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offering not being looked to) 것은 앞에서와 같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그의 안색이 변했다(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분노(anger)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하고, 안색(faces) 내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들이 변할 안색이 떨어졌다(fall) 말합니다. ByCain,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offering not being looked to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anger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faces,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fall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와 예배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차이가 드러난 가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로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을 단순히 한 개인이 화를 냈다는 심리 묘사로 읽지 않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교회적 상태의 변화로 읽습니다.

 

먼저 AC.355가인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중요한 표현 하나를 덧붙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생활상의 부족보다 더 깊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충분한 체어리티를 보이지 못하는 것과,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도 여전히 참된 신앙일 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원리로 정당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의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처음에는 단순한 구별이었는데 나중에 분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구별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AC.338에서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데서 나타납니다. AC.347이 처음의 가인 교리가 후에 이른 상태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 것도,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그렇게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흐름은 정상적인 구별이 자동으로 악이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독립성이 인정되고 그 분리가 점점 멀어져 마침내 분리 자체를 허용하는 교리로 굳어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도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의미했고, AC.354에서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아벨의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화가 나셔서 그의 제사를 거부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이 아벨에게는 열리고 가인에게는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서로 다른 것은 인간 쪽의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된 예배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흐를 수 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AC.355는 이 분노체어리티가 떠났음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한다는 일반적인 심리 공식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분노는 체어리티가 더 이상 그 안에서 살아 있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독립성과 우위를 주장할수록 체어리티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가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단순히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서운함보다 훨씬 깊은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언제나 악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불의와 악을 보고 일어나는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고, 자연적인 인간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AC.35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일반적인 감정론이 아니라 가인의 속뜻 안에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여 사람이 화를 냈으니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에서 신앙이나 교리적 확신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밀어내면서 분노와 적대감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영어 원문의 his faces falling은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들이 떨어졌다는 표현인데, 스베덴보리는 얼굴들(faces)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굴에 관한 상응을 AC.355보다 지나치게 앞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결론을 붙드는 것입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의 떠남은 단지 외적인 태도 하나가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이 그 내적인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내적인 것이 변하면 얼굴이 떨어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55는 가인의 진행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교리나 예배의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신앙에서 죽은 행위가 나오며, 그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분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뒤집는 것이 단지 머릿속의 신학적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붙들고 살아갈 때 애정과 의지의 방향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적인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아벨을 실제로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AC.338부터 이 지점까지를 연결하면 그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본래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에서 더욱 멀리 분리되고, 마침내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는 교리까지 형성됩니다. 그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오고 예배도 이루어지지만 체어리티가 없으므로 그 행위와 예배에는 내적 생명이 없습니다. 이제 AC.355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창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아무런 내적 과정 없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AC.355는 교리와 삶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교리의 오류가 모두 즉시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불완전하게 알고도 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가 악한 삶을 정당화하거나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며, 그러한 분리를 계속해서 옳다고 확증하게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교리는 우리가 무엇을 참이라고 여기고 무엇을 선이라고 판단하는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거짓된 질서는 결국 애정과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가인의 교리가 위험한 것은 단순히 한 문장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는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점은 더욱 중요합니다. 가인은 종교를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인 예배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그 안에서는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으며 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언제나 바르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알수록 그 진리가 나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있는지, 이웃의 선을 기뻐하게 하는지, 자신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다면 진리는 자기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바르게 행해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빛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있는가를 체어리티의 유일한 심리적 척도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많이 느끼는 상태보다 깊습니다. AC.351에서 보았듯 그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감정 표현의 정도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방향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AC.355 마지막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아직 아벨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했고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드러났지만, 4:6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이것은 다음 AC.359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지만, 이미 중요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상태가 악해지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시고 경고하시며, 악이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AC.355의 어두운 변화는 주님의 부르심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더욱 절실해지는 지점입니다.

 

결국 AC.355의 중심은 가인이 화를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체어리티가 떠났고,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그 분리가 교리적으로 허용되며, 그 상태에서 행위와 예배가 계속될 때, 결국 체어리티 자체가 밀려나고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됨은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은 실제 이웃의 선을 위한 삶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AC.355는 아벨이 죽기 직전, 가인의 얼굴이 먼저 변했다는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소멸은 언제나 외적인 행위 이전에 내적인 질서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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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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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벨(Abel) 그의 제물(offering)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Abel,and his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벨이라는 개인이 가인보다 더 사랑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적 상태와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AC.349에서 밝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내적 생명으로 받아 그것을 표현한다면, 그 외적인 것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올바른 질서가 중요합니다.

 

AC.350-353은 바로 이 질서를 차례로 밝혀 왔습니다. AC.350아벨이 체어리티이고 떼의 처음 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개괄했습니다. AC.351은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설명했고, AC.352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기름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며,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살아 있는 까닭은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기분이 좋아지시고 가인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다는 식으로 인간의 변화하는 감정을 주님께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어떤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으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으로 표현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심돌아보지 않으심은 변하는 주님의 사랑보다 서로 다른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외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예배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더구나 곡식보다 동물 제물이 본질적으로 우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AC.348-349에서 살펴보았듯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의 제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것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예배가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벨의 예배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아벨에게 체어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가인보다 더 훌륭한 예배를 만들어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2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기름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이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란 인간이 자기에게서 좋은 것을 생산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고 그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선에 따라 살아가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사랑과 선의 생명을 자기 proprium에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다시 분명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 대신 체어리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을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예배와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올바른 질서를 이루는가입니다.

 

AC.354는 바로 다음 AC.355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4:4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고 했고, 4:5에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4에서 먼저 돌아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다음에 나오는 돌아보지 않으심을 주님의 거절이나 편애로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가 있고, 가인에게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내적 상태의 차이를 돌아보셨다돌아보지 않으셨다는 표현으로 드러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AC.354는 매우 간단하면서 깊은 기준을 줍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릇이 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되는지, 진리를 알수록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기 우월감보다 쓰임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라는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앙과 예배를 주님 앞에서 살펴보는 기준입니다.

 

결국 AC.354AC.350-353의 긴 설명을 매우 단순한 한 문장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처음 난 것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가 신앙과 행위와 예배에 생명을 주는 질서가 살아 있음을 뜻합니다. 참된 예배의 생명은 외적인 형식 자체에도, 인간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어 신앙과 예배 속에 살아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물이 표상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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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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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3

기름(fat)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29:13, 22; 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위에 있는 꺼풀과 콩팥과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 너는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위의 꺼풀과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29:13, 22)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3:3-4, 14)

 

8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같이 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8-9, 19, 26, 31, 35)

 

16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이라 했습니다. (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하였습니다. (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23, 25)

 

이유는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 ‘기름(fat)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fa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복으로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 기름진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 살진 (fatness)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 (light)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fatnessand thefountain of lives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river of deliciousnesses,andlight,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름진 (fat)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것인 열매들도 기름(fat)이라고 합니다. (18:12) where in like mannerfatdenotes the celestial, andlips of songs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소산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butter of kine), 양의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blood of the grape)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butter of kine,themilk of sheep,thefat of lambs,thefat of rams and goats,thesons of Bashan,thefat of the kidneys of wheat,and theblood of the grape,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천적인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자세히 풉니다. 첫 문장부터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롭고 좋은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속한 천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앞 AC.352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의 생명도 인간 자신의 선함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살펴본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낮추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은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특별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29장과 레3, 4, 8장에는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이 매우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문자만 보면 왜 이런 신체 부위의 기름까지 세세하게 구별하는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 기름들이 천적인 것과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번호만을 근거로 간의 기름은 정확히 어떤 사랑이고 콩팥의 기름은 또 어떤 선이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범위는 여러 종류의 기름이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그것들이 거룩하여 제단 위에 드려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기름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인 제사가 내적인 사랑과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AC.349에서 이미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인 사랑과 선에 있습니다. 자연적인 제물은 그 내적 실재를 담아 보여 주는 표상적 그릇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이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한 규례도 설명됩니다. AC.353은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성격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유대인 개인의 내면을 일률적으로 단정하는 말로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표상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일반적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을 인간이 자기 것으로 취하는 대신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한 규례는, 표상적으로 보아 천적인 선이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는 질서를 보존합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제사법에서 선지서와 시편으로 이동하여 기름진 이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55:2에서는 기름진 으로 영혼이 즐거움을 얻고, 31:14에서는 제사장의 마음이 기름으로 흡족해지는 것이 주님의 선으로 백성이 만족하는 것과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문자적인 지방이나 풍성한 음식만을 뜻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연이어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별개의 교리를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기름기름진 이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영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하나의 논증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6:8-9은 그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끊어진 두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비롯되는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인간의 신앙과 진리의 빛이 독립적인 자기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는 AC.353 첫머리의 선언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63:5에서도 기름진 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민18:12에서는 땅의 첫 열매까지 기름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했고, 여기서는 기름이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떼의 처음 것과 기름진 을 드렸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거룩한 것도 주님께 속하고, 그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의 선과 생명도 주님께 속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낸 선을 주님께 자랑스럽게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3]에서 신32:14가 인용되면서 AC.353은 한 단계 더 넓은 원리를 밝힙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에는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와 같이 매우 다양한 자연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각각이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353은 각각이 정확히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을 뜻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의 엉긴 젖은 이것’, ‘양의 젖은 저것’, ‘바산의 숫양은 이것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상응표를 더 만들어 붙이는 것은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이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붙들어야 할 더 큰 원리는 천적인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사랑’, ‘’, ‘체어리티라는 말을 하나의 단순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실제 삶에서 무수한 형태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을 위로하는 선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선, 어린아이를 돌보는 선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선, 진리를 가르치는 선과 말없이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선은 모두 선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은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AC.353이 직접 각각의 사례를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라는 원리를 우리의 삶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획일적인 하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각 사람과 공동체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무수한 형태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기름 = 사랑’, ‘ = 신앙과 같은 기본적인 대응을 아는 것은 유익하지만, 상응을 단순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53 자체가 기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천적인 것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세부 종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연물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다른 표상들과 함께, 어떤 교회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상응은 자연물에 영적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무수한 질서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자연계의 형상 안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신32:14의 표현들을 두고 속뜻이 없다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밀의 콩팥의 기름이나 포도의 와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3은 그러한 낯선 세부조차 말씀 안에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실재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문자적 형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열어 보여 줍니다.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오면 이 긴 설명의 목적이 선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며, ‘기름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선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은 내가 좋은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린다는 인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를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도 소산과 제물이 있었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체어리티와 사랑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자연적인 재료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단지 기름은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천적인 것이 사랑에 속한 모든 이며, 그 사랑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사랑에서 비롯될 때 살아 있고 천적이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 역시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예배를 충실히 드리며 많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사랑의 생명을 보여 줍니다.

 

 

 

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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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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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2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13:2, 12, 15). That thefirstlings of the flock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모든 것은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것까지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아들 중에 모든 처음 자를 대속하리니 (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의미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하여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자라 이스라엘 자손 모든 초태생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모든 처음 태어난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처음 난 것, 곧 장자가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첫째라는 사실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출13:2, 12, 15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것이니라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인간이나 짐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실재, 곧 모든 거룩함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번호의 중심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된 별개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하여 살펴본 문제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인간에게 실제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사랑의 최초 근원과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선을 끊임없이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행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체어리티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성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고 이만큼 선을 행했다는 자기 의보다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인정이 깊어지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벨이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도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가 드린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참된 사랑과 선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소유했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처음부터 주님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것은 여호와의 이라는 표상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적 질서입니다.

 

AC.352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다음이 시므온이며, 레위는 셋째입니다. 그런데 속뜻에서는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주님께서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성막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3:40-45; 8:14-20). AC.352가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내적 질서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적인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먼저다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사랑을 느끼고 언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가 하는 시간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온다고 해서 진리가 선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선과 사랑이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난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를 하나의 시간 공식으로 섞기보다, ‘외적으로 먼저 나타나는 내적으로 생명을 주는 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르우벤이 신앙을, 시므온이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신앙 행위 체어리티라는 자동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AC.35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먼저이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 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알고 바르게 행하도록 섬깁니다.

 

이제 AC.352 마지막의 중요한 주의 사항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에서 처음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장자라는 말이 나온다고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대입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는 표상에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반면 교회에서 생겨나는 처음 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처음 난 것이 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독립적이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가 가인의 길입니다.

 

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처음 의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분이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말합니다. 시편은 내가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말씀은 각각 별도의 장자론을 전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이 왜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하는지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13, 3장과 8, 89, 1장의 여러 인용은 모두 처음 것의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52는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가인의 길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는 길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리는 것은 떼의 처음 ’,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에는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붙들었다면, 아벨의 예배는 선과 사랑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두 제물의 차이는 단지 체어리티가 있느냐 없느냐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AC 공부와 신앙생활에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신앙과 체어리티, 퍼셉션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 위험에 놓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알수록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참된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식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참된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AC.352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 처음 것이 거룩한가?그것이 자연적인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인가?모든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시며 참된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가?자연적인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가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참으로 장자이신가?모든 사랑과 선과 거룩함의 처음과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장면은 결국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인정하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52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 안에서 발견하는 선과 사랑의 근원을 나는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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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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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1

아벨(Abel)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Abel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떼의 처음 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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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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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4:4)

 

AC.350

여기서 아벨(Abel)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fat, 기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Abel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firstlings of the flock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의 제물을 개괄하면서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 정반대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46-349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이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은 단순히 가인의 것보다 더 좋은 물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을 단순히 착한 사람’, 가인을 나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형제의 제물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예배에는 외적 행위와 제물이 있었지만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곡식과 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거룩한가가 아니라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입니다.

 

떼의 처음 에서 스베덴보리는 처음 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말은 AC.350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선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다면 그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면서, 그 선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처음 을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면서 내가 선하다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다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강조합니다. ‘처음 의 거룩함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선이라는 중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좋은 부분을 골라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과 사랑의 선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제물의 품질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AC.349의 핵심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의 아벨의 제물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리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이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며, 내적인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그 외적인 예배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문제는 외적인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도 이 질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떤 종류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바뀌어 아벨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가인에게는 호의를 거두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주님 쪽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쪽의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예배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원문의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예배를 드린 뒤 별도로 추가하는 선행 하나가 아닙니다.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웃에게 착하게만 하면 예배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체어리티 자체도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는 무엇이 참된 선이고 참된 이웃 사랑인지를 가르칩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결합되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 안에서 표현될 때 예배는 살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50은 신앙을 체어리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으므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체어리티에 기초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창4:3-4를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우열로 읽는 것은 속뜻의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곡식과 첫 열매 역시 거룩한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고기를 곡식보다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에 있지 않고 그것들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이 질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을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0에서는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행위 예배라는 기계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행위와 살아 있는 예배의 생명은 서로 다른 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자기 성찰의 기준이 됩니다. 예배의 형식과 말씀의 정확성, 기도와 찬송, 헌금과 봉사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의와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 안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더 많이 드린다는 뜻보다 내가 가진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양의 제물이 땅의 소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와 거룩함과 천적인 선의 근원 역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가장 깊은 차이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예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AC.350의 핵심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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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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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9

제물(offering)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모든 소산의 열매, 그리고 처음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offering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offerings,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offerings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offering in righteousness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sons of Levi,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days of eternity,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ancient years,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땅에 있어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and the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3:2-4, 20:40, 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 열매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3:10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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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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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fruit of the ground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 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땅은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fruitis no fruit, or that thework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bear fruit upward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fruit of excellence,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fruit of salvation,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돋게 할지어다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가인의 땅의 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그것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고, 이제 AC.34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가인에게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어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묻는 것은 행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어떤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이고 선해 보여도 신앙의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의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은 모두 겉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형태만 있을 뿐 그것을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AC.348 사람에게만 속한다는 말은 외적 행동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외적 행동이 내적 생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12:1-2, 4가 첫 번째 증거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외적으로만 보면 생명과 번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외적인 종교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입에 있는 신앙과 내적인 생명 사이에는 거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살아 있는 선의 열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적 상태에서 그 열매가 나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렘17:9-10과 미7:13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 사람에게 그의 길과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으십니다. 미가에서도 땅이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자동으로 좋은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과 거짓에서도 그것에 맞는 행위가 나오며, 말씀은 그것 역시 행위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외적 명칭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질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땅의 소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소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9과 시21:10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열매가 결국 멸망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모스에서는 위의 열매아래의 뿌리가 함께 언급됩니다. 여기서 AC.348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니며 결국 그 열매와 뿌리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와 열매의 이미지를 통해 행위에는 그것을 낳는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번호에서 뿌리를 특정한 영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지나치게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는 외적인 모양을 가지고 한동안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48은 죽은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37:31부터는 정반대의 열매, 곧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행위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매우 명확하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AC.348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둘 다 겉으로는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4:2와 사45:8은 이 살아 있는 열매의 성질을 더욱 밝힙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답고 영화로운열매라고 하고, 이어 구원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사45:8의 마지막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공로나 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348행위를 평가하는 매우 섬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하고 체어리티를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행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위는 신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설교, 성경 공부와 같은 일은 모두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8은 그 외적인 모양만 보고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기 의와 명예와 인정,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에서 행할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체어리티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을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이웃의 참된 유익을 향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AC.348은 앞의 AC.344-346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AC.346에서는 그러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48은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밝힙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아무리 열매처럼 보여도 죽은 행위이고,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문제 되는 것은 가인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AC.348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열매의 크기나 외형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결합되고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날 때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는 우리에게 단순히 많은 선행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행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 모두 열매이지만 그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AC.348의 핵심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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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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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 시간이 흐른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것만큼 받아들일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알고 싶다’, ‘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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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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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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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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