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따라서‘천사는글자를보지않으니인간도원어를연구할필요가없다’는 것은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연구는낮은것이고속뜻만높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속뜻’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우리성경은틀렸고원어를아는내가진짜뜻을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보면진짜뜻은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영적의미니까단어의정확한뜻은중요하지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AC.65가 보여 주는 것은‘원어연구냐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어떤이들이하늘의첫입구뜰까지들려올라갔고,그곳에서저와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들은그곳에서는말씀속의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이해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리고그내적의미가너무도아름답고,연속의질서가너무도완전하며,그들을너무도깊이감동시켜서,그들은그것을‘영광’(glory)이라고불렀다고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첫입구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아마이렇게말씀을읽을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첫입구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어느층인가?첫째천국보다더낮은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낮은단계의하늘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첫입구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단어가전혀없고오직추상적인의미만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바로안쪽의영적의미이며그보다더깊은곳에는천적의미가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질서’입니다. 특히 ‘insuchorderof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언제나신적진리가사랑과결합되어나타나는상태이므로여기서도정확히그것을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내적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성경을읽을때마다반드시특정천사들이동시에그내적의미를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단어나글자를이해하지않는다니,그렇다면인간에게도단어와문법과원어는별로중요하지않은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천사들처럼말씀의내적의미를직접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첫입구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스베덴보리처럼영계를보고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성경’이라는 말보다‘theWord’,곧‘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자체에서는 분명히‘theinternalsenseoftheWord’,곧‘말씀의속뜻’을 말합니다.그리고 그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합니다.이어서 천사들이‘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the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과‘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읽는다’와‘말씀을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므로‘성경’이라는 말은 낮고‘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스베덴보리가‘the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우리가 흔히‘성경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the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그러나AC.64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속뜻이있는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지만다른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여기서‘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따라서‘the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속뜻’만이 아니라‘말씀’입니다.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아르카나 역시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theWord’를 우리말로‘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한국 교회에서‘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AC.64가‘말씀의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왜성경이아니라말씀이라고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스베덴보리가‘the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오히려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AC.64가 말하는 속뜻도,아르카나도,천사들의 지각도 모두‘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아르카나’는‘속뜻’과 같은 말일까요?또AC에서 자주 만나는‘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arcana’는 라틴어‘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그래서Arcana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천적인비밀들’, ‘천국의비밀들’정도의 뜻이 됩니다.다만 여기서‘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아르카나’와‘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AC.64는 먼저‘이것이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아르카나는너무많아서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다’고 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속뜻=그릇,아르카나=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1장이 좋은 예입니다.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그런데AC.6부터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빛과 어둠,물과 궁창,식물과 씨,해와 달과 별,물고기와 새와 짐승,하나님의 형상과‘심히좋았더라’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상징의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이것을뜻한다’, ‘물은저것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퍼셉션은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하나는내용이고하나는그것을알아보는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AC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AC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AC.64의 순서도 먼저‘말씀의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Arcana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AC.64에서‘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theinternalsenseoftheWord)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이는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그안에담긴아르카나는너무나많아서,그것들을모두풀어내려면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을것입니다.여기에서는다만극히일부만제시되었는데,그것도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theexternalman)에서속사람(theinternalman)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확인해주는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말씀을이렇게지각합니다.그들은문자속에있는것들,심지어단어하나의가까운의미조차도전혀알지못합니다.하물며말씀의역사서와예언서에매우자주등장하는나라,성읍,강,사람의이름들은더더욱알지못합니다.그들은오직그말들과이름들이의미하는것들만을관념으로가집니다. 그래서낙원에있는아담을통해그들은태고교회를지각하지만,그교회자체가아니라그교회의주님에대한신앙을지각합니다.노아를통해서는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남아아브람시대까지계속된교회를지각합니다.아브라함을통해서는그개인을전혀지각하지않고,그가표상한구원하는신앙을지각합니다.이와같이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는다’는 말을 ‘문자적의미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낮고속뜻은높으니이제문자는필요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관한여섯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theexternalmantothe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대한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노아도아브라함도실제인물이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을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이야기를이제역사로읽지말고상징으로만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아브라함처럼용감하게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AC가말하는‘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고다른성경책에는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AC.63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이것이사후천국에들어간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따라서AC.63만 가지고‘하늘,천적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그러므로 이어지는‘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하늘은장소가아니라오직마음의상태라는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천국은장소가아니고인간내면의상태일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하늘로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하늘,곧천적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하늘’과‘천적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사람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 인도됩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다음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AC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천적 인간,안식,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창세기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그 말씀을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살아있는사람이어떻게하늘로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그러나‘하늘,곧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다음장에서’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2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은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여섯단계로나눌수있으며,이것들을그의창조의날들(thedaysofhiscreation)이라고부릅니다.이는사람이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상태에서출발하여,처음에는겨우인간이라할만한어떤상태가되고,그렇게조금씩조금씩나아가마침내여섯째날에이르러하나님의형상(animageofGod)이되기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거듭남에속한시간들과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창조의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인간이라할수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거듭나지않았으니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인간이라할수없는’ 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littleand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지금셋째날인가,넷째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은 ‘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이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모든것이최종적으로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여섯째날에완성되었는데왜일곱째날이또필요한가?’, ‘모든사람이결국천적인간이되어야하는가?’, ‘영적천국에갈사람과천적천국에갈사람은처음부터정해져있는가?’ 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또 ‘일반적으로도,그리고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전체의역사에도정확히여섯단계가있고,한사람의생애에서도같은여섯단계가계속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창조의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의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여섯째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2
사람이영적일동안에는,그의다스림이겉사람에서속사람을향해이루어집니다.그래서여기서이렇게말하는것입니다.‘그들로바다의물고기와하늘의새와가축과온땅과땅에기는모든것을다스리게하자’(Letthemhavedominionoverthefishofthesea, andoverthefowloftheheavens, andoverthebeast, andoveralltheearth, andovereverycreepingthingthatcreepethupontheearth)그러나사람이천적이되어사랑으로선을행하게되면,그의다스림은속사람에서겉사람을향해이루어집니다.주님이시편에서자신을,그리고그분의모양인천적인간을이렇게묘사하신것처럼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themhavedominionoverthefishofthesea,andoverthefowloftheheavens,andoverthebeast,andoveralltheearth,andovereverycreepingthingthatcreepethupontheearth.”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그러므로여기에서는먼저‘짐승’(beasts)이언급되고,그다음에‘새’(fowl),그리고그뒤에‘바다의물고기’(fishofthesea)가언급됩니다.이는천적인간이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하기때문입니다.이점에서그는영적인간과다릅니다.영적인간을설명할때에는이해와신앙에속한‘물고기’(fishes)와‘새’(fowl)가먼저언급되고,그다음에‘짐승’(beasts)이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ofthe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AC.52는 바로 앞 AC.51에서 제시한 ‘영적인간은형상이고,천적인간은모양이다’라는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번에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스림이어느방향으로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무조건 ‘겉에서속으로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52는 오히려 두 방향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겉→ 속’과 ‘속→ 겉’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고 다른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창1:26의 순서가 그 증거가 됩니다. ‘그들로바다의물고기와하늘의새와가축과온땅과땅에기는모든것을다스리게하자.’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순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하며, 따라서 신앙과 관계되고,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는 영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40과 AC.44이후의 설명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물고기와 새는 기억 지식 및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되었고, 짐승들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었습니다. 이제 AC.52에서는 그 각각의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왜 그것들이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 목록 자체가 영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시8:6-8을 인용합니다. 거기서는 ‘모든소와양과들짐승’, 그다음에 ‘공중의새’, 마지막에 ‘바다의물고기’가 나옵니다. 창1:26에서는 물고기와 새가 짐승보다 먼저였는데,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이고 새와 물고기가 뒤따릅니다. AC.52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속한사랑에서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반면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이처럼 두 성경 구절의 배열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 차이를 읽어 냅니다.
여기서 ‘천적인간은사랑에서출발한다’는 말을 ‘천적인간은진리를생각하거나이해할필요가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2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없어지거나 진리가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새와 물고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옵니다. 따라서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지 이해에 속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을 ‘사랑없이머리로만신앙생활하는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이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한쪽은이성만있고다른쪽은사랑만있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AC.52의 구별은 훨씬 섬세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기존 해설에서처럼 ‘영적인간은옳기때문에하고,천적인간은좋아서자연스럽게한다’는 예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 인간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사랑으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든 선택에서 아무런 분별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2가 직접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출발하는가’와 ‘다스림의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무엇을 뜻할까요? 창1:26에는 사람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AC.52는 이것을 자연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문제로만 읽지 않고, 지금까지 물고기·새·짐승이 나타내 온 인간 안의 것들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다스림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어떤 질서 아래 놓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림=강압이아니라질서’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한 뒤, 시8의 ‘발아래’를 감각·습관·기억·행동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태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2는 ‘발’의 상응이나 ‘발아래둔다’의 세부 속뜻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목하는 것은 ‘짐승→ 새→ 물고기’라는 순서입니다. 따라서 인용 구절은 그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앞의 AC.47과 흥미로운 연결도 생깁니다. AC.4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창1:24와 25에서 생물들이 언급되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그냥 문체상의 변화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그 순서 변화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2에서도 다시 단어의 ‘배열’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단어 하나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 배열과 순서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의모든단어순서는각각반드시별도의상응을가진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AC.52에서 창1:26과 시8:6-8의 서로 다른 배열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AC.51과 함께 읽으면 이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2는 그 차이의 한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천적 인간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모든개인은먼저영적인간이되었다가반드시천적인간으로바뀐다’는 일직선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AC.51에서도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분명히 구별하며, 이후 AC에서도 이 구별은 계속 중요하게 유지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술에는 더 내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지만, 그것과 모든 사람의 영적 유형을 하나의 승급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52가 천적 인간에 대해 특별히 덧붙이는 표현은 ‘사랑으로선을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출발점은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하고, 그에 따라 말씀의 배열에서도 애정과 의지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나옵니다. 뒤이어 이해에 관계되는 새와 물고기가 놓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을 단순히 ‘이해에서사랑으로발전한다’고만 정리하는 것보다, 두 질서의 방향을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창1:26과 시8:6-8의 피조물 순서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AC.52는 그래서 아주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물고기,새,짐승’이라는 익숙한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을 때 인간의 내적 질서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앞의 ‘형상’과 ‘모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AC.49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라고 합니다.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AC.49는‘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독자들이감당할수없기때문’, ‘신비주의에빠질위험이있기때문’, ‘섭리적으로감추어두셨기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에게는‘태고교회사람들과주님께서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고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둘째,그는 그것을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직후‘이러한이유로그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이라고부르지않았다’고 이어집니다.따라서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사람’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영적눈으로보았다’, ‘내적시야가열렸다’와 같은 세부를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얼굴과얼굴’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아직은때가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주제에는더말할것이많이있지만,지금이자리에서는그것을다루지않겠다.’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곧‘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고,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이글이말하는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렇게 읽으면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그 경계를 존중하면서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6)
AC.49
태고교회,곧그교회의사람들과주님께서는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는데,그때주님은사람의모습으로나타나셨습니다.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이러한이유로,태고교회사람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man)이라는호칭으로부르지않았습니다.그들은주님에게서나온것들만을‘사람’(men)이라고했고,자기자신을그호칭으로부르는일은하지않았습니다.오직자기안에서인식된것들,곧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된모든사랑의선과신앙의진리만을‘사람의것’(ofman)이라했습니다.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These they said were “of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예언서들에서‘사람’(man)과‘인자’(thesonofman)는최고의뜻으로는주님을뜻하고,속뜻으로는지혜와총명을뜻하며,따라서거듭난모든사람을뜻하게됩니다.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of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As in Jeremiah:
이사야에서‘사람’(man)은속뜻으로는거듭난사람을,최고의뜻으로는유일한사람으로서의주님을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다니엘에게나타나셨을때에는‘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일컬음을받으셨습니다.이는같은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4] 주님께서는복음서에서도자신을자주‘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하시며,다니엘에서와같이영광가운데오실것을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여기‘하늘구름’(Thecloudsofheaven)은말씀의문자적의미를뜻하고,‘능력과큰영광’(powerandgreatglory)은말씀의속뜻을뜻합니다.이속뜻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며,바로여기서속뜻의능력과영광이나옵니다. The “cloudsof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andgreat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사람을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인간’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인간은사람이아니라는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모든선’과 ‘신앙의모든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참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인간자격이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참된영적생명의근원이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말할수있지만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땅을만들고그위에사람을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모양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사람들에게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큰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속뜻을깨닫는순간곧인자의재림이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사람만사람이고다른사람은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