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his brother’s name was Jubal)는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은 야발에 이어 그의 아우 유발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의 AC.412-416에서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 무관한 두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 구별되는 두 종류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같은 교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야발과 유발은 모두 가인의 계보에 속하며,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을 설명하면서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를 구별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강조되고, 유발에게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이 구별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한 교리들이 각각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유발에 관한 문자적 기록은 그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었다고 말합니다(창4:21). 앞의 야발이 장막과 가축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면, 유발은 악기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의 차이로만 읽지 않습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내듯이,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때 ‘영적인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알고 있거나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뿐 아니라 선도 함께 언급됩니다. AC.417이 유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신앙의 진리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라고 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진리들과 선들이 각각 어떤 세부적인 내용을 가리키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이어지는 번호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유발이 인류 최초의 악기 연주자였다는 역사적 주장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416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상’이라는 표현의 속뜻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유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 표현이 어떤 교리를 나타내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그렇다고 악기의 구조나 소리의 성질에 관한 세부적인 상응을 이 번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발과 유발을 함께 읽으면 두 형제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을 통해 우리는 말씀에서 사랑에 관한 것과 신앙에 관한 것이 각각 다른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유발에게도 신앙의 ‘선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은, 신앙을 선과 무관한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417은 유발의 이름과 악기에 관한 기록을 통해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밝힙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이어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읽는 우리는, 말씀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 및 선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별을 분명히 붙들고, 수금과 퉁소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17 해설)

 

 

 

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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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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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주한’(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사람들 가운데 최초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 아벨에 대해서도 그가 ‘양 떼의 목자’(a shepherd of the flock)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야발은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합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 in tents and in folds of 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AC.416은 앞의 AC.412-415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짧지만 중요한 논거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이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장막을 짓거나 가축을 길렀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자체에 이미 기록된 아벨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창4:2에 따르면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창4:20에 이르러 야발을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록을 단순한 직업의 발생 순서로만 읽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는데, 어떻게 훨씬 뒤에 등장하는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겠습니까? AC.416은 바로 이 의문을 통해 독자가 문자적 기록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아벨보다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보의 순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야발을 최초의 목축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의 AC.412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AC.415에서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야발에 관한 기록을 단순한 생업의 기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합니다.

 

아벨과 야발이 모두 목축과 관련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속뜻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과 관련하여 설명되었고,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와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누가 먼저 가축을 쳤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기록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번호는 말씀의 속뜻을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기록을 무시한 채 임의로 새로운 의미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4:2의 아벨과 창4:20의 야발을 함께 읽고, 계보의 순서까지 확인하면서 문자적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씀의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조하여 읽는 일이 속뜻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416의 핵심은 야발이 실제로 어떤 목축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다는 사실은 야발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직업의 최초 창시자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번호들에서 밝혀진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따라,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이해하게 됩니다. (AC.416 해설)

 

 

 

AC.417, 창4:21, ‘유발과 수금과 퉁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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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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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체어리티를 죽인 가인이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아 성읍을 세웁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이루며, 거기에서 또 다른 분리들이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특히 오늘은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신앙이 홀로 자기 성읍을 쌓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인의 표로 보존된 신앙이 그 뒤 어디로 향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97-404 요약입니다.

 

AC.397-404는 지난주에 읽은 AC.370-396에서 주님께서 ‘가인의 표’를 주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보존하신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죽였고,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는 가인의 잘못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장차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신앙 자체를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했습니다. 이번 AC.397-404는 바로 그 보존된 신앙이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고, 또 어떻게 새로운 교리적 계보를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7-398에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하고,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가인은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에덴 동쪽’에 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 그리고 AC.398에서는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는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지난주에 본 ‘가인의 표’에 의해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지배했던 마음 가까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AC.398은 여기서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변화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곧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흐르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할 신앙이 사랑에서 독립하여 오히려 사랑을 지배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 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난주의 AC.393과 이번 AC.398을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이 먼저 온다’는 것과 ‘신앙이 지배한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거듭남의 순서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질서의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지만 결국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바로 이 결합을 거부하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킨 상태입니다.

 

그런데 AC.399부터 이야기가 다시 한 단계 진행됩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아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가인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원리 안에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교리들이 생겨납니다. 가인의 최초 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 원리가 자기 논리를 따라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400은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교회의 것이든 이단의 것이든 ‘잉태’와 ‘출생’은 앞의 영적 상태에서 뒤의 영적 상태가 산출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세대가 이어졌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나 상태가 자기에게서 다음 상태를 산출했다는 영적 계보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주 강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논리를 따라 계속 새로운 분리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쉽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본문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작은 원리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거기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세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출생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1에서는 왜 그 새로운 상태를 ‘에녹’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에게서 일어난 분리는 이제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으로 머물지 않고 ‘가르침’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되고 전해질 수 있는 교리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이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성읍’이 중요해집니다. AC.399와 AC.402에서 가인이 쌓은 성읍은 그 이단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에녹이라는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이 생겨나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분리가 이제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리가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에서 나온 진리인가가 중요합니다.

 

AC.402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씀 전체에서 ‘성읍’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길게 보여 줍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의 성, 진리의 성읍에서부터 혼돈의 성읍과 계시록의 큰 성읍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속뜻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이 세운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성읍’도 성읍이고 ‘거룩한 예루살렘’도 성읍입니다.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이 되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를 중심으로 진리들이 조직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따라서 교리의 규모가 크고 논리가 정교하며 성경 지식이 많다는 것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 교리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며, 사람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AC.402의 수많은 성경 인용 가운데 특히 스가랴의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 구별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신앙의 영적인 것으로, ‘성산’인 시온산을 신앙의 천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선이라는 천적인 것이 중심이 되고 그로부터 진리와 교리라는 영적인 것이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도록 했지만, 거룩한 성읍에서는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AC.403은 여기서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창세기의 이 부분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고인들은 영적인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가인이 아들을 낳고 성읍을 세우며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이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변화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읍을 세우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에서 새로운 가르침이 나오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하나의 교리적 세계가 형성되는 영적 과정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을 ‘지극히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어마다 뜻을 붙여 암호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신앙’, ‘아벨은 체어리티’, ‘성읍은 교리’라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며,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전체 흐름 속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단순히 ‘꾸며 낸 이야기’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역사 형식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 역사 형식 안에 담긴 속뜻을 보는 데 있습니다.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가 바로 영적 상태들의 연속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속뜻을 담는 외적 그릇입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AC.404에서는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는 계보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에녹에서 가르침이 되고 성읍에서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한 뒤, 이제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여러 후속적인 분리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근본 원리가 자기 안에서 계속 후손을 낳으며 하나의 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AC.404에서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이랏이라는 이름이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므로 에녹이라는 이단에서 파생된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등의 구체적인 의미를 자세히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멈춥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모든 세부를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과 AC가 밝혀 주는 곳에서는 깊이 들어가되, 밝혀 주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다루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97-404 전체에는 하나의 분명한 흐름이 있습니다. 지난주 마지막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신앙을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는 것이 곧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놋 땅’, 곧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며,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는 뒤집힌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된 신앙은 에녹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성읍이라는 교리적인 전체를 형성하며, 다시 그 안에서 여러 후속적인 분리들을 낳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지만 인간은 그 보존된 신앙을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더 많은 분리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의 ‘가인의 표’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자유까지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보존된 신앙이 한편으로는 훗날 영적 인간이 체어리티로 돌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인의 계열에서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을 자동으로 에덴으로 돌려보내는 표가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의 질서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하는 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은 AC를 읽고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 자신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성읍’을 쌓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AC를 공부하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수많은 진리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교리적 이해를 만들어 갑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성읍이 얼마나 크고 정교한가?’가 아닙니다.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더 많은 아르카나를 아는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를 더욱 깊게 하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섬기게 하며,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하게 한다면 그 진리는 생명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우리의 이해를 높이며, 사랑보다 교리적 옳음을 앞세우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본문은 교리 자체를 경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진리는 필요하고 교리는 필요하며, 특히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은 주님께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교리가 사랑에서 나왔는가, 사랑을 섬기는가, 그리고 사람을 다시 사랑으로 인도하는가입니다. 참된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AC.397-404는 지난주의 ‘가인의 표’ 이후에 남은 질문에 답합니다. ‘보존된 신앙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그 신앙은 에덴 안에 있지는 않지만 에덴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랑과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보존된 신앙 앞에는 두 방향이 놓입니다.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영적 신앙이 될 수도 있고, 사랑에서 계속 독립하여 자기 가르침과 자기 성읍과 자기 계보를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97-404의 전체 흐름은 ‘가인의 보존 → 여호와의 얼굴에서 나감 → 진리와 선 밖의 놋 땅 → 에덴 가까이에 남아 있는 신앙 → 사랑 대신 신앙, 의지 대신 이해의 지배 → 가인에게서 에녹의 출생 → 분리된 신앙의 가르침 형성 →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의 형성 → 하나의 분리에서 여러 분리가 파생되는 계보’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이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보존 섭리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본문은 그 보존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참된 목적은 자기만의 성읍을 높이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존된 신앙이 다시 사랑을 만나고, 진리가 다시 선과 결합하며, 이해가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섬기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인의 길을 넘어 주님께서 마련하신 영적 질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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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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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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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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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1, 창4:17, ‘에녹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시작되고 형성되기 시작한 교리적 가르침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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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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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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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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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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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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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왜 창세기 초반은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었는가? - 태고인들의 표상적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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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20(D1)

 

2668, 6, 창4.6, 2026-09-20(D1)-주일예배(창4,16-18, AC.397-404),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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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27, 창4:19-24, AC.405-433),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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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13, 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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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9-15)

 

제목은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다가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읽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고,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생명과 방향을 잃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올 길을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인의 실패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70-396 요약입니다.

 

 

AC.370-396은 지난주에 읽은 AC.359-36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가인은 체어리티를 표상하는 아벨을 자기 아래 두려 했고,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려는 교리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AC.370-396은 바로 그 다음을 다룹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과의 결합을 잃은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신앙을 주님께서는 왜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가가 이번 리딩의 중심입니다.

 

AC.37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아벨’은 체어리티이므로 이 질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네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제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데까지 갔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C.371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퍼셉션과 양심’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에서 멀어진 뒤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잃었고, 훗날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형성된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영적 사람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뒤의 AC.393에서 다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AC.372-376에서는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이 설명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에서 ‘피’가 단수가 아니라 ‘피들’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며, 특히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을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과 생명을 원하지만, 미움은 영적으로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셨던 사실을 피가 알려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악에는 그 악 자체의 죄책이 들어 있으며 영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중요합니다. 이 문맥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시킨 ‘분열 또는 이단’의 교리적 토대를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이단’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직접 붙이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데 있지 않고, 둘을 분리한 뒤 신앙을 독립시키고 체어리티 위에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단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진리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가인이 갈았던 땅을 갈 수 있습니다.

 

AC.377-382에서는 그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도 끊어집니다. 신앙은 여전히 교리를 연구하고 논증하며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신앙은 생명 있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땅은 더 이상 그 힘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정교한 교리 체계로 만들어도 거기서는 참된 영적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AC.381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382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특히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진리를 찾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많이 찾아다니는 것과 진리 안에 실제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결국 사람에게 영적 방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AC.383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가인이 이제 자기 상태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한 회개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상태와도 다릅니다. AC.384는 바로 이 점에서 가인 안에 ‘선의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자기 악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받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본문 후반의 ‘가인의 보존’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AC.385-388에서는 가인이 자기 상태를 더 자세히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고 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진리에서도 떨어지고 선에서도 떨어지면 결국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처음에는 하나의 교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서는 인간의 영적 방향감각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AC.389-391에서는 가인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자기 자신, 곧 proprium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생각에서는 거짓이, 의지에서는 악이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에는 그 자체로 두려움과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밖에서 형벌을 만들어 가인에게 던지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사람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지옥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해치고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그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번 본문의 가장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오히려 보호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AC.392-396의 속뜻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열립니다. 가인을 보존한다는 것은 가인의 악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AC.393이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를 잃은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될 수 없었습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먼저 신앙의 지식이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하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의 지식’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AC.394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국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교리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셨다면 후대의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됩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잘못되었음에도 ‘가인’이 완전히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입니다. 주님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인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AC.395에서 ‘칠 배’는 이 보존이 거룩하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396은 마침내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표’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태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마나 몸에 실제로 어떤 신비한 표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의 속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AC.370-396 전체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신앙의 비참한 결과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아벨이 사라지고, 그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으며, 땅은 더 이상 힘을 내지 않고, 가인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게 됩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신앙이 더 강하고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가 생명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을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가인을 완전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렸어도 장차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신앙’이라는 통로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 순간부터 가인의 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으며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더욱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며,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작은 선과 진리까지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가인의 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신앙과 모든 진리를 함께 없애 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것까지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표는 악을 보호하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표입니다.

 

결국 AC.370-39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난주의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벨을 잃은 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을 보시고,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이번 리딩은 ‘가인의 형벌’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보존하여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에서 신앙으로’라는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표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70-396의 전체 흐름은 ‘체어리티의 소멸 → 죄책의 드러남 → 주님과의 결합 상실 → 영적 결실의 상실 → 선과 진리의 방향 상실 → 내적 고통과 악의 일부 인정 → 악과 거짓에서 오는 두려움 → 가인의 보존 → 신앙의 보존 →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의 보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깊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은 아벨을 죽이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에게도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가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의 표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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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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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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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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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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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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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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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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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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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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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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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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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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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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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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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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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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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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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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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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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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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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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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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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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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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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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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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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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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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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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13(D1)

 

2668, 5, 창4.5, 2026-09-13(D1)-주일예배(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pdf
1.32MB

 

 

 

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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