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434
여기서‘사람’(man)과그의‘아내’(wife)는앞에서‘아다와씰라’(AdahandZillah)로나타낸새교회를뜻합니다.그리고그여자의‘아들’(son),곧이름을셋이라한아들은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을뜻합니다.‘하나님이가인이죽인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 whomCainslew)는것은가인이분리하여소멸시켰던체어리티가이제주님에의해이교회에주어졌다는뜻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and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appointedanotherseedinsteadofAbel,whomCain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는 라멕으로 끝난 계보 뒤에 왜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432-433까지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그리고 마침내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황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창4:25은 갑자기 다시 ‘아담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아들을낳아그의이름을셋이라하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족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이후에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먼저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를 뜻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곧 아다와 씰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라멕 계열에서 아다와 씰라가 등장한 뒤, 이제 ‘사람과그의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새 교회가 다시 언급됩니다. 따라서 창4:25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준비된 새 교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이 새 교회에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셋(Seth)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으로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가인은 결국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창4:25의 ‘아벨대신에다른씨를주셨다’는 말이 중요해집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른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가인이 분리하고 소멸시킨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이 새 교회에 다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 스스로 되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의해’ 다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셋 자신이 곧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셋은 ‘체어리티를얻을수있게하는새로운신앙’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씨’가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벨이라는 인물을 셋이라는 인물이 대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가 다시 교회에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도록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것은 앞의 라멕 이야기를 지나온 독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라멕에게서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모두 죽었습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어 ‘성한곳이없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 황폐로 창4를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다른씨를주셨다’고 합니다. 황폐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통해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AC.434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결국 셋의 탄생은 단순한 족보의 연장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새 교회에 그것을 다시 주시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분리했고 아벨을 죽였지만,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434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셋 자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황폐해진 뒤에도 ‘다른씨’를 주시고, 다시 사랑과 신앙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434해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사랑의거룩한것들과거기서나오는선들이의미된다는사실은,야발이‘장막과가축의우리에거주한’(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사람들가운데최초가아니었다는점에서분명합니다.아담과하와의둘째아들아벨에대해서도그가‘양떼의목자’(ashepherdoftheflock)였다고말하기때문입니다.더욱이야발은가인의계보에서일곱번째에해당합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shepherdofthe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AC.416은 앞의 AC.412-415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짧지만 중요한 논거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이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장막을 짓거나 가축을 길렀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자체에 이미 기록된 아벨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창4:2에 따르면 아벨은 ‘양치는자’였습니다. 그런데 창4:20에 이르러 야발을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록을 단순한 직업의 발생 순서로만 읽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는데, 어떻게 훨씬 뒤에 등장하는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겠습니까? AC.416은 바로 이 의문을 통해 독자가 문자적 기록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아벨보다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보의 순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야발을 최초의 목축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의 AC.412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AC.415에서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야발에 관한 기록을 단순한 생업의 기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합니다.
아벨과 야발이 모두 목축과 관련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속뜻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과 관련하여 설명되었고,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와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누가먼저가축을쳤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기록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번호는 말씀의 속뜻을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기록을 무시한 채 임의로 새로운 의미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4:2의 아벨과 창4:20의 야발을 함께 읽고, 계보의 순서까지 확인하면서 문자적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씀의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조하여 읽는 일이 속뜻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416의 핵심은 야발이 실제로 어떤 목축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다는 사실은 야발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직업의 최초 창시자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번호들에서 밝혀진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따라,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이해하게 됩니다. (AC.416해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JehovahlookedtoAbel,andtohisoffering)는것은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한다는것을의미합니다.이는‘아벨’(Abel)과그의‘제물’(offering)에관하여앞에서이미설명한바와같습니다. That “JehovahlookedtoAbel,andtohisoffering,” 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 “Abel,” and his “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AC.350-353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벨이라는 개인이 가인보다 더 사랑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적 상태와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AC.349에서 밝힌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내적 생명으로 받아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 외적인 것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올바른 질서가 중요합니다.
AC.350-353은 바로 이 질서를 차례로 밝혀 왔습니다. AC.350은 ‘아벨’이 체어리티이고 ‘양떼의처음난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개괄했습니다. AC.351은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설명했고, AC.352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은 ‘기름’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며,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AC.354의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살아 있는 까닭은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기쁘시게한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시고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다는 식으로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을 주님께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으므로 ‘주님을기쁘시게하는것’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심’과 ‘돌아보지않으심’은 변하는 주님의 사랑보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외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를드렸느냐,드리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더구나 곡식보다 동물 제물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AC.348-349에서 살펴보았듯 가인의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의 ‘제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것은 ‘무엇을드렸는가?’보다 ‘그예배가어디에서생명을얻고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벨의 예배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벨에게 체어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가인보다 더 훌륭한 예배를 만들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2가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고 했고, AC.353도 ‘기름’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이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좋은 것을 생산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선에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사랑과 선의 생명을 자기 proprium에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다시 분명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신앙보다행위가중요하다’거나 ‘신앙대신체어리티를가져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역시사랑에서비롯될때에는천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을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예배와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이루는가입니다.
AC.354는 바로 다음 AC.355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창4:4에서는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은받으셨으나’라고 했고, 창4:5에서는 ‘가인과그의제물은받지아니하신지라가인이몹시분하여안색이변하니’라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4에서 먼저 ‘돌아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다음에 나오는 ‘돌아보지않으심’을 주님의 거절이나 편애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가 있고, 가인에게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내적 상태의 차이를 ‘돌아보셨다’와 ‘돌아보지않으셨다’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AC.354는 매우 간단하면서 깊은 기준을 줍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릇이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되는지, 진리를 알수록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기 우월감보다 쓰임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라는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예배를 주님 앞에서 살펴보는 기준입니다.
결국 AC.354는 AC.350-353의 긴 설명을 매우 단순한 한 문장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가 신앙과 행위와 예배에 생명을 주는 질서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외적인 형식 자체에도, 인간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어 신앙과 예배 속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물이 표상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체어리티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설명했습니다.체어리티는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를뜻합니다.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는사람은이웃이고통을당할때에도자신의고통을대하듯그를불쌍히여기기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체어리티란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는사람은이웃이고통을당할때에도자신의고통을대하듯그를불쌍히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모든사람을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는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사람의일이니나와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사람에게실제로무엇이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행위→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선’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양떼의처음난것’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원래사랑이많은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고통을자신의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은 ‘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이웃의고통은여전히남의일인가,아니면그의참된선이나에게도중요해지고있는가?’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창4:2)
AC.343
‘양치는자’(shepherdoftheflock)가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사람이라는것은누구에게나분명할것입니다.구약과신약의말씀에서아주익숙하게사용하는표상이기때문입니다.사람들을인도하고가르치는사람을‘목자’(shepherd)라고하고,인도와가르침을받는사람들을‘양떼’(flock)라고합니다.체어리티의선으로인도하지않고그것을가르치지도않는사람은참된목자가아니며,선으로인도받지않고무엇이선인지를배우지않는사람은양떼에속하지않습니다.‘목자’와‘양떼’가이런의미를가진다는것을말씀의인용으로확증할필요는거의없지만,다음구절들을인용할수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ofthe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In Isaiah:
양떼를체어리티의선으로인도하는사람들이‘양떼를모으는’(gathertheflock)사람들이며,체어리티의선으로인도하지않는사람들이‘양떼를흩는’(scattertheflock)사람들입니다.모든모임과결합은체어리티에서나오고,모든흩어짐과분리는체어리티가없는데서나오기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the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the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치는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에 익숙한 ‘목자와양떼’의 표상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치는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치는자’를 표상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3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면서 ‘사람들을인도하고가르치는사람을목자라고하고,인도와가르침을받는사람들을양떼라고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목자=가르치는사람,양떼=배우는사람’이라는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의선으로인도하지않고그것을가르치지도않는사람은참된목자가아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43전체를 여는 핵심 질문은 ‘목자가얼마나많이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목자가사람들을어디로인도하는가?’입니다. 그 목적지는 분명히 ‘체어리티의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의 ‘신앙→행위로나타나는신앙→체어리티’라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에게 무엇이 참인지를 알려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시도록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는별로중요하지않고사랑만있으면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자는 분명히 ‘인도하고가르치는’ 사람이며, 양 떼 역시 ‘무엇이선인지를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선을 행하려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다만 진리는 그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세운 데 있었다면, 참된 목자의 역할은 정반대로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가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여러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을 각각 독립된 주제로 확장하기보다 하나의 공통된 그림으로 읽는 것이 AC.343의 의도에 더 잘 맞습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이 양식을 내며 가축이 넓은 목장에서 먹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소산의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시80:1에서는 주님을 ‘이스라엘의목자’, 곧 ‘요셉을양떼같이인도하시는이’라고 부릅니다. 렘6:2-3에서는 목자들과 양 떼가 나타나고, 겔36:37-38에서는 사람들을 ‘양떼’와 ‘제사드릴양떼’로 표현하며, 사60:7에서도 양 무리가 모여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목자와 양 떼라는 말이 말씀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선으로 이끄는 관계를 나타내는 익숙한 표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40:11은 이 전체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같이양떼를먹이시며어린양을그팔로모아품에안으시며젖먹이는암컷들을온순히인도하십니다.’ 여기서는 참된 목자의 원형이 결국 주님 자신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먹이고,모으고,품고,인도하신다’는 일련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생명을 위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인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것은 자기에게서 목자직의 능력이나 선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쓰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며, 자기 생각으로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AC.343은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상당히 엄중한 기준도 제시합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을 이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어 간다면 그 가르침이 정말 AC.343이 말하는 ‘체어리티의선’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거나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선으로인도받지않고,무엇이선인지를배우지않는사람은양떼에속하지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외적인 소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양 떼는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으로 인도받으려 합니다. 목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양 떼 역시 그 선을 배우고 받아들여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의 중심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권위와 지식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 떼도 단지 종교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고,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C.343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설명을 ‘모임과결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모임과결합은체어리티에서나오고,모든흩어짐과분리는체어리티가없는데서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임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합을 이루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참된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적 차이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고 체어리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만 진리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생명을 가지려면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원리에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치는자’입니다. 체어리티는 양 떼를 선으로 인도하고, 모으고, 결합합니다. 특히 사40:11의 주님은 양들을 ‘모아품에안으시는’ 목자로 나타나시므로, 가인이 보여 주는 분리와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모음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인은나쁜사람,아벨은착한사람’이라는 도덕적 대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의 질서를, 아벨은 신앙이 본래 결합되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하나의 덕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신이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적과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AC.343은 ‘참된목자는어디로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체어리티의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람을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된 인도의 근원은 사람인 목자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은 그 주님의 목자직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전하는진리는이사람을체어리티의선으로인도하고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양 떼의 자리에서는 ‘나는단지진리를듣고아는데머무르는가,아니면주님의인도를받아무엇이선인지를배우고그선을행하려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서는 모이고 결합하며,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흩어지고 분리됩니다. 이것이 ‘양치는자’ 아벨을 통하여 AC.343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체어리티는교회의두번째자손이므로‘형제’(brother)라고하며,그이름을‘아벨’(Abel)이라고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두번째자손은체어리티이며,아벨과형제가이를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의 다른 곳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가잉태하고낳는것은신앙과체어리티외에는아무것도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진리가 선과 삶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하여 경쟁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도록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나타나는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놓으면 AC.342가 보여 주려는 질서가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단지 어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인 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르우벤→시므온→레위’는 ‘신앙→행위로나타나는신앙→체어리티’라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우려 하지만, 말씀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신앙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아가며 체어리티를 향합니다.
다만 이 흐름을 ‘먼저머리로진리를알고,그다음일정기간행동을반복하면,마지막에자동으로체어리티가생긴다’는 기계적인 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인간의 반복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진리와 선을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고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또한 이것을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 그대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AC.337이 말하는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르우벤→시므온→레위’는 특히 진리를 배워 삶으로 받아들이고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후대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단일한 시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창29:32-34가 인용된 이유도 바로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0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사례를 인용하여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하여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더 넓은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르우벤의 이름이 ‘봄’과, 시므온이 ‘들음’과, 레위가 ‘연합’과 연결되어 각각 더 깊은 의미를 갖지만, AC.342자체에서는 그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창29:32-34는 세 인물에 관한 별도의 주제를 여는 인용이라기보다 AC.342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이어지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직에 관한 설명도 같은 중심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고 ‘양치는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직의 역사나 제도 전체로 논의를 넓히기보다, 왜 이것이 아벨의 ‘양치는자’와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아 ‘양치는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벨- 체어리티- 양치는자’와 ‘레위- 체어리티- 제사장직- 양치는자’가 같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의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부분들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영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양치는자’를 곧바로 오늘날의 목회자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342의 직접적인 초점은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 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직 역시 그 본질을 지위나 권위에서 찾기보다 선을 섬기고 사람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인도하는 쓰임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목자가양을먹이고모으고품고인도한다’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AC.343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전개되므로, AC.342에서는 그 주제를 지나치게 앞당겨 확장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교회의두번째자손이므로형제라고하며,그이름을아벨이라고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단지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어,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방향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곧 신앙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거쳐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가인의 비극은 바로 이 방향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 형제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인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더욱 무겁게 읽히게 됩니다. 다만 그 구절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AC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고, 여기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만 붙드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342의 핵심은 ‘신앙의목적지는신앙자체가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적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알고믿는진리는지금어디로가고있는가?’ 단지 머릿속에서 더 많은 교리 지식으로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삶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체어리티와 결합하시도록 받아들이고 있는가? ‘르우벤→시므온→레위’는 신앙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점에서 체어리티인 아벨이 왜 신앙인 가인의 ‘형제’인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그러나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를‘가인’(Cain)이라하였고,이웃을향한사랑인체어리티를‘아벨’(Abel)이라하였습니다.(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Abel.”(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사랑하면서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의 ‘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신앙을분리한사람들이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분리된신앙의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분리되어나온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사랑을통하여주님을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창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가진신앙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서살아있는가,아니면그것들과분리되어스스로서려하고있는가?’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1-8)
인애(charity)가 없는 신앙(faith)의 행위는 신앙의 행위가 아니며 자체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348, 이순철 역)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AC.348)
※ 윗글은 오늘 본문 중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에 나오는 ‘땅의 소산’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 오늘 설교는 원래 추수감사절 설교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인과 아벨처럼 각자 예물을 가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예물은 어떻게 보실지 생각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요? 그리고 급기야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 즉 그 속뜻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보통 아담과 하와라고 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말씀의 그런 겉뜻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의 속뜻은 전혀 다릅니다. 영적인 의미, 곧 속뜻으로 ‘아담’과 ‘하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즉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시던 그때부터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주님은 교회를 통해 인간과 만나시고, 교회를 통해 인간을 가르치시며, 그렇게 해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신앙이 생긴 걸 말합니다.
※ 교회로 말미암는 자녀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신앙을 첫아들, 곧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를 그 아우, 곧 ‘아벨’(Abel)이라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처음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옳다고 여겨질 때, 비로소 진리로 말미암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깁니다. 바로 그 신앙이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입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심, 이를테면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욕심 같은 것, 즉 자아 사랑, 세상 사랑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을 극복,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그 에너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내면에 있는 좋지 않은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앙이 생겼을 때는 아직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사랑 없는 신앙, 사랑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교리라고 해도 됩니다. 아직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상태인 것이지요.
※ 모든 것이 완전, 온전했던 태고교회도 점차 변질, 기울어져 그 끝은 노아의 홍수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태고교회는 대략 여덟 번 정도의 상태변화를 겪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상태변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 부분부터입니다. 이 부분부터 아담, 즉 태고교회는 자신의 자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려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perception, 주님으로부터 내 영으로 들려오는 일종의 내적 음성)으로 모든 것, 곧 주님에 관한 모든 것, 천국에 관한 모든 걸 100% 무슨 별도 학습 없이 그냥 알았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바로 답이, 그것도 주님으로 말미암는 100% 온전한 답이 자신의 열린 영으로 들려오니 굳이 따로 교리화하여 학습할 필요가 없었지요. 마치 천적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소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면서 이 퍼셉션의 해상도(?), 수신 감도가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가인’이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일어난 것인데요, 주님한테서 시선을 돌리니 영이 흐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하며, 주님이 일일이 다 알려주시니 부족한 거 없이 늘 ‘내 잔이 넘치나이다’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들이, 어린 영유아들이 무슨 신앙이 있어 엄마, 아빠를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니듯 말입니다. 주님 아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자신들의 퍼셉션 감도가 흐릿해졌으면서도 그걸 커버하느라 이런 쪽, 그러니까 전에는 저절로 알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글로 정리, 교리화하여 그때그때 주님 찾을 필요 없이 꺼내볼 수 있는 쪽으로 잔머리를 굴린 겁니다.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주님만 바라봄으로써 선조들처럼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2절입니다.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 부부에게 두 번째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이 바로 체어리티인데요, 이 체어리티를 아벨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부부에게 아벨이 태어난 것은, 할 수 없이 생긴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제는 이 신앙으로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걸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신앙만 있을 때는 진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진리에 따라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진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 즉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 신앙과 사랑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신앙과 사랑의 분량이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보다 사랑이 더 많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신앙이 더 많습니다. 전자의 사람을 우리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21번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성향, 곧 머리가 먼저 반응하는지, 아니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지를 잘 살피면 나중에 나는 어떤 천국으로 가게 될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양치는 자 ‘아벨’은 사랑, 즉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이었고, 농사짓는 자 ‘가인’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고교회 안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교회 안에도 사랑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고, 신앙으로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신앙보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뚜렷하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보다는 신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뚜렷하다,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즉 가인과 아벨이 주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3절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난 후에‘는 가인과 아벨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했을까요? ‘가인’, 즉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더 나빠졌고,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로 사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만약 그러지 않고 ‘신앙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게 되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어 영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사랑의 상태’로 나아간 사람은 신앙이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는데요, 왜냐하면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의 수준에 맞는 진리, 즉 신앙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체어리티로 사는 아벨은 영적으로 성장했고, 신앙으로 사는 가인은 영적으로 쇠퇴했습니다. 그 결과가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나타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제물’은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이 드린 제물입니다. 반면 ‘양의 새끼로 드린 제물’은 이웃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셨다기보다 받으실 수가 없었다가 맞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진리를 믿는다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진리에 따라 그렇게 살지는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위선자의 삶이지요. 그러니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애, 체어리티의 삶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다음에 헌금과 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러니까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살다가 예배를 드릴 때만 경건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5:23-24)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1:11-12)
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제물을 안 받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조금 있는 사랑마저 식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안색을 붉힐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주님께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내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의 양심을 통해 그의 사랑이 식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 양심이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걸 바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느낌은 주님으로부터 양심을 통해 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안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걸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원망의 마음이 커서 양심의 경고를 무시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8절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랑 없이 신앙만의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 즉 체어리티를 모두 잃어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신앙’, ‘신앙’, ‘교리’, ‘교리’하며 마음이 돌덩어리같이 딱딱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그동안 여러 시대의 교회, 곧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가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회입니다. 모든 교회는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도 그랬고,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오늘날 기독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앙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앞에 세 교회 시대처럼 이 기독교회도 교인들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은 높이고, 삶은 등한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신앙과 삶을 분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 곧 ‘오직 믿음’의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 물론 이는 마틴 루터 당시 극도로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반발, 저들의 엉터리 같은 ‘행위’를 극단적으로 고발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이번엔 완전 반대쪽 극단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사랑을 죽이는 일이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아담교회라고도 하는데요, 이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렇게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순수한 지각을 통해서 주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진리는 선이 있는 진리였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 또는 진리와 선이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떠나는 모습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고, 진리와 선을 분리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먼저 신앙, 그러니까 진리를 주시고, 각자의 신앙에 따라 그다음에 사랑, 그러니까 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인애의 선을 만들어주신다. (계시록의 속뜻 935, 이순철 역) the Lord produces the goods of charity with a man according to the state of truth with him. (AR.935)
그것을 본문에서는 ‘하와가 먼저 가인을 낳고 그다음에 아벨을 낳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교회가 되었든 개인이 되었든 ‘신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런 신앙을 ‘앉은뱅이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사랑의 단계로 나아갔다가 후퇴해서 다시 신앙의 단계로 내려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잘못하면 내면에 있는 사랑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습관이 있으면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가지고 있던 사랑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어떤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벨의 예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인의 예물을 가지고 온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올 한 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철저히 회개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분들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음속에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 심장이 뛰는 모든 성도에게 주님의 그러한 풍성한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