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 불리는데,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sin lying at the door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devil,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체어리티가 없음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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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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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절에 대한 설명에서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는 있었으나,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 뜻입니다. 선을 행한다(do well)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뜻하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데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의지를 알았는데, 당시에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을 (uplifting)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얼굴을 든다(lift up the face) 것은 체어리티를 가지는 것이며, 얼굴이 떨어진다(face to fall) 것은 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Cain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do well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uplifting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lift up the face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face to fall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이미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으므로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 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는 (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 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 좋은 행동을 하라거나 합당한 제물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과 선을 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낯을 (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 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 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 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기 때문에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 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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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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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Cain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Cain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있는가?’, ‘우리가 틀릴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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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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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네게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음을 상징합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며,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없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에 해당하는 if thou doest 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 thou art well disposed’,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 uplifting’, 들어 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 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 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 고개를 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들어 올림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는 없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놓이게 됩니다.

 

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지만 네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을 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리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본질이고, 사랑과 삶은 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 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 중요하지요. 선행도 해야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옳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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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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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고대교회부터인데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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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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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하나님께’,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3-5)

 

제목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46-358 요약입니다.

 

AC.346-358 앞의 AC.338-345에서 밝혀진 가인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이제 실제 행위와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4: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으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참된 성질이 외적인 형식이나 제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차이가 마침내 가인의 분함 안색이 변함으로 이어지면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46-347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원문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에서 시작된 가인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어 이제 결과가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함 있었고, 신앙도 후대처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고, 분리가 굳어져 하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교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목적에서 멀어질 있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게 되고, 마침내 신앙으로부터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냅니다. 흐름은 내적 분리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AC.346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며, 심지어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문제는 종교적 행위가 없다는 있지 않고,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가 안에 없다는 있습니다.

 

AC.348 이것을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땅의 소산 여기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부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얼마든지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있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종교적인 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고 사람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12장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말씀이 가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외적으로는 열매까지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의 뿌리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와 열매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사람의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만으로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할 없습니다. 같은 봉사와 헌신이라도 자기 의와 명예, 인정과 보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37:31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인용하면서 위로 열매를 맺는다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심으신 선이 사람의 실제 삶과 쓰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AC.349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관계를 밝힙니다. 외적인 것은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나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을 외적인 예배도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물이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면서도 받아들여질 없었던 이유입니다. 문제는 제물을 드렸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제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습니다.

 

AC.350-354에서는 이제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과 대조됩니다. 아벨 체어리티를, 떼의 처음 ,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나타내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동물 제물을 곡식 제물보다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핵심입니다.

 

특히 양의 새끼 기름 아벨의 예배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주님께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처음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선의 시작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며, 기름 천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선의 가장 내적인 생명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누구인가?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벨의 제물 안에는 바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신앙 체어리티 이해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제물의 대비는 신앙의 예배와 사랑의 예배라는 단순한 대립보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신앙의 예배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AC.355부터 말씀의 초점은 제물 자체에서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옮겨갑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4:5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로까지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 생각 자체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AC.356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분함 안색의 변화 이해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단순히 머릿속의 교리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AC.357 가인이 몹시 분하여 바로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날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개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이 본래 체어리티를 섬겨야 자기 위치를 잊고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 , 체어리티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후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씨앗이 이미 드러납니다.

 

AC.358 안색이 변하니,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떨어졌다 표현은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마음의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신다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인간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이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 향할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합니다.

 

따라서 AC.346-358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외적인 것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예배가 있었으며 제물이 있었습니다. 아벨에게도 행위와 예배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여호와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자체로 살아 있지 않으며,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비로소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땅의 소산 아벨의 양의 새끼와 기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과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드리는가?, 나는 봉사하는가?, 나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며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와 인정 욕구, 교리적 우월성,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외적인 종교생활은 풍성해도 안의 생명은 약해질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행위라도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체어리티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가인의 타락 과정이 다시 한번 점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분리가 AC.346-358 이르면 하나의 분명한 연쇄를 이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따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별이 분리가 됩니다. 분리된 신앙에서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생깁니다.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깁니다.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이미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6-358 중심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질문은 무엇이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입니다. 답은 체어리티이며, 궁극적으로는 체어리티를 통하여 인간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생명을 받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종교 행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흘러나와 실제 삶과 예배를 하나로 만들 이루어집니다.

 

결국 AC.346-358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지만, 예배의 내적 근원은 달랐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있지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없다면 결국 죽은 열매가 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예배는 모든 거룩함과 선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아벨의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앞의 AC.338-345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단계 깊게 보여 줍니다. 구간이 가인과 아벨은 무엇인가? 밝혔다면, AC.346-358 둘의 차이가 실제 삶과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행위도 살아 있고 예배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얼굴, 내적인 것들에도 주님의 자비가 비칩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와 행위와 예배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생명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행위와 예배가 되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전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하나의 예배가 되어 갑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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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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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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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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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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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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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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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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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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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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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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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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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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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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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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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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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30(D1)

 

2666, 3, 창4.3, 2026-08-30(D1)-주일예배(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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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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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23, 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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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 ’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 변함’, 원어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의 원인이 되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proprium인가?’, ‘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

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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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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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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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 얼굴이 떨어짐(falling)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는데,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 의미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 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 표현됩니다. That by the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and of its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lifts up his faces upon man,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face falling,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makes the face to fall),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face of Jehovahis mercy, and when helifts up his face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makes the face to fall,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표현은 훨씬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aces falling’, 얼굴이 떨어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얼굴이 들리는 떨어지는 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에서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58은 그 결과를 한 단계 더 깊이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단순히 감정 하나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자체가 변했고, 그것이 얼굴이 떨어졌다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얼굴과 내적인 것이 완전히 일치하여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천적 상태에서는 내적 사랑과 외적 표현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분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얼굴로는 한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가장과 기만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여 속에 있는 감정을 무엇이든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상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모습을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거듭남의 목표도 악한 속마음을 그대로 외부에 표출하여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가인의 진행 과정이 보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생기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납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드러나고, 이제 그 결과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곧이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6:26과 시4:6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의 내적인 것들 안에 받아들여져 그것이 외적인 삶을 통하여 빛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 역시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고 계시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바라봐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렘3:12은 같은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자비를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간결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고,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6:26과 시4:6, 3:12은 서로 따로 떨어진 증거 구절들이 아니라 얼굴’, ‘자비’, ‘체어리티’, ‘들림과 떨어짐의 상응을 하나로 밝혀 주는 인용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57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357에서는 말씀에서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돌려지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가운데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마치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도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한 뒤 곧바로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이며 그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달라집니다.

 

이 점은 가인의 경우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그 체어리티에 반발합니다. 따라서 한쪽에는 주님께서 얼굴을 드심’, 곧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시는 끊임없는 신적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얼굴이 떨어짐’, 곧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 대비를 붙들면 하나님께서 가인을 외면하셨는가?라는 질문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AC.358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태고교회 전체가 지점에서 곧바로 속과 겉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 상태로 바뀌었다고 너무 크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58이 직접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을 의미했던 이유와 태고시대의 특별한 상태입니다.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특정 계열과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남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이후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과 연결되지만, 이 한 번호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내적·외적 상태를 동일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상응은 거듭남을 생각할 때에도 아름다운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내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변화하고, 그 선이 말과 행동과 관계와 일상의 쓰임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났듯이, 거듭나는 인간에게서도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은 외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것도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높인 결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를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적인 것들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이며, 주님의 얼굴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얼굴, 곧 인간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단순한 표정 변화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57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그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것들이 이미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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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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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Cains anger was kindled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and evenfury,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Isa. 45:24),

 

이로부터 분노(anger) 악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nce it is evident thatanger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번호는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왜 말씀에서는 분노진노격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하나로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이미 떠난 상태가 드러나고 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인정되며,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고, 이제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가 분노로 나타난 뒤 마침내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에서 찾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자연적인 분노가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일반 공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와 악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7이 직접 다루는 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악한 상태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나타날 때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가인에게 적용하면 그의 분노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것은 받아 주지 않으셨다는 형제간의 질투를 넘어섭니다.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분노를 살필 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분노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의 교리적 위치와 명예와 판단인지 자기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랑과 선도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가 다릅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 질서가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같은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과 그분의 질서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57은 말씀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진노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아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하며,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이러한 외관에 따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속뜻에서는 악의 원인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시78:49-50을 인용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인용 직후 이것을 직접 해석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따라서 이 시편 인용은 단순한 보조 구절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라는 말씀의 외관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45:24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노하는 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사야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이 두 표현을 통하여 실제 분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는 말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악한 영을 불러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성질에 따른 영적 결합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는 같은 성질의 사랑이 서로 결합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와 기만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수록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악을 방치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악을 제한하시고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 가운데 선택한 사랑의 결과가 허용되는 것과 주님께서 악 자체를 만들어 보내시는 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시78: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나아갈 길을 직접 마련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것이 악의 결과나 심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습니다. 다만 그 결과의 원인을 주님의 보복적 분노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가인의 분노로 돌아옵니다. 4:5에서 먼저 분노하는 분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반발합니다. 앞의 AC.352-354에서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고, 그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57에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 무엇이 신앙과 삶을 지배할 것인가 하는 서로 반대되는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57 마지막에서 분노을 의미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 결론은 이 번호 전체를 압축합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자리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분노를 판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 안에서 거슬렸기에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인가, 아니면 뜻과 명예와 판단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자기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57은 동시에 주님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며,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자기와 같은 악과 결합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변함없는 주님의 질서조차 자기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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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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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6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Cain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to his offering he looked not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두 내용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힙니다. 첫째,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둘째,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이미 나온 내용을 다시 길게 설명하는 데 있다기보다, 이제 AC.357AC.358에서 이어질 분노안색이 변함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분명하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의미에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분리되어 있는 상태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 것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그 자체로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에서 떼어 내고도 온전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리에 있습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을 주님께서 미워하시거나 그의 제물을 보고 감정적으로 거절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49에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는 신앙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53은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체어리티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생명을 얻는 신앙의 대비입니다. 아벨이 의미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356은 짧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제물을 계속 드리고 있으므로 외적인 종교생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내적 생명인 체어리티가 떠나면 외적인 예배만으로 그 결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에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다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356이 다시 확인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을 수 없으며, 예배 역시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얻을 때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과 선의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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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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