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 심화 1)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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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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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심화

1, ‘신앙에서 체어리티가 태어난다는 말은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낮다는 뜻인가?’

 

AC.429에서 처음 읽는 독자가 특히 멈칫할 만한 표현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태어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설명을 단순히 ‘어느 쪽이 먼저인가’라는 순서의 문제로만 읽으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우열이 아니라, 라멕이 소멸시킨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이번 번호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은 ‘한 사람’과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신앙으로 풀이하고, ‘어린아이’를 체어리티로 풀이합니다. 이어 신앙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은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도 함께 부인하고 죽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표현은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서로 다른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삶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예는 AC.429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지,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모든 단계를 상세히 구분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는 체어리티가 신앙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라멕의 고백에서 신앙을 죽이는 일은 체어리티를 죽이는 일과 함께 나타납니다. 신앙의 소멸을 말하면서 체어리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번호를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서 반드시 신앙이 시간적으로 먼저 생기고 체어리티가 나중에 생긴다는 공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29는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전체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가인과 아벨의 해설, 그리고 이어지는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한 문장의 표현을 떼어 내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분명합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알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실패를 곧바로 라멕의 ‘소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황폐의 상태입니다.

 

결국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은 체어리티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AC.429에서는 신앙을 부인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그 신앙에서 태어나는 체어리티의 소멸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고 한 말이 왜 교회의 황폐를 나타내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AC.429 심화 1)

 

 

 

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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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6 심화

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과 ‘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레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그 일 가운데 아직 내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C.레6 심화 1)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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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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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는 ‘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를 ‘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삶’,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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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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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

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가장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자가 권세를 통하여 추구하고 부자가 재물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실제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AC.452는 AC.450-451에서 계속되어 온 ‘천국에서의 높고 낮음’이라는 주제를 그 내적 핵심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AC.450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공상을 바로잡았고, AC.451에서는 세상의 권세가 영계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AC.45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천국에서 참으로 큰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능력을 일부러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신의 높음과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바라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가장 큼’의 기준 자체가 세상과 달라집니다.

 

특히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 그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큰 권세에서, 부자는 더 많은 재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천국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큰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겉모습만 낮아졌을 뿐 내적 목적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역시 천국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조차 자기 높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천국적 상태는 무엇인가?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자체가 자기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자신의 위치가 낮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과 행복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라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칭찬받기 위해 돕거나, 인정받기 위해 섬기거나, 훗날 보답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면 아직 자기 자신이 목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국적 쓰임은 상대방의 선을 그 자체로 기뻐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52는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가?’라는 질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사랑으로 그 행복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막9:35)이 가리키는 천국의 질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AC.452 해설)

 

 

 

AC.453, 창5 앞, '천국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3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거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은 단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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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창5 앞, '천국에서는 무엇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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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6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의 기쁨이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다른 어떤 활동도 없이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 자체가 곧 활동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기를 원하시며, 그들은 그것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행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조차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과 같은 삶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그러한 삶이 모든 삶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삶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되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The best instructed of them all said that heavenly joy consists solely in praising and glorifying the Lord, being a life destitute of any doing of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this is an active life. But they were told that praising and celebrating the Lord is not such an active life as is meant, but is an effect of that life; for the Lord has no need of praises, but wills that they should do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it is according to these that they will receive happiness from the Lord. But still these best instructed persons could form no idea of joy, but of servitude, in doing these goods of charity. But the angels testified that such a life is the freest of all, and that it is conjoined with happiness unutterable.

 

해설

AC.456은 지금까지 나온 잘못된 천국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하게 보이는 생각을 다룹니다. 앞에서는 천국을 편안히 쉬는 곳이나 찬란한 빛 가운데 머무는 곳으로 생각했다면, 여기서는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천국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찬양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는 것과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것을 서로 분리하여 전자만을 천국의 활동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이 이들을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은 천국이 단순한 휴식이나 감각적인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을 주님을 향한 찬양과 영화롭게 함에만 한정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는 실제 삶은 그 중심에서 제외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삶,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라는 말이 AC.456의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이것은 찬양의 가치를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찬양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 안에 들어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그 삶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천국적 삶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삶에서 피어나는 고백이며 기쁨입니다.

 

특히 ‘주님은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상당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찬양이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이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의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찬양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찬양이 참된 찬양이 되려면 예배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단지 주님을 높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56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합니다. 찬양을 오래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뜨겁게 주님을 찬양하였더라도 그 예배가 이후의 삶에서 용서와 정직과 섬김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 삶’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을 들으면서도 거기에서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오해를 보여 줍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고 섬기는 것은 의무와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느낍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이 ‘모든 삶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삶’이며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되어 있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AC.456은 ‘찬양이냐 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의 참된 질서를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며, 그 삶에서 다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예배와 천국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 사랑의 삶은 다시 주님을 향한 찬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으로 자신의 영광을 채우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천국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AC.456 해설)

 

 

 

AC.457, 창5 앞, '천국의 행복은 왜 사람마다 똑같지 않은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7 이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거의 모든 사람은 지옥은 누구에게나 똑같고 천국도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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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5, 창5 앞, '찬란한 빛 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천국의 기쁨이 될 수 없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5세상에서 말씀에 관하여 매우 많은 것을 배웠던 어떤 사람은 천국의 기쁨이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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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4

어떤 사람들은 천국이 안락하게 쉬는 삶, 곧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삶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히 쉬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기 자신의 행복에 종속시키기를 원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이것을 원한다면 아무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은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게으른 삶이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활동적인 삶 외에는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삶은 쓰임(use)과 체어리티의 선(goods of charity)에 있습니다. 천사들은 세상에서 오는 영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 사람들에게 쓰임이 되는 일, 사람들 주위에 있는 악한 영들이 정해진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불어넣는 일, 죽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는 일, 그리고 그 영혼들의 상태가 허락한다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보다 더 큰 행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Some think that heaven consists in a life of ease, in which they are served by others; but they are told that there is no possible happiness in being at rest as a means of happiness, for so everyone would wish to have the happiness of others made tributary to his own happiness; and when everyone wished this, no one would have happiness. Such a life would not be an active life, but an idle one, in which they would grow torpid, and yet they might know that there is no happiness except in an active life. Angelic life consists in use, and in the goods of charity; for the angels know no greater happiness than in teaching and instructing the spirits that arrive from the world; in being of service to men, controlling the evil spirits about them lest they pass the proper bounds, and inspiring the men with good; and in raising up the dead to the life of eternity, and then, if the souls are such as to render it possible, introducing them into heaven.

 

이 모든 일로부터 천사들은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을 지각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주님의 형상이 되며, 이와 같이 이웃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천국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누리는 행복은 쓰임 안에(in use), 쓰임으로부터(from use), 그리고 쓰임에 따라(according to use) 있으며,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에 따라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이 편안하게 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들으면,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삶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를 지각하도록 허락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러한 삶이 지극히 슬픈 것이며 모든 기쁨을 파괴하는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싫어하고 역겨워하게 될 것임을 지각합니다. From all this they perceive more happiness than can possibly be described. Thus are they images of the Lord; thus do they love the neighbor more than themselves; and for this reason heaven is heaven. So that angelic happiness is in use, from use, and according to use, that is, it is according to the goods of love and of charity. When those who have the idea that heavenly joy consists in living at ease, idly breathing in eternal joy, have heard these things, they are given to perceive, in order to shame them, what such a life really is, and they perceive that it is a most sad one, that it is destructive of all joy, and that after a short time they would loathe and nauseate it.

 

해설

AC.454는 천국의 기쁨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원히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수고와 피로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처럼 상상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천국의 안식과 전혀 다른 것으로 봅니다. 천국의 안식은 활동의 중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와 갈등이 사라진 가운데 사랑으로 기쁘게 활동하는 상태입니다.

 

본문 첫 부분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섬김만 받는 삶이 행복일 수 없는지를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 나를 섬김으로써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누구도 참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에 쓰임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의 행복이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삶은 ‘쓰임과 체어리티의 선’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쓰임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한다거나 계속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실제로 그 선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활동과 사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쓰임으로 나타나고, 쓰임은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쓰임을 매우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새로 영계에 온 영들을 가르치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이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불어넣으며, 죽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일을 의무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에서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존재의 생명과 행복에 쓰임이 되는 것 자체가 그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특히 ‘이와 같이 그들은 주님의 형상이 된다’는 표현은 쓰임의 가장 깊은 근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모든 존재에게 생명과 선을 주시며 그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선을 바라며 쓰임의 삶을 살 때, 그들은 주님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는 형상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이웃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천국이 천국이다’라는 말은 천국의 본질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누리는 행복은 쓰임 안에, 쓰임으로부터, 쓰임에 따라 있다’는 문장은 AC.454의 핵심 문장입니다. ‘쓰임 안에’ 있다는 것은 천사의 행복이 실제 쓰임의 활동 가운데 있다는 뜻이고, ‘쓰임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그 행복이 사랑이 실제로 흘러나가 이웃에게 선이 되는 데서 생긴다는 뜻이며, ‘쓰임에 따라’ 있다는 것은 그 쓰임 안에 담긴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의 질에 따라 행복의 질도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나중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쓰임 자체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결국 AC.454는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원한 휴식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은 처음에는 편안해 보일 수 있지만 곧 생명과 기쁨을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천국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끊임없이 쓰임으로 흘러가며, 그 흐름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영원히 쉬는 곳’이라기보다 ‘사랑으로 기쁘게 쓰임이 되는 곳’이며, 천국의 안식은 활동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수고가 사라진 가운데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안식인 것입니다. (AC.454 해설)

 

 

 

AC.455, 창5 앞, '찬란한 빛 속에 있는 것만으로는 천국의 기쁨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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