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표상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심화 3)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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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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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AC.143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또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그러한 동물들로 표상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일반적으로 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서 전체가 그러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이 속뜻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짐승들입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짐승들을 의미합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을 통해 확증한 바 있으므로(AC.45-46), 여기서는 더 이상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은 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 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 온순하니 선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 곧 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 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창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AC.144, 창2:19-20, ‘이름으로 부르다 - 그 본질과 성질을 알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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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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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앞의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나무’라는 대상 자체에 언제 어디서나 ‘퍼셉션’이라는 하나의 뜻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나무 = 퍼셉션’, ‘동쪽 = 주님’과 같은 대응 관계만 모아 놓고 그것을 모든 본문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상응은 일종의 암호표가 되고 말씀 해석은 그 암호를 대입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103은 그렇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라도 지금 무엇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에 따라 그 대상이 나타내는 것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한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단어 하나만 떼어 볼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전체 문맥과 그곳에서 다루는 사람의 상태와 생명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창2:9에서 다루는 사람은 천적 인간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 사람 자신도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99).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앞의 설명과 동떨어진 새로운 상응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으며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안에서 ‘나무들’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03은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것은 여러 상응의 뜻을 많이 외워서 말씀을 마음대로 풀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뜻을 본문에 먼저 대입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 문맥과 질서 안에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응에 관한 지식조차 말씀보다 앞설 수 없으며, 우리가 만든 해석의 공식이 말씀을 지배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98-99에서 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의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듯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서도 자기 지식과 추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 것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성과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03의 짧은 설명은 상응을 기계적인 해석 도구로 만드는 일을 막으면서, 동시에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기보다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겸손히 따라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무는 퍼셉션을 뜻한다’는 한 가지 상응만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 때 우리는 상응을 고정된 공식으로 다루는 대신, 말씀의 문맥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의미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AC.103 해설)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

AC.103 심화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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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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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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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곧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선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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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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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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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사19:5-6, 학2:6-7, 슥14:7-8, 시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심화 1)

 

 

 

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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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8:14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과 ‘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 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단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 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과 ‘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때는 저녁이고, 주님의 오심은 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은 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과 ‘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 저녁은 언제나 무조건 A, 아침은 언제나 무조건 B라고 정의되었으므로 말씀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같은 뜻을 대입하면 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 없는 저녁의 상태 가운데 주님이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된다’는 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 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 심화 1)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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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자연계의 어떤 것이 단지 우연히 영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기능과 쓰임을 통하여 영적인 것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정하는 상징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미를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은 개인의 연상이나 취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질서에서 나옵니다.

 

사람 자신도 상응을 이해하는 중요한 예가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정서를 드러내고, 말은 생각을 표현하며, 행동은 의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미소가 기쁨을 나타내고 눈물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물론 이러한 예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상응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도 이러한 관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빛, 물, 불, 산, 나무, 강, 집, 길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은 단순히 사전식으로 하나의 숨은 뜻을 부여받은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의 성질과 기능, 그리고 말씀 전체에서의 쓰임과 문맥을 따라 영적인 것과의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공부한다는 것은 ‘빛은 무조건 이것, 물은 무조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상응표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표상’과 ‘상응’은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말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의식이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낼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그러한 표상과 의미가 가능하게 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데 더 적합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것이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자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비가 왔으니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셨다거나, 우연히 어떤 동물을 보았으니 그것이 내 미래를 예고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다릅니다. 상응은 점술이나 징조 해석의 도구가 아닙니다. 특히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 전체의 연결과 영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그 상응을 밝히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응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연결에서 끝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이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의 영적인 질서를 보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를 하나씩 해설하면서 우리는 상응이 실제 말씀 해석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4에서는 상응의 모든 체계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과 그 안의 영적인 것 사이에는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있는 관계가 있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4 심화 2)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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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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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더구나 이 표현은 AC.1에도 이미 등장했고, AC.2에서는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라는 말이 뒤따르면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전체적으로’는 말씀이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에서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등에 관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개별적으로나’라고 덧붙입니다. 말씀의 큰 이야기와 중심 주제만 내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에도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의 해설 방식이 왜 그토록 세밀한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한 장 전체가 어떤 내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몇몇 중요한 구절만 속뜻을 가지고 나머지는 그 이야기를 이어 주는 장식이나 배경이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물과 장소, 행동과 사물, 숫자와 방향, 반복되는 표현들까지 하나씩 살핍니다. 그렇게 하는 근거가 바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내적인 것을 품고 있다는 그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개별적으로’를 각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상응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를 읽어 가면 같은 말도 문맥과 연결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드러나는 방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세부에까지 속뜻이 있다’는 것과 ‘모든 단어를 고정된 상응 사전으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AC.2가 직접 선언하는 말씀의 성격이고, 후자는 우리가 그 선언을 잘못 사용하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석 방식입니다.

 

그리고 AC.2에서는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가 특별히 주님과 연결됩니다.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의 궁극적인 초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단어에는 숨은 뜻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내적인 것들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AC의 방대한 세부 해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까지 내적인 것을 품고 있으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큰 주제만 요약하지 않고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따라가며 해설합니다. (AC.2 심화 1)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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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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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물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곰,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겔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이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이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이 문맥에서는 그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뜻,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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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또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피조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주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 = 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고 짐승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 앞에 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 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 인간 안의 살아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까, 악한 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 그 짐승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 = 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 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 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 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 질서 잡힌 높은 애정이고 들짐승은 본능적인 낮은 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 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 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 ‘살아 있는 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 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 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 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조차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 creature’, 곧 ‘모든 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 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를 보았으니 뜻은 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6,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심화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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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순서가 말해 주는 거듭남 :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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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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