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선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도 없습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AC.112는 앞의 AC.110-111에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여러 구별을 매우 간결한 질서로 정리합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네 관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신앙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계속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이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말은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AC.107). 참된 지혜는 사랑과 분리되어 머리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은 없다’는 말은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AC.110과 연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랑,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떨어진 여러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과 진리도 같은 구조 안에 있습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AC.110에서 금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 설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단순한 도덕적 행동과 정확한 지식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이 있고, 진리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AC.112는 앞의 AC.111에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의 상태를 왜 문제 삼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매우 정교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나 사실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모두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AC.112가 보는 것은 그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 하는 근원과 질서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의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표현을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는 모든 지식이나 이성적 사고, 또는 자연적인 선행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것들을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구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112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바깥에서 알려 주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신앙의 근원도 주님이시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고 선해지는 것은 자기 안에 주님과 별개의 또 하나의 선과 지혜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112의 반복되는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는 그래서 단순한 교리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앞에서 에덴으로부터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이 동산을 적셨던 것처럼, 이제 그 생명의 흐름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름은 인간에게 붙고 그 지혜와 지성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 근원의 질서를 놓치지 않는 것이 AC.110-112의 여러 세밀한 구별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AC.112 해설)

 

 

 

AC.113, 창2:11-12,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말씀에서 ‘금’(gold)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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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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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이 ‘동쪽’(east)이시기 때문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표상적 유대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AC.101은 AC.98에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고 한 것을 에스겔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선지자는 ‘동쪽을 향한 문’으로 인도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동쪽’을 주님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AC.98의 ‘동쪽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라면, ‘동쪽’은 그 사랑과 지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은 AC.98-99에서 계속 설명한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표상적 유대교회의 한 관습을 언급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 자체에 어떤 독립적인 거룩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향이 주님을 표상했다는 점입니다. ‘동쪽’을 향한다는 외적인 행위는 그 표상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내적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 관습은 말씀 안의 ‘동쪽’과 예배의 표상이 서로 같은 중심, 곧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AC.98-101의 흐름을 보면 ‘동쪽 에덴동산’의 세 요소가 하나씩 분명해집니다. ‘동산’은 지성이고, ‘에덴’은 사랑이며, ‘동쪽’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 전체가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1 해설)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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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은 사랑을, 동산은 지성을 뜻함을 보여 주는 이사야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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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삼위 가운데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일체는 그 한 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고, 그 셋을 다시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한 분 하나님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 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삼위일체는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구별은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신 신성을 가리키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 오셔서 취하시고 영화하신 신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과 천사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말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주님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스베덴보리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4와 AC.15는 따로 떼기보다 서로 이어서 읽을 때 스베덴보리의 의도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성육신 이전과 이후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신성 자체는 영원부터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나 임시적인 육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세를 받은 피조된 중개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사람의 영혼과 몸과 활동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이 하나 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성 자체와 신적 인간과 발출하는 신성은 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가 한 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4에서 왜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적용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삼위 가운데 ‘성자’라는 한 위격만을 선택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부를 지나쳐 성자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를 따로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 단계처럼 통과하는 구조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한 분만을 골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4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선언은 성부와 성령을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드는 선언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간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선은 세 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으며, 그분에게서 모든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옵니다. (AC.14 심화 1)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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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 그 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 자체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in its own way) 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 그 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 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 심화 2)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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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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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의 어떤 단어를 신적 진리라고 번역한 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 말한 신적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적 진리가 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 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 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 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 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 심화 4)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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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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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 여기고, 그러한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에서 창1:3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로 앞 AC.17-19에서는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고, 깊음이 있으며, 그럼에도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 위에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빛’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빛은 사람이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얻어 낸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던 주님에게서 오는 첫 영적 빛입니다. AC.19에서 아직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던 것이 AC.20에 이르러 비로소 빛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높은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사랑을 지지하는 것을 진리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사람에게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준으로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악인 것을 선이라 하고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시작은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데서보다 ‘내가 지금까지 선이라고 여긴 것이 정말 선인가?’라는 새로운 분별이 시작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처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즉시 자기의 모든 악을 보고 완전히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의 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인정과 칭찬을 원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공로를 마음속에 붙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AC.20의 직접적인 정의라기보다 그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을 그대로 선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 판단 자체가 흔들리고 참된 선의 기준이 자기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최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두 번째 인식이 열립니다.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AC.20의 두 인식은 서로 연결됩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의 빛은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도덕적 성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빛이 깊어질수록 그 인식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요8:24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문장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AC.20에서 지나치게 넓은 구원론이나 특정 교리의 증명 구절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빛이 결국 주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향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요1:1, 3-5, 9의 인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요8:24가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요1의 말씀은 왜 주님이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신지를 밝히는 데 사용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에서 생명과 빛이 주님 안에 있으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말씀은 빛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AC.16에서 시작된 ‘새 창조’의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새 창조에서도 생명과 빛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특히 Potts 본문에 포함된 요1:5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AC.17-20의 흐름에서 의미가 선명합니다. 앞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고, 이제 그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모든 표현이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요한복음 구절들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주님이 생명 자체, 곧 선 자체이시며, 빛 자체, 곧 진리 자체이시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참된 선도 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빛이 있으라’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AC.20의 ‘첫 번째 상태’를 AC.7의 첫 번째 상태와 서로 다른 두 체계처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거듭남의 전체 여섯 날을 개괄하면서 첫 상태를 ‘유아기에서부터 거듭남 직전까지의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로 설명했고, AC.20은 이제 창1:3의 실제 본문을 따라 그 첫 빛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갑자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로 여기던 상태에서 깨어나 선과 진리가 자기보다 높은 것이며, 더 나아가 그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20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거듭남의 매우 작지만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사람은 아직 많은 싸움을 앞두고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알지 못했지만 이제 빛이 비치면서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니었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의 첫 빛은 결국 자신을 더 선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빛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하는 빛입니다. (AC.20 해설)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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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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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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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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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와 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가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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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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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는 창세기 1장의 개별 표현을 해설하기에 앞서,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용어 하나를 분명히 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이름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후 AC를 읽다가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나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별도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선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오직 그분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린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14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신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이어지는 AC.15와 이후 주님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보아야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주님’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만으로 이 명칭을 정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을 주님 자신이 옳다고 확인하신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따라서 AC.14의 논지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호칭은 주님 자신의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인간의 거듭남, 천국, 교회,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언급합니다. 그때마다 막연한 신적 원리나 이름 없는 절대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앞의 AC.7-13에서 거듭남의 여러 상태를 살펴본 직후 이 선언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14는 짧지만 이후 전체 저작의 독법을 정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 중개자 가운데 한 분이 아니며, 온 천국이 인정하고 경배하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이 짧은 단락 하나에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이 이어지고, 이후 관련 가르침들이 점차 펼쳐집니다. AC.14에서는 먼저 이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됩니다. 앞으로 AC에서 말하는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AC.14 해설)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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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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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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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 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곧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AC.2는 AC.1의 선언을 한층 더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으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범위를 더욱 분명히 하여,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이것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거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에는 속뜻이 있고 어떤 부분에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훨씬 철저합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심지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숙고란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C.1이 ‘말씀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선언했다면,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있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의 근원, 곧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여기서 AC.2의 중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생명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단지 오래 살아남은 종교 문헌이라는 데 있지 않고, 문장이 아름답거나 인간에게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의 가장 깊은 지향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에게서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주님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 하고,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구절의 문자적 표면에 주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족보와 역사, 율법과 전쟁, 지명과 숫자처럼 겉으로는 주님과 직접 관계없어 보이는 표현들까지도 내적으로는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속뜻을 따라 읽어 갑니다.

 

그러므로 AC.2는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AC 해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왜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까지 그렇게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생명은 일부 유명한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그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의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1에서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는 문을 열었다면, AC.2에서는 왜 그 비밀들이 말씀의 가장 작은 것에까지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AC.2 해설)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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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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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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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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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일반적으로 말해 그 안의 모든 것이 단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곳곳에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외적인 것들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드러내시고 설명하셨는데,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하므로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고, 낙원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AC.1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여는 첫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곧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독자가 앞으로 말씀을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구약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잘못되었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가 문자에서 출발합니다. 다만 말씀은 문자에 보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 외적인 것들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 AC.1의 첫 선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이야기나 몇몇 특별한 예언에만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앞으로 AC에서 인물과 장소뿐 아니라 이름과 숫자와 방향, 행동과 반복되는 표현까지 세밀하게 다루게 되는 출발점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 가운데 몇몇 부분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교훈이 아니라, 그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첫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을 인간의 내면이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을 말하고, 이어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앞으로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동산, 가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등이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로 열리더라도, 그 속뜻의 중심에서 주님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말씀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관하여 무엇을 담고 있는가?’라는 방향이 AC.1에서부터 주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적인 것의 존재가 전혀 낯선 주장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이미 밝혀 주신 예들을 듭니다.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하며, 낙원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희생 제사는 실제 의식이고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실제 장소이지만, 말씀 안에서는 그것들이 그 외적 대상에만 머물지 않고 내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AC.1은 아직 그 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이것이 ‘상응’과 ‘표상’이라는 거대한 말씀 이해로 펼쳐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첫 번호에서는 상응의 체계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외적인 것 안에 내적인 것이 있다는 첫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문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행 해설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층위’라는 말을 사용했고, 바로 그 때문에 기존 심화 2와 심화 3이 생겼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AC.1 원문이 직접 ‘degree’나 ‘gradus’를 사용하여 말씀의 의미들을 단계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층위’는 우선 외적인 것과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동일한 평면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의미의 더 정확한 관계는 이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에서 독자가 먼저 붙들 것은 복잡한 상응표나 의미의 단계 체계가 아닙니다. 구약의 겉 글자 안에는 문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무엇보다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천국과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및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언 하나를 먼저 세운 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하나씩 열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은 이후 10,837개 번호 전체를 읽게 하는 첫 문이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는 대작이 왜 쓰였는지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해 놓은 서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 해설)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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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 2, ‘층위’란 무엇인가?

AC.1 심화2. ‘층위’란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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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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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심화4. ‘신적 진리’(Divine Truth)란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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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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