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9, AC.27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 9,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 9절 속뜻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이 비로소 속 사람, 겉 사람의 존재와, 주님의 것이 속 사람을 통해서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의 기억 안에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지식이 쌓여 분류되며, 이 밀려들어 오는 지식은 자연적이든, 영적, 천적이든 그의 기억-지식 가운데 머무르다가 주님에 의해 나중에 꺼내어져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한곳으로 모이는 천하의 물’인 ‘바다’가 바로 이 지식이며, ‘’은 ‘’, 곧 겉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27.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그리고 진리와 선 (truths and goods) 이라는 것이 있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from, or through) 겉 사람으로 흘러든다는 사실, 비록 그게 겉으로는 안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이런 걸 알게 될 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진리와 선(those truths and goods), 즉 참과 선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은 그의 기억 속으로 차곡차곡 쌓이며, 그 지식([scientifica])가운데로 분류되는데요, 그 이유는,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어지는 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아니면 천적이든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형태로 거기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들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바다’(seas)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뭍’(the dry [land])이라 하고, 지금은 이어지는 10절에서처럼 ‘땅’(earth)이라고 합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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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8, AC.26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Verse 8,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 8절 속뜻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가 들어 있어 ‘궁창’이라, ‘하늘’이라 합니다. 저녁은 불신앙, 아침은 신앙, 저녁은 사람의 것, 아침은 주님의 것, 저녁은 주님의 떠나심, 아침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은 때 혹은 상태를 말하며, 사람의 거듭남 과정 중 이 속 사람, 겉 사람 구별 단계를 두 번째 상태라 합니다.

 

 

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및 ‘날’(day)의 의미는 위 5절에서 보여드렸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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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7,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Verses 6, 7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 6, 7절 속뜻

 

속 사람, 겉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은 먼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신 후, 속 사람 안에 주님의 것, 곧 선과 진리를 두십니다. 겉 사람 안에는 사람의 것이 있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조차 사실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러는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시며, 주님의 섭리로 사람의 이 모든 오류와 탐욕을 주님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강제로 바로잡으시거나 끄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24. 하나님의 영, 즉 주님의 자비로 낮(day, 날) 안에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생긴 다음, 처음으로 빛이 비취는데요, 이 빛은 곧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선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 후, 주님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 간 일종의 어떤 구분, 구별을 두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간 구별이 됩니다. ‘궁창’(an expanse)은 속 사람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을,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은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하물며 속 사람이라는 것의 본성(nature) 및 퀄러티(quality)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는 속 사람, 겉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하기도 합니다. 그 자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들까지도 그동안 가라앉게 했기 때문이며, 심지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것들까지도 무슨 혼란스럽고 흐릿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먼저 이르시기를,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이어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처럼, 먼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하신 게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 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그 다음 관찰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즉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선과 진리라는 것, 오직 주님께만 속한 선과 진리라는 것이 이 속 사람이라는 것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겉 사람은 거듭나고 있을 때, 선을 행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아는 그런 본성 가운데 여전히 있지만, 사실은 주님에게 속한 이 선과 진리에 의해 인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일종의 구별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국에 관한 일종의 아르카눔(arcanum, 秘義, 감추어진 비밀, 신비, 복수는 아르카나 arcana)인데요, 인간은 자기 본성에 속한 것들에 의해, 그리고 감각에 속한 거짓과, 뿐만 아니라 온갖 탐욕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진리와 선 쪽으로 인도되며 구부러진다는 사실, 그래서 거듭남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일반적으로든 아니든,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즉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궁창, 즉 속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이지요.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25. ‘땅을 펼치며 하늘을 펴는’(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서에서 흔히 말하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입니다.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그리고 다시, 주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을 드러내어 말하는 데를 보면,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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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5, AC.22-23

5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Verse 5,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 5절 속뜻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저녁’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아침’ 상태가 되었다가 합니다. 저녁은 불신앙, 아침은 신앙, 저녁은 사람의 본성, 아침은 주님, 저녁은 주님의 떠나심, 아침은 주님의 오심입니다.

 

 

22. ‘저녁’(evening)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morning)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뒤따르는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한 종류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이 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man’s own)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반면, ‘아침’은 아래 시편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다니엘입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23. 말씀에서 ‘날’(day)을 가지고 때(time) 자체를 가리키곤 하는 것만큼 더 흔한 것은 없는데요, 이사야입니다.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 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을 가지고 때를 가리키곤 하기 때문에, 이는 또 그 때 그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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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4-5, AC.21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Verses 4, 5,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 4, 5절 속뜻

 

주님은 빛이시고, 선이십니다. 사람 안에 두 가지,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빛, 곧 낮이고, 사람에게 속한 것은 어둠, 곧 밤입니다.

 

 

21. 빛을 ‘선’(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the 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낮’(day)으로 비교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고요, 반면, 사람의 것(man’s own)은 뭐든지 다 ‘밤’(night)으로 비교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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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3, AC.20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Verse 3,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 3절 속뜻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랬던 그에게 선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 생명 그 자체, 빛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겉(external) 아닌 속(internal)을 향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을 뭔가 더 높은 것으로(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外的, altogether external, 겉)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것이 선이며, 그런 사랑들에 대해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환상(fancy)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알기 시작하는데요, 그것은 먼저 그는 자기의 선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 그가 빛 되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계시다(the Lord exists)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함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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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AC.17-19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Verse 2,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 2절 속뜻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상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어 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의 상태이지만, 주님은 자비하셔서 그런 그의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지식으로 된 ‘리메인스(remains)를 두시고, 마치 보석처럼 귀히 여기십니다. ‘남은 자(a remnant)라고도 하는 이 리메인스는 그의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the earth void and empty), 또 ‘땅’(the 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天的, heavenly) 생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18. ‘깊음 위’(The 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로 되어 있는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즉 무슨 ‘깊음’(a deep)과도 같은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군데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a black mass)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 즉 누구나 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남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듭남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the new man)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옛 사람(the old man)반드시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19.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to 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to 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킵니다.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즉 ‘남은 자’(a remnant)라 하는데,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에 속한 것들(external things)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day)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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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 AC.16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Verse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 1절 속뜻

 

사람의 거듭남 관련, ‘태초’는 그 첫 번째 시기를 말합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 ‘’,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antiquitatis])(32:7, 왕하19:25, 44:1)이라 하기도 하고,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신32:7)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왕하19:25)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시44:1)

 

‘영원’(days of eternity)(시25:6)이라 하기도 합니다.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시25:6)

 

‘태초’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the first period),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이 나오는 거의 모든곳에서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전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및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天, heaven)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을, ‘지’(地,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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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24(D1)-주일예배(2505, 눅13,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pdf
0.36MB

https://youtu.be/IHM4XUWZFes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능력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능력이며, 그러므로 상호 작용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은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할 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야 한다 하신다. (삶에 관한 교리 103)

 

 

사람에 대한 편견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을 비하했고, 문둥병자나 세리, 이방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병자나 장애인, 이방인들은 영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1-7)

 

주님의 제자들조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유전 죄가 많거나 스스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맹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을 모르면 누구나 다 맹인이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통해서만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직접 진흙에다 당신의 침을 섞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요,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 본문은 여러 다양한 번역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 그들의 피가 희생제물에 흘러들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그 번역들의 예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공동번역)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새번역)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이방인을 뜻하며,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이 흘리는 피는 이방인의 선을 뜻합니다. 피는 선이나 인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선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거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빌라도의 제물은 무엇입니까? 고대인들은 예배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예배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제물이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자기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 힘 있는 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힘없는 사람들의 선의와 진실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 지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조작과 거짓, 선동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가령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라든지 자유를 찾아 귀순한 두 청년을 판문점에서 강제 북송한 사건이라든지 말이지요. 그런데도 당시 힘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진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했는데요,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자의 진실을 짓밟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희생제물에 섞은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자신에게 닥쳐서는 안 되는 어떤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닥칠 때, 그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우월감이며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웃들에게 그런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는 이유가 뭘까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상에서의 삶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닥치든, 이웃에게 닥치든 시련이 있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살펴보고, 고칠 점이 있으며 고쳐야 합니다. 나와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제적인 회개는 자신을 검토하여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주님께 기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발견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그러고 나서 주님을 의지해 악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앞에서 빌라도에게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의 얘기가 이방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이 말씀은 신앙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그곳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이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로암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데요, 또 망대라고 하는 탑은 노아의 후손들이 쌓았던 바벨탑과 같은 의미로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열여덟은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열여덟(18)이라는 수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싸움을 뜻하는 6의 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영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총명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단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고, 그 교리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실로암의 망대를 만들다 치어 죽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욕망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죄가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단하고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첫 번째 회개는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이고, 두 번째 회개는 선 또는 의지의 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그리고 진리에다 자신의 생각을 섞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토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의 진리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면 선 또는 의지에 관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르게 이해하는데 진리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의 삶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이웃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들 스스로 저지른 죄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지난 수년을 겪었으며, 사실 아직도 꿈틀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실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이웃에게 영향을 주고, 이웃의 행동이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입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재앙과 환난을 짧게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3:8-9)

 

아멘

 

 

원본

2020-10-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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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상담이나 교제를 원하시는 분들께’ (2023/9/23)

 

※ 처음부터 저와 전화통화하시거나 저를 만나러 오시기 전, 사전에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아 이런 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러프한 자기소개입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장로교 통합에서 성장하다가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한 후에는 한동안 기업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직원으로 있었고, 그리고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한 후, 어느 교회 부사역자로 있다가 지난 2013년 개척, 목사 안수를 받은 침례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1961년생입니다.

 

오랫동안 침례교 신학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던 저는 그러나 무슨 신학 지식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닌,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영적 체험들을 좀 하게 되면서, '정원 목사'라는 분의 저서들을 통해 영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개척 초기 여러 신학적 비주류(?)들을 잠깐잠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떤 것을 좀 살피다 보면 어딘가 저하고는 안 맞아 거기에서 물러나 또 다른 것을 살피고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만 결과적으로 잠깐잠깐 살펴본 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무슨 이단, 삼단을 기웃거린 것은 아닙니다 ^^ 단지,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금새 신앙의 패러다임이 참 다양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의 종류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그중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제가 여러 곳을 두루 살핀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8월, 어느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수도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후 시작한 수도학교에서 저는 수도학교 3년간 많은 수도사, 성인들 및 수도 영성 관련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또 현재 수도사의 삶을 사시는 분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으며, 이 일로 저는 현 개신교 일반 목회 스타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별과 같이 빛나는 분들이시지만, 제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과 성인들은 '성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이며, 그러다가 2017년 늦가을,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6년 차인 지금은 이분의 저작들(Writings)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대한 글은 아래 제 블로그 해당 글을 참고하시고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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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에 가장 최근에 올린 따끈따끈한 글 또한 공유하오니 한번 읽어보시지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 나서...’ (2023/9/21)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나서...’ (2023/9/21) 어젯밤 늦게 아들이 저런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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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를 통해 스베덴보리를 좀 살피신 후에도 마음이 동하시면, 그때 비로소 제게 연락주시면 좋겠습니다. 경험상 이런 순서가 피차 좋을 듯 싶어서입니다 ^^ 제 이메일 주소는 bygrace.byun@gmail.com 이며, 이메일로 본인의 연락처 및 간략한 자기소개를 주시면, 제가 카톡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비록 교제라 할지라도 저는 주(主, dominion)가 번역의 일이라 그저 이 글을, 저 책을 읽어 보세요 정도의 코치 밖에는 못하지 싶습니다. 제 소명의 일도 있고, 그리고 제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은 것 같아서이며, 무엇보다도 제 역량(?)이 이제 겨우 첫 단계만 열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으로 시작했습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아래는 번역본입니다. 라틴어 전공자의 번역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그 원본이 라틴어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 역시 평생을 몸담았던 기존 신학적 입장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인공위성 발사 시, 로켓 추진체가 지면을 박차고 출발, 중력을 극복하고자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요, 주님과 천국을 사모함에 따른 내면 열어주심과 그 열린 창으로 천국 지혜를 부어주심이십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를 찾으시는 모든 분 역시, 동일한 은혜 안에 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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