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창4:23)

 

AC.427

‘라멕’(Lamech)은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뜻합니다. 그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하기를, 너희 귀로 내 말을 들으라’(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고 한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그의 ‘아내들’(wives)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내가 한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다’(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는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사람’(man)은 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a little one to my hurt)는 그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상처’(wound)와 ‘타박상’(bruise)은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상처’는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해’(hurt)는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나타냅니다.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as before; that he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signifies confession, which can only be made where there is a church, which, as has been said, is signified by his “wives.”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faith, for by a “man” is signified faith; “a little one to my hurt” signifies that he had extinguished charity. By a “wound” and a “bruise” is signified that there was no more soundness; by a “wound,” that faith was desolated; by a “hurt,” that charity was devastated.

 

해설

AC.427은 창4:23에 나오는 라멕의 말을 풀이합니다. 앞의 AC.421-426에서는 라멕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의 내적·외적 요소,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다시 라멕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앞에서와 같이 ‘황폐’를 나타낸다고 밝히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관한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멕은 먼저 자기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고백’으로 풀이합니다. 그가 아내들에게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내들이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고백이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백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 라멕은 자신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람’이 신앙을 나타내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4:23의 살인에 관한 표현을 문자적 사건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신앙이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신앙을 소멸시켰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은 앞뒤의 황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구별됩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두 죽음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에 연결함으로써, 이 고백이 교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와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4장의 앞부분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의 고백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근거로 가인과 라멕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27이 직접 밝히는 것은 라멕이 황폐를 나타내며, 그의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라멕은 이 두 죽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상처’와 ‘해’가 생겼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상처는 신앙의 황폐를, 해는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들은 라멕이 입은 육체적 부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교회 안에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도 단순히 신앙생활이 잠시 약해지거나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못한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말하며,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라멕의 황폐와 동일한 상태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는 라멕이 표상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AC.427에서 라멕의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상태에 관한 고백입니다. 아다와 씰라는 교회를 나타내며, 그들에게 말을 듣도록 요청하는 것은 고백을 뜻합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처와 해는 그 결과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가 단순히 외적인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에 관한 문제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AC.427 해설)

 

 

 

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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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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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C가 쓰인 때로부터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와 기독교회는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질문은 ‘세대의 종말’을 현대적인 시간 개념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로 읽을 것인가와 관계됩니다.

 

우선 AC.32 자체가 ‘세대의 종말’을 무엇과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 ‘종말’의 핵심은 몇 년 뒤 세상이 사라진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거의 잃어버린 영적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세대의 종말’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대’(age)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 인간 세대, 곧 20년이나 30년 정도의 기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서의 ‘consummation of the age’ 역시 한 사람의 세대가 끝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교회적 시대의 완결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18세기에 ‘세대의 종말’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몇십 년 안에 지상 세계가 끝난다’는 예언을 한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종말’이라는 말을 어떤 상태가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면 시간이 오래 흐른다는 사실 자체가 곧 모순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교회가 그 본래의 사랑과 신앙을 잃었다고 해서 지상의 조직과 제도, 예배와 교리, 교회 건물과 이름이 그 즉시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형태는 남아 있으면서도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은 크게 쇠퇴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32의 관심은 바로 그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6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왜 아직 종말이 끝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종말’이라고 불렀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에서 그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물리적 소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가 소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이 단락의 문맥에 가장 잘 맞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에 관하여 훨씬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수백 년의 교회사를 정확히 어떤 단계의 ‘과도기’라고 이름 붙일 것인지, 또는 현재가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인지를 AC.32만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기 시대의 교회를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는 종말 상태’로 보았다는 사실까지만 분명히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세대의 종말’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종말’이 달력상의 짧은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AC.32에서 그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2 심화 1)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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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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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창5:7, 8)

 

AC.499

여기서 ‘날들’(days)과 ‘연수’(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가 ‘죽었다’(died)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해설

AC.499는 창5:7-8에 등장하는 표현들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기보다, 앞에서 이미 밝혀진 해석 원리가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날들’과 ‘연수’는 교회가 지나온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에서 생겨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두 절 역시 한 사람의 수명과 자녀와 죽음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면서 진리와 선을 산출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먼저 ‘날들’과 ‘연수’는 AC.482-483, 486-488에서 살펴본 원리와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시간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셋이 구백십이 세를 살았다는 창5:8의 숫자도 단순히 생물학적인 수명의 길이를 말하는 데 속뜻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라 하는 교회가 시작되어 변화하고 지속되다가 끝나기까지의 상태들과 관계됩니다. AC.499가 구체적인 숫자의 의미를 여기서 다시 풀지 않고 ‘앞에서와 같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들들과 딸들’ 역시 AC.489-491에서 밝혀진 원리를 그대로 따릅니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며, 그 진리와 선의 어떠함은 그것들을 낳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셋 교회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교회 안에서 여러 진리와 선이 생겨나고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단순히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속하는 동안 다음 세대와 다음 교회에 이어질 수 있는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산출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죽었다’는 표현은 AC.492-495에서 살펴본 것처럼 육체적인 죽음 자체보다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계열에서 그 죽음은 퍼셉션의 변화와 쇠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죽었다’고 할 때 그 안에 존재하던 모든 선과 진리가 한순간에 완전히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교회를 그 교회이게 했던 특유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고, 그 가운데 보존된 것들은 다시 다음 교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에 반복되는 ‘살고, 낳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으며, 모든 날들을 지낸 뒤 죽었다’는 일정한 형식에는 교회의 한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거의 똑같은 문장이 되풀이되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회들의 탄생과 상태 변화와 결실과 종말이 차례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반복은 또한 교회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그 교회 가운데 생겨난 선과 진리를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다음 상태를 위한 것으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죽음’ 뒤에는 언제나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승이 있습니다. 셋의 상태가 끝나더라도 에노스가 이어지고, 그 뒤로 다시 다른 교회들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상태는 변하고 교회도 쇠퇴하지만,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인류 가운데 교회가 계속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AC.499 해설)

 

 

 

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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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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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AC.498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창5 전체를 읽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다시 못 박습니다.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씀의 속뜻은 한 개인에게서 한 개인이 태어났다는 족보상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셋’이라 하는 교회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AC.470에서 제시된 창5의 기본 원리가 이제 실제 계보의 각 이름에 계속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begat)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앞 교회가 끝난 뒤 전혀 무관한 새 교회가 등장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뒤의 교회는 앞의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물려받습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로부터 천적 성격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에서는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에노스 역시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왔으면서 셋과는 구별되는 교회적 상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음’에는 ‘계승’과 ‘변화’라는 두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97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합니다. 그렇다면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차례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로부터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조금씩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연속적인 역사입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짧은 한 문장 안에도 이전 교회로부터의 계승과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이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창5의 이름들을 해석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속뜻에서 각각 하나의 교회 또는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각 이름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더 본질적으로는 ‘이 이름으로 표현된 교회의 상태는 어떠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창5의 반복적인 족보 형식이 교회의 내적 역사를 담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다만 ‘에노스’라는 이름이 교회를 뜻한다고 해서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까지 AC.498 하나만으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우선 ‘에노스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해석의 틀을 확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어떠함은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더 밝혀집니다. 이것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이나 한 글에 이후의 내용을 미리 모두 집어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표현을 하나씩 열어 가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의 흐름에는 주님의 섭리라는 더 큰 배경이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전보다 낮아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곧바로 그 교회를 끊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오도록 하시면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십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짧은 계보는 그래서 단순한 쇠퇴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의 연속성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98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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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AC.496은 창5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주는 글입니다. 창5:6의 문자적 본문은 셋이라는 사람이 백오 세에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족보 기록이지만, 속뜻에서는 ‘셋 → 에노스’가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이 태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나온 과정입니다. AC.470에서 이미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밝힌 원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태고교회 이후 여러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차례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셋을 ‘두 번째 교회’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승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제되어 다음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상태에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앞서 AC.481-485에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닮았지만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는 교회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교회’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후대라는 뜻뿐 아니라, 태고교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 교회를 이미 태고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하면서도 곧이어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적 교회의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기본 질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생생함과 완전함이 최초의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표현 역시 실제 연령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닙니다. AC.482-483과 AC.487-488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와 ‘연수’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백오 년은 셋 교회가 어떤 상태를 지나 다음 교회인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105’라는 수 자체의 세부적인 의미를 풀지 않고, 앞에서 확립한 원칙대로 ‘때와 상태들’을 뜻한다고만 밝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의 개별 상응을 억지로 풀기보다는, 창5의 연수가 교회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기록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은 창5의 ‘낳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에서 또 하나의 교회가 ‘태어난다’는 것은 앞선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무관한 것이 새로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교회만의 고유한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가 생겼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창5의 족보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계승의 연속입니다.

 

이 점에서 AC.496은 앞으로 이어질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의 이름을 읽는 기본 틀을 마련합니다. 각각의 이름은 단순히 족보상의 한 사람을 지나가는 표지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 이름으로 나타난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그 상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창5의 긴 족보가 단순한 이름과 연수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역사가 됩니다. (AC.496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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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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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들은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숫자들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만 말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들과 척도들이 말씀에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날들과 해들의 숫자들뿐 아니라 척도의 숫자들까지도, 그 숫자의 의미에 따라 시간과 척도에서 추상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희년은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하여 쉰째 해에 지키도록 하였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열둘이었으며 주님의 사도들도 같은 수였고, 장로들은 일흔이었으며 주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은 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경우에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이처럼 추상될 때 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상태들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 숫자가 나오면 시간이나 수량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상징적인 뜻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ultimates of 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 언제나 이것, 12는 언제나 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 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 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 해설)

 

 

 

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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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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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사람이 죽음’(man’s dying)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 해설)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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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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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겔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자기 죄의 분량을 채우는 자들에 관한 말씀으로, 그들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날들’이라 하고 특별한 상태에 대해서는 ‘해들’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시편에서는,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시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기서도 ‘날들’과 ‘해들’은 그분의 나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시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날’(days of old)은 태고교회의 상태들을, ‘지나간 세월’(years of the ages)은 고대교회의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으로, ‘원수 갚는 날’(day of vengeance)은 정죄의 상태를,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는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날’과 ‘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에서는,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욜2:1, 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날’은 각 사람에게는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어둠과 캄캄함, 구름과 흑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3:9, 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neither day nor night) 날이 있으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서 ‘날들이 길어진다’(days prolonged)는 것은 생명의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문자적 의미에서는 ‘날’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해 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만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 앞에서는 물질과 공간과 시간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에스겔의 다음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겔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여기서 ‘구름의 날’(day of cloud)은 구름, 곧 거짓을 의미하고, ‘여러 나라들의 날’(day of the nations)은 여러 나라들, 곧 악을 의미하며, ‘여호와의 날’(day of Jehovah)은 황폐를 의미합니다. 또한 요엘에서는,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욜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습니다. 이 장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날들’과 ‘해들’도 이와 같습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해설

AC.488은 왜 창5의 ‘날들’과 ‘해들’을 단순한 시간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상태로 읽어야 하는지를 말씀의 여러 본문을 통해 입증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문자에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표현 안에 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에서는 ‘날’과 ‘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됩니다.

 

첫째,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날’이 단순한 24시간을 뜻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날’, ‘보복의 날’, ‘구속할 해’,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한 날’과 같은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달력상의 어느 날짜가 아니라 그때 나타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특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다’는 표현은 문자적 시간의 틀만으로는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날’이 상태를 나타낸다는 원리를 적용할 때 그 말씀의 속뜻이 열립니다.

 

둘째, AC.488은 ‘날들’과 ‘해들’의 관계를 다시 확인합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시77:5의 ‘옛날’과 ‘지나간 세월’을 각각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상태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창5에서 한 교회의 ‘모든 날들’이 언급되고 그 안에 구체적인 ‘해들’이 기록되는 것은, 한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에서 일어난 보다 세부적인 상태 변화들을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3]에 있습니다. 천사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며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무런 순서나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지상의 해와 달, 날과 해라는 물리적 시간 단위로 측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가 천국에 이르면 시간에 속한 관념은 벗겨지고,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영적 실재, 곧 상태와 그 변화가 남습니다.

 

이것은 ‘상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는 우리의 삶이 시간의 연속 안에서 펼쳐집니다. 기쁨의 때, 시험의 때, 무지의 때, 깨달음의 때가 모두 ‘언제’라는 시간 속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 자체가 우리의 영적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서는 시간으로 표현된 것이 천국에서는 그 시간에 담긴 상태로 지각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창5에 적용하면 800년이나 930년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AC.487이 이 숫자들 안에 교회의 수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면, AC.488은 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지를 천사들의 말씀 이해 방식에서 설명합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보이지만, 시간의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해당하는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5의 긴 연수들은 속뜻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어떤 상태들을 거쳐 갔는지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장을 ‘천국에는 아무런 변화나 순서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88 자체가 천사들은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변화의 연속을 주로 시간으로 경험하지만, 천국에서는 그것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행복 등 내적 상태의 변화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라져도 삶의 변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라는 외적 틀을 벗고 그 안에 있던 영적 실재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결국 AC.488은 창5의 연수를 해석하는 문제를 넘어 말씀의 속뜻 자체가 어떤 차원의 언어인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에는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천사들은 그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그리고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는다’는 마지막 설명은 이 글 전체를 압축합니다. 창5의 ‘날들’과 ‘해들’을 상태로 읽는 것은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지상적 표현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읽는 일입니다. (AC.488 해설)

 

 

 

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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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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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데, 이는 이 구절과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상태들도 일반적으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그리고 ‘해들’(years)이 덧붙여질 때에는 그 해들의 시기들에 의해 상태들의 어떠함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숫자들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많은 수들이 있었고, 그것들로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말씀의 많은 곳, 특히 예언서들에도 나타납니다. 유대교회의 의식에도 시간과 측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과 그 밖의 것들에 관한 숫자들이 그러하며, 그것들은 적용되는 바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팔백’이라는 수와 다음 절의 ‘구백삼십’,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구절의 연수에 담겨 있는 것들, 곧 각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적용된 그 교회의 상태 변화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AC.487은 앞의 AC.482와 AC.486에서 제시한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날들’은 교회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해들’은 그 일반적인 상태 안에 들어 있는 특별한 상태와 그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에 반복되는 ‘그의 모든 날은 몇 년이었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한 수명 계산이 아니라 한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겪은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여러 변화를 묘사하는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근거로 창1의 창조의 ‘날들’을 듭니다.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의미했던 것처럼, 창5의 날들도 단순히 24시간 단위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1과 창5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창1에서 한 사람 또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들이 ‘날들’로 묘사되었다면, 창5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거쳐 간 상태들이 다시 시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AC.487은 여기서 숫자 자체의 의미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태고인들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단순한 숫자들로 교회에 속한 여러 상태를 표현했고, 이 숫자들을 서로 조합하여 더 복잡한 상태들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5의 800이나 930과 같은 큰 숫자를 곧바로 하나의 간단한 상응으로 바꾸어 ‘800은 이것, 930은 저것’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단순한 수가 결합된 숫자이며, 그 안에는 각 교회가 겪은 복합적인 상태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 800과 930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된 교회의 상태 변화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숫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절제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숫자에 속뜻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숫자의 모든 의미를 곧바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기본적인 숫자의 의미와 그것들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조합된 숫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 등의 숫자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상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문맥에 따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수, 기간, 측량 등이 예배의 영적 실재를 표상했던 것처럼, 창5의 연수 역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숫자의 의미는 숫자만 떼어 내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창5의 족보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에서는 아담이 몇 살에 셋을 낳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모두 몇 세에 죽었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변화들을 거쳤으며 그 전체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리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5의 숫자들은 사람의 나이를 세는 계산표라기보다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는 영적 언어인 셈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483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들이 각각 서로 다른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들이 주로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었다면, 각 이름 옆에 기록된 연수는 그 서로 다른 교회들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창5에서는 ‘이름’과 ‘숫자’를 따로 떼어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고, 숫자는 그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합니다.

 

결국 AC.487은 창5의 기이하게 긴 수명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고대 사람들이 정말 800년, 900년을 살 수 있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왜 바로 그 숫자들을 사용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교회의 어떤 상태와 변화를 나타내셨는가가 핵심입니다. 아직 그 모든 숫자의 아르카나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5의 숫자들이 무의미한 장식도 아니고 단순한 연대 자료만도 아니라는 것, 그것들이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 변화를 담아내는 말씀의 정교한 언어라는 사실을 AC.487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87 해설)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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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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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

‘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고, ‘해들’(years)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며,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해설

AC.486은 매우 짧지만 창5의 계보를 읽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 열쇠를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창5:4에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속뜻에서는 이 ‘날들’과 ‘해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교회의 내적 상태와 그 안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달력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거쳐 간 영적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앞의 AC.482에서 이미 창5의 연수는 문자 그대로의 세속적 연수보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AC.486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들’과 ‘해들’ 사이에도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해들’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날들과 해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과 특별의 관계에 있습니다. ‘날들’이 한 교회가 지나온 상태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표현이라면, ‘해들’은 그 전체 안에 포함된 보다 구체적인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AC.482에서 가장 작은 시간과 가장 큰 시간 사이에도 유사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과 연결됩니다. 전체가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일반적인 상태 안에는 여러 특별한 상태들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자녀를 낳았다는 족보의 표현이지만, 속뜻에서는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한 교회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여러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AC.486은 단순히 ‘그들이 알고 있던 진리와 선’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 직접 연결됩니다. 당시 여러 교회를 구별하는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각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외부에서 배워 기억 속에 저장한 교리적 지식이라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퍼셉션했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낳음’이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로 이어지는 것을 ‘낳음’으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한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 역시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출생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말씀에서 영적인 생명이 실제 생명의 출생과 성장이라는 언어로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람과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영적 생명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5:4의 한 구절 안에는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구체적인 상태들, 그리고 그 상태 가운데서 생겨난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가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긴 생애와 많은 자녀가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일정한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풍성해지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AC.486 해설)

 

 

 

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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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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