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고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사45:24)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이로부터 ‘분노’(anger)는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번호는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왜 말씀에서는 ‘분노’와 ‘진노’와 ‘격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하나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이미 떠난 상태가 드러나고 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인정되며,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고, 이제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나타난 뒤 마침내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자연적인 분노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와 악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7이 직접 다루는 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악한 상태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나타날 때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그의 분노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내 것은 받아 주지 않으셨다’는 형제간의 질투를 넘어섭니다.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노를 살필 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분노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의 교리적 위치와 명예와 판단인지 자기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랑과 선도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가 다릅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 질서가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같은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과 그분의 질서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57은 말씀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진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하며,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이러한 외관에 따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속뜻에서는 악의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시78:49-50을 인용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인용 직후 이것을 직접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 인용은 단순한 보조 구절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라는 말씀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45:24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노하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야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이 두 표현을 통하여 실제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는 말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악한 영을 불러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성질에 따른 영적 결합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같은 성질의 사랑이 서로 결합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와 기만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수록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악을 제한하시고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가운데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허용되는 것과 주님께서 악 자체를 만들어 보내시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78:50의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이 악의 결과나 심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그 결과의 원인을 주님의 보복적 분노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가인의 분노로 돌아옵니다. 창4:5에서 먼저 분노하는 분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반발합니다. 앞의 AC.352-354에서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57에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무엇이 신앙과 삶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서로 반대되는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57 마지막에서 ‘분노’가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결론은 이 번호 전체를 압축합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자리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분노를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인가, 아니면 내 뜻과 명예와 판단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57은 동시에 주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며,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자기와 같은 악과 결합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변함없는 주님의 질서조차 자기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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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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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계속 관계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여기서는 떠난다고 하는가?’

 

먼저 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 ‘사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주변에 있으면서 영향력만 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제 어떤 악한 영도 전혀 접근할 수 없으며 악의 영향 가능성 자체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 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 바로 그 뒤에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 ‘악한 영들이 지배권을 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 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 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어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 그 교리를 AC.63 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 ‘그러므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 밖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 첫째, 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는가, 몇 미터 밖으로 물러나는가?’ 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 영들의 세계에서 ‘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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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이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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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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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그 안의 욕정과 거짓을 빨리 없애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으며 악한 영들까지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먼저 AC.59 자체가 제시하는 이유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욕정과 거짓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좋은 것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오면서 자기 것으로 획득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악한 욕정이 지배해 왔다면 욕정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은 몸에 묻은 먼지처럼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제 삶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순간에 제거하여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59의 방향은 분명히 ‘개혁’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한 영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허락하신다’와 ‘뜻하신다’입니다. 악한 영들의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성질에 따라 사람의 욕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용이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AC.59은 그렇게 자극된 욕정들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결국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개혁하시고 선을 향해 이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정을 자극하게 하시는가, 자극된 욕정이 왜 느슨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AC.59은 그 세부적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빈칸을 너무 빨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욕정이 드러나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을 자기 것으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AC.59이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시험에 관한 다른 AC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더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데까지 가면 충분합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의 획득된 생명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여러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도 피해야 합니다. ‘악이 즉시 없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AC.59의 주제 자체가 ‘전투’입니다. 악이 즉시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이 실제 전투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이전의 욕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 ‘나는 전혀 거듭나지 않았구나’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9의 설명대로라면 거듭남의 과정 자체에 옛 생명과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욕정도 주님께서 아직 남겨 두신 것이니 괜찮다’며 합리화해서도 안 됩니다. 욕정은 여전히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또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 악을 당장 없애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목회 원칙이나 교육 원칙이 AC.59에서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적 섭리의 방식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AC.59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이 아시면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얽혀 있는 악과 거짓을 단순히 잘라 내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악한 의도조차 주님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그들의 미움이 주님의 목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C.59에서 ‘악한 영들이 허락된다’는 놀라운 말을 읽을 때 악한 영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중심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작용 가운데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옛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시는 주님이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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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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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모든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전투에 놓이게 되며,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 불립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 결과 욕정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되며, 이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이 전투의 시기 동안, 사랑과 신앙,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시는데, 이는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음식은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 주님께서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즉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전투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누구도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뒤이은 글들에서 계속 설명될 것입니다. 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9는 바로 앞 AC.58에서 남겨 둔 질문에 답합니다. AC.58은 같은 사람의 자연적인 것들에게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이 음식으로 주어진다고 했지만,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AC.59는 바로 그 이유를 거듭남의 ‘전투’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계속 전투에 종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투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와 싸우는 외적인 전쟁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 그리고 그것들을 자극하는 악한 영들과 관련된 거듭남의 전투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대목부터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듭남을 ‘나쁜 사람이 점점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과정은 훨씬 더 격렬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욕정들에서 거짓들이 생겨납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 기존의 생명과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선과 진리 사이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욕구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59에서 말하는 욕정은 거짓을 낳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소망이나 즐거움을 곧바로 ‘욕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거듭나기 전에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아무 가치 없는 악이다’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정죄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은 거듭나기 전 사람이 획득해 온 생명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해 온 삶이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실까요? AC.59의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욕정과 거짓이 한순간에 없어지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악이 인간의 본래 생명이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이 거듭남에 꼭 필요한 좋은 재료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온 생명의 상태를 한순간에 없애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기존 인간을 순간적으로 소멸시키고 전혀 다른 인간을 그 자리에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용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악한 영들을 보내어 사람을 악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단어는 ‘허용된다’(are suffered)입니다. 악한 영들의 작용은 주님의 선한 작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욕정들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느슨해집니다’(loosened). 마침내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을 정도가 되고, 그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여기서도 주어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합니다. 욕정들이 느슨해지는 과정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선으로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의 활동과 주님의 활동을 같은 종류의 작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악한 영은 자유로운 선택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하다’, ‘욕정이 올라오지 않으면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없으므로 거듭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완성된 이론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들의 유입, 시험의 질서는 AC 전체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59가 직접 밝히는 것은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이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져 주님께서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을 사용하신다’는 말과도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선한 것으로 만드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악입니다. 다만 악한 영들의 활동을 무제한으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허용의 범위 안에 두시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방향입니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악한 영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선과 진리만이 참으로 선하고 참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영들이 전투 중인 사람에게 남겨 주는 음식은 ‘채소와 풀의 푸른 것’에 비유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AC.58에서 왜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그렇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한 AC.59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채소와 풀의 푸른 것’을 ‘삶이 단조롭고 메마르며 겨우 버티는 심리 상태’라고 구체적으로 번역해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AC.59는 그런 심리적 묘사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투 중 악한 영들이 사람에게 그것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남겨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도 다른 음식을 주십니다. ‘씨 맺는 채소’와 ‘열매 있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설명합니다.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AC.57에서는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영적 음식과 관련하여 설명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전투 중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시는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같은 자연적 표상이 언제나 단 하나의 문장으로만 정의되는 기계적인 상징 사전을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음식을 ‘간헐적으로’ 주십니다. AC.59은 왜 항상 평화 상태를 유지하게 하지 않으시는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너무 편안해지면 거듭남이 중단되기 때문에 평화를 일부러 거두신다’거나 ‘다시 전투할 힘을 주기 위한 휴식 시간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전투 가운데서 주님께서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 기쁨과 즐거움을 간헐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거듭남의 전투를 매우 어둡게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전투가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것이 같은 문단 안에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기울이시고 평온과 평화도 주십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더욱 강한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은 즉시 멸망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영의 세계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주님은 가끔 위험할 때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59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의 보존 자체가 지속적인 주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이례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직접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는 당시 이미 여러 해 동안 육체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해 왔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용되었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머리카락 하나도 해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정말 문자 그대로 수천의 영들을 경험했다는 뜻인가?’,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도 이런 영적 경험을 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AC.59 본문의 의미를 넘어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독립적인 문제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AC.59 자체에서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비유나 상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 사실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을 해설하면서 이 대목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로 바꾸는 것도 본문에 충실한 독법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경험을 가지고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을 혼자 이겨 낸 영적 거인’이라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강해서 견뎠다고 하지 않고 ‘주님의 보호 아래서’ 안전했다고 말합니다. AC.59의 주인공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능력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해의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견뎌야 하는 전투에 관하여 충분히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개인 간증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전투와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절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이런 주제를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말한다고 해서 누구든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그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진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주어진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9의 직접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한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이런 낯선 영적 현실을 충분히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뒤에서 더 구체적인 사항들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우리에게도 AC.59를 읽는 좋은 방법을 보여 줍니다. 악한 영, 욕정의 자극, 영적 전투, 수천의 영들과의 경험 같은 말을 한꺼번에 완전한 영계 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세부 사항은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지금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구조는 이렇습니다. 거듭남 가운데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사람은 전투를 겪습니다. 거듭나기 전 그를 지배하던 욕정과 거짓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으로 기울이실 수 있게 됩니다. 전투 중 악한 영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간헐적으로 평온과 평화,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AC.59의 중심을 ‘왜 악한 영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신정론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나는 사람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허용하시고 보호하시며 선으로 이끄시는가?’라는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을 인간의 자기계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욕정을 찾아내어 자기 힘으로 재배열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전투는 실제로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겪습니다. 그러나 욕정을 선으로 기울이시는 분도 주님이고, 전투 중 평화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며, 매 순간 사람을 보호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마지막 무게중심은 인간의 싸움보다 더 깊은 곳, 곧 싸우는 인간을 한순간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호에 있습니다.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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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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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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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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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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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두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의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영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늘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의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두 영과 두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한 명’,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한 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천사와 두 영이 있으므로 내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과 두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영과 두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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