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나란히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lifeof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is, ofnovitiate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soul과 spirit을 서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서로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320의 ‘thelifeofsouls’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 또는 인간 자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단순히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비물질적 ‘부분’으로 생각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AC.320의 관심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부품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novitiatespirits’는 죽음 이후 처음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을 가리키므로 ‘신참, 신생영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영’이 지상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20이 이어서 설명하듯 그는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을 전과 같은 한 사람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이라는어떤것이죽은뒤어떻게되는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죽음이후에도계속살아가는인간은처음영계에서어떤상태에있는가’를 소개하는 문장입니다. ‘soul’이라는 표현으로 사후에 계속되는 인간의 생명을 넓게 제시하고, 곧이어 ‘novitiatespirits’라는 표현으로 지금부터 다룰 대상이 죽음 직후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임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고, ‘영’이라고 하면 더욱 비현실적인 존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죽은 뒤에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AC.320에서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에게 ‘당신은영입니다’라고 말하면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며, 전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는 soul과 spirit의 차이를 완전히 지워 버릴 필요도 없고, 반대로 두 단어 사이에 지나치게 엄격한 존재론적 구별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soul은 ‘영혼’, spirit은 ‘영’으로 구별하여 옮기되, 이 문맥에서는 둘 다 육체의 죽음 이후 계속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하면 됩니다.
결국 AC.320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soul과spirit가운데어느것이진짜나인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나’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사라지고 영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나는 사건이 아니라, 육체를 벗은 인간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임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삶,곧죽은뒤처음영계에들어가는신참,신생영들(novitiatespirits)의삶에관한일반적인사항과관련해서말하자면,저는많은경험을통해다음과같은사실을알게되었습니다.사람이저세상(theotherlife)에들어가면그는자신이저세상에와있다는사실을알지못하고,여전히이세상에있으며,심지어아직도육체안에있다고생각합니다.이러한상태는매우실제적이어서,누군가그에게자신이영이라고말해주면그는크게놀라고경이로워합니다.이는자신이감각과욕구,생각에있어서전과똑같이한인간으로존재함을발견하기때문이며,또한세상에살때에는영의존재를믿지않았거나,혹은어떤사람들처럼영이지금자신이경험하는것과같은존재일수있다고는전혀생각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영으로산다는것에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욕구,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사람이없어지고전혀다른존재가생기는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전과똑같은사람인데무엇이달라졌다는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내가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벗은뒤에도계속살아가는나는과연어떤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영으로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AC.41에‘천사적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영’이라는 것인지,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천사적영’을 단순히‘천사를다른관점에서부르는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영들’(spirits), ‘천사적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따라서‘angelic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천사적영’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영’, ‘천사적영’, ‘천사’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따라서‘천사적영’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영’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AC.41에서는 왜 굳이‘천사적영’을 언급했을까요?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천사적영이정확히어느계층에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이 글의 중심은‘생명’입니다.사람의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주님에게서나오는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천사적영은천사인가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왜그의생각의가장작은부분까지살아있다고하는가?’라는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AC.41에서‘천사적영’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천사적영’을‘천사와완전히같은존재를달리부르는말’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영사이의별도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우선은‘천사적인상태와성질을가진영적존재를가리키는스베덴보리의표현’정도로 이해하면서,AC.41의 핵심인‘주님에게서오는애정이생각과말의가장작은부분까지살아있게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이후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영’, ‘천사적영’,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이장의끝에서,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세워져영원한삶안으로들어가는지를말하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accordingly,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AC.67부터 이어진 짧은 서론을 마무리하면서, 이 장의 끝에서 다룰 내용을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바로 앞의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끼어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2의 첫말 ‘그러므로’는 바로 그 설명을 받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칙에 따라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에서일으켜세워져’라는 표현은 중요하지만,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그 과정의 성격을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죽음을 ‘아래로떨어지는사건’과 대조하고, 사람이 ‘능동적으로다른삶안으로옮겨지는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원문은 단지 사람이 어떻게 ‘raisedfromthedead’ 되는지를 말하겠다고 할 뿐입니다. 특히 ‘일으켜세워져’는 수동형이므로 인간이 능동적으로 다른 삶으로 옮겨진다는 설명은 오히려 원문의 표현과 맞지 않습니다. 그 소생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이 장 끝에 이어질 기록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설명하도록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영원한삶안으로들어간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영원은끝없는시간이아니라주님과의관계안에서살아있는상태’이며, 사람이 ‘자기삶의참된자리로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2는 아직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앞의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미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했고, ‘죽음은삶의연속’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72에서는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전환 과정이 뒤에서 설명될 것이라는 정도로 읽는 것이 충분합니다.
또한 ‘이장의끝에서’라는 위치 자체에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장의 끝을 독자가 말씀의 속뜻을 삶의 실제로 연결하는 자리라고 설명하지만, AC.7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 사이에 끼어들어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AC.72의 ‘이장의끝에서’ 역시 우선 그 편집상의 설명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에서 다시 한번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AC.67부터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과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는 것을 계속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사후의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일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71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지는 여기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2의 역할은 새로운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번호는 하나의 예고입니다. AC.67-71에서 다른 삶에 관하여 왜 말하는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다고 하는지, 인간과 영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 기록을 AC안에 어떻게 배치할지를 설명한 뒤, 이제 실제로 다룰 첫 주제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세워져영원한삶안으로들어가는가’입니다.
이 한 문장을 지나면 곧바로 창2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약속한 내용은 이 장의 끝에 가서 실제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 소생의 과정을 미리 채워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AC.72는 그 문을 열어 놓고, 자세한 설명은 약속한 자리에 남겨 둡니다. (AC.72해설)
그러나이러한내용들을말씀본문에들어있는것들사이에끼워넣는다면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될것이므로,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그것들을각장의처음과끝에어떤순서대로덧붙이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이와별도로부수적으로삽입되는것들도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it is permitted,of the Lord’s Divine mercy,to append them in some order,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AC.67부터 시작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짧은 안내문입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말하기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계속 끼워 넣으면 서로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어떤순서대로’라고 한 점입니다. 다른 삶에 관한 기록들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경험을 무작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 안에서 제시됩니다. 따라서 독자는 앞으로 창세기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과 함께, 각 장의 처음과 끝에서 다른 삶과 영계에 관한 별도의 연속된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을 현행 해설처럼 ‘장의처음은독자의인식을열어주는자리이고,장의끝은그인식을가라앉히고확장하는자리’라고까지 설명할 근거는 AC.71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말씀의문자와그내적의미만이놓인다’고 절대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이어서 ‘부수적으로삽입되는것들도있다’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배치 원칙은 각 장의 처음과 끝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보다 말씀을 우위에 놓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가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AC.71에서 그가 직접 밝힌 배치 이유는 이러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내용들 사이에 삽입될 경우 ‘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설명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와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고,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AC.70에서도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어떤 순서로 덧붙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이 번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은 별도로 물어볼 만한 중요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AC.71의 역할은 크지만 그 내용은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다른 삶에 관한 많은 내용을 기록할 것이며, 그것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기억하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왜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다가 장의 경계에서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긴 기록들이 등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무관한 자료가 우연히 한 책 안에 섞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처음부터 밝힌 구성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AC.71해설)
여러해동안제가듣고보았던것을밝히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으므로,여기에서는먼저사람이소생될때,곧육체의삶에서영원한삶으로들어갈때그상태가어떠한지를말하고자합니다. 사람들이죽은뒤에도살아있음을제가알수있도록,저는육체안에사는동안알고지내던많은사람들과말하고그들과함께있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그것도단지하루나한주동안만이아니라여러달동안,거의일년동안이나이세상에서처럼그들과말하고교제했습니다. 그들은육체안에살때자신들이그랬듯이,그리고지금도매우많은사람들이그러하듯이,죽은뒤에는살아있지않을것이라고믿는그러한불신가운데있었다는사실을몹시이상하게여겼습니다.사실육체의죽음이후거의하루도지나지않아사람은다른삶안에있게됩니다.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it shall here be told,first,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but for months,and almost a year,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and that very many others are,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예고한 ‘다른삶’에 관한 실제 내용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다른 삶에 들어가는 첫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다루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표현이 ‘소생될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의 일을 소멸한 사람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생은 죽음으로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0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말합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 경험은 하루나 한 주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처럼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AC.68에서 ‘보았고,들었으며,느꼈다’고 한 증언이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내용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후에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 자신들도 죽은 뒤에 계속 살아갈 것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후의 삶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는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의 자기 불신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거나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고, 그들이 보인 놀라움 자체를 전합니다.
이어지는 ‘육체의죽음이후거의하루도지나지않아사람은다른삶안에있게된다’는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직접 말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긴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의하루’를 곧바로 영계의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실제 시간이 전혀 아니라 하나의 상태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부터 사람이 어떻게 소생되어 다른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차례로 설명하려 하고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기록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같은 이유로 AC.70에서 곧바로 연옥이나 영들의 세계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끌어올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는 ‘어떤중간지대나긴공백이없다’, ‘연옥이나무의식상태를전제하지않는다’는 설명이 있지만, AC.70자체가 여기서 연옥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육체가 죽은 뒤 인간의 삶은 중단되지 않으며,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0의 마지막 문장은 이 번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죽음은삶의연속’이라는 말은 죽음이 아무 변화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인간 자체가 소멸했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번호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연속성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 번호들에서 더 자세히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AC.70해설)
저는많은사람들이사람이육체안에살아있는동안에는영들과천사들과말하는것이도저히불가능하다고할것임을잘알고있습니다.또많은사람들은이모든것이상상이라고할것이고,어떤사람들은제가신뢰를얻기위해이런것들을이야기한다고할것이며,또다른사람들은그밖의여러반대를제기할것입니다. 그러나이모든것에도불구하고저는물러서지않습니다.왜냐하면저는보았고,들었으며,느꼈기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for I have seen,I have heard,I have felt.
해설
AC.68은 AC.67에서 시작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합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곧바로 그러한 주장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들,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사람들,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논증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들을 길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저는보았고,들었으며,느꼈기때문입니다.’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내세우는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증언입니다.
그렇다고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라는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보았다’는 형상과 구조와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들었다’는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이며, ‘느꼈다’는 실재로서 경험했다는 선언이라고 세분합니다. 그러나 AC.68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더 충실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증언이 상상이나 자기 암시일 수 없다고 논증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해설에는 상상이라면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 없고,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려우며, 조작이라면 수십 년 동안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그 절제된 태도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이 단락의 힘을 더 잘 살립니다.
AC.68은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믿을것인가,거짓말이라고할것인가’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 관하여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을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도록 허락된 것에 관한 증언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과 AC.68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8에서는 그러한 말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증언을 거두지 않습니다. 독자는 바로 이 전제를 알고 이후의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AC.68의 마지막 세 동사는 짧지만 중요합니다. ‘저는보았고,들었으며,느꼈기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장으로 모든 반론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앞으로 그의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는 이 짧은 번호에서 분명해집니다. (AC.68해설)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로 들어가기 전에 놓인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곧바로 창2의 속뜻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밝히려 하는지 먼저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은 ‘다른삶’, 곧 사후에도 계속되는 영적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67은 창2의 첫 해설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AC.67-72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여는 서문에 가깝습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일을 자신의 학문이나 추론의 성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던 일과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AC.67의 처음과 끝이 모두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허락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의 속뜻과 ‘다른삶의본성’을 연결하는 이유도 본문 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알면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 자체가 영적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품고 있으므로, 그 세계의 본성을 전혀 모른다면 속뜻의 많은 부분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성경은처음부터끝까지오직사후세계에관한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성경은처음부터끝까지사후세계를바라보며기록된책’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AC.67의 직접 진술은 그보다 신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많은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그것을 묘사하며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후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 등 훨씬 넓고 깊은 내용을 펼쳐 보일 것이므로, AC.67에서는 원문이 정한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편이 좋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듣고보았던것들’을 밝히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철학적 추론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AC.68부터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보일 반응까지 예상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67은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떤 성격의 글로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AC.67하나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공간을이동한것이아니라인식과지각의차원이열렸다’고 단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번호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 가운데서 듣고 보았다고 말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경험의 구체적인 성격은 이어지는 번호들과 다른 관련 저작을 통해 점차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AC.67의 무게는 말씀의 속뜻과 영계에 관한 증언을 처음부터 서로 연결해 놓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는 독자는 단지 자연계의 사건과 인간 심리만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려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 다른 삶을 알게 된 것도, 그것을 이제 밝히게 된 것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두 축, 곧 ‘말씀의속뜻과다른삶의관계’와 ‘주님의허락아래주어진증언’이 AC.67이후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AC.67해설)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종류의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짧은 표현이 상당히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살아가는 하나의 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신앙,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듯 사후에도 그 차이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먼저 ‘영’(spirit)이라는 말 자체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이라고 할 때 언제나 한 종류의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이 말은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고, 천사와 구별하여 아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직천사가되지못한중간단계의존재’라고 고정해서 읽으면 문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어서 처음 영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 후 사람은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은사람이영이된다’는 말은 일상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물질적인몸을벗은인간이영적세계에서영으로서의자기생명을계속살아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과 관련하여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들의세계’(world of spirits)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이자 중간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일정한 과정을 밟는 일종의 대기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에 겉과 속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사람이 지상생활 중 외적인 이유로 감추거나 조절했던 것들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른 실제 상태가 점차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영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준비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으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벗어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종류의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계의 생물학적 종을 분류하듯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과 애정, 신앙과 사고, 삶의 목적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영들의 상태도 다양하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영들’과 ‘악한영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두 종류의 종족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선과 진리를 기뻐하는 애정이 삶의 중심을 이룬 사람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며 악과 거짓을 기뻐하는 사람은 사후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로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죽으면영이되고,일정한과정을마치면영이라는종에서천사라는종으로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사랑과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악령이나 마귀도 처음부터 별도의 종족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할 때 ‘인간,영,천사’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존재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통하여 연속됩니다.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격과 삶이 죽음으로 끊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영계에는 그렇게 많은 공동체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무한히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애정과 쓰임을 가집니다.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악한 영들의 경우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과 욕망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의 똑같은 악으로 이루어진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비슷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질에 따라 결합합니다. 결국 영계에서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는 외부에서 임의로 배치되는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장소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실제로 장소와 환경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지만, 그 외적인 환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로 맞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의 ‘거리’와 ‘가까움’ 역시 자연계의 물리적 거리와 똑같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태의 유사성과 차이가 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AC를 읽다 보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들에 관한 표현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거나 돕고, 어떤 영들은 인간의 특정한 기억이나 애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어떤 영들은 악한 욕망과 거짓을 자극하려 합니다. 또 여러 행성의 영들에 관한 기록이나 인간 몸의 기관들과 상응하는 영적 공동체들에 관한 기록처럼 오늘의 독자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AC.5의 ‘여러종류의영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유입되는 것과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영이내머릿속에생각을넣으므로나는그생각에책임이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러 유입 가운데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고, 악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악한영이시켰다’며 책임을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택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어떤종류의영이나에게붙어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특별한 영계 교통이 허락되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거나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영적 현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배우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5의 ‘여러종류의영들에관하여가르침을받았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내적 삶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지상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삶이 죽음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하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이름을 가졌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종류의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존재들을 몇 개의 고정된 종류로 분류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랑과 애정과 사고의 상태가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로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종류의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영계에는여러종족이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사후에도인간의고유한삶과사랑의성질이계속되며,그차이에따라영적세계에는헤아릴수없이다양한상태와공동체와질서가존재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AC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게 될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지금무엇을알고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 곧 ‘나는실제로무엇을사랑하며,어떤삶을살아가고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5심화2)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 자신이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영계의존재를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수년동안’과 ‘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입니다. AC제1권이 출판된 것은 1749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의 생애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신학 저술 전체에 방대한 영계 경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AC.5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기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놓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꿈이나 한두 차례의 환시를 경험했다는 주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들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중단됨없이’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영계 경험을 순간적인 종교적 황홀경이나 특별한 꿈 몇 차례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렇다면이것은객관적으로증명된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글의 역할은 아닙니다. 반대로 현대인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환각이나 상상이라고 판정하는 것 역시 AC.5를 읽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영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교통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가 이후 제시하는 방대한 기록과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에는 AC출판 이전부터 중요한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740년대 전반 그는 오랫동안 해 온 자연과학과 철학적 탐구에서 점차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개인 기록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흔히 ‘꿈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꿈과 내적 갈등, 자기 성찰과 종교적 경험 등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의 신학 저술이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내적 전환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준비 기간의 꿈과 AC.5에서 말하는 지속적인 영계 교통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고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AC.5의 주장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전환에는 여러 단계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되, 후대에 전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모든 것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1745년의 경험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여러 자료에서는 174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루며,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는 사명과 관련된 경험이 있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와 구체적인 장면,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하나의 확정된 역사적 장면처럼 재구성할 때에는 자료의 성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AC.5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스베덴보리는 이미 ‘수년동안’ 주님의 신적 자비로 영들과 천사들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경험을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5는 자신의 특별함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4에서 그는 말씀 안에 속뜻이 있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어떻게그런것을알수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AC.5는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에 관한 증언은 그가 앞으로 말할 영적인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중단됨없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일을 자기 지성의 성취나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AC.5의 문법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이 영계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경험의 중심에는 ‘특별한능력을가진스베덴보리’보다 ‘특별한목적을위하여허락하신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을까요? AC.5자체에서 스베덴보리가 곧이어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영계와의 교통은 단순히 ‘저세상이실제로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의 질서,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천사들에게배운내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것을 알 수 있는 근원을 ‘주님으로부터’라고 명시합니다. 이후 그의 저술에서도 주님과 말씀의 권위는 영이나 천사의 말보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들과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최종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특별한 영계의 경험이 허락된 것 역시 주님께서 말씀과 영적인 질서를 밝히시는 더 큰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앞으로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그가 어떤 영을 만나 그 영이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영의 말이 곧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태에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으며,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AC.5에서 곧바로 ‘여러종류의영들’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영계의 다양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중단됨없이’라는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영들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을 믿으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영계의 시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영적 현상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AC의 중심은 영을 보는 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이 놀랍기 때문에 그것만 좇아 읽으면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가 거대한 사후세계 체험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계 경험이 낯설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제거하고 성경 해설만 취하려 하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소명과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험이 그의 말씀 해설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5의 ‘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지내게되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이한 현상의 지속 기간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영계의 일들을 추측하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보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우선 그 증언을 그가 말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한 뒤, 이후 수천 개의 AC글을 따라가며 그 증언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심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종류의영들’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하는 영계는 모든 영이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거치며, ‘영’, ‘천사’, ‘악한영’ 등의 표현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AC.5의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AC.5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