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 20)

 

AC.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하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은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45:3, 4) I will give thee the treasures of darkness, and hidden riches of secret places, that thou mayest know that I, Jehovah, who call thee by thy name, am the God of Israel. For Jacob my servant’s sake, and Israel my chosen, I have even called thee by thy name, I have surnamed thee, and thou hast not known me. (Isa. 45:3–4)

 

이 구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 by name)과 ‘칭호를 주는 것’(surname)은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In this passage, to “call by 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 Again: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라고 하는데, 앞뒤 구절에서 분명한 것처럼 이것은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signifying to become of another character, as appears from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Again: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성질을 아셨음을 뜻합니다. 같은 선지서의 또 다른 곳에서는, denoting that he knew their quality. Again in the same prophet: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 모두를 아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meaning that he knew them all. In the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라고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 but qualities; 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 but his quality.

 

해설

AC.145는 AC.144에서 설명한 ‘이름’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합니다. AC.144에서는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5에서는 이것이 단지 고대인의 언어 습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연이어 인용되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은 모두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과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사45:3-4에서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네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하시고,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칭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칭호를 주는 것’이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를 알고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질과 그가 맡게 될 쓰임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62:2의 ‘새 이름’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단순한 명칭이라면 새 이름은 호칭의 변경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름이 성질을 함축한다면 새 이름은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의미는 앞뒤 구절에서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름의 의미를 단어 하나에서 임의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놓인 문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43:1과 사40:26도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그들의 성질을 아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의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씀 역시 그 모두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께서 무수한 존재들의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깊어집니다. 사데 교회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단순히 천국의 명부에 사람들의 지상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 역시 사람의 외적인 신분이나 명칭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와 성질 가운데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용들을 거친 뒤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AC.145 전체의 결론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질이 알려집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강한 진술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을 식별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천국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규정하는 핵심이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외적인 명칭보다 내적인 상태가 본질적인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창2:19-20으로 가져오면 AC.142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지 각각의 동물에게 명칭을 붙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4가 고대인의 이름 짓는 관습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면, AC.145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같은 원리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AC.142-145는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결국 다시 proprium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질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AC.142가 말하듯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흥미로운 성경 상징 하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AC.145)

 

 

 

AC.146, 창2:19-20, ‘선과 진리를 알고도 proprium으로 기울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 by name)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은, 고대인들이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로 이해했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그 이름에 고유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자녀들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이 그 이름으로 지칭되는 것들의 근원과 성질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것’(calling by name)으로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AC.144는 AC.142에서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왜 그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이 되는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름은 대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명칭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그래서 ‘보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seeing and calling by name)을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름 짓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과 딸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지금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독자는 우선 ‘고대인의 이름은 그 사람의 기원과 성질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 설명은 AC.142의 창2:19-20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셨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동물들의 명칭을 정했다는 장면만을 속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고, 사람이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것이 ‘이름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AC.144는 바로 이 해석의 언어적·고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름’, ‘본질’, ‘근원’, ‘성질’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소리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름이 중요하게 사용될 때에는 오늘날의 명칭 개념만 가지고 읽기보다, 그 이름이 그 대상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은 하나의 고정된 뜻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144가 말하는 핵심은 이름이 본질과 근원과 성질을 함축한다는 것이지, 이름 하나마다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의 표현은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의미를 살필 때에도 그 이름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어떤 사건 가운데 등장하는지, 그리고 말씀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43과 AC.144를 나란히 놓으면 고대인들의 언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을 말하면서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4에서는 그들이 이름을 통하여 사물과 사람의 본질과 성질을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그 이름이 단순히 외적인 사물과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질을 드러내는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인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4는 창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해설인 동시에, 앞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읽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본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저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C.142에서 사람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AC.144)

 

 

 

AC.145, 창2:19-20, ‘말씀에서 이름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AC.143, 창2:19-20, ‘짐승들이 애정을 의미하는 이유 - 천국적인 관념과 영계의 표상’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AC.143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또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그러한 동물들로 표상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일반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서 전체가 그러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이 속뜻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짐승들입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짐승들을 의미합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 확증한 바 있으므로(AC.45-46), 여기서는 더 이상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은 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 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 온순하니 선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 곧 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 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창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bygrace.kr

 

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앞의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나무’라는 대상 자체에 언제 어디서나 ‘퍼셉션’이라는 하나의 뜻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나무 = 퍼셉션’, ‘동쪽 = 주님’과 같은 대응 관계만 모아 놓고 그것을 모든 본문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상응은 일종의 암호표가 되고 말씀 해석은 그 암호를 대입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103은 그렇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라도 지금 무엇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에 따라 그 대상이 나타내는 것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한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단어 하나만 떼어 볼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전체 문맥과 그곳에서 다루는 사람의 상태와 생명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창2:9에서 다루는 사람은 천적 인간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 사람 자신도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99).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앞의 설명과 동떨어진 새로운 상응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으며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안에서 ‘나무들’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03은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것은 여러 상응의 뜻을 많이 외워서 말씀을 마음대로 풀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뜻을 본문에 먼저 대입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 문맥과 질서 안에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응에 관한 지식조차 말씀보다 앞설 수 없으며, 우리가 만든 해석의 공식이 말씀을 지배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98-99에서 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의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듯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서도 자기 지식과 추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 것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성과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03의 짧은 설명은 상응을 기계적인 해석 도구로 만드는 일을 막으면서, 동시에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기보다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겸손히 따라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무는 퍼셉션을 뜻한다’는 한 가지 상응만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 때 우리는 상응을 고정된 공식으로 다루는 대신, 말씀의 문맥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의미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AC.103 해설)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

AC.103 심화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

bygrace.kr

 

 

 

 

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bygrace.kr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의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삽입한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것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본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소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책의 구성 자체를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안내입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70부터는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말씀 본문의 속뜻을 해설하는 가운데 계속 삽입하면 내용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에서 각 장의 앞뒤에 길게 나타나는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기록은 본문 해설과 무관하게 덧붙인 여담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말씀의 본문에 대한 연속적인 해설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AC.67에서 밝힌 대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을 독자가 계속 알아 갈 수 있도록 따로 배열한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용들이 본문 해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소개되는 내용들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부터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과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을 계속 ‘허락’의 언어로 말해 왔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로 덧붙이는 것까지 같은 언어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메인 해설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 기록과 배열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획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1을 알고 나면 이후 AC의 구성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성경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는 해설과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이 서로 경쟁하는 두 주제가 아니라, 말씀의 해설은 그 연속성을 지키고 다른 삶에 관한 내용도 흩어지지 않도록 각각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장의 처음이나 끝에서 영계에 관한 긴 기록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본문과 무관한 삽입물로 건너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아 의도적으로 함께 제시한 내용으로 읽어야 합니다. (AC.71 해설)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에 따라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

bygrace.kr

 

 

 

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bygrace.kr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어떠한지, 곧 어떻게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죽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8

제가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이 말할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이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제가 신빙성을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밖의 여러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에 단념하지 않습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그러한 증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이며,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할 사람도 있고, 자신이 신빙성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의심할 사람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이 쉽게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하면서 이 기록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론들을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체험이 공상이 아니라는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 그가 내놓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아무 검토 없이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예상되는 반론들을 자신도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밝히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특히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는 세 표현은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여기서는 거기에 ‘느꼈다’를 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자신의 기록을 단순한 사상이나 추론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의 증언으로 제시합니다. 이 단계에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증언을 미리 참이라고 증명하거나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어떤 성격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지를 정확히 읽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AC.68은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읽는 독자의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론이 있을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저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반론들이 있음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의 기록은 이 한 문장의 선언 위에서 읽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의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AC.68 해설)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고 시대에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

bygrace.kr

 

AC.67, 창2 앞,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삶’은 무엇이며, 그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 삶’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AC.67에서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말할 ‘다른 삶’은 자신의 추측이나 철학적 사변으로 제시되는 세계가 아니라, 직접 듣고 보도록 허락되었다고 그 자신이 증언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의 삶이 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다른 삶의 본성’을 아는 것과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다루고 있다면, 그 실재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AC를 읽기 전에 영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기록 자체가 독자에게 그 삶을 차례로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완성된 영계 지식을 요구한 뒤 속뜻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도 함께 열어 보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그가 밝히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두 가지를 함께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삶이 어떠한가를 알아 가는 동시에, 왜 그러한 지식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 뒤에 영계에 관한 기록이 이어지는 것은 창2의 해설과 무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삶만이 인간 존재의 전부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말씀의 속뜻이 향하고 있는 영적 삶의 실재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AC.67 한 번호에서 완전히 닫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되어 앞으로 계속 답을 얻게 되는 질문입니다. AC.67에서 우선 붙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은 서로 떨어진 두 주제가 아니며,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이 속뜻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른 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그의 증언을 따라가며 확인하게 됩니다. (AC.67 심화 1)

 

 

 

AC.67, 창2 앞,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왜 ‘다른 삶’, 곧 사후의 삶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먼저 밝히려 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르카나를 알기 위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한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창2 해설과 무관하게 삽입된 별도의 사후세계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밝힐 내용을 추론이나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67은 이후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의 성격을 미리 밝혀 주는 서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앞으로 나오는 내용을 스베덴보리가 철학적으로 구성한 사후세계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주님의 허락 아래 듣고 보았다고 증언하는 내용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증언의 진위를 여기서 별도로 논증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기록을 어떤 성격의 것으로 제시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67은 아직 ‘다른 삶의 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뒤, 이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영계의 구조나 사후 인간의 상태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읽으면서 독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차례로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이 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 해설)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bygrace.kr

 

 

 

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제가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이 말할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이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할 것

bygrace.kr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사19:5-6, 학2:6-7, 슥14:7-8, 시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심화 1)

 

 

 

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과 진리라고 여기다가, 새로 잉태되면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더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간다는 이런 내적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인지, 영계에서 관찰한 것인지, 아니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과정인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AC.20의 각 단계를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자서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깊은 내적 변화와 영적 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생각과 정서와 꿈을 세밀하게 관찰했다는 사실은 그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학 저술기로 넘어가기 전후의 개인 기록은 그가 자기 사랑, 명예욕, 지적 자부심, 주님에 대한 의존 같은 문제를 매우 깊이 씨름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에게 거듭남이 순전히 책상 위의 추상적인 주제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AC.20은 스베덴보리가 자기에게서 직접 겪은 단계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한 걸음 너무 나갑니다. AC.20 자체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1:3의 속뜻을 해설하면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첫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 영적 경험이 이런 설명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과, AC.20의 교리를 그의 자전적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감각이 열린 뒤 오랜 기간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 자체에서도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과 사후 인간의 상태,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성질에 관한 경험을 매우 자주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과 정서가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흘러들고 악과 거짓은 지옥적 영향과 연결된다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20의 여섯 날의 각 단계는 영계에서 여러 사람을 관찰하여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계 경험을 교리의 중요한 확증으로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석 자체는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보았기 때문에 창1을 그렇게 해석했다’고 한 방향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이며 가장 직접적인 층위가 바로 말씀입니다. AC는 처음부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인간이 임의로 상징을 붙여 해석하는 문서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 담겨 있으며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신적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 낮과 밤, 물, 땅, 식물, 광명체, 동물, 사람은 서로 흩어진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하나의 내적 질서를 이룹니다. AC.20의 첫 빛 역시 이 말씀의 속뜻 안에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개인 경험, 영계 경험, 말씀의 속뜻이라는 세 가지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까요? 셋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 똑같은 무게의 ‘세 가지 자료원’이라고 기계적으로 병렬시키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말씀과 그 속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은 그가 설명하는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고 확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그가 이런 문제를 단순한 관념으로만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20의 교리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그의 개인 체험에 두는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 부여한 위치와도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AC.20의 문장은 스베덴보리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심리 경험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 교리 전체와 연결됩니다. 선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어느 특정한 위기나 회심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말씀의 속뜻 안에서 제시된 거듭남의 보편적인 질서로 읽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애가 이 설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개인 기록을 읽어 보면, 훗날 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것’, 자기 지성과 공로, 주님께 대한 의존 같은 문제들이 그에게도 실제적인 문제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거듭남의 문제와 무관한 관찰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가 그의 개인적 체험이고 어디서부터가 말씀의 계시적 해설인지를 우리가 임의로 확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질문에 가장 안전하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가 열린 상태에서 오랫동안 영적 세계를 경험했다고 증언했고, 자신의 내적 삶에서도 깊은 변화를 겪었으며,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려 그 안에서 인간 거듭남의 질서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배경을 함께 고려할 수 있지만, AC.20 자체는 스베덴보리 개인의 체험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인간의 내적 변화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했는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bygrace.kr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