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

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다’(calling by name)는 사물의 어떠함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 준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어떠함과 관련되는데, 곧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 다시 말해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담’(Adam)이라는 말이 ‘흙’(groun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By “calling a name,” or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AC.479는 창5:2의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에서 왜 ‘이름’이 중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을 붙인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그 대상의 ‘어떠함’, 곧 그 본질과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 첫 번째 어떠함은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흙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이라는 말이 ‘흙’(ground)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을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에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을 뜻한다고 보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과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AC.479는 ‘그 후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6에서 계속 살펴본 흐름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영적 인간으로 창조되어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지만,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면 천적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더욱 온전한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79는 그것을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신앙이 사랑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질서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사람됨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은 창4에서 다루었던 가인의 상태와 다시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반면 창5에서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입니다. 신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이루지만,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AC.479에서 ‘아담’, ‘흙’, ‘거듭남’, ‘사람’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흙’과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를 이루실 때 그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이름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그 교회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어떠함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79 해설)

 

 

 

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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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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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

‘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하고 보여 주었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이후 영적 교회도 주님의 형상이므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는 인간다운 이해(human understanding)를 가진 모든 이를 사람이라 합니다. 사람은 이해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기 때문이며, 그 능력에 따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람답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별은 마땅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한 그의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 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 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 태고교회와 모든 참된 교회, 그리고 그로부터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특별히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0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겔36:10-12) I will cause man to multiply upon you, all the house of Israel, all of it; I will cause to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that they may be multiplied and bear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ccording to your antiquities; and I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my people Israel, (Ezek. 36:10–12)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적’(antiquities)은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고대교회들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족속’과 ‘내 백성 이스라엘’은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교회를 ‘사람’이라 합니다. 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 of Israel” and “people 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3] 신명기에서도, So in Moses: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32:7, 8) Remember the days of eternity, understand ye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when the most high would give the nations an inheritance, when he would set apart the sons of man, he set the bounds of the peopl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Deut. 32:7–8)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역대’(generation and generation)는 고대교회들을 의미합니다. ‘인종’(sons of man)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던 사람들이며, 이 신앙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입니다. 거듭난 사람을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레미야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by the “days of 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and 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 of 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empty and void;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하였습니다. 여기서 ‘땅’은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을, ‘하늘’은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을, ‘사람’은 선에 대한 사랑을, ‘공중의 새’는 진리에 대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 of the 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4] 다시 예레미야에서는, Again: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31:27) Behold the days come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Jer. 31:27)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속 사람을, ‘짐승’은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beast” the external. In Isaiah: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2:22) Cease ye from man in whose nostrils is breath, for wherein is he to be accounted of, (Isa. 2:22)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where by “man” is signified a man of the church. Again: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2) Jehovah shall remove man far away,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Isa. 6:12)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황폐함, 곧 더 이상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man, in that there should no longer exist either good or truth. Again: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사24:6)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shall be burned, and man shall be left very little, (Isa. 24:6)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where “man” signifies those who have faith. Again: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사33:8, 9) The paths have been desolated, the farer on the path hath ceased, he hath made vain the covenant, he hath despised the cities, he hath not regarded man, the earth mourneth and languisheth, (Isa. 33:8–9)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노스’(Enosh)입니다. 다시, denoting the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Enosh.” Again: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사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precious than fine gold, and a man than the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moved out of her place, (Isa. 13:12–13)

 

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사람’에 해당하는 말은 ‘에노스’(Enosh)이고, 두 번째는 ‘아담’(Adam)입니다. 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AC.477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답합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교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의 기준이십니다.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것을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473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연결됩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역시 사람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5:1-2에서 ‘하나님의 모양’과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을 이루는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말씀은 그 교회를 특별히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은 이해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으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참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기준을 바로잡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한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는 단순한 지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역시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성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수많은 성경 인용은 바로 이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겔36:10-12에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만을 뜻하지 않고 교회가 회복되고 번성하는 것을 속뜻으로 포함합니다. 그래서 ‘옛적’은 태고교회, ‘처음’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까지 모두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묶입니다. 시대와 외적 형태는 달라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모두 ‘사람’인 것입니다.

 

신32:7-8 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옛날’과 ‘역대’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고,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렘4:23, 25에서는 정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선에 대한 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까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랑의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자 말씀은 그것을 ‘사람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렘31:27의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에서는 ‘사람’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을, ‘짐승’이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6:12와 사24:6에서는 선과 진리 또는 신앙이 사라지는 교회의 황폐함을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인용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참으로 살아 있는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33:8-9와 사13:12-13에서 ‘에노스’(Enosh)와 ‘아담’(Adam)이라는 히브리어가 구별되어 제시되는 것도 앞으로 창5의 이름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창5의 이름들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담고 있으며, ‘사람’을 뜻하는 여러 표현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에노스’는 곧 창5에서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다시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477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개인에게로 내려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 참된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는 주님의 모양 또는 형상을 받아 ‘사람’이 되고, 개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날수록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창5:2의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주님의 모양을 나타내는 교회,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입니다. (AC.477 해설)

 

 

 

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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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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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로, 먼저 이 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것이 묘사됩니다. 이후의 번성은 바로 이 상태로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AC.474는 AC.469에서 시작된 창5:1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왜 창5의 계보가 곧바로 셋과 그 후대의 교회들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태고교회 자체의 상태를 설명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창5가 다루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입니다. 여기서 ‘번성’은 단순히 자녀가 태어나 인구가 늘어나는 생물학적 번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부터 그 성격을 이어받은 후대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계속되는 교회적 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후대의 교회들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창5:1은 태고교회가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것을 묘사합니다. AC.472와 AC.473에서 살펴본 ‘창조하다-영적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만들다-천적 인간-하나님의 모양’이라는 질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창5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출발점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이후의 번성은 바로 이 상태로부터 이어진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등장할 셋, 에노스, 게난 등의 교회들은 아무 관계 없이 차례로 등장하는 독립된 교회들이 아니라, 먼저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파생되고 계승되는 교회들입니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처음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장 개요에서 보았듯이 그 상태는 점차 변화하고 쇠퇴하여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승의 출발점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계보의 책’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 계보에는 부모와 자녀의 출생이 기록되지만, 속뜻으로는 교회가 교회를 낳고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후대에 전달되는 과정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았다’는 표현을 앞으로 만날 때에도 단순히 개인의 출생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 상태로부터 다음 교회 상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474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관계에도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더해 줍니다. 적어도 창5의 계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그 출발점을 분명히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된 태고교회’에 두고 있으며, 그 이후의 교회들이 ‘이 상태로부터’ 번성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5는 태고교회 자체의 천적 상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 후대 교회들의 계승과 변화를 추적하는 하나의 분명한 교회적 계열입니다. 이것이 창4의 계열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계속 확인해야 하지만, 창5 자체의 출발점과 진행 방향은 이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AC.469-474에서 창5:1은 앞으로 펼쳐질 교회사의 기준점을 세웁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시고, 다시 사랑으로부터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완전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이후의 여러 교회가 이어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시작은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사람을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474 해설)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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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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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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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여 준 바 있습니다. ‘형상’(image)은 ‘모양’(likeness)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모양’은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입니다. 천적 인간은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해설

AC.473은 우리가 흔히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거듭남의 서로 다른 상태로 구별합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을, ‘모양’은 천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를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인간을 나란히 놓은 구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앞선 상태와 더 완성된 상태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형상’이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주님의 질서를 반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아직 자신의 의지와 주님의 뜻 사이에서 싸움과 선택을 경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은 ‘모양’을 향한 준비입니다.

 

반면 ‘모양’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실제적인 닮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이유를 곧바로 밝힙니다. 천적 인간은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이 주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을 더욱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어, 그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선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472의 ‘창조하다’와 ‘만들다’의 구별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과 연결되고, 그 영적 인간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져’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이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조 → 형상 → 영적 인간’과 ‘만들다 → 모양 → 천적 인간’이라는 두 흐름은 서로 다른 설명이 아니라 동일한 거듭남의 질서를 서로 다른 말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자유는 주님과 반대되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따라 선을 기쁘게 행하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억지로 주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자신의 사랑이 점점 하나의 방향을 향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기쁨과 자유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결국 AC.473은 거듭남의 목적이 단지 ‘올바른 것을 아는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형상이 사랑과 삶 속에서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신앙과 진리가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고, 마침내 사람이 주님의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랑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모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73 해설)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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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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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셨다’(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가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본래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과 관련되고, ‘만들다’(make)라는 말은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정확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이것은 앞서 2장에서 보여 준 바와 같습니다. 거기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그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 곧 완전하게 하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AC.16, 88) That by the “day in which God created man” is signified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that by “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 is signified his being made celestial, appears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The expression to “create” properly relates to man when he is being created anew, or regenerated; and the word “make,” when he is being perfected; wherefore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observed between “creating,” “forming,” and “making,” as was shown above in the second chapter, where it is said of the spiritual man made celestial that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in making”; and in other passages also, to “create” relates to the spiritual man, and to “make,” that is, to perfect, to the celestial man. (See n. 16 and 88.)

 

해설

AC.472는 창5:1에 사용된 ‘창조하다’와 ‘만들다’를 같은 뜻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의 거듭남에서 서로 다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더욱 완전하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되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거듭남의 진행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삶과 자기 자신의 것, 곧 proprium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받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사람이 진리를 단지 알고 믿는 상태를 넘어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고 행하는 상태에 이를 때 그는 점차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때문에 AC.472는 창2의 ‘하나님이 그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말씀을 다시 불러옵니다. AC.16과 AC.88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식’은 주님께서 더 이상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이 지나고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움직이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애쓰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 되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만드심’, 곧 완전하게 하심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흠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완전성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런 완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하게 하심은 거듭남의 질서가 더 온전히 이루어져, 신앙과 진리가 사랑과 선에 결합되고 사람이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구별은 태고교회가 왜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1은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 뒤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AC는 이 순서를 ‘영적 인간이 됨’에서 ‘천적 인간이 됨’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거나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당신의 모양을 닮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결국 AC.472는 말씀의 단어 하나까지도 거듭남의 질서를 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창조하다’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만들다’는 그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더욱 온전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진리를 알고 신앙을 갖게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삶이 흘러나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AC.472 해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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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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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교회에 대한 묘사입니다.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69는 창5:1을 단순한 족보의 머리말로 읽지 않고, 태고교회의 성립과 그 성격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 ‘계보의 책’은 문자적으로는 아담 이후의 후손들을 기록하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곧 이후 이 장에서 여러 이름으로 표상되는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도 단순히 개인들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이 장이 말하려는 교회적 역사를 충분히 볼 수 없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가 ‘사람이 영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단순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 처음 생겨났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에 머물던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1의 창조 기사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의 창조’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AC.469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1에서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먼저 영적이 되고, 그다음 주님께서 그를 천적인 사람으로 이끄십니다. 영적인 상태에서는 아직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지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합니다. 태고교회가 바로 이러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1은 단순히 ‘아담의 후손들이 누구였는가’를 알려 주기 위한 족보의 시작이 아닙니다. 이 한 절 안에서 먼저 태고교회 자체가 어떤 교회였는지를 다시 세워 놓고, 그다음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들의 상태를 살펴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영적 상태가, ‘하나님의 모양’에서 천적 상태가 언급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5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창5의 여러 이름을 단순히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의 연속으로만 보면 이 장은 긴 족보에 지나지 않지만, AC가 밝히는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세우신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의 교회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사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마침내 천적인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모든 생명과 지혜의 시작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AC.469 해설)

 

 

 

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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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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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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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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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는 18세기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하늘의 비밀들’, 또는 ‘천국의 아르카나’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arcana)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제목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읽을 때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천국,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깊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이며, 스베덴보리가 1749년부터 1756년까지 라틴어로 익명 출판했습니다. 전체 글 번호는 AC.1부터 AC.10837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각 절과 주요 표현의 속뜻을 밝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주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세계, 인간의 사후 상태, 천사들의 삶, 영적 유입, 자유, 섭리, 신앙과 체어리티, 거듭남 등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영적 세계관을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인물, 교훈, 명령 등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한 껍데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는 그 안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외적 형식이며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씀의 문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 교회와 천국의 질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들을 그는 ‘아르카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깊이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문자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읽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부터 여섯 날에 걸쳐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던 인간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고,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창조’는 더 이상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자연계와 영계는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배후의 영적인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상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물과 땅, 나무와 열매,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진리와 관련되고, 물은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땅은 사람이나 교회의 외적·자연적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의미만 가진다’는 식의 고정된 상징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의미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가운데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뱀 역시 단순히 한 동물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이 내적 질서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나타냅니다.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애굽과 광야, 모세와 출애굽 역시 문자에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변화,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아담이 교회인가?’, ‘왜 물이 진리와 관계되는가?’, ‘왜 애굽이나 광야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각 단어에 그때그때 임의로 의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표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다시 선지서와 시편과 복음서로 이어지면서 비슷한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표상’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사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내면이 변화되고, 삶의 중심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욕망과 습관, 잘못된 생각과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조금씩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과 싸움을 거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려 할 때 조금씩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긴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마음’, 겉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의 삶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자연적 차원이며,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입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질서 있게 나타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신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진리는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비슷해 보여 혼란스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 이해와 관계되고, 천적인 것은 선과 사랑, 의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공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되며 문맥에 따라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고, 어떤 곳에서는 교회의 서로 다른 특성을 설명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천국의 서로 다른 질서와 천사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도 AC를 읽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사후 삶과 영계에 관한 내용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적 시야가 열려 오랜 기간 천사들과 영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배정받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이루었는가와 깊이 관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스베덴보리를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본 신비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의 중심이 신기한 영계 체험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 역시 결국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방향은 사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관한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강제로 행한 것은 인간 자신의 삶으로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 혼자 이루는 자기수련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방적인 변화도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인간 이해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인간 안에 악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아시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끄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아직 불완전한 동기와 생각이 남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이 갑자기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평생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무엇보다 중심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심리나 영적 성장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특히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한 것도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 암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닙니다. 문자는 속뜻을 담고 있으며, 속뜻은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상응을 통해 연결되듯, 말씀의 문자와 그 안의 영적·천적 의미도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도 설명합니다. 인간이 말씀의 문자에서 사람 이름과 장소, 역사적 사건을 읽을 때 천사들은 그것들과 상응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천사가 서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자연계와 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거룩하게 읽을 때, 비록 그 속뜻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 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모든 상응을 암기하고, 모든 속뜻을 지식으로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자기 상태를 비추어 보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제 삶에서 선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삶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1만 개가 넘는 글 번호에 걸쳐 같은 개념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깊어지고, 하나의 성경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상응’, ‘표상’, ‘리메인스’, ‘퍼셉션’, ‘인플럭스’, ‘proprium’,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속 사람’, ‘겉 사람’ 등 처음 접하면 낯선 개념들도 계속 등장합니다. 한두 번 읽어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념들이 점차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 타락과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애굽,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하나의 주제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제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처음 접하는 독자가 그 깊은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이어 해설을 붙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심화를 통해 개념과 성경 인용, 관련 AC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한 글 번호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AC 전체의 흐름과 연결하여 읽고,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는 ChatGPT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번역 표현을 비교하고, 긴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며, 관련 개념을 정리하고, 제가 이해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지는 파일들에는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hatGPT 자체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문과 말씀, 그리고 AC 전체의 문맥을 더 세밀하게 살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독자가 말씀과 본문을 직접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소개 역시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더 깊은 질서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직접 읽어 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설명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성경 본문을 잠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거듭남, 천국의 질서와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 무슨 뜻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어떻게 살아지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천국의 질서를 아무리 자세히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더욱 주님께 향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는 제목의 ‘아르카나’는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빛을 구하며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했던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것이 교회만의 이야기도 아니구나. 이것은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구나.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는구나.’ 바로 그 순간, 감추어져 있던 것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첫걸음으로 창세기 1장, AC.1-66부터 시작합니다. 창1에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새 창조를 거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져 가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여섯 날의 과정과 창1만의 여러 주제들은 다음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소개’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이는 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본 하늘의 질서, 곧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를 하나씩 열어 보이려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이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한 번역 문서가 아닙니다. 이 원고는 스베덴보리의 대표 저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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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3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거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은 단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천국을 하나의 방과 같은 곳으로 생각하여, 문이 열리면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도록 허락받고, 문지기들이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ome entertain so gross an idea of heaven that they suppose it to be mere admission, in fact that it is a room into which they are admitted through a door, which is opened, and then they are let in by the doorkeepers.

 

해설

AC.45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449-452에서 계속 바로잡아 온 잘못된 천국관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유형을 보여 줍니다. 이번에는 천국을 ‘입장 허가를 받아 들어가는 장소’로 생각하는 관념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을 사람의 내적 상태와는 별개로, 죽은 뒤 어느 문 앞에서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두 장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너무나 거친 개념’이라고 하는 까닭은 천국을 전적으로 외적인 장소와 절차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떠한 사랑을 품고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보다, 마지막에 천국의 문이 열리느냐 닫히느냐가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천국이 마치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든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공간처럼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경험들이 이미 보여 주었듯이 천국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AC.450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곧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천국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으로 어떤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이 천국의 사랑과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국의 ‘문’도 단순한 출입구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제 삶으로 살아갈 때 그의 내면은 천국과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외부에서 주어지는 낯선 삶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부터 사람 안에 형성해 가시는 생명의 완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AC.453은 구원 역시 단순한 ‘입장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물론 천국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획득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생명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거듭남의 과정 없이, 외적 허가 하나만으로 내적 상태가 천국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글은 바로 다음 경험들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옳다면, 어떤 사람이든 천국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상태와 맞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천국의 생명은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이 형성되어 있는가’입니다.

 

결국 AC.453은 천국을 미래의 어떤 장소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현재의 삶으로 되돌립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뒤 천국 문 앞에서 누가 나를 들여보내 줄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내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와 선과 진리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도록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단순히 외적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AC.453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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