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형에 따른 판단’입니다. 노재환은 칠순잔치에서 전자 건반으로 트로트를 연주하는 노인입니다. 호텔 매니저와 클래식 공연 관계자들의 눈에는 ‘고급 예술’의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뽕짝’으로 낮추어 불리고, 그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런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명성, 말투, 옷차림, 심지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도 그 사람의 영적 실체 자체는 아닙니다. 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단순히 ‘트로트도 클래식만큼 훌륭하다’로 읽으면 조금 얕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음악이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지식과 재능과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쓰임’(use)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재환이 클래식 무대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트로트가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때 ‘내 음악이 향해야 할 곳은 사람들의 삶 속이다’라고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깊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선을 전달하기 위한 것인가?’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천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가장 큰 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눈은 눈의 일을 하고, 손은 손의 일을 하며, 심장은 심장의 일을 합니다. 손이 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고귀해서 발을 멸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쓰임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클래식과 트로트의 문제도 ‘어느 음악이 더 높은가?’에서 ‘각각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수준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예술적 훈련의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음’과 ‘사람의 가치에 위아래가 있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노재환이 마침내 오페라 피아노 앞에 앉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나는 칠순잔치 반주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건반 앞에 앉자 감추어져 있던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과거를 알고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 사람이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존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노재환이 정말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평생 칠순잔치에서 트로트만 연주했던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그를 업신여겨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이 이야기의 영적 핵심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은 ‘감춰진 천재성을 발견하는 방식’보다 더 깊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맡은 가장 작고 평범한 쓰임 안에서도 그의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훨씬 커 보이고, 어느 작은 잔칫집에서 어르신들의 노래에 반주하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그 외적인 규모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지, 아니면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실 ‘골든핑거’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했는데도 노재환이 잔치를 망치지 않으려고 ‘제가 조금 더 조용히 연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재능보다 그 재능을 지배하는 애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트로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장르도 경계도 없는 하나 됨’으로 나아갑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무수한 차이가 완벽한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바이올린이 피아노가 될 필요가 없고, 피아노가 성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서, 트로트는 트로트로서 자기 쓰임을 다하면서 더 높은 선을 함께 섬길 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차별하지 말자’는 말이 ‘분별하지 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반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원고는 좋은 반주를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도, 설교도, 신학도,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 대한 이해도 결국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반주’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며, 지식은 삶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 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순간 ‘반주자가 주인공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받쳐 주고, 지식이 쓰임을 받쳐 주며, 재능이 이웃의 기쁨을 받쳐 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의 제목 ‘트로트 할아버지가 피아노 앞에 앉자’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더 중요한 순간은 ‘피아노 앞에 앉은 뒤 모두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몰랐을 때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이 사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도 나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지금 그를 존중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으로 낮추어 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어떤 쓰임을 업신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동 서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그래서 ‘숨은 천재를 무시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천재가 아니어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주님 앞에서는 가장 작은 쓰임도 사랑으로 행해질 때 천국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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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 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 수집하라. 환경을 이용하라. 퇴로를 확보하라. 각자의 장점을 살려라. 무기를 개선하라. 역할을 나누어라.’ 특히 ‘너희가 약했던 게 아니라 사냥 방식이 잘못됐던 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 많이 알고,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더 강한 무기를 만들고, 더 잘 조직하고, 더 강한 부족이 되는 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주변 세계를 뛰어난 지식과 질서를 가진 중심 인물이 조직하고 교화하여 더 큰 질서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 주변’, ‘질서와 혼란’, ‘교화와 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 말이 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 유능한 한 사람이 올바른 지식으로 공동체를 이끈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강한 부족인가?’가 아니라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이 누구를 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 잘 조직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질서의 중심에 자기 집단의 우월함이 있는가, 아니면 공동의 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 부족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에서 ‘주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될 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강해지고, 더 잘 조직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 피우는 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직접 피우면 되니까 불씨를 얻으려고 음식을 바칠 필요 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가진 불은 누구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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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들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많은 사람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천국 전체는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집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AC.111은 앞의 AC.110에서 제시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자체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AC.110의 ‘사랑의 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그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히 지적하는 것은 ‘겉 사람’이 지성과 지혜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기억지식은 주님의 유입을 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계속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곧 지성이나 지혜라고 여기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시하는 데 있습니다. AC.111은 지식의 양과 참된 지혜의 생명이 같은 것이 아님을 구별합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도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지식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혜와 지성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앎과 이해에 어떤 사랑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많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를 이룬다’는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사랑과 신앙 역시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지만 그렇다고 둘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110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세밀하게 구별한 것도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한 인간 심리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질서가 획일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 됨은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를 없애 모두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들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시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천국으로 질서 지으시는 것입니다. 구별과 하나 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주님께서는 뒤섞어 차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질서 안에 두시면서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11의 마지막 문장은 앞의 세밀한 구별들이 단순한 용어상의 복잡함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사람과 천국을 실제로 그렇게 질서 지으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1을 읽으면서 아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혜와 지성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번호는 왜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을 지혜로 여기고, 알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기 쉬운 우리의 익숙한 틀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제 보여 주려는 것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올라가는 질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는 질서입니다. AC.111은 바로 그 낯선 질서로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중요한 문턱입니다. (AC.111 해설)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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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참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옴’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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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 창2:11-12,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하윌라는 마음을 뜻함’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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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

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가장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자가 권세를 통하여 추구하고 부자가 재물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실제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AC.452는 AC.450-451에서 계속되어 온 ‘천국에서의 높고 낮음’이라는 주제를 그 내적 핵심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AC.450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공상을 바로잡았고, AC.451에서는 세상의 권세가 영계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AC.45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천국에서 참으로 큰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능력을 일부러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신의 높음과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바라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가장 큼’의 기준 자체가 세상과 달라집니다.

 

특히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 그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큰 권세에서, 부자는 더 많은 재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천국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큰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겉모습만 낮아졌을 뿐 내적 목적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역시 천국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조차 자기 높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천국적 상태는 무엇인가?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자체가 자기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자신의 위치가 낮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과 행복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라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칭찬받기 위해 돕거나, 인정받기 위해 섬기거나, 훗날 보답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면 아직 자기 자신이 목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국적 쓰임은 상대방의 선을 그 자체로 기뻐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52는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가?’라는 질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사랑으로 그 행복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막9:35)이 가리키는 천국의 질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AC.452 해설)

 

 

 

AC.453, 창5 앞, '천국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3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거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은 단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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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창5 앞, '천국에서는 무엇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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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

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원한 다른 나라(another kingdom)에 있으며, 땅에서 누리던 그의 통치는 이미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있는 곳에서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가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the mercy of the Lord)에 따라서만 존중받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 나라에서도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부와 군주의 총애에 따라 평가되는데, 그곳에서는 선과 진리가 부(wealth)이며 군주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다른 어떤 방식으로 명령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역자(rebel)인데, 이는 그가 이제 다른 분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 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 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해설

AC.451은 바로 앞 AC.450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라는 가르침을 한 걸음 더 구체화합니다. AC.450이 ‘높아지고 지배하려는 욕망’ 자체를 보여 주었다면, AC.451은 세상에서 실제 권세를 누렸던 사람이 사후에도 그 권세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사람의 지배욕까지 자동으로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은 세상에서 권세를 행사하던 습관과 즐거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사후에 전혀 다른 인격으로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성품을 가지고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는 AC의 일관된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죽음은 몸을 벗는 것이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즉시 바꾸는 사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먼저 알려지는 것은 ‘너는 이제 다른 나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직책과 권한은 그 나라 안에서만 효력이 있었으며 죽음과 함께 끝났습니다. 영계에서는 세상의 신분, 직위, 명성 자체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선을 사랑했으며, 어떠한 진리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특히 ‘선과 진리가 부’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부유하다고 하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가진 사람이 부유합니다. 여기서도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사랑과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부는 소유하여 자기를 높이는 재산이 아니라, 주님께 받아 이웃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더욱 깊은 표현은 ‘군주의 총애는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이나 권력자의 총애를 얻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자격으로 주님의 총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 구원과 천국의 생명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아 그것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근본적인 질서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방식대로 계속 지배하려는 사람을 ‘반역자’라고 한 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는 이제 ‘다른 분의 나라’, 곧 주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것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점이 아니라, 천국의 통치 질서 자체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섬기며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한 권위입니다.

 

마지막의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러워하였다’는 짧은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을 빼앗겨 굴욕을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질서를 천국에까지 가져오려 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AC.451은 결국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세상에서 맡은 직분과 영향력과 능력을 ‘내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 위에 서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이 내게 맡기신 것’으로 여기며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얼마나 선과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받아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AC.451 해설)

 

 

 

AC.452, 창5 앞,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왜 가장 작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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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0, 창5 앞, '천국은 높은 곳에 있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0세상에 사는 동안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잘못된 생각을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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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8

악한 영들은 때때로 주님의 천국 외에 또 다른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그것을 찾아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혹스럽게도 다른 어떤 천국도 결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악한 영들은 주님에 대한 증오와 지옥에서 겪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광기 어린 생각에 빠지며, 그리하여 이와 같은 공상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Evil spirits have sometimes supposed that there is another heaven besides that of the Lord, and they have been permitted to seek for it wherever they could, but to their confusion they could never find any other heaven. For evil spirits rush into insanities both from the hatred they bear against the Lord, and from their infernal suffering, and catch at such fantasies.

 

해설

AC.458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449부터 이어져 온 천국에 관한 여러 잘못된 생각의 뿌리를 한층 더 깊은 곳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천국을 높은 곳, 입장이 허락되는 장소, 편안히 쉬는 곳,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곳, 혹은 영원히 찬양만 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여러 관념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훨씬 근본적인 생각이 등장합니다. ‘주님의 천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혹시 다른 천국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천국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과 지배욕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영에게는 주님의 천국이 자신이 원하는 천국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행복은 원하지만, 그 행복을 이루는 천국의 사랑과 질서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 천국’을 상상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그 생각을 단지 말로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 가서 그것을 찾아보도록’ 허락하십니다. AC.450의 영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들이 원하는 천국을 경험하도록 허락받았고, AC.455의 사람이 자신이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찬란한 빛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강제로 빼앗기보다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 이르는지를 스스로 경험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도 다른 천국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가 하나뿐이라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닙니다. 천국은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난 채 천국의 행복만 따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질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천국의 기쁨만, 체어리티 없이 행복만, 주님 없이 천국만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악한 영들이 이러한 공상에 매달리는 원인으로 ‘주님에 대한 증오’와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함께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지배적인 악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 악으로 인한 고통에서는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이 변화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이 자기 안의 악한 사랑에 있는 한, 장소를 바꾸거나 다른 천국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그 상태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광기 어린 생각’이라는 표현도 단순히 이성을 잃었다는 의미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영적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며, 악한 사랑이 사고를 지배하면 사람은 결국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주님을 미워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천국의 기쁨을 원하며, 자기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천국을 찾는 것 자체가 영적 질서에서는 모순인 것입니다.

 

결국 AC.458은 천국이 주님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독립된 행복의 세계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천국에는 AC.457에서 본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이 있지만,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의 천국으로 이루는 근원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오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와 무수한 종류의 행복이 있어도 ‘다른 근원에서 오는 또 하나의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을 원하는 것은 결국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원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사랑과 질서 안으로 이끄심으로써 천국의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AC.458 해설)

 

 

 

AC.459, 창5 앞, ‘세 천국과 천적·영적 존재의 차이’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9천국은 셋입니다. 첫째 천국은 선한 영들(good spirits)이 거하는 곳이고, 둘째 천국은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거하는 곳이며,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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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7, 창5 앞, '천국의 행복은 왜 사람마다 똑같지 않은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7 이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거의 모든 사람은 지옥은 누구에게나 똑같고 천국도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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