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 인간-형상’과 ‘만듦-천적 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상태’에서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 심화 2)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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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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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AC.1-5) 및 창1(AC.6-66) 번역, 해설 및 심화, 목차 및 색인 포함 with ChatGPT’ 소개

 

 

이 파일을 처음 열어 보시는 분은 아마 먼저 분량에 놀라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1장 한 장을 다루는데 500쪽이 넘습니다. ‘천지창조 한 장을 설명하는 데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분량을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이하 AC)를 처음부터 차례로 우리말로 옮기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여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AC.1부터 한 글씩 읽어 가면서 번역만으로는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질문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어떤 질문은 짧은 해설만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질문은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다음 글로 넘어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번역에 해설이 붙고, 해설에서 다시 질문이 생겨 심화가 붙으면서 지금의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파일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하여 집필한 결과물이라기보다, AC.1에서 AC.66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며 남긴 ‘읽기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원문을 번역하다가 표현 하나에서 멈추기도 했고,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질문하기도 했으며, 처음 AC를 접하는 분이라면 어디에서 이해하기 어려울지를 생각하면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검토해야 했고,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던 설명을 AC 전체의 문맥과 대조하면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파일에는 그런 과정까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자료의 기본 구성은 ‘번역, 해설, 심화’입니다. 먼저 ‘번역’은 영어 AC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려는 부분입니다. 그다음 ‘해설’은 단순히 번역문을 다시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그 AC가 앞뒤 글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창세기 본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처음 읽는 독자가 어디에서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멈출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설명한 부분입니다. ‘심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다룹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해설 안에 모두 넣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을 따로 살펴본 것입니다.

 

그래서 심화까지 반드시 차례대로 모두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이라면 먼저 AC 본문의 번역과 해설을 따라가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읽다가 특별히 궁금한 주제가 나오면 그때 관련 심화를 읽으셔도 됩니다. 반대로 이미 AC를 어느 정도 읽어 오신 분이라면 관심 있는 글 번호나 심화 주제를 찾아 들어가셔도 됩니다. 500쪽이 넘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번에 ‘완독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한 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읽는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펼치면 천지창조를 만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놓이며, 뭍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랍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는 말씀의 문자입니다.

 

그런데 AC는 그 문자 안에서 또 하나의 창조를 봅니다. ‘사람의 거듭남’입니다.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6은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섯 날은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지나가는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처음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조금씩 주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고, 주님에게 속한 것과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며,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연계의 최초의 빛과 함께 ‘내 안에는 언제 처음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창이 물과 물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사람 안에서는 무엇이 구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땅에서 식물이 돋고 씨를 맺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는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선한 삶의 열매가 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도 더 이상 서로 떨어져 있는 창조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고, 한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이 조금씩 형성되어 가는 긴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거듭남만을 말한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료는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문자에는 분명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AC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그 문자를 없애고 다른 이야기를 대신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이 점을 여러 차례 조심해서 구별했습니다. 창조의 말씀을 지우고 거듭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자료를 읽으실 때 처음부터 모든 ‘상응’을 외우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 이것, 물은 이것, 나무는 이것, 새는 이것’ 하는 식으로 대응표를 만들어 외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창1 전체의 생명 있는 흐름을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표현이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이어지고, 둘째 날이 셋째 날을 준비하며, 그렇게 여섯째 날까지 진행됩니다. 실제 파일에서도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라는 점을 중요하게 붙들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창1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순서가 곧 거듭남의 질서로 읽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어둠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빛이 비치고, 구별이 생기고, 무엇인가 싹트고, 진리가 자라고, 사랑과 신앙이 점차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마침내 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가 달라져 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를 이루시는 ‘새 창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중심에 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빛을 만들고, 자기 힘으로 선을 생산하고, 마침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읽어 갈수록 ‘내가 한다’고 생각하던 것의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작도 주님에게서 오고, 선과 진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며, 시험 가운데 사람을 붙드시고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응답하고 싸우고 살아가지만 그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과 능력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점은 이 자료가 창1의 여섯 날을 읽으면서 계속 되돌아가는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남의 ‘단계’를 정리하는 교과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지금 몇째 날에 있는가?’라고 자기 영적 수준을 판정하려는 읽기를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은 사람에게 영적 등급표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질서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실제 삶에서는 여러 상태가 복잡하게 경험될 수 있고, 이미 배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재는 잣대로 사용하기보다, 거듭남의 방향과 질서를 배우는 데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이 파일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AC를 처음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무엇인가?’, ‘리메인스란 무엇인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왜 같은 짐승이 어떤 곳에서는 선한 것을 뜻하고 다른 곳에서는 악한 것을 뜻하는가?’, ‘형상과 모양은 무엇이 다른가?’,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왜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즉시 없애지 않으시는가?’,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능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은 것이 이번 작업의 한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곧바로 거대한 교리 체계를 가져와 답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 AC가 지금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고, 다음 글의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스베덴보리의 이 글에 직접 있는 것인지, 관련 AC들을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나 적용인지도 가능한 한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료는 처음 작성한 글을 그대로 모은 것만도 아닙니다. AC.1부터 AC.66까지 다시 검토하면서 번역과 해설, 심화 가운데 지나치게 나간 설명은 줄이고, 처음 읽는 분에게 꼭 필요한 설명은 오히려 보충했습니다. 성경 구절이나 다른 AC 글 번호가 인용되었다고 해서 모두 별도의 심화로 남겨 두기보다, 그 인용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해설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소화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읽은 독자가 정말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품을 만하고, 그 질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심화로 남겼습니다.

 

특히 성경과 AC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AC는 성경을 대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을 AC에 맞추어 고치는 것도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이 있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을 밝히고 설명하는 책이라는 순서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AC의 영어 인용과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의 표현이 다르더라도 의미상 문제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의 표현을 우선했고, 의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할 때에는 성경을 AC의 문장에 맞추어 바꾸기보다 ‘개역개정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고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파일 마지막 AC.66의 삼상2:3 심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실제 사례로 다룹니다.

 

AC.64-66에 이르면 창1의 거듭남 이야기는 다시 ‘말씀’ 자체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읽는 나라와 성읍과 강과 사람의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하고, 자신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내적 의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는지를 ‘영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합니다. 마지막 AC.66에서는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안내도 남깁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을 구별하는 설명은 앞으로 창세기를 계속 읽어 갈 때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AC.1-66은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창세기 2장을 읽을 준비가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이 그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지, ‘일곱째 날’의 안식은 무엇인지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일은 하나의 완결된 창1 작업인 동시에 앞으로 계속될 긴 AC 읽기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이 자료를 처음 읽으시는 분께 한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응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심화까지 모두 읽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창조하시는가?’

 

그 질문을 가지고 읽다 보면 ‘빛이 있으라’가 조금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궁창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씨가 싹트는 모습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생물이 살아 움직이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장면들이 먼 옛날의 창조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새 창조의 질서와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에는 ChatGPT가 함께했습니다. 번역을 비교하고, 문장을 다듬고, 앞뒤 AC의 문맥을 살피며,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무엇을 궁금해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ChatGPT가 AC를 해석해 준 결과’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AC 원문과 말씀 앞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다시 원문에 비추어 검토하며, 때로는 앞서 쓴 해설을 고치고 다시 쓰는 긴 협업의 결과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파일의 제목에도 ‘with ChatGPT’라고 적었습니다. ‘by ChatGPT’가 아니라 ‘with ChatGPT’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이번 작업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자료는 제 손에서만 읽히는 작업 노트를 넘어, 처음 AC를 접하는 분들과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낯설고, 어떤 대목에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서둘러 받아들이거나 서둘러 거부하기보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C 자체에 머무르기보다, AC가 계속해서 가리키는 말씀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500쪽이 넘는 긴 여정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짧은 한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어쩌면 창세기 1장을 속뜻으로 읽는 긴 여정은 결국 이 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빛을 주시고, 구별하시고,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사랑과 신앙을 자라게 하시며, 마침내 그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 말입니다.

 

이 자료가 그 놀라운 말씀의 여정을 조금 더 깊이 따라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문(AC.1-5) 및 창1(AC.6-66) 번역, 해설 및 심화, 목차 및 색인 포함 with ChatGPT.pdf
3.61MB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5)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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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란 무엇인가? - AC를 처음 읽는 분들을 위한 소개

※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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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1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단계의 사람이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 가운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신앙이 이제 사랑과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이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짐승’은 일상적인 말에서처럼 거칠고 악한 본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짐승들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들을 표상합니다. 다만 각각의 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해당 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여섯 번째 상태에서 더욱 충만한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의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형상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기보다,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 거듭난 사람을 스베덴보리가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형상’의 구체적인 속뜻은 이어지는 창조 본문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몸이 음식을 통해 유지되듯이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르고 유지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만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함께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이것은 몸이나 감각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감각을 통하여 세상을 접합니다. 문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AC.12는 이 싸움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 방향과 결과를 짧게 제시합니다.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던 사람이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때, 스베덴보리는 그를 천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12에서는 아직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진행 가운데 처음에는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더 깊은 차이는 이후 AC에서 훨씬 정교하게 밝혀집니다.

 

결국 AC.12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대응하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양육되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을 지나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질서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천적 상태를 바라보게 합니다. (AC.12 해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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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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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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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

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유한 이름으로서 ‘아담’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은 이 구절과 앞의 여러 구절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를 단수로 말하지 않고 복수로 말하며, 또한 이 말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어 둘을 함께 ‘사람’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둘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본문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라고 하였고, 마찬가지로 1장에서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게 하자’(창1:2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The reason why he is called “Adam” is that the Hebrew word “Adam” signifies “man”; but that he is never properly called “Adam” by name, but “man,” is very evident from this passage and also from former ones, in that [in some cases] he is not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but in the plural, and also from the fact that the term is predicated of both the man and the woman, both together being called “man.” That it is predicated of both, everyone may see from the words, for it is said, “He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nd in like manner in the first chapt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Gen. 1:26) Hence also it may appear that the subject treated of is not the creation of some one man who was the first of mankind, but the most ancient church.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해설

AC.478은 창세기 초반의 ‘아담’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입니다. 핵심은 히브리어 ‘아담’(Adam)이 본래 ‘사람’을 뜻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의 ‘아담’을 처음부터 한 개인의 고유명사로 읽기보다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단수와 복수의 변화입니다. 창1:26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고’라고 단수로 말씀하신 뒤 곧이어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창5:2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에서 ‘사람’은 어느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괄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문법적 특징을 태고교회라는 집단적 의미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로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75-477과도 이어집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신앙과 사랑을 의미하고, 이 둘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더 이상 둘을 따로 ‘남자와 여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그리고 AC.477에서는 가장 높은 의미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으로서,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2의 ‘사람’은 단순한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478의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그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최초의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로 세우시고 그 교회를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셨는가를 읽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AC.478의 논점은 창세기 본문의 역사성 전체를 한 문장으로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을 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 역시 ‘실제로 아담이라는 개인이 존재했는가?’라는 문제로 곧바로 옮겨가기보다, 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나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를 이해하는 데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보면 창5:1의 ‘아담 계보의 책’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속뜻으로 한 개인 아담의 생물학적 후손 명단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계승에 관한 기록입니다. AC.469에서 ‘계보의 책’을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열거라고 한 것과 AC.470에서 이어지는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교회적 실재를 의미한다고 한 설명이 여기서 서로 연결됩니다.

 

결국 AC.478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창5를 읽는 관점을 정리해 줍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후손들의 계보가 이어지지만, 속뜻으로는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어떤 영적 상태들을 지나 노아에 이르게 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AC.478 해설)

 

 

 

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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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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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

‘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하고 보여 주었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이후 영적 교회도 주님의 형상이므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는 인간다운 이해(human understanding)를 가진 모든 이를 사람이라 합니다. 사람은 이해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기 때문이며, 그 능력에 따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람답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별은 마땅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한 그의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 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 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 태고교회와 모든 참된 교회, 그리고 그로부터 교회에 속한 사람들,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특별히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0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겔36:10-12) I will cause man to multiply upon you, all the house of Israel, all of it; I will cause to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that they may be multiplied and bear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ccording to your antiquities; and I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my people Israel, (Ezek. 36:10–12)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적’(antiquities)은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고대교회들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족속’과 ‘내 백성 이스라엘’은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교회를 ‘사람’이라 합니다. 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 of Israel” and “people 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3] 신명기에서도, So in Moses: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32:7, 8) Remember the days of eternity, understand ye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when the most high would give the nations an inheritance, when he would set apart the sons of man, he set the bounds of the peopl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Deut. 32:7–8)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역대’(generation and generation)는 고대교회들을 의미합니다. ‘인종’(sons of man)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던 사람들이며, 이 신앙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입니다. 거듭난 사람을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레미야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by the “days of 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and 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 of 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empty and void;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하였습니다. 여기서 ‘땅’은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을, ‘하늘’은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을, ‘사람’은 선에 대한 사랑을, ‘공중의 새’는 진리에 대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 of the 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4] 다시 예레미야에서는, Again: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31:27) Behold the days come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Jer. 31:27)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속 사람을, ‘짐승’은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beast” the external. In Isaiah: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사2:22) Cease ye from man in whose nostrils is breath, for wherein is he to be accounted of, (Isa. 2:22)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where by “man” is signified a man of the church. Again: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6:12) Jehovah shall remove man far away,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Isa. 6:12)

 

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황폐함, 곧 더 이상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man, in that there should no longer exist either good or truth. Again: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사24:6)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shall be burned, and man shall be left very little, (Isa. 24:6)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where “man” signifies those who have faith. Again: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사33:8, 9) The paths have been desolated, the farer on the path hath ceased, he hath made vain the covenant, he hath despised the cities, he hath not regarded man, the earth mourneth and languisheth, (Isa. 33:8–9)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노스’(Enosh)입니다. 다시, denoting the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Enosh.” Again: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사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precious than fine gold, and a man than the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moved out of her place, (Isa. 13:12–13)

 

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사람’에 해당하는 말은 ‘에노스’(Enosh)이고, 두 번째는 ‘아담’(Adam)입니다. 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AC.477의 출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답합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교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의 기준이십니다.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서 참된 인간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것을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473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연결됩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므로 사람이라 하고,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역시 사람이라 합니다. 따라서 창5:1-2에서 ‘하나님의 모양’과 ‘사람’이라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을 이루는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말씀은 그 교회를 특별히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은 이해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으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참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그 기준을 바로잡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한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는 단순한 지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 역시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성을 이룹니다.

 

이어지는 수많은 성경 인용은 바로 이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겔36:10-12에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증가만을 뜻하지 않고 교회가 회복되고 번성하는 것을 속뜻으로 포함합니다. 그래서 ‘옛적’은 태고교회, ‘처음’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까지 모두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묶입니다. 시대와 외적 형태는 달라도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 있는 교회라는 점에서는 모두 ‘사람’인 것입니다.

 

신32:7-8 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 줍니다. ‘옛날’과 ‘역대’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들을 가리키고,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렘4:23, 25에서는 정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선에 대한 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까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사랑의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자 말씀은 그것을 ‘사람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렘31:27의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에서는 ‘사람’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을, ‘짐승’이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6:12와 사24:6에서는 선과 진리 또는 신앙이 사라지는 교회의 황폐함을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인용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참으로 살아 있는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33:8-9와 사13:12-13에서 ‘에노스’(Enosh)와 ‘아담’(Adam)이라는 히브리어가 구별되어 제시되는 것도 앞으로 창5의 이름들을 읽는 데 중요합니다. 창5의 이름들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담고 있으며, ‘사람’을 뜻하는 여러 표현 자체에도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에노스’는 곧 창5에서 하나의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다시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477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개인에게로 내려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 참된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교회는 주님의 모양 또는 형상을 받아 ‘사람’이 되고, 개인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날수록 참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창5:2의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통칭하여 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고 주님의 모양을 나타내는 교회,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입니다. (AC.477 해설)

 

 

 

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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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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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로, 먼저 이 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것이 묘사됩니다. 이후의 번성은 바로 이 상태로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AC.474는 AC.469에서 시작된 창5:1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왜 창5의 계보가 곧바로 셋과 그 후대의 교회들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태고교회 자체의 상태를 설명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창5가 다루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입니다. 여기서 ‘번성’은 단순히 자녀가 태어나 인구가 늘어나는 생물학적 번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부터 그 성격을 이어받은 후대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계속되는 교회적 번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후대의 교회들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창5:1은 태고교회가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것을 묘사합니다. AC.472와 AC.473에서 살펴본 ‘창조하다-영적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만들다-천적 인간-하나님의 모양’이라는 질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창5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출발점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이후의 번성은 바로 이 상태로부터 이어진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등장할 셋, 에노스, 게난 등의 교회들은 아무 관계 없이 차례로 등장하는 독립된 교회들이 아니라, 먼저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파생되고 계승되는 교회들입니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처음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장 개요에서 보았듯이 그 상태는 점차 변화하고 쇠퇴하여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승의 출발점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계보의 책’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문자적으로 계보에는 부모와 자녀의 출생이 기록되지만, 속뜻으로는 교회가 교회를 낳고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후대에 전달되는 과정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았다’는 표현을 앞으로 만날 때에도 단순히 개인의 출생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 상태로부터 다음 교회 상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474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관계에도 하나의 중요한 기준을 더해 줍니다. 적어도 창5의 계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그 출발점을 분명히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된 태고교회’에 두고 있으며, 그 이후의 교회들이 ‘이 상태로부터’ 번성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5는 태고교회 자체의 천적 상태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 후대 교회들의 계승과 변화를 추적하는 하나의 분명한 교회적 계열입니다. 이것이 창4의 계열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는 계속 확인해야 하지만, 창5 자체의 출발점과 진행 방향은 이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AC.469-474에서 창5:1은 앞으로 펼쳐질 교회사의 기준점을 세웁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시고, 다시 사랑으로부터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완전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로부터 이후의 여러 교회가 이어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시작은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사람을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474 해설)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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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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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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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보여 준 바 있습니다. ‘형상’(image)은 ‘모양’(likeness)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모양’은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입니다. 천적 인간은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해설

AC.473은 우리가 흔히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거듭남의 서로 다른 상태로 구별합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을, ‘모양’은 천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를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인간을 나란히 놓은 구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앞선 상태와 더 완성된 상태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형상’이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주님의 질서를 반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지만, 아직 자신의 의지와 주님의 뜻 사이에서 싸움과 선택을 경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은 ‘모양’을 향한 준비입니다.

 

반면 ‘모양’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실제적인 닮음’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이유를 곧바로 밝힙니다. 천적 인간은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이 주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을 더욱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어, 그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선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472의 ‘창조하다’와 ‘만들다’의 구별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과 연결되고, 그 영적 인간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져’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양’이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조 → 형상 → 영적 인간’과 ‘만들다 → 모양 → 천적 인간’이라는 두 흐름은 서로 다른 설명이 아니라 동일한 거듭남의 질서를 서로 다른 말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자유는 주님과 반대되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따라 선을 기쁘게 행하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억지로 주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자신의 사랑이 점점 하나의 방향을 향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기쁨과 자유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결국 AC.473은 거듭남의 목적이 단지 ‘올바른 것을 아는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형상이 사랑과 삶 속에서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신앙과 진리가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고, 마침내 사람이 주님의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랑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모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73 해설)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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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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