사람은 더 높은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선택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빛이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 빛이 점점 자라면 겉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새로운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실제 삶에서 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웁니다’. 예를 들어, ‘남을 속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에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에서는 그것을 ‘선택’합니다. 비록 손해가 있어도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 결정합니다.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사랑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겉 사람의 행동도 점점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반대로 겉 사람만 바꾸려고 하면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속 사람이 그대로라면, 겉의 변화는 피곤한 노력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바뀌기 시작하면 겉 사람의 변화는 점점 자연스러워집니다. 마치 방향이 바뀐 강물이 결국 다른 곳으로 흐르듯이, 삶의 흐름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새 창조’라고 설명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세상이 만들어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속 사람이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어둠과 혼돈 같은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빛이 생기고, 구분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나타나는 단계가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은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라고 설명됩니다.

 

이렇게 보면 거듭남이 왜 속 사람에서 시작되는지 분명해집니다. 겉 사람은 표현이고 결과입니다. 속 사람은 방향과 근원입니다.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도 오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면 삶 전체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행동의 개선이 아니라 속 중심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옳다고 여기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시작될 때, 겉 사람의 삶도 조금씩 새롭게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C.26,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주 간단한 원리를 기억하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항상 ‘안에서 바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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