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가르침을 포함한 하나의 이단이었다는 사실은, 이 이름 자체에서도 어느 정도 분명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 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 에녹이 태어나고 성읍이 세워지는’ 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 분리된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 해설)

 

 

 

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bygrace.kr

 

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1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고 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어지는 것들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 이와 유사한 잉태와 출생들입니다. 그들은 이것들로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는데, 이는 이러한 것들도 서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 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 것이든 이단들의 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 언제나 이것 하나를 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 상태에서 무엇이 나왔으며 그것이 다시 무엇을 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 이단 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 이단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 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 해설)

 

 

 

AC.401, 창4:17, ‘에녹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시작되고 형성되기 시작한 교리적 가르침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에녹’(Enoch)이라 불린 것은 그 모든 교리적 또는 이단적

bygrace.kr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고, 그것이 ‘에녹’(Enoch)이라 불렸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쌓은 성읍’(the city which he built)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분열 또는 이단이 ‘에녹’(Enoch)이라 불렸기 때문에,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고 한 것입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그 자체로 신앙일 수 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곧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것을 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곧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 = 교리 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 계열의 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 계열의 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 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 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 얼마나 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 교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 해설)

 

 

 

AC.400, 창4:17,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 - 잉태와 출생과 계보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

bygrace.kr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bygrace.kr

 

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놋 땅에 거하였다’(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 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 땅에 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 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 mind’, 곧 ‘이해의 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거나 ‘가인의 신앙이 거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 선 밖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 표’ 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 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 보존된 신앙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 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 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쪽 놋 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 해설)

 

 

 

AC.398, 창4:16,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다 - 에덴 동쪽에 거한 가인의 속뜻’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bygrace.kr

 

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9-15)

 

제목은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다가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읽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고,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생명과 방향을 잃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올 길을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인의 실패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70-396 요약입니다.

 

 

AC.370-396은 지난주에 읽은 AC.359-36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가인은 체어리티를 표상하는 아벨을 자기 아래 두려 했고,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려는 교리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AC.370-396은 바로 그 다음을 다룹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과의 결합을 잃은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신앙을 주님께서는 왜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가가 이번 리딩의 중심입니다.

 

AC.37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아벨’은 체어리티이므로 이 질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네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제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데까지 갔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C.371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퍼셉션과 양심’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에서 멀어진 뒤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잃었고, 훗날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형성된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영적 사람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뒤의 AC.393에서 다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AC.372-376에서는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이 설명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에서 ‘피’가 단수가 아니라 ‘피들’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며, 특히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을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과 생명을 원하지만, 미움은 영적으로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셨던 사실을 피가 알려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악에는 그 악 자체의 죄책이 들어 있으며 영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중요합니다. 이 문맥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시킨 ‘분열 또는 이단’의 교리적 토대를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이단’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직접 붙이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데 있지 않고, 둘을 분리한 뒤 신앙을 독립시키고 체어리티 위에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단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진리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가인이 갈았던 땅을 갈 수 있습니다.

 

AC.377-382에서는 그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도 끊어집니다. 신앙은 여전히 교리를 연구하고 논증하며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신앙은 생명 있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땅은 더 이상 그 힘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정교한 교리 체계로 만들어도 거기서는 참된 영적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AC.381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382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특히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진리를 찾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많이 찾아다니는 것과 진리 안에 실제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결국 사람에게 영적 방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AC.383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가인이 이제 자기 상태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한 회개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상태와도 다릅니다. AC.384는 바로 이 점에서 가인 안에 ‘선의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자기 악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받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본문 후반의 ‘가인의 보존’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AC.385-388에서는 가인이 자기 상태를 더 자세히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고 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진리에서도 떨어지고 선에서도 떨어지면 결국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처음에는 하나의 교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서는 인간의 영적 방향감각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AC.389-391에서는 가인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자기 자신, 곧 proprium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생각에서는 거짓이, 의지에서는 악이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에는 그 자체로 두려움과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밖에서 형벌을 만들어 가인에게 던지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사람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지옥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해치고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그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번 본문의 가장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오히려 보호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AC.392-396의 속뜻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열립니다. 가인을 보존한다는 것은 가인의 악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AC.393이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를 잃은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될 수 없었습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먼저 신앙의 지식이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하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의 지식’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AC.394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국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교리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셨다면 후대의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됩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잘못되었음에도 ‘가인’이 완전히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입니다. 주님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인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AC.395에서 ‘칠 배’는 이 보존이 거룩하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396은 마침내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표’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태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마나 몸에 실제로 어떤 신비한 표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의 속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AC.370-396 전체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신앙의 비참한 결과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아벨이 사라지고, 그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으며, 땅은 더 이상 힘을 내지 않고, 가인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게 됩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신앙이 더 강하고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가 생명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을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가인을 완전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렸어도 장차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신앙’이라는 통로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 순간부터 가인의 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으며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더욱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며,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작은 선과 진리까지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가인의 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신앙과 모든 진리를 함께 없애 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것까지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표는 악을 보호하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표입니다.

 

결국 AC.370-39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난주의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벨을 잃은 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을 보시고,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이번 리딩은 ‘가인의 형벌’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보존하여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에서 신앙으로’라는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표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70-396의 전체 흐름은 ‘체어리티의 소멸 → 죄책의 드러남 → 주님과의 결합 상실 → 영적 결실의 상실 → 선과 진리의 방향 상실 → 내적 고통과 악의 일부 인정 → 악과 거짓에서 오는 두려움 → 가인의 보존 → 신앙의 보존 →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의 보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깊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은 아벨을 죽이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에게도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가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의 표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bygrace.kr

 

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bygrace.kr

 

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bygrace.kr

 

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bygrace.kr

 

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bygrace.kr

 

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bygrace.kr

 

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bygrace.kr

 

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bygrace.kr

 

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bygrace.kr

 

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bygrace.kr

 

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bygracetistory.tistory.com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bygrace.kr

 

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bygrace.kr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bygrace.kr

 

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bygrace.kr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bygrace.kr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bygrace.kr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bygrace.kr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bygrace.kr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bygrace.kr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bygrace.kr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bygrace.kr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bygrace.kr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bygrace.kr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bygrace.kr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bygrace.kr

 

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bygrace.kr

 

 

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bygrace.kr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bygrace.kr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bygrace.kr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13(D1)

 

2668, 5, 창4.5, 2026-09-13(D1)-주일예배(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pdf
1.32MB

 

 

 

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5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 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 ‘일곱째 날’과 ‘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천적 인간의 본성을 처음부터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 AC.85 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AC.85는 ‘왜 이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왜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일찍 명시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 인간의 수용 상태,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 속뜻의 보존, 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 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속뜻이 처음부터 명백하게 쓰여 있었다면 교회사적 혼란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왜 이제야 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왜 이러한 영적 실재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도록 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 앞으로 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 (AC.85 심화 1)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뜻이 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3 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는 다른 뜻인가?

 

AC 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AC.83의 Potts 영어는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the sixth day”’가 아니라 정관사 ‘the’를 따옴표 밖에 두고 ‘“sixth day”’만 묶었을까요? 두 표기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또는 상응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sixth day라는 상징 자체를 특별히 강조한다’거나, 반대로 ‘“the sixth day”’라고 되어 있으면 ‘정관사까지 포함한 특정 상태 전체’를 강조한다고 구별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영어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영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 따라서 영어의 따옴표 위치에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에서는 어떤 명사구 가운데 핵심 표현만 인용하거나 특별한 용법으로 표시하면서 관사나 다른 문법 요소를 따옴표 밖에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옴표가 ‘the’를 포함했는지 여부만으로 속뜻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AC.83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옴표의 범위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날’을 문자적인 하루가 아닌 사람의 상태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며, 그 이유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the’가 따옴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이 이 문맥에서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AC 영어 원문을 읽을 때에도 유용한 원칙입니다. Potts 영어의 따옴표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씀의 어떤 표현을 집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번역에서도 영어 원문이 실제로 따옴표로 표시한 핵심 표현을 한국어와 함께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문의 따옴표 위치 자체를 새로운 상응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최종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어 번역의 문장부호보다 라틴어 원문을 우선해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는 매우 중요한 번역 자료이지만, 따옴표와 같은 편집 요소까지 모두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고 전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번역상의 중요한 의미 차이가 의심될 때에는 라틴어 어휘와 문법을 확인하고, 영어의 문장부호는 그다음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를 서로 다른 영적 상태나 서로 다른 상응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3에서 중요한 것은 ‘여섯째 날’이 단순한 시간 표시를 넘어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따옴표는 그 표현을 알아보도록 돕는 표지로 사용하되, 따옴표의 범위 자체에서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3 심화 1)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2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 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 AC.82 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과 ‘땅’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82만 가지고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AC를 계속 읽다 보면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 벌하시고, 멸하시며, 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을 말씀의 외적인 나타남과 인간에게 보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께서 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 ‘그러므로 악이나 파괴의 근원이 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는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며, 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 appearance와 permission에 관한 전체 교리를 사13:12 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 ‘이 구절의 뜻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 그 답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심화에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자에 기록된 ‘내가 하리라’라는 표현을 임의로 ‘사실은 주님이 하지 않으셨다’고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 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단순히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 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AC.82 심화 1)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각 사람이 먼저 교회여야 하는 이유’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80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창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 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 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과 ‘AC의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