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 의미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의 이야기와 셋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신앙을 서로 맞대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 분리된 상태는 여러 교리적 형태로 파생되었고,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는 그 모든 흐름을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인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AC.335의 핵심 표현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와 신앙을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가 형성되고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신앙입니다.

 

이 점은 AC.328의 원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고 했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셋은 가인의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그 길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교리적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35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거듭남의 질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으며, 이어지는 AC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성격을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연결하여 계속 설명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은 이미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고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AC.335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신앙의 더 구체적인 성격과 그로부터 형성된 교회는 바로 다음 AC.336과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AC.330가인의 AC.335은 매우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5에서는 실제로 새로운 신앙이 주님께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수단을 구원의 질서 안에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와 셋 사이에는 깊은 섭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신앙을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왜곡한 것을 그대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라멕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특정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계열에서 신앙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류 가운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실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AC.335의 셋은 바로 그 점을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는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4:25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씀도 이 속뜻을 매우 아름답게 담고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가인은 그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를 주십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이 는 새로운 신앙과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소멸된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씨를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셋을 단순히 죽은 아벨 대신 태어난 좋은 아들로만 읽으면 창4의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셋은 아벨과 똑같은 것을 직접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였고, 셋은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바로 다음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창4:25-26새로운 신앙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인 에노스라는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벨을 단순히 되살려 원상복구하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이미 어떤 상태를 지나온 뒤에는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의 거듭남 질서와 동일시하기보다, 우선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마련하셨다는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역사적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자에서는 가인의 여러 후손과 라멕의 이야기가 진행된 뒤 마지막에 셋의 출생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의 모든 세대가 역사적으로 끝난 뒤에야 셋이 태어났다는 식의 연대표를 AC.335의 속뜻에서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후 창5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은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의 계승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 계열에서도 퍼셉션의 상태가 점차 변화하고 쇠퇴해 가며, 마침내 홍수에 이르는 큰 흐름이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셋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으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5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고, 셋은 주님께서 다시 신앙을 체어리티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여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줍니다.

 

그러므로 AC.335는 신앙을 낮추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참된 존엄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존엄은 체어리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살아 있는 수단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을 의미하지만, 하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심화

1. 가인 신앙이고,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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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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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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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3-24)

 

AC.334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을 일어났으며, 이는 극도의 모독이었습니다. (23-24)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 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 자체는 칠십칠 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 교회는 일어났다.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 충분히 발전하면 선으로 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 교회가 타락하면 주님께서 곧바로 다른 조직이나 교단을 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심화

1.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일어나는가?

 

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 심화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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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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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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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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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Cain)으로 성격을 있습니다. 야발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으로 표상된 그 교리적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멕에 이른 그 교리적 상태는 이미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은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함께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30-332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이어진 한 교리적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바로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C.333의 단계에서는 아다와 씰라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너무 앞서 정리하기보다, 우선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교회의 보다 구체적인 상태와 당시의 상황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 유발은 영적인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 안에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주님 사랑과 선에 관계된 것들, ‘영적인 것들은 신앙과 진리에 관계된 것들,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이 외적 삶과 형식 안에서 나타나는 차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33 한 번호만으로 이 셋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상호 관계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후 AC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각각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표상하는지가 자세히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33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멕의 종말 뒤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교회 안에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큰 구조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한 교리적 계열의 실패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곧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창4의 홍수 이전 문맥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질서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라도 그 범위와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AC.333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추적하는 것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보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표상하고, 아다와 씰라는 그 종말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그들의 아들들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다시 한번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낳았다는 말은 속뜻에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가 파생되고 전개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러 교회적 요소들이 형성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33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종말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한 시대의 신앙 구조가 쇠퇴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형식의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새롭게 일으킬 것을 일으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어떤 선과 진리, 어떤 체어리티와 신앙의 질서를 새롭게 일으키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3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멕의 종말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이 곧 주님의 종말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더 이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 일어날 있는가?

 

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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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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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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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이름들로 불렸으며,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 마지막이 라멕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가인의 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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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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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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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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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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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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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 ‘성은 언제나 하나의 ’, ‘물은 언제나 하나의 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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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Enoch.(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4 에녹 5 에녹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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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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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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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 소멸된 체어리티를(10),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 왜곡된 교리를(11),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 (13-14)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으며, 이것이 가인에게 표를 주신 (mark set upon Cain)으로 의미됩니다. (15)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한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나타냅니다. (16)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voice of bloods.(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curse from the ground.(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mark set upon Cain.(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AC.330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멸된 체어리티는 핏소리, 왜곡된 교리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까지 진행되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그에게 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핏소리는 소멸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4:10의 개역개정은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원문의 복수형을 살려 voice of bloods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피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앞의 AC.329에서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핏소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과 교리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진리가 선과의 결합을 잃으면 교리 역시 본래의 질서를 잃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단순히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분리가 계속되면서 교리가 왜곡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로 묘사되는 거짓과 악입니다. AC.330은 이 거짓과 악이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교리가 왜곡되면 생각과 삶 역시 그 왜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며 유리하는 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왜곡된 교리에서 생겨나는 거짓과 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변덕스러운 심판이라기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간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생각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330 전체의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가인의 상태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승인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신앙이 그 통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는 분리된 신앙에 대한 승인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 편에서는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신앙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장차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 이후의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되어 감에 따라 이후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길이 중요해집니다. AC.330은 아직 그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이라는 말로 그 이후의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을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이 보존된 이유는 신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이유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신앙이 보존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AC.330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분리 이후에는 그 이전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보존되지만 그 위치와 기능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AC.330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흐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 교리의 왜곡 거짓과 주님에게서 돌아섬 영원한 죽음의 위험이라는 하강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 편에서는 바로 그 무너진 상태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0은 단순한 심판의 개요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타락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인의 가 가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심화

1. 주님께서는 가인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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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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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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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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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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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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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루면서도, 매우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아벨의 제물이라는 서로 다른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를 뜻합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만으로는 신앙의 내적인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 삶에서 어떤 선을 낳고 있으며,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개로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창4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만 남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principal)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보다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고 체어리티의 질을 결정하려 할 때 본래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것을 신앙은 낮은 것이고 체어리티만 높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결합 안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필요하고 신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도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도 새롭게 보입니다. 아벨이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주된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둘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다음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살아 있으며,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기 전까지는 결합의 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 앞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앞의 AC.327에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했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돌아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4:7은 바로 아벨의 죽음 직전에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C.328은 또한 신앙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통하여 신앙의 질이 드러납니다.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며 많은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를 알고 있는지가 신앙의 질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우리가 배우는 아르카나도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AC.325부터 이어진 흐름을 정리하면 이제 매우 선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으며,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가 결정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AC.329에서 우리는 그 비극적인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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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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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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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5-6)

 

AC.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으로 묘사됩니다. (5-6) 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verses 56)

 

해설

AC.327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태가 악해졌다(became evil)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지만,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고, 이제는 그 분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아벨을 죽이자는 상태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자 예배의 질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 결과 애정과 내적 상태 자체가 악한 방향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악화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가인의 분노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이 이 분노를 통하여 묘사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감정 분석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떤 방향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구별되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체어리티는 더 이상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독립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분노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 없이 존재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밀어내며 결국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의 살인은 속뜻에서 이러한 영적 과정의 마지막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표현도 가인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더욱 강하게 묘사합니다. 다만 AC.327에서는 아직 이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분함안색의 변화가 함께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AC.325부터 계속 지켜야 할 중요한 구별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가면, 본래 선을 섬겨야 할 진리가 그 목적을 잃게 됩니다.

 

또한 창4:6에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C.327은 이 질문의 속뜻을 아직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문자 자체에서도 주님께서 가인의 악해진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부르심과 경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AC.325-327을 함께 놓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먼저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해집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갑자기 등장하는 비극이 아니라 앞에서부터 진행되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AC.327은 우리에게 나는 화를 내는가?라는 심리적인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진리와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선과 함께 있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어 신앙이 스스로 서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작은 질서의 변화처럼 보였던 것이 결국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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