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영’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천사적 영’을 단순히 ‘천사를 다른 관점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 ‘영들’(spirits),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따라서 ‘angelic 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천사적 영’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 ‘영’, ‘천사적 영’, ‘천사’ 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 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 따라서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 ‘영’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AC.41에서는 왜 굳이 ‘천사적 영’을 언급했을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 ‘천사적 영이 정확히 어느 계층에 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의 중심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 ‘천사적 영은 천사인가 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왜 그의 생각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하는가?’라는 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AC.41에서 ‘천사적 영’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천사적 영’을 ‘천사와 완전히 같은 존재를 달리 부르는 말’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 영 사이의 별도 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은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을 가진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서, AC.41의 핵심인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생각과 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살아 있게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 이후 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영’, ‘천사적 영’,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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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두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의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영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늘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의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두 영과 두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한 명’,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한 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천사와 두 영이 있으므로 내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과 두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영과 두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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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짧은 표현이 상당히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살아가는 하나의 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신앙,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듯 사후에도 그 차이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먼저 ‘영’(spirit)이라는 말 자체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이라고 할 때 언제나 한 종류의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이 말은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고, 천사와 구별하여 아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직 천사가 되지 못한 중간 단계의 존재’라고 고정해서 읽으면 문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어서 처음 영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 후 사람은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말은 일상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물질적인 몸을 벗은 인간이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서의 자기 생명을 계속 살아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과 관련하여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이자 중간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일정한 과정을 밟는 일종의 대기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에 겉과 속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사람이 지상생활 중 외적인 이유로 감추거나 조절했던 것들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른 실제 상태가 점차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영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준비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으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벗어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계의 생물학적 종을 분류하듯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과 애정, 신앙과 사고, 삶의 목적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영들의 상태도 다양하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두 종류의 종족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선과 진리를 기뻐하는 애정이 삶의 중심을 이룬 사람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며 악과 거짓을 기뻐하는 사람은 사후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로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죽으면 영이 되고, 일정한 과정을 마치면 영이라는 종에서 천사라는 종으로 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사랑과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악령이나 마귀도 처음부터 별도의 종족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할 때 ‘인간, 영, 천사’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존재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통하여 연속됩니다.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격과 삶이 죽음으로 끊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영계에는 그렇게 많은 공동체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무한히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애정과 쓰임을 가집니다.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악한 영들의 경우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과 욕망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의 똑같은 악으로 이루어진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비슷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질에 따라 결합합니다. 결국 영계에서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는 외부에서 임의로 배치되는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장소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실제로 장소와 환경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지만, 그 외적인 환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로 맞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의 ‘거리’와 ‘가까움’ 역시 자연계의 물리적 거리와 똑같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태의 유사성과 차이가 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AC를 읽다 보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들에 관한 표현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거나 돕고, 어떤 영들은 인간의 특정한 기억이나 애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어떤 영들은 악한 욕망과 거짓을 자극하려 합니다. 또 여러 행성의 영들에 관한 기록이나 인간 몸의 기관들과 상응하는 영적 공동체들에 관한 기록처럼 오늘의 독자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AC.5의 ‘여러 종류의 영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유입되는 것과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영이 내 머릿속에 생각을 넣으므로 나는 그 생각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러 유입 가운데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고, 악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악한 영이 시켰다’며 책임을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택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 어떤 종류의 영이 나에게 붙어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특별한 영계 교통이 허락되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거나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영적 현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배우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5의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내적 삶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지상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삶이 죽음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하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이름을 가졌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존재들을 몇 개의 고정된 종류로 분류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랑과 애정과 사고의 상태가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로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영계에는 여러 종족이 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사후에도 인간의 고유한 삶과 사랑의 성질이 계속되며, 그 차이에 따라 영적 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와 질서가 존재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AC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게 될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 곧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5 심화 2)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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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 심화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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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되 주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건 좀... (2025/4/16)

 
이런 제목이 좀 터무니없거나 자극적이십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주, 아니 거의 만연하다시피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제 주변, 나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 어떤 분들보다도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마르실 지경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씀 중에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 하십니다. 이상하지요? 또 가령 지방회 같은 델 참석해 보면, 분명 수십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모이셨음에도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고 하는 얘긴 요만큼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걸 꼭 말을 해야 아나 인가요? 지방회뿐이 아닙니다. 무슨 이만한, 그러니까 전국 규모의 무슨 집회나 세미나에 가봐도 이런저런 방법이나 간증, 그러니까 뭘 어떻게 했더니 어떻게 부흥하고 성장했다는 등이 주된 내용이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천국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슨 언급이 없습니다. 새삼 뭘 그런 걸 다... 인가요? 오히려 좀 뻘쭘해지나요? 참 이상합니다... 천국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빼면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런 거, 그러니까 가령, 나는 전도 몇 명 했고, 선교지 몇 번 나갔고, 어디를 얼만큼 몇 교회를 후원하거나 교회 몇 개를 세웠고, 지금까지 몇 교회 주의 종들을 섬겼고, 무슨 헌신과 헌금을 얼마나 했고... 등등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이미 오래전에 영접기도한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 프리패스지... 같은 이런 생각, 이런 오해와 착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천국은 예수 영접기도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며, 특히 그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라 사랑, 교회 사랑 등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아니,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런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하다 보면, 교회 사랑하다 보면 주님이 알아서 그걸 주님 사랑한 걸로 쳐주셔서 하늘 상급 많아지겠지 하시는 의식과 태도, 동기로 하신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고스란히 하늘 상급이 되려면, 이런 행위들은 주님을 더욱 사랑한 결과로 당연히 뒤따르는 행위일 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만 주님을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천사들한테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가운데 주님 주신 쓰임새의 삶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 주시는 지고한(inmost) 행복 가운데 들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276-283) 중 278번 글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순진함은 지혜를 거처로 삼는다고 하고, 천사는 그 순진한 정도만큼만 지혜롭다고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순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한 것도 제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그 근원을 주께 돌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 모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모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다. 선을 사랑하는 것, 즉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들이 알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대인관계에서 그들은 절대 악한 의도로 행동하지 않으며, 오직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의도로 행동한다. 악한 의도로 행동하는 것을 그들은 교활함이라 부르며, 뱀의 독처럼 기피한다. 그것이 순진함에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그 결과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기억에 저장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다. 즉 말씀대로 의도하고 실천한다. 그들에게는 의지 자체가 기억인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대체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분별력 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이들을 가리킨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 y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이것이 ‘지혜로운 순진함’이라 부르는 그 순진함이다.
 
[3] 순진함이란, 어떤 선함도 그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두 주께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를 받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를 이루는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 근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외적 순진성, 나이 들어서는 내적 순진성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전자를 통해 후자에 이르고, 다시 후자에서 전자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늙으면 몸도 줄어들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번엔 지혜로운 아이, 즉 천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아이’란 높은 의미로는 천사를 뜻한다. 성서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뜻하고, ‘노인’은 순진한 상태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주192
 
 
주192. 말씀에서 ‘어린아이들’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 (AC.5608). ‘젖먹이들’도 마찬가지다 (AC.3183). ‘노인’은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으로는 지혜를 의미한다 (AC.3183, 6524).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며, 그때 그의 지혜 안에 이노센스가 있어, 그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3183, 5608). //
 
 
천사들은 금식기도, 산기도, 안수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무슨 무슨 작정기도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저런 거 한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기도든 뭐든 주님을 움직여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동기로는 하지 마세요. 설령,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전에 없던 신령한 은사가 마침내 생겼다 해도 사실은 별로 안 좋은 겁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계급장이 된다면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런 은혜를 주셨어요 한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 된다기보다는 뭐랄까, 주님 보시기에 좀 아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육으로는 세상과, 영으로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역시 천사들처럼 천국과, 그리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천사 공부 많이 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을 사시기 바랍니다. 거듭 당부드립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가득 찬 나라이며, 주님의 신성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해에서 열과 빛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좀 확장하면, 지상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원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원수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그의 안에 깃드신 주님 신성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령, 이재명 같은 사람한테도 말이죠. 비록 그와 같은 사람들한테 예의 바르게 대했다가 해를 입더라도 말입니다. 아래 유다서를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유1:9)
 
비록 천사장 미가엘일지라도 비방하는 판결을 삼가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마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심지어 지옥도 사랑하셔서 여전히 돌보시는 분임을 미가엘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집회, 평화적 시위에서도 우리는 만에 하나 적의, 증오, 복수 같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게 되며, 우리를 향한 천국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이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싶으셔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 끝까지 주님의 전능, 전지, 편재, 그리고 사랑과 섭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붙들어 보시면 압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시야에 다른 건 안 들어옵니다. 제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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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양’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낮’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밤’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09. 2023-03-06(D2)-매일예배(2426, 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pdf
0.67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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