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

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으로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영에게 연장(extension)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영이 실체(substance)라는 것까지 부정하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리고 영에게 연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실체에 대해서도 논쟁하기 때문에, 영이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며, 그 결과 영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비교적 단순한 영들이었던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과 그 밖의 이와 비슷한 논쟁의 표현들을 듣고는, 그런 것들을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러운 말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은 지성을 향한 길을 막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해설

AC.446은 AC.444-445에서 다룬 ‘영의 연장’과 ‘영의 실체’ 문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앞에서는 영을 아무런 연장도 없는 ‘추상적 생각’으로 보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관념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자신들이 가진 기억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워합니다. 곧 감각으로 확인하거나 기존 지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을 통해 얻고 기억 속에 축적한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니 실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아니니 어떤 장소에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AC.446은 바로 이러한 추론의 연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연장 → 실체 → 장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들은 영에게 연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영이 실체라는 것도 의심하고, 다시 영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마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사람’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잡한 추상적 논의가 오히려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AC.446은 단순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대비시킵니다. 여기서 ‘단순한’ 사람이나 영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추상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제 삶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맥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이 존재하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의 실체와 장소를 끝없이 논쟁한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학문적 정교함이 언제나 더 분명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추상적 논쟁의 한 예로 제시됩니다. AC.446 자체는 이 용어가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어떤 엄밀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배경을 임의로 덧붙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떤 목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들은 이런 표현들을 듣고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럽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 철학 용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있기보다, 그런 추상적 논쟁이 오히려 영적 실재를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다’(close the way to intelligence)는 말이 이 글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실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사고가 아니라, 말과 개념을 계속 추상화한 끝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으므로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결국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고, 살아 있지만 아무런 실체도 없는 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만 남게 됩니다.

 

AC.444-446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바로잡으려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의 인간은 자신을 실제 존재로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철학을 배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지식이 실제 영적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는가, 아니면 지나친 추상화로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AC.446 해설)

 

 

 

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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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이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믿은 뒤, 그 믿음에 따라 사랑하고 살아가는 순서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오히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것은 창2에서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AC.99). 또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했으며(AC.102), 그 생명나무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AC.105).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AC.111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해 온 중심 질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적인 사랑을 만들어 낸 다음 거기서 교리나 신앙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가 받아들여지며,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채 머리 안에 먼저 자리 잡고 있다가 나중에 사랑과 결합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사랑의 생명 안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거듭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AC.111에서 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을 문제 삼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실을 알고 교리를 정확히 기억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도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AC.99).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혜와 지성 안으로 흘러드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AC.112는 이 질서를 더욱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의 차이를 지나치게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단순한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에는 사랑의 생명이 있고, 지성에는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시므로 참된 지혜와 지성의 근원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말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AC.107). 그 강이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고, 이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서로 무관한 상응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 지성이 있는 하나의 생명의 흐름을 여러 이미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113-115에서 금과 보석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특히 AC.115에서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신앙이 단순히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단순히 ‘사랑이 중요하고 신앙은 덜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111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고, 천국 전체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신앙의 고유한 성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각각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의 가장 깊은 초점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랑으로 신앙을 만들고, 다시 그 신앙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12가 계속해서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창2의 모습은 바로 이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 안에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0-115를 읽으며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비손이나 하윌라, 금과 호마노의 개별 상응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상응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오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바로 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손은 더 이상 낯선 고대의 강 이름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생명이 신앙과 지성 안으로 흘러들어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AC.111 심화 1)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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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해석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것을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렇게 읽으면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위험하거나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은 그렇게 읽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과 기억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생명의 질서 안에서 어디에 놓이며, 무엇이 무엇의 근원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02의 두 나무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AC.105에 이르면 이 생명나무를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질서에서는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인간의 감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이 차이가 핵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고 기억한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실 여부를 스스로 세우려는 질서가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신앙의 근원을 결정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라’,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 ‘증거를 살피지 말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102-106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은 계속 인간 안에 있으며 주님의 유입을 받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 자체가 참과 선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반지성주의라기보다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에 관한 설명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서로 다른 신앙의 질서와 연결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질서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는 질서입니다. 결국 두 나무의 차이는 단순히 ‘신앙 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AC.106은 ‘지식의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의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점입니다. 왜 그것이 인간의 타락과 연결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02 심화 1)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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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을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자기 가르침을 꾸민다는 사실입니다.

 

이 설명은 말씀을 인용하는 행위와 말씀의 참된 뜻을 가르치는 일을 구별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정확하게 인용하더라도, 그 구절들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모아 놓는다면 그 인용만으로 가르침의 참됨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을 설명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입니다. 먼저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의 내용들을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새긴 우상’과 예레미야의 ‘헛된 것들의 교훈’은 이 문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사야에서는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가르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그 거짓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입니다. 두 구절 모두 거짓이 단순히 아무런 근거 없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장식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424는 모든 잘못된 해석이 반드시 의도적인 속임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직접 설명하는 대상은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꾸미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금과 은의 의미도 이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이 우상을 선처럼 보이게 하고, 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금과 은이 귀한 재료라는 사실이 우상을 참된 것으로 바꾸어 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하고 참된 말씀의 표현을 가져와 장식한다고 해서, 그 표현들로 꾸민 가르침의 중심까지 저절로 참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점은 AC 번역과 해설을 작성하는 우리의 작업에도 적용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관련 구절을 찾아 덧붙이는 것과, 해당 구절의 문맥 및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뜻을 확인하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이 직접 말한 내용, 관련 저작에서 확인한 내용,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생각해 낸 적용을 구별하면 말씀을 자기 생각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해석의 자유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해석의 근거를 분명히 하자는 뜻입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성경 구절이 들어 있으니 참된 가르침이다’라는 판단이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지적하는 문제는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이미 만들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인용할 때 그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본문의 뜻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AC.424 심화 1)

 

 

 

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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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계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서 ‘거문고 타는 자들’(harpers)은 앞에서와 같이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들’(trumpeters)은 신앙의 선들을 뜻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artificer of any craft)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사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이 말씀은 자기 상상으로 거짓, 곧 ‘새긴 우상’(graven image)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렘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는 거짓을 가르치면서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것을 ‘헛된 것들의 교훈’(doctrine of vanities)이자 ‘지혜로운 자들의 작품’(work of the wise)이라고 부릅니다. 고대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상을 만드는 세공업자들로 표상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곧 거짓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또한 청색 실과 옷으로 꾸미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그 거짓과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는 앞의 AC.421-423에서 설명한 두발가인의 의미를 ‘세공업자’라는 말에 집중하여 밝힙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며,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놋과 쇠를 다루는 모든 세공업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계시록과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먼저 계18:21-22는 바벨론이 무너진 뒤 거문고와 퉁소와 나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거문고 타는 자들’을 진리들로, ‘나팔 부는 자들’을 신앙의 선들로 풀이합니다. 이어 ‘어떠한 종류의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앞의 AC.420에서 악기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세공업자가 함께 등장하는 말씀을 통해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40:19-20은 세공업자가 ‘새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계시록 인용에서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을 나타냈지만, 이사야에서는 세공업자가 거짓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우상을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공업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세공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장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참된 지혜에 대한 칭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장인은 흔들리지 않을 우상을 만들기 위해 불려 온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참됨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우상’이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나 논증 방식을 뜻한다고까지 이번 번호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렘10:1, 8-9는 이 문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는 ‘헛된 것들의 교훈’, ‘나무토막’,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세공업자와 금을 다루는 자, 청색 실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내용들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대의 우상 제작에 연결합니다. 세공업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청색 실과 옷은 그 거짓과 겉으로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과 은은 거짓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거짓에 선과 진리의 외관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청색 실과 옷에 관해서는 이번 번호가 ‘겉으로 보기에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치므로, 이를 근거 없이 특정한 영적 상태나 교리로 더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 인용을 함께 읽으면 ‘세공업자’라는 표현이 왜 중요한지 분명해집니다.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나타내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언제나 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인용은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인용은 사람이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거나 꾸밀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세공업자’라는 단어 하나에 고정된 도덕적 평가를 붙이기보다, 그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는지에 따라 문맥을 살피게 합니다.

 

이 설명은 두발가인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냈고, AC.423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자연적인 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스승’이 가르치는 대상인 세공업자들이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와 동시에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식을 참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게 합니다. 말씀의 내용을 모아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된다면 ‘헛된 것들의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424의 중심은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두발가인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지식이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식을 많이 갖추었는가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4 해설)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AC.424 심화 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AC.424 심화1.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어떻게 거짓을 가르칠 수 있는가?’ 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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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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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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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를 뜻하며, 여기서는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자연세계를 접하고, 기억 지식을 통하여 배우고 생각합니다. 앞의 AC.24-29에서도 기억 지식은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감각과 기억 지식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만’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영적인 모든 것을 감각적 증거 아래에 두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천국, 영혼, 주님의 섭리와 같은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검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연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감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재판관이 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기억 지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 자체는 귀중하며,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참이다’, ‘내 이성이 납득하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기억 지식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지식이 사랑과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가능 여부를 판정하는 지배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에는 매우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사랑과 자비가 사라질 수 있고, 말씀의 구절을 많이 알면서도 그 지식을 상대방을 판단하고 이기는 데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 많아서 사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쓰이면 매우 유익합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지성에 대한 신뢰와 결합하여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입니다.

 

감각적인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주님의 지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만을 전부라고 여기고 영적인 원인이나 목적 자체를 배제할 때, 감각은 더 이상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하는 원리가 됩니다. AC.31에서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질서의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말을 ‘과학이나 지식이 신앙을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식과 이해를 거듭남의 중요한 단계로 봅니다. 오히려 사람의 감각과 지식이 자기보다 높은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섬길 때에는 그것들이 거듭남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AC.31의 표현은 결국 ‘무엇이 무엇을 다스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중심이 되고 감각과 기억 지식이 그것들을 섬기면 질서가 바르게 서지만, 감각과 기억 지식만이 최종 기준이 되어 사랑과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영적 빛은 점차 가려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은 바로 이런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할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AC.31 심화 1)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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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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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garden)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며, ‘앗수르’(Assyria)가 있는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입니다. ‘구스’(Ethiopia)가 있는 그의 ‘셋째 강’(third river)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며,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나온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는 ‘애굽’(Egypt)도 그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뒤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선지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 사람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을 의미하며, 그들은 추론을 통하여 그것들을 이와 같이 모독합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설명한 에덴동산과 네 강의 질서를 정반대의 상태에 적용합니다. AC.98 이후 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 동쪽은 주님을 의미했고, 네 강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는 이 모든 질서가 뒤집힙니다. 같은 동산과 에덴과 강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동산’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며, 그의 ‘에덴’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에덴이 사랑을 의미했으므로 여기에서도 사랑이라는 기본 관계는 남아 있지만, 그 사랑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에 놓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동쪽’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AC.101에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서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방위의 상응을 새로 제시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야 할 내적 방향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뒤집혔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의 전도는 네 강에서도 이어집니다. 유브라데는 앞에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이 지성과 지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 됩니다. 이것은 기억지식 자체가 정죄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29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지 않으며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기억지식이라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아래에 있을 때에는 생명을 받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에게서는 거짓된 원리를 확증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받는 것은 기억지식이라는 능력이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전도된 질서입니다.

 

둘째 강에 관한 설명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118-119에서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앗수르가 있는 둘째 강이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이성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성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추론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AC.129에서 사람이 아무리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여도 그의 지식과 추론이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한 설명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성은 자신이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진리를 밝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강과 넷째 강에서는 전도가 더욱 깊어집니다. 구스와 연결된 셋째 강은 악과 거짓에서 나온 원리들이며, 그것들이 그 사람의 ‘신앙에 관한 앎들’이 됩니다. 앞에서 구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이미 잘못된 원리에서 나온 것들이 신앙에 관한 앎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 넷째 강의 ‘지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면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그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정반대의 것이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바로와 애굽을 인용합니다. 특히 겔29장에서 바로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AC.130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문제의 핵심은 강 자체가 아니라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AC.122-124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바로는 정반대로 강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혜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겔31장의 ‘에덴의 나무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AC.130은 이것을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이라고 직접 풀이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자료의 출처가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앎이 반드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조차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추론에 종속시키면 그것을 모독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경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 아래에서 사용하는가에 있습니다.

 

AC.130은 결국 앞에서 설명한 상응들이 고정된 일대일 암호가 아님을 다시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동산·에덴·강·앗수르·애굽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긍정적인 질서 안에서도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전도된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임의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여전히 기억지식과 관련되고, 이성은 여전히 이성과 관련되며, 사랑은 여전히 사랑과 관련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30은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AC.129를 에덴과 네 강 전체에 적용하여 보여 주는 하나의 반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130)

 

 

 

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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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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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 입장을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 자기 눈을 멀게 하며, 마침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어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곧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그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하며,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 감각으로 볼 수 있고 기억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 대 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 대 질서의 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의 핵심입니다. (AC.128)

 

 

 

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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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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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AC.127은 바로 앞의 AC.126에서 제시한 경고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힙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단순한 지적 방법의 잘못이 아니라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일으킨 원인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교회의 타락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논점은 한 개인이 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데서 교회 전체가 어떻게 그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AC.118-121과 AC.125에서 이미 본 것처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인간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으며, 천적 인간도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빛 안에서 자연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자연적인 감각과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는 것입니다.

 

AC.126에서는 이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AC.127은 그 결과가 왜 교회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감각과 지식의 판단 아래 놓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지고, 앞의 AC.122-124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천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만일 문제가 단순히 잘못된 추론에 그친다면 이것은 지성의 오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질서는 삶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욕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거짓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앎의 질서는 결국 잘못된 삶의 질서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왜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탐구’라고 하지 않고 ‘탐구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AC 자체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살피고 서로 연결하면서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권위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자기 힘으로 파헤치고 판정하려는 내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신앙에 관해서는 질문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다음 장, 곧 창3의 속뜻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미리 그 원리를 밝히면서 그것이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의 이야기도 단지 아주 먼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이미 제시됩니다.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찾으려는 질서의 전도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27의 핵심은 지성과 연구를 포기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지성과 연구를 지배하는가를 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위에 있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 아래에서 쓰일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지식이 위에 올라가 신앙의 신비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히며, 그 결과는 거짓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동시에 모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타락의 원리입니다. (AC.127)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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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7)

 

AC.126

이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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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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