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7
이말씀들안에거듭남에관한아르카나가들어있다는사실은,앞절에서땅이‘생물,가축,땅의짐승’(thelivingsoul, thebeast, andthewildanimaloftheearth)을낼것이라고말한반면,다음절에서는순서가바뀌어하나님께서‘땅의짐승,가축’(thewildanimaloftheearth, thebeast)을만드셨다고말하는데서도분명히드러납니다.이는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하기때문입니다.그래서거듭남은겉사람에서시작되어속사람으로나아갑니다.이런이유로여기다른순서가나오는것이며,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되는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livingsoul,thebeast,andthewildanimalofthe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wildanimaloftheearth,” and likewise “the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가축,땅의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짐승,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정도의어순차이에정말의미가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외적인행동을반복하면그것이차츰속사람을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자체는 ‘행동→ 습관→ 애정→ 속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땅의짐승을...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하다가하나님이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외적행동,이것은습관,이것은길들여진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것들이먼저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자기에게서인듯’과 ‘실제로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생각하고,내가선택하고,내가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자기에게서인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주님으로옮겨가는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주님으로주체가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모든어순변화에는반드시별개의속뜻이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5와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상응을 단순한‘영적암호표’처럼 생각하면‘물=진리’, ‘나무=지각’, ‘짐승=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그러나 실제로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자체가 좋은 예입니다.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짐승은 인간의‘애정’과 관계됩니다.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곰,늑대,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암송아지,양,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따라서‘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겔34:25에서는‘악한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따라서‘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이자연물의정확한정답은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이자연물이인간의어떤영역과관계되며,지금이문맥에서는그영역이어떤상태에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짐승의 경우에는‘애정과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온순한지 해로운지,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구절이니까좋은뜻,부정적인구절이니까나쁜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하나의 구절만 보고‘짐승은애정을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같은짐승이어떻게선한애정도악한애정도뜻할수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사람의애정(affections)을뜻한다는사실,곧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는사실은말씀의많은구절을보면분명한데요,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이렇게여기서전반적으로‘용들’(whales),‘과수’(fruittree),‘짐승’(wildanimal),‘가축’(beast),‘기는것’(creepingthing),‘나는새’(fowl)가함께언급되는데,이것들이사람안의살아있는원리들을뜻하지않는다면,여호와를찬양하라는부름을받을수없었을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tree,” “wildanimal,” the “beast,” “creeping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가축’(beasts)과‘땅의짐승’(wildanimalsoftheearth),또‘가축’(beasts)과‘들의짐승’(wildanimalsofthefield)을조심스럽게구별합니다.그럼에도사람안의선한것들은‘가축’(beasts)이라합니다.마찬가지로,하늘에서주님과가장가까운이들도‘생물’(animals)이라하는데,에스겔서와요한계시록에서모두그렇게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animalsoftheearth,” and “beasts” and “wildanimalsofthefield.”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또한복음이전파되는이들도‘피조물’(creatures)이라하는데,이는그들이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주3. 여기이단어는‘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아닌, 흠정역(theauthorizedversion)에서처럼‘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정확하게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준’(ζοόν, z¯oon)과, 라틴과영어의‘애니멀’은서로정확히대응하며, ‘생물’(alivingcreature)이라는의미에맞기때문입니다. 원전(theoriginal)해당구절들에서사용된단어는준이며, 만일‘비스트’ 사용을의도했다면썼을법한테르(θήρ, th¯er)나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living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씨와짐승의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씨는정확히무엇이고짐승의씨는정확히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두려워하지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앞에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인간안의살아있는것들을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있는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짐승은선한애정입니까,악한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그짐승의성질에따라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질서잡힌높은애정이고들짐승은본능적인낮은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살아있는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존재’라는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가까운하늘의존재들조차생물이라고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온천하에다니며만민에게복음을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creature’, 곧 ‘모든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창조되는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인간의애정을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단어를보았으니뜻은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는 18세기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하늘의비밀들’, 또는 ‘천국의아르카나’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arcana)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제목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읽을 때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천국,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깊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이며, 스베덴보리가 1749년부터 1756년까지 라틴어로 익명 출판했습니다. 전체 글 번호는 AC.1부터 AC.10837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각 절과 주요 표현의 속뜻을 밝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주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세계, 인간의 사후 상태, 천사들의 삶, 영적 유입, 자유, 섭리, 신앙과 체어리티, 거듭남 등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영적 세계관을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인물, 교훈, 명령 등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한 껍데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는 그 안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외적 형식이며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씀의 문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 교회와 천국의 질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들을 그는 ‘아르카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깊이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문자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읽습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부터 여섯 날에 걸쳐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던 인간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고,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창조’는 더 이상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창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자연계와 영계는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배후의 영적인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상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물과 땅, 나무와 열매,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진리와 관련되고, 물은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땅은 사람이나 교회의 외적·자연적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사물은언제나하나의의미만가진다’는 식의 고정된 상징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의미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가운데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뱀 역시 단순히 한 동물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이 내적 질서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나타냅니다.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애굽과 광야, 모세와 출애굽 역시 문자에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변화,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아담이교회인가?’, ‘왜물이진리와관계되는가?’, ‘왜애굽이나광야가인간내면의상태를나타내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각 단어에 그때그때 임의로 의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표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다시 선지서와 시편과 복음서로 이어지면서 비슷한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표상’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사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내면이 변화되고, 삶의 중심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욕망과 습관, 잘못된 생각과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조금씩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과 싸움을 거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려 할 때 조금씩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긴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단순히 ‘보이지않는마음’, 겉 사람을 ‘겉으로보이는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의 삶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자연적 차원이며,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입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질서 있게 나타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신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진리는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비슷해 보여 혼란스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 이해와 관계되고, 천적인 것은 선과 사랑, 의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공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되며 문맥에 따라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고, 어떤 곳에서는 교회의 서로 다른 특성을 설명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천국의 서로 다른 질서와 천사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도 AC를 읽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사후 삶과 영계에 관한 내용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적 시야가 열려 오랜 기간 천사들과 영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배정받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이루었는가와 깊이 관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스베덴보리를 단순히 ‘사후세계를많이본신비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의 중심이 신기한 영계 체험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 역시 결국 ‘그렇다면인간은지금이세상에서어떻게살아야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방향은 사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관한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강제로 행한 것은 인간 자신의 삶으로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 혼자 이루는 자기수련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방적인 변화도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인간 이해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인간 안에 악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아시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끄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아직 불완전한 동기와 생각이 남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이 갑자기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평생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무엇보다 중심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심리나 영적 성장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특히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한 것도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암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닙니다. 문자는 속뜻을 담고 있으며, 속뜻은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상응을 통해 연결되듯, 말씀의 문자와 그 안의 영적·천적 의미도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도 설명합니다. 인간이 말씀의 문자에서 사람 이름과 장소, 역사적 사건을 읽을 때 천사들은 그것들과 상응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천사가 서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자연계와 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거룩하게 읽을 때, 비록 그 속뜻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 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모든 상응을 암기하고, 모든 속뜻을 지식으로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자기 상태를 비추어 보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제 삶에서 선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삶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1만 개가 넘는 글 번호에 걸쳐 같은 개념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깊어지고, 하나의 성경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상응’, ‘표상’, ‘리메인스’, ‘퍼셉션’, ‘인플럭스’, ‘proprium’, ‘영적인간’, ‘천적인간’, ‘속사람’, ‘겉사람’ 등 처음 접하면 낯선 개념들도 계속 등장합니다. 한두 번 읽어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념들이 점차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 타락과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애굽,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하나의 주제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제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처음 접하는 독자가 그 깊은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이어 해설을 붙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심화를 통해 개념과 성경 인용, 관련 AC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한 글 번호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AC전체의 흐름과 연결하여 읽고,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는 ChatGPT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번역 표현을 비교하고, 긴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며, 관련 개념을 정리하고, 제가 이해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지는 파일들에는 ‘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hatGPT자체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문과 말씀, 그리고 AC전체의 문맥을 더 세밀하게 살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독자가 말씀과 본문을 직접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소개 역시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안에우리가지금까지보지못했던더깊은질서가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직접 읽어 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설명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성경 본문을 잠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거듭남, 천국의 질서와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무슨뜻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말씀이내삶에서어떻게살아지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천국의 질서를 아무리 자세히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더욱 주님께 향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라는 제목의 ‘아르카나’는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빛을 구하며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했던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단순히옛사람들의이야기가아니구나.이것이교회만의이야기도아니구나.이것은지금내안에서일어나고있는일이구나.그리고그안에서주님께서일하고계시는구나.’ 바로 그 순간, 감추어져 있던 것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첫걸음으로 창세기 1장, AC.1-66부터 시작합니다. 창1에서는 ‘혼돈하고공허하며흑암이깊음위에’ 있던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새 창조를 거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져 가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여섯 날의 과정과 창1만의 여러 주제들은 다음 ‘창1,AC.1-66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소개’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성경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이는 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본 하늘의 질서, 곧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를 하나씩 열어 보이려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