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론, 성경관 등 일정한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는 필요합니다. 모든 가르침이 똑같이 참일 수는 없으며,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교리적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것과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시는 것은 같은 것인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와 교회, 교육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지식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교리를 배우고도 악하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교리를 배웠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무슨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거짓을 믿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 진리를 만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외적인 교리는 정통이어도 내면에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참된 이단’이라는 다소 역설적 표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단은 단순히 어떤 교리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선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리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원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는 그 신앙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이 역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가장 강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교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에 그대로 대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비춥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고백 자체를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삶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믿는 것은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use)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멸시, 권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도 스베덴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결국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의 교리가 틀렸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하며 지옥에 간다’는 판단으로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검토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특히 이 원리를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해, 속죄론, 사후세계, 성경의 속뜻 등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전통적 교리 체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짜 이단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칼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가? 이 가르침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가?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가?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삶을 살게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부합하는지도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집단에 먼저 이름표를 붙이기보다 진리와 삶의 열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결국 ‘누구’보다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가 이단인가?’보다 ‘무엇이 사람을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깊은 차원의 이탈은 ‘교단 명부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왜곡하며,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서 삶이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금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진리인 줄 알고 붙드는 사람보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을 위해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이 더 깊은 어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단의 이름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최종적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선까지 부정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지점이 ‘이단’이라는 매우 날카로운 말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

 

 

 

SL.5, ‘좌파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주님은 정치적 좌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가 ‘좌파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들이대면 의

bygrace.kr

 

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라는 말로 구별한다고 설명합니다.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세 표현 모두 나이가 어린 존재를 가리키므로,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들이 사랑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먼저 젖먹이의 사랑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먹이가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자신의 사랑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머니나 유모와 맺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유아의 사랑은 부모를 향한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별도의 단계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말합니다. 세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 하나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품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단순히 선생님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0은 교사에 대한 복종을 체어리티의 정의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의 관계를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어린아이가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단계를 실제 나이에 따라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적 성장표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30의 직접적인 설명은 말씀에서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영적 상태를 실제 나이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 다른 단계에 있는 사람보다 반드시 더 거룩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 구별은 렘44:7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됩니다. 그 말씀에서는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유아와 젖먹이’까지 끊어 버려 남은 것이 없게 하려느냐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리와 선에 관한 표현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에 관한 표현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그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는 말씀에서 단순히 같은 연령대를 반복하여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AC.430에서 이들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내며, 어린아이는 특별히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구별을 알면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 표현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0 심화 2)

 

 

 

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

bygrace.kr

 

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이 사람은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이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의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심화 1)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 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 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더욱 굳게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의 ‘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 진리가 점차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으로 자리 잡아 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 말한다’는 것과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11 심화 1)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때 :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 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임을 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와 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의 ‘생명 있는 것들’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 있는 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과 ‘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 해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bygrace.kr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bygrace.kr

 

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도 그러하며,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 곧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를 창5 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 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 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 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 해설)

 

 

 

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bygrace.kr

 

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14수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45:9-17)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Ps. 45:9-17)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딸’(daughter)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들도 선들로 말미암아 ‘딸들’(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과 ‘예루살렘의 딸’(daughter of Jerusalem)(사37:22 및 그 밖의 많은 곳), 또한 ‘내 백성의 딸들’(daughters of my people)(사22:4), ‘다시스의 딸’(daughter of Tarshish)(사23:10), ‘시돈의 딸’(daughter of Sidon)(12절), 그리고 ‘들에 있는 딸들’(daughters in the field)(겔26:6, 8)이라 합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12)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해설

AC.490은 앞의 AC.489에서 ‘아들들은 진리, 딸들은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것 가운데 특별히 ‘딸들’이 왜 선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짧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드러냅니다. 말씀에서 ‘딸’은 단순히 여성인 자녀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 더 나아가 그러한 선을 지닌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45편에서 왕의 딸과 왕후가 금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한 모습은 단순히 왕궁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90은 이를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선과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겉모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진리를 통하여 드러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의복과 금과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딸의 모습은 교회 안의 선이 진리와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러므로 교회들도 선들로 말미암아 딸들이라 한다’는 설명입니다.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 ‘예루살렘의 딸’(daughter of Jerusalem) 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교회가 ‘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인 의인화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진리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가 사랑의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을 때, 진리는 더 이상 본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딸’이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아들’과 ‘딸’, 곧 진리와 선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 ‘두로의 딸’, ‘시돈의 딸’처럼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에 ‘딸’이 붙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지역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나 교회에 속한 것을 그 안의 선이라는 측면에서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딸’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문맥에 따라 ‘어떤 선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은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을 계속 산출했습니다. AC.489가 ‘아들들’을 진리로 설명했다면 AC.490은 ‘딸들’을 선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그 선이 사랑과 신앙의 선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살아나며 계속해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AC.490 해설)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bygrace.kr

 

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옛날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사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에서는,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시144:11, 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아들들’(sons of the stranger)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하고, ‘우리 아들들’(our sons)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our daughters)은 선의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맹인들’(blind)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먹은 자들’(deaf)은 진리에 순종하게 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렘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자녀들’(children)과 ‘아들들’(sons)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사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은 주님을 의미하고, ‘자녀들’은 거듭난 사람들, 곧 선과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실제로 그 구절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또 이사야에서는,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사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desolate)은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하고,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married wife)은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또, where “sons” signify truths.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렘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고대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슥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AC.489는 AC.486에서 짧게 제시했던 ‘아들들은 진리, 딸들은 선’이라는 상응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대응표를 하나 더 익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첫 문단의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의 창5:3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자연적 생명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담에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와 선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AC.486과 연결하여 이 진리와 선이 그들이 ‘퍼셉션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은 단순히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하여 보유하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83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교회들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 자체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리와 선이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었습니다.

 

사60:3-5가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흩어졌던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회 안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모여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고 딸들은 안기어 온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진리와 선이 다시 풍성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144편의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언제나 참된 진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느냐에 따라 참된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의미하지만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전체 문맥과 그 근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43:6, 8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맹인’이 보고 ‘귀먹은 자’가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회복될 때 그는 비로소 영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결되고, ‘듣는 것’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들들과 딸들의 귀환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54:1의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과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은 ‘아들’이 실제 혈육의 자녀를 넘어 교회에 속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로, 후자를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떤 여인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 교회 안에서 진리가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창5의 족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이 각각 교회를 나타내며, 그 연수는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AC.489는 그 교회들이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표현까지 열어 줍니다. ‘이름’은 교회를, ‘날들과 해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변화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놓이면 창5의 족보는 단순한 인명과 수명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가 이어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계속 산출되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출생’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선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말은 태고교회의 생명력이 단순히 오래 존속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적 결실을 맺었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89 해설)

 

 

 

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bygrace.kr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

‘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고, ‘해들’(years)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며,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해설

AC.486은 매우 짧지만 창5의 계보를 읽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 열쇠를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창5:4에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속뜻에서는 이 ‘날들’과 ‘해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교회의 내적 상태와 그 안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달력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거쳐 간 영적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앞의 AC.482에서 이미 창5의 연수는 문자 그대로의 세속적 연수보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AC.486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들’과 ‘해들’ 사이에도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해들’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날들과 해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과 특별의 관계에 있습니다. ‘날들’이 한 교회가 지나온 상태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표현이라면, ‘해들’은 그 전체 안에 포함된 보다 구체적인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AC.482에서 가장 작은 시간과 가장 큰 시간 사이에도 유사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과 연결됩니다. 전체가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일반적인 상태 안에는 여러 특별한 상태들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자녀를 낳았다는 족보의 표현이지만, 속뜻에서는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한 교회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여러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AC.486은 단순히 ‘그들이 알고 있던 진리와 선’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 직접 연결됩니다. 당시 여러 교회를 구별하는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각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외부에서 배워 기억 속에 저장한 교리적 지식이라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퍼셉션했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낳음’이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로 이어지는 것을 ‘낳음’으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한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 역시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출생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말씀에서 영적인 생명이 실제 생명의 출생과 성장이라는 언어로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람과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영적 생명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5:4의 한 구절 안에는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구체적인 상태들, 그리고 그 상태 가운데서 생겨난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가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긴 생애와 많은 자녀가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일정한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풍성해지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AC.486 해설)

 

 

 

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bygrace.kr

 

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