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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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는 데 이르며, 이때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vastated)고 합니다. 태고교회에서 가인파(Cainites)라 불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고, 홍수 후 고대교회에도 그러했으며, 유대교회에도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당시 유대교회는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도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nucleus)이 남아 있으며, 신앙에 관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remnant)은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그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Noah)라고 부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AC.407은 앞의 AC.405-406에서 설명한 라멕의 황폐를 교회 전체의 역사라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그가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보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이번 문맥에서 교회가 참된 신앙을 잃어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황폐를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쇠퇴나 건물과 제도의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외적으로 존속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참된 신앙이 사라진다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황폐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규모가 작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인 신앙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황폐의 사례로 태고교회에서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 홍수 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초기 기독교회를 차례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와 가인파를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처음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인파라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계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가인과 같은 상태였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에 관한 언급도 같은 논지를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처음의 참된 신앙에서 점차 떠나 황폐에 이르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반복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가 주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이 주님에 관한 동일한 지식과 태도를 가졌다는 역사적·사회적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관한 설명에서도 시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시대에는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오늘날’은 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별도의 검토 없이 오늘날의 모든 기독교회와 모든 신자에 대한 현재적 사실 판단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황폐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한 직후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nucleus)은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은 그 핵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존속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황폐와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이번 번호의 ‘핵심’(nucleus)과 ‘남은 부분’(remnant)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에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한 뒤, 태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홍수 때까지 존속했고 홍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번 문맥에서 단순히 홍수 이야기의 한 인물을 넘어, 황폐해진 태고교회로부터 보존되어 이어지는 교회의 남은 부분을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남은 부분’을 곧바로 개인의 거듭남에서 말하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번호는 교회 전체의 황폐와 그 가운데 보존되는 교회의 핵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 안에 보존되는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관련 AC 본문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한 ‘핵심’과 ‘교회의 남은 부분’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가인의 계보와 노아의 관계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역사는 그 황폐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이 보존되어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며, 그 남은 부분이 노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은 교회의 황폐와 보존이라는 두 측면에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지더라도 주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을 보존하십니다. 물론 이번 번호는 그 핵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보존되었는지, 홍수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내용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어지는 AC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황폐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남은 부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큼은 이번 번호에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따라서 AC.407을 읽을 때에는 교회의 황폐에 관한 진술만큼이나 그 뒤에 나오는 ‘그러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교회의 황폐를 열거한 뒤에도 교회에는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황폐해진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핵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남은 부분은 홍수를 지나서도 계속되었고, 그 교회의 남은 부분을 노아라고 부릅니다. 결국 AC.407은 한 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면서도, 그 쇠퇴를 넘어 계속되는 교회의 보존을 함께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407 해설)

 

 

 

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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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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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것 같은데 왜 그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그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창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셋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창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셋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셋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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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 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은 ‘강제’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 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C.330과 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 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창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 AC 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AC.330의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와 ‘라멕에서 신앙이 남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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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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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And he drank of the wine and was drunken; and he was uncovered in the midst of his tent.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And Ham, the father of Canaan, saw the nakedness of his father, and told his two brethren without.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And Shem and Japheth took a garment, and laid it upon the shoulder, both of them, and went backward, and covered the nakedness of their father; and their faces were back ward, and they saw not their father’s nakedness. (창9:21-23)

 

※ 오늘부터는 본문에 영문도 함께 싣겠습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이순철 역)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reby fell into error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drunkard” in the Word. They are called “drunkards” who believe nothing but what they apprehend, and for this reason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And because this is done by means of sensuous things, either of memory or of philosophy, man being what he is cannot but fall thereby into errors. (AC.1072, Clowes 역)

 

※ 위 인용은 AC(Arcana Coelestia, 라틴,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 1072번 글에서 가져왔으며, 이는 창세기 9장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중 ‘취하여’에 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먼저, 오늘 배경입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 함, 야벳이었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잠이 들었는데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함은 그냥 자기 선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아니 그러는 게 더 나았을 일을 형제들에게로 가 알려요. 점잖게 말해 ‘알렸다’이지 아마 키득키득 천박, 경박하게 알렸을 겁니다. 함의 말을 듣고 그의 형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가서는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이 일은 작은 사고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 말씀에는 영적 교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노아와 그 자손들은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의 몰락 후, 주님에 의해 새로 세워진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와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聖) 문서(스베덴보리가 주님의 계시로 기술한 그의 모든 저작, Writings)에 의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들, 즉 아직 지상에도 퍼셉션(perception)이 있었던 시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말씀을 그때그때 직접 들었고, 말씀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태고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天的, Celestial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 위 퍼셉션에 관해 전에 정리했던 글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 지상에 머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걸 잃어버린, 노아 이후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 무슨 말로도 설명이 안 되고, 또 설령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국은 퍼셉션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천국 모든 구성원은 주님과 이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주님의 신성은 신적 사랑(Divine Love)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이며, 그래서 천국 모든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즉시 아는 능력, 곧 퍼셉션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을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처럼 무슨 공부를 통해서, 학습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이 퍼셉션으로 그냥 압니다. 직감, 직관이라고 해야 하나요? 천사들이 뭘 궁금해하면, 그 즉시 그냥 어떤 답이 내적으로 들린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만큼 주님과 늘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천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태고교회가 이런 퍼셉션을 지상에서도 누렸다는 것입니다... //

 

천적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즉 사랑이나 선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신앙, 또는 진리가 따라오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노아로 상징되는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靈的, Spiritual Church)입니다. 영적 교회는 지성의 교회입니다. 즉 신앙이나 진리가 먼저이고, 다음에 사랑과 선이 따르는 교회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랑의 교회라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종의 천국에 관한 공리(公理,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읽고 또 읽어 거의 심비(心碑, 마음 판)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완전히 동일한 사회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단 한 천사도 다른 이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일반적, 종류별, 그리고 세부적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나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세 천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사회공동체(societies)로 나누어진다. 이제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고 하기 때문이다. (HH.20)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HH.21)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HH.22)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서로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HH.23)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聖職)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성경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王權)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성경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the celestial Divine the Lord)에서 ‘예수’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라고 칭했다. (HH.24)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즉시(at once)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perceive),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 34)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는 것’(the taught of Jehovah)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45, 46절에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6:45, 46) (HH.25)

 

앞서 말한 대로, 이 천적 천사들이 지혜와 영광에 있어 다른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신적 진리를 생활 속에 직접, 즉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신적 진리를 듣자마자 그것을 의도하고 행하며(will and do), 결코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천사들은 어떤 진리를 들으면, 주의 입류(入流, influx)에 의해 즉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 속으로는 직접(directly) 들어가시고, 생각 속으로는 의지를 거쳐 간접적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주님은 선 안으로는 직접 유입하시지만, 진리 안으로는 선을 거쳐 간접적으로 유입하신다. 왜 두 가지가 같은 말이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행동에 속한 것은 선이라 부르며, 기억과 거기서 나오는 생각에 속한 것은 진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실로 모든 진리는 사람의 의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선으로 바뀌어 사랑 안에 심어진다. 그러나 그냥 기억과 생각 안에만 머무는 진리는 선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으며,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의지와 의지에서 비롯된 사고 능력(understanding, 이해, 이성)으로 인해 사람인 것이며, 의지를 떠난 사고 능력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HH.26) //

 

그렇게 순수하고 따뜻했던 천적 교회의 사람들도 자아에 눈을 뜨면서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는데요, 말씀에서는 그것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 그리고 네피림과 같은 괴물이 출현하는 걸로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그렇게 무너지고, 이어 고대교회가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대교회는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말씀에는 세 종류, 곧 감람(橄欖,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주 나오는데요, 이들 나무는 각각 천적(celestial), 영적(spiritual), 그리고 자연적(natural)인 것과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노아와 아들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본래 진정한 신앙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릇된 신앙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고, 그릇된 신앙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신앙은 주님 신앙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은 입으로만 주님을 신앙할 뿐, 삶은 정반대인 신앙입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 또는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비밀’ 1072번 글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살피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술 취한 자라 부른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감각적인 것, 기억에 속한 것, 또는 철학이나 그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AC.1072)

 

진정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마음대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주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반대로 그릇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합니다.

 

※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 안에는 순진함, 천진난만함(innocence)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행이 이상하게 순진하지가 않다면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닌 겁니다.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 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에서 인용 //

 

내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나 말씀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릇된 교리가 양산되었습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이를테면 오늘 노아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자들인 것입니다. 말씀에는 술에 취한 노아가 벌거벗고 잠이 들었다 했습니다. ‘벌거벗은지라’는 교회 안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으로 진리를 추론하거나 왜곡하는 교회에는 진정한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잠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것은 고대교회가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함이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22절입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은 노아의 아들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되는 아들로, 영적으로는 부패한 교회를 뜻합니다. 부패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천국의 비밀’ 1076번 글은 부패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교회처럼 예배를 드리지만 체어리티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해서 신앙을 그 본질과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며, 그로 인해 신앙을 죽은 것으로 만든다면 그 교회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게 된다. (AC.1076, 이순철 역) A church is said to be corrupted when it acknowledges the Word and has a certain worship like that of a true church, but yet separates faith from charity, thus from its essential and from its life, whereby faith becomes a kind of dead affair; the result of which necessarily is that the church is corrupted. (AC.1076, Clowes 역)

 

한마디로 말해서, 겉으로만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뿐, 삶에 있어서는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는 교회가 부패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는 부패한 교회의,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들이 생각할 때 잘못된 교리나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함이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는 그들, 곧 잘못된 교리나 신앙을 가졌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도 다른 교회의 잘못된 신앙이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때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오늘날 주류교회들의 신앙인 ‘오직 믿음’ 교리 같은 것입니다. 만약 비난을 할 목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거론한다면, 우리는 여기 함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신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잘못이 아니겠지요. 함의 말을 듣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장막으로 갑니다. 23절입니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것으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함과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가 되지요. 속뜻으로 셈과 야벳은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셈’은 고대교회 예배의 내적인 것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리고 ‘야벳’은 예배의 외적인 것을 뜻합니다. 즉 제사의 제물들과 의례들을 뜻합니다. 내적인 것 없는 외적 예배, 오직 외적이기만 한 예배는 생명 없는 죽은 예배입니다. 반대로 예배의 내적인 것만 있고, 외적인 것이 없다면 내적인 것은 허공중에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만 있고 지상의 교회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의 내면에 속 사람만 있고 겉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의 교회가 없이 어떻게 천국의 시민들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 안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안에 동시에 있는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옷을 가져다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뜻하고, ‘하체를 덮었으며’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깨는 힘과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벗은 몸을 똑바로 보지 않고 뒷걸음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동조합니다.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함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마치 공모를 하듯 진심으로 잘못된 행동에 동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더라도 그것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 다음은 셈, 함, 야벳 요약입니다.

 

셈, 참된 내적(internal) 교회

야벳, 참된 외적(external) 교회

함, 부패한(corrupted) 내적 교회

가나안, 부패한 외적 교회 (AC.1227)

 

어떤 예배가 참되다 하는 것은 그 예배가 주님을 향한 참사랑의 애정(affection)을 가지고 드려지고 있다는 뜻이고, 어떤 예배가 부패했다 하는 것은 그런 애정 없이 형식적으로, 즉 다른 동기와 목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사랑의 애정을 말하는데, 이걸 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배웠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말씀에서는 노아의 아들 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달려가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주로 보고 장점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무섭게 추궁하고 마음속으로 정죄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함의 말을 듣고 급히 옷을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줬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대함을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용서가 안 될 때가 있지요. 그래서 말씀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어깨에 메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깨에 옷을 메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교회 건축을 할 때, 이유 없이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 제가 알기로 근처 개신교 교회들이 와서 시위를 하고, 민원을 넣는 등 그렇게 반대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신축 허가가 나지 않아 개축을 해야 했고, 그렇게 건축이 늦어지면서 시공비는 엄청나게 인상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잊으라고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하듯 그동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잘못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생각하고, 분풀이를 하려 한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 항상 체어리티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이 잘못을 할 때,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되 결코 동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1, 3)

 

아멘

 

2022-0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0.54MB
축도2025-03-23(D1)-주일예배(2590, 창9,21-23), '술 취한 노아와 그 세 아들, 셈, 함, 야벳'.pdf
0.25MB
천국과지옥.1.4.20-28.'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pdf
0.3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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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뜻

 

AC.468

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리들 또는 교회들은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 때부터 ‘노아’(Noah)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하여 마침내 소수에게만 남게 됩니다. 홍수 때 그것이 남아 있던 그 소수를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and shown in the foregoing chapter, it is evident that by names are signified heresies and doctrines. Hence it may be seen that by the names in this chapter are not meant persons, but things, and in the present instance doctrines, or churches, which were preserved, notwithstanding the changes they underwent, from the time of the most ancient church even to “Noah.” But the case with every church is that in course of time it decreases, and at last remains among a few; and the few with whom it remained at the time of the flood were called “Noah.”

 

[2] 참된 교회가 쇠퇴하여 소수에게만 남게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쇠퇴해 온 다른 교회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와 ‘남은 자’(remnant)라 하며, ‘땅의 가운데’ 또는 ‘중앙에’ 있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경우가 그러한 것처럼 개별적인 경우도 그러합니다. 즉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또는 보편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또는 참된 신앙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얼마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인체와 같습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그 주변의 내장들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심장이 쇠약해지면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여 사람이 죽습니다. 마지막 리메인스가 바로 ‘노아’(Noah)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6:12과 다른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듯 온 땅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That the true church decreases and remains with but few, is evident from other churches which have thus decreased. Those who are left are in the Word called “remains,” and a “remnant,” and are said to be “in the midst,” or “middle,” “of the land.” And as this is the case in the universal, so also it is in the particular, or as it is with the church, so it is with every individual man; for unless remains were preserved by the Lord in everyone, he must needs perish eternally, sinc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are in the remains. So also in the general or universal—if there were not always some with whom the church, or true faith, remained, the human race would perish; for, as is generally known, a city, nay, sometimes a whole kingdom, is saved for the sake of a few. It is in this respect with the church as it is with the human body; so long as the heart is sound, life is possible for the neighboring viscera, but when the heart is enfeebled, the other parts of the body cease to be nourished, and the man dies. The last remains are those which are signified by “Noah”; for (as appears from Gen. 6:12, as well as from other places) the whole earth had become corrupt.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6:12)

 

[3] 각 사람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 전체 안에 존재하는 리메인스에 관해서도 선지서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Of remains as existing in each individual as well as in the church in general, much is said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3, 4) He that is left in Zion, and he that remaineth in Jerusalem, shall be called holy to him, even everyone that is written unto lives in Jerusalem, when the Lord shall have washed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washed away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thereof, (Isa. 4:3–4)

 

이 말씀에서 거룩함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며, 이 리메인스는 교회의 리메인스뿐 아니라 교회에 속한 사람의 리메인스도 의미합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those left)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는, in which passage holiness is predicated of the remains, by which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the church, and also of a man of the church; for “those left” in Zion and Jerusalem could not be holy merely because they were “left.” Again:

 

20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0, 21)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he remains of Israel, and such as are escaped of the house of Jacob, shall no more again stay upon him that smote them, but shall stay upon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in truth. The remains shall return, the remains of Jacob, unto the mighty God. (Isa. 10:20–2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50:20) In those days, and in that time, the iniquity of Israel shall be sought for, and there shall be none; and the sins of Judah, and they shall not be found; for I will pardon him whom I shall make a remnant. (Jer. 50:20)

 

미가에서는, In Micah: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미5:7) The remains of Jacob shall be in the midst of many peoples, as the dew from Jehovah, as the showers upon the grass. (Micah 5:7)

 

[4] 사람 또는 교회의 남은 것, 곧 리메인스는 또한 십분의 일로 표상되었으며, 그것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을 포함하는 수도 거룩하였으며, 따라서 ‘십’(ten)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esidue or remains of a man, or of the church, were also represented by the tenths, which were holy; hence also a number with ten in it was holy, and “ten” is therefore predicated of remains; as in Isaiah: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12, 13) Jehovah shall remove man,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and yet in it [shall be] a tenth part, and it shall return, and shall be for exterminating; as an oak, and an ilex, when the stock is cast forth from them, the holy seed is the stock thereof; (Isa. 6:12–13)

 

여기서 남은 것은 ‘거룩한 씨’(seed of holiness)라 불립니다. 아모스에서는, where the residue is called a “seed of holiness.” And in Amos: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3) Thus saith the Lord Jehovah, The city that goeth forth a thousand shall have a hundred left, and that which goeth forth a hundred shall have ten left to the house of Israel. (Amos 5:3)

 

이 말씀들과 다른 많은 구절에서 속뜻으로는 지금까지 말해 온 ‘리메인스’(remains)가 의미됩니다. 교회의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한 성읍이 보존된다는 것은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In these and many other passages, in the internal sense are signified the “remains” of which we have been speaking. That a city is preserved for the sake of the remain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to Abraham concerning Sodom: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Abraham said, Peradventure ten may b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for ten’s sake. (Gen. 18:32)

 

해설

AC.468은 창5의 ‘장 개요’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제시된 이름들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확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해 두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적어도 창5의 속뜻을 해설하는 이 자리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개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들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며 변화해 온 교리와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창5의 족보 형식은 속뜻으로는 교회의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교회들이 ‘여러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62-467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줍니다. 처음에는 천적인 태고교회가 있었고, 이후 그 상태가 점차 달라졌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홍수 때까지 참된 교회가 남아 있던 소수가 있었고, 바로 그들을 ‘노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문맥에서 단지 열 번째 교회의 명칭만이 아니라, 이전 교회가 거의 사라진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2]에서 이 ‘리메인스’의 원리는 교회 전체에서 한 사람의 내면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AC.468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 전체에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소수에게 남아 있어 인류 전체가 보존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과거의 좋은 기억 정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들이 훗날 거듭남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심장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심장이 건강한 동안에는 주변의 장기들도 생명을 유지하지만, 심장이 쇠약해져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교회 안의 리메인스가 이와 같습니다. 참된 교회가 외적으로 크게 쇠퇴하더라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를 보존하시는 동안에는 인류와 교회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아’가 바로 홍수 직전 이러한 마지막 리메인스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보존은 단지 몇 사람이 재난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가운데 영적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3]에서 인용되는 사4:3-4, 사10:20-21, 렘50:20, 미5:7은 바로 이 원리가 말씀 전체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아 있는 자’, ‘남은 자’, ‘피한 자’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숫자상 살아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시온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단지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룩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이것입니다. 이들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의 주제는 AC의 리메인스 교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4]에서는 이 리메인스가 왜 ‘십’이라는 수와 연결되는지가 설명됩니다.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하였기 때문에 십을 포함하는 수가 거룩하게 사용되었고, ‘십’은 리메인스에 관하여 서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6:12-13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에도 ‘십분의 일’과 ‘거룩한 씨’가 남으며, 암5:3에서는 천 명 가운데 백 명,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산술적인 비율 자체가 아니라, 황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무엇인가를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18:32의 소돔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이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십’은 단순한 인원수를 넘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몇 사람을 위하여 한 성읍이, 때로는 한 나라 전체가 구원받기도 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AC.468은 창5의 장 개요 전체를 ‘리메인스’라는 놀라운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태고교회는 쇠퇴했고 퍼셉션도 마침내 사라졌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을 ‘노아’라 하셨고, 바로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교회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붙들고 다시 영적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교회의 마지막 남은 자인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AC.468 해설)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 심화‘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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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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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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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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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7

‘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ch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and “Noah” is described as a new church. (verse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9절)

 

해설

AC.467은 앞의 AC.466에서 노아를 ‘고대교회’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홉 번째 교회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다음 ‘노아’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아홉 번째 교회 다음에 열 번째 교회가 이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한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인지 추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467은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462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변화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셋’은 처음의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히 교회의 명칭이 바뀌어 온 과정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내적 상태가 점차 달라져 마침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노아’가 등장합니다. AC.467은 노아를 단순히 라멕 다음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새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라멕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음 교회는 이전의 상태를 그대로 회복하거나 반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 새 교회를 ‘노아’라고 한 것입니다. 앞의 AC.466에서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에녹에 관한 AC.464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교리로 형성하여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했던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라멕에 이르러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는 AC.467의 설명은, 왜 앞선 시대에 그러한 교리의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만 그 보존된 교리가 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이후의 본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67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라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 교회’인 ‘노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교회의 끝이 곧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형태의 교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에도 주님은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라멕과 노아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의 끝에서도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AC.467 해설)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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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6, 창5, ‘노아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된 열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6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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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466

열 번째 교회는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이름을 ‘노아’(Noah)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합니다. (28-29절) A tenth, 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 was named “Noah.” This church is to be called the ancient church. (verses 28–29)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28, 29절)

 

해설

AC.466은 AC.460부터 이어져 온 교회들의 계승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진 뒤, 열 번째 교회로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노아를 단순히 그 연속 가운데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교회에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고대교회’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끝나 가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주는 이름입니다.

 

원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홍수 후 세 교회의 모체’(the parent of three churches after the flood)입니다. 노아라 하는 교회로부터 홍수 후에 다시 세 교회가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AC.466은 아직 그 세 교회가 무엇이며 각각 어떠한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노아가 이전 교회의 마지막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에 이어질 교회들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이 점에서 ‘노아’를 열 번째 교회라고 하는 것과 ‘고대교회’라고 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순서로는 열 번째이지만, 그 성격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끊어진 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에서 보존된 것을 통하여 다음 시대의 교회가 준비됩니다. 창5의 교회 계승이 노아에 이르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맞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고대교회라 한다’는 말은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태고교회’와도 분명히 구별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는 단순히 시대가 앞서고 뒤선다는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와 방식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AC.466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노아와 함께 ‘고대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시작된다는 점을 붙들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구체적인 차이는 이후의 해설에서 차례로 밝혀집니다.

 

또한 AC.466은 앞에서 에녹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이 교리로 형성되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노아에 이르러서는 태고교회와는 다른 상태의 교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앞선 교회에서 보존된 것이 후대에 쓰이도록 준비되었다는 AC.464의 설명은, 교회의 상태가 달라져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66은 그래서 창5 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이 장은 태고교회에서 출발하여 여러 교회를 거쳐 단순히 쇠퇴와 종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열 번째 교회에 이르러 다음 시대를 준비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위한 것을 보존하시고, 홍수 이후 다시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연속과 전환의 자리에 놓인 교회이며, 그 교회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고대교회’라고 합니다. (AC.466 해설)

 

 

 

AC.467, 창5, ‘라멕에게서 퍼셉션이 사라지고 노아라는 새 교회가 시작된다’

개요 AC.467‘라멕’(Lamech)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퍼셉션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며, ‘노아’(Noah)는 새 교회로 묘사됩니다. (29절) “Lamech” is described as retaining nothing of the perception 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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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5, 창5,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다’

개요 AC.465 아홉 번째 교회를 가리켜 ‘라멕’(Lamech)이라 하였습니다. (25절) A ninth church was called “Lamech.” (verse 25)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5절) 해설AC.465는 앞에서 이어져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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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a son;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And he called his name Noah, saying, He shall comfort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Lamech lived after he begat Noah five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Lamech were seven hundred seventy and seven years; and he died.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And Noah was a son of five hundred years; and Noah begat Shem, Ham, and Japheth.

 

AC.460

이 장은 특별히 태고교회가 이어지는 여러 세대를 거쳐 홍수에 거의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간 과정을 다룹니다. This chapter treats specifically of the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rough successive generations, almost to the flood.

 

해설

AC.460은 창5의 ‘장 개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보여 주는 짧지만 중요한 문장입니다. 창5의 본문은 여러 이름과 출생, 나이와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특별히 다루는 것이 ‘태고교회가 이어지는 여러 세대를 거쳐 홍수에 거의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간 과정’이라고 먼저 밝힙니다. 따라서 창5를 읽을 때에는 문자에 나타나는 족보의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태고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이어지는 여러 세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한 세대 다음에 또 한 세대가 왔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본문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창5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차례로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관심은 각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족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이름들이 세대별로 이어지는 족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한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면서 나타낸 서로 다른 상태들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장하는 이름들을 먼저 역사적 개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로는 그 이름들이 무엇을 나타내며,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어떠한 상태와 변화를 보여 주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과정의 끝을 AC.460이 ‘홍수에 거의 이르기까지’라고 정한다는 점입니다. 창5는 아직 홍수 자체를 다루지 않지만, 이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홍수 직전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5는 여러 세대와 교회의 상태를 각각 따로 떼어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AC.460이 먼저 밝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할 ‘낳고’, ‘살고’, ‘죽었더라’라는 표현과 여러 숫자를 읽는 데에도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직 AC.460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모든 기록이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세대들을 다루는 하나의 전체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개별 이름이나 숫자의 속뜻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지금 태고교회의 어떠한 상태와 그 이어짐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전체 문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AC.460은 창5를 단순히 오래된 족보로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는 태고교회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마침내 홍수 직전까지 이르는 긴 영적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의 ‘장 개요’와 본문 해설은 바로 그 역사를 하나씩 펼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차츰 보게 될 것입니다. (AC.460 해설)

 

 

 

AC.461, 창5, ‘사람과 하나님의 모양은 태고교회 자체를 가리킨다’

개요 AC.461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사람’(homo),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이라 하였습니다. (1절) 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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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9, 창5 앞, ‘세 천국과 천적·영적 존재의 차이’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9천국은 셋입니다. 첫째 천국은 선한 영들(good spirits)이 거하는 곳이고, 둘째 천국은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거하는 곳이며,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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