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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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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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놋 땅에 거하였다’(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 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 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 mind’, 곧 ‘이해의 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거나 ‘가인의 신앙이 거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 표’ 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 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 보존된 신앙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 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 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 놋 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 해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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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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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9-15)

 

제목은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다가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읽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고,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생명과 방향을 잃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올 길을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인의 실패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70-396 요약입니다.

 

 

AC.370-396은 지난주에 읽은 AC.359-36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가인은 체어리티를 표상하는 아벨을 자기 아래 두려 했고,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려는 교리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AC.370-396은 바로 그 다음을 다룹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과의 결합을 잃은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신앙을 주님께서는 왜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가가 이번 리딩의 중심입니다.

 

AC.37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아벨’은 체어리티이므로 이 질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네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제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데까지 갔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C.371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퍼셉션과 양심’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에서 멀어진 뒤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잃었고, 훗날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형성된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영적 사람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뒤의 AC.393에서 다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AC.372-376에서는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이 설명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에서 ‘피’가 단수가 아니라 ‘피들’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며, 특히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을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과 생명을 원하지만, 미움은 영적으로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셨던 사실을 피가 알려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악에는 그 악 자체의 죄책이 들어 있으며 영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중요합니다. 이 문맥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시킨 ‘분열 또는 이단’의 교리적 토대를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이단’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직접 붙이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데 있지 않고, 둘을 분리한 뒤 신앙을 독립시키고 체어리티 위에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단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진리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가인이 갈았던 땅을 갈 수 있습니다.

 

AC.377-382에서는 그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도 끊어집니다. 신앙은 여전히 교리를 연구하고 논증하며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신앙은 생명 있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땅은 더 이상 그 힘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정교한 교리 체계로 만들어도 거기서는 참된 영적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AC.381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382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특히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진리를 찾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많이 찾아다니는 것과 진리 안에 실제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결국 사람에게 영적 방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AC.383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가인이 이제 자기 상태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한 회개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상태와도 다릅니다. AC.384는 바로 이 점에서 가인 안에 ‘선의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자기 악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받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본문 후반의 ‘가인의 보존’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AC.385-388에서는 가인이 자기 상태를 더 자세히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고 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진리에서도 떨어지고 선에서도 떨어지면 결국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처음에는 하나의 교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서는 인간의 영적 방향감각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AC.389-391에서는 가인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자기 자신, 곧 proprium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생각에서는 거짓이, 의지에서는 악이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에는 그 자체로 두려움과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밖에서 형벌을 만들어 가인에게 던지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사람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지옥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해치고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그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번 본문의 가장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오히려 보호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AC.392-396의 속뜻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열립니다. 가인을 보존한다는 것은 가인의 악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AC.393이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를 잃은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될 수 없었습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먼저 신앙의 지식이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하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의 지식’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AC.394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국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교리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셨다면 후대의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됩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잘못되었음에도 ‘가인’이 완전히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입니다. 주님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인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AC.395에서 ‘칠 배’는 이 보존이 거룩하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396은 마침내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표’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태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마나 몸에 실제로 어떤 신비한 표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의 속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AC.370-396 전체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신앙의 비참한 결과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아벨이 사라지고, 그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으며, 땅은 더 이상 힘을 내지 않고, 가인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게 됩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신앙이 더 강하고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가 생명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을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가인을 완전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렸어도 장차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신앙’이라는 통로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 순간부터 가인의 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으며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더욱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며,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작은 선과 진리까지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가인의 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신앙과 모든 진리를 함께 없애 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것까지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표는 악을 보호하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표입니다.

 

결국 AC.370-39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난주의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벨을 잃은 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을 보시고,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이번 리딩은 ‘가인의 형벌’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보존하여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에서 신앙으로’라는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표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70-396의 전체 흐름은 ‘체어리티의 소멸 → 죄책의 드러남 → 주님과의 결합 상실 → 영적 결실의 상실 → 선과 진리의 방향 상실 → 내적 고통과 악의 일부 인정 → 악과 거짓에서 오는 두려움 → 가인의 보존 → 신앙의 보존 →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의 보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깊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은 아벨을 죽이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에게도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가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의 표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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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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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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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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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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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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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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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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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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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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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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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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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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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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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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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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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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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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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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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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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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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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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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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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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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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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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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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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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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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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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13(D1)

 

2668, 5, 창4.5, 2026-09-13(D1)-주일예배(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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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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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 날’과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 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는 ‘왜 이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왜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일찍 명시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 처음부터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면 교회사적 혼란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인간적인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왜 이제야 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한 번호에서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왜 이러한 영적 실재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도록 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 심화 1)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안식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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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는 다른 뜻인가?

AC 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AC.83의 Potts 영어는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the sixth day”’가 아니라 정관사 ‘the’를 따옴표 밖에 두고 ‘“sixth day”’만 묶었을까요? 두 표기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또는 상응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sixth day라는 상징 자체를 특별히 강조한다’거나, 반대로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으면 ‘정관사까지 포함한 특정 상태 전체’를 강조한다고 구별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영어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영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 따라서 영어의 따옴표 위치에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에서는 어떤 명사구 가운데 핵심 표현만 인용하거나 특별한 용법으로 표시하면서 관사나 다른 문법 요소를 따옴표 밖에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옴표가 ‘the’를 포함했는지 여부만으로 속뜻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AC.83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옴표의 범위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날’을 문자적인 하루가 아닌 사람의 상태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며, 그 이유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the’가 따옴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이 이 문맥에서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영어 원문을 읽을 때에도 유용한 원칙입니다. Potts 영어의 따옴표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씀의 어떤 표현을 집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번역에서도 영어 원문이 실제로 따옴표로 표시한 핵심 표현을 한국어와 함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문의 따옴표 위치 자체를 새로운 상응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최종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어 번역의 문장부호보다 라틴어 원문을 우선해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는 매우 중요한 번역 자료이지만, 따옴표와 같은 편집 요소까지 모두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고 전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상의 중요한 의미 차이가 의심될 때에는 라틴어 어휘와 문법을 확인하고, 영어의 문장부호는 그다음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를 서로 다른 영적 상태나 서로 다른 상응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3에서 중요한 것은 ‘여섯째 날’이 단순한 시간 표시를 넘어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따옴표는 그 표현을 알아보도록 돕는 표지로 사용하되, 따옴표의 범위 자체에서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3 심화 1)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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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 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 AC.82 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과 ‘땅’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82만 가지고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AC를 계속 읽으면서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 벌하시고, 멸하시며, 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주님께서 실제로 악을 행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께서 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그러므로 악이나 파괴의 근원이 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는 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문자에 기록된 ‘내가 하리라’는 표현을 임의로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왜 말씀이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그 속뜻과 말씀의 표현 방식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와 함께 ‘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단순히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원리가 아니며, 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의 나타남과 신적 허용에 관한 원리를 사13:12 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 ‘이 구절의 뜻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 그 답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자에 기록된 표현을 임의로 ‘사실은 주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 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AC.82 심화 1)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들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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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창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 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 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과 ‘AC의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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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주님께서 직접 ‘이제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71 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 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 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 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허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여기까지의 글에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우리가 하나의 방식으로 채워 넣지 않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보고 기록하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알려졌는지는 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말씀인지, 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 또는 다른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 표현은 자신의 사역을 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에서 이러한 허락의 성격을 직접 밝혀 주는 설명을 만나면 그때 이해를 더 넓히면 됩니다. 지금은 그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AC.71 심화 1)

 

 

 

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의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삽입한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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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가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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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 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 AC.161은 그 답을 ‘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오직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AC.161이 ‘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행위’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구별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이 부분은 속 사람이고 이 부분은 겉 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삶, 하나의 의지, 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 이것이 AC.161이 말하는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 ‘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까지 했으며,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 ‘나라는 존재가 점점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 ‘주님께서 안에서 움직이시고 인간은 밖에서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천적·영적 생명과 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 ‘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 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 내 삶을 내 삶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 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 (AC.161 심화 1)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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