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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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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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는 18세기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하늘의 비밀들’, 또는 ‘천국의 아르카나’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arcana)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제목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읽을 때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천국,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깊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이며, 스베덴보리가 1749년부터 1756년까지 라틴어로 익명 출판했습니다. 전체 글 번호는 AC.1부터 AC.10837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각 절과 주요 표현의 속뜻을 밝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주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세계, 인간의 사후 상태, 천사들의 삶, 영적 유입, 자유, 섭리, 신앙과 체어리티, 거듭남 등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영적 세계관을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인물, 교훈, 명령 등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한 껍데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는 그 안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외적 형식이며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씀의 문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 교회와 천국의 질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들을 그는 ‘아르카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깊이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문자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읽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부터 여섯 날에 걸쳐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던 인간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고,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창조’는 더 이상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자연계와 영계는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배후의 영적인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상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물과 땅, 나무와 열매,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진리와 관련되고, 물은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땅은 사람이나 교회의 외적·자연적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의미만 가진다’는 식의 고정된 상징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의미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가운데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뱀 역시 단순히 한 동물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이 내적 질서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나타냅니다.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애굽과 광야, 모세와 출애굽 역시 문자에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변화,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아담이 교회인가?’, ‘왜 물이 진리와 관계되는가?’, ‘왜 애굽이나 광야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각 단어에 그때그때 임의로 의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표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다시 선지서와 시편과 복음서로 이어지면서 비슷한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표상’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사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내면이 변화되고, 삶의 중심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욕망과 습관, 잘못된 생각과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조금씩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과 싸움을 거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려 할 때 조금씩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긴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마음’, 겉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의 삶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자연적 차원이며,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입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질서 있게 나타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신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진리는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비슷해 보여 혼란스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 이해와 관계되고, 천적인 것은 선과 사랑, 의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공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되며 문맥에 따라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고, 어떤 곳에서는 교회의 서로 다른 특성을 설명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천국의 서로 다른 질서와 천사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도 AC를 읽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사후 삶과 영계에 관한 내용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적 시야가 열려 오랜 기간 천사들과 영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배정받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이루었는가와 깊이 관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스베덴보리를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본 신비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의 중심이 신기한 영계 체험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 역시 결국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방향은 사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관한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강제로 행한 것은 인간 자신의 삶으로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 혼자 이루는 자기수련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방적인 변화도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인간 이해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인간 안에 악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아시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끄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아직 불완전한 동기와 생각이 남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이 갑자기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평생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무엇보다 중심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심리나 영적 성장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특히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한 것도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 암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닙니다. 문자는 속뜻을 담고 있으며, 속뜻은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상응을 통해 연결되듯, 말씀의 문자와 그 안의 영적·천적 의미도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도 설명합니다. 인간이 말씀의 문자에서 사람 이름과 장소, 역사적 사건을 읽을 때 천사들은 그것들과 상응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천사가 서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자연계와 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거룩하게 읽을 때, 비록 그 속뜻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 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모든 상응을 암기하고, 모든 속뜻을 지식으로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자기 상태를 비추어 보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제 삶에서 선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삶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1만 개가 넘는 글 번호에 걸쳐 같은 개념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깊어지고, 하나의 성경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상응’, ‘표상’, ‘리메인스’, ‘퍼셉션’, ‘인플럭스’, ‘proprium’,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속 사람’, ‘겉 사람’ 등 처음 접하면 낯선 개념들도 계속 등장합니다. 한두 번 읽어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념들이 점차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 타락과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애굽,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하나의 주제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제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처음 접하는 독자가 그 깊은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이어 해설을 붙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심화를 통해 개념과 성경 인용, 관련 AC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한 글 번호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AC 전체의 흐름과 연결하여 읽고,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는 ChatGPT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번역 표현을 비교하고, 긴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며, 관련 개념을 정리하고, 제가 이해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지는 파일들에는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hatGPT 자체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문과 말씀, 그리고 AC 전체의 문맥을 더 세밀하게 살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독자가 말씀과 본문을 직접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소개 역시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더 깊은 질서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직접 읽어 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설명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성경 본문을 잠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거듭남, 천국의 질서와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 무슨 뜻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이 내 삶에서 어떻게 살아지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천국의 질서를 아무리 자세히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더욱 주님께 향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는 제목의 ‘아르카나’는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빛을 구하며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했던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것이 교회만의 이야기도 아니구나. 이것은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구나.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는구나.’ 바로 그 순간, 감추어져 있던 것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첫걸음으로 창세기 1장, AC.1-66부터 시작합니다. 창1에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새 창조를 거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져 가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여섯 날의 과정과 창1만의 여러 주제들은 다음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소개’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성경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이는 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본 하늘의 질서, 곧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를 하나씩 열어 보이려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이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한 번역 문서가 아닙니다. 이 원고는 스베덴보리의 대표 저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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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란 무엇인가 (2025/7/22)

 

오늘은 ‘상응’(相應, correspondence)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처음 알게 된 8년 전만 해도 ‘상응’이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냥 일상 용어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 그 밑바탕에 깔린, 그러니까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원리라는 건 몰랐다는 말씀인데요, 그의 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김은경 역)을 중심으로 그 관련 내용들을 좀 살펴보면,

 

먼저, 서문입니다.

 

...이 말씀(마24:29-31)을 글자 그대로(the sense of the letter) 해석하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이라 부르는 마지막 날에 이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리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며, 주의 징조가 하늘에 나타나고, 주께서 나팔 든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믿게 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구절에서 예언되었듯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파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긴다고 믿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세부에 숨겨진 속뜻(the arcana)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속뜻(an internal sense)이 있다.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보면, 자연적 차원, 세상의 일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뜻은 영적 차원, 천국의 일을 다루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각 구절만이 아니라 각 낱말에도 해당되는 사실이다.주3 성경은 그 지극히 세밀한 부분까지 내적인 뜻을 담게 할 목적으로 오직 상응(correspondences)으로만 쓰였기 때문이다.주4

 

주3.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속뜻, 혹은 영적인 뜻이 있다 (AC.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 여기 이 HH.1, AC.1143 같은 표기는 각각 Heaven and Hell 1번 글, Arcana Coelestia 1143번 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국제적 약어가 있어 그 약어로 보통은 표기합니다. 마치 신구약 성경을 그 약어로 표기하듯 말입니다.

 

주4. 말씀은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 안에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어떤 영적인 의미들을 갖게 된다 (AC.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저자 서문, HH.1)

 

다음은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 간에는 어떤 상응이 존재한다’(HH.87-102)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인지 모르고 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으로 인해 천국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 것이 그의 외적 감각(the external senses)을 즐겁게 하고, 그의 성향(the natural longings)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적 감각(the internal senses)과 정신(the mind)을 만족케 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너무 고차원적이라고 거부한다. 고대인들(the ancient people)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상응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이 가장 중요한 지식이었다. 상응의 지식에 의해 그들은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를 얻었고, 상응의 지식은 천사들의 지식이므로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상응 지식에 의해 천국과 교통했다. 가장 오래전 사람들인 태고인(太古人)들은 천적인 사람들(天的, celestial men)이었으므로 천사들처럼 상응 자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천사와 대화했고, 주님도 자주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지금은 상응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상실되어 상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주72

 

주72. 상응의 지식은 그 밖의 다른 지식을 얼마나 초월하는가 (AC.4280) 상응 지식은 태고인의 지식 중 첫째였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잊어버린 지식이 되었다 (AC.3021, 3419, 4280, 4749, 4844, 4964, 4966, 6004, 7729, 10252). 상응 지식은 동방 여러 나라들과 이집트에서 번창했다 (AC.5702, 6692, 7097, 7779, 9391, 10407).

(HH.87)

 

그러므로 상응의 개념과 본질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a perception of what correspondence is)을 모르면, 영계(the spiritual world), 영계에서 자연계(the natural world)로 흘러드는 입류(inflow), 영계와 자연계의 상관관계, 사람의 영혼(the spirit of man, which is called the soul)과 그것이 몸에 작용하는 방식, 사람의 사후 상태(man’s state after death) 등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응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나올 내용의 기초이기도 하다.

(HH.88)

 

먼저 상응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자연계 전체는 영계에 상응하는데, 단지 일반적으로만이 아니라 세부적인 모든 것이 상응한다. 따라서 영계로부터 나와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계와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생겨나고(springs from) 영계에 의해 지속된다(has permanent existence from)는 것이다. 이 관계는 정확히 결과와 원인의 관계와 같다. 여기서 자연계는 태양 아래 그 빛과 열을 받는 모든 것과 그 전체 범위를 말한다. 거기서 형성돼 지속되는 모든 것이 자연계에 속한다. 그러나 영계는 천국을 말하고, 천국의 모든 것은 영계에 속한다.

(HH.89)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위 57번 글 참조)이자 자연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영계와 자연계가 공존한다. 그의 마음에 속하는 내적 차원(the interior things), 즉 사고력과 의지(understanding and will)에 관계되는 것은 그의 영계를 이루고, 몸에 속하는 외적 차원, 즉 몸의 감각과 행동에 관계되는 것은 자연계를 이룬다. 따라서 그의 영계에서 비롯된 그의 자연계에 속한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영계의 상응이다.

(HH.90)

 

사람의 얼굴을 보면 상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꾸밈없는 얼굴에는 그 마음의 모든 성정(all the affections of the mind)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얼굴을 마음의 표지(the index of the mind)라 부른다. 즉 얼굴은 자연계에 드러난, 사람의 영계인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사람의 사고력에 속한 것(what pertains to the understanding)은 그의 말에 나타나고, 의지에 속한 것은 몸의 행동에 나타난다. 따라서 얼굴이건 말이나 행동이건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상응이다.

(HH.91)

 

이러한 관찰로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속 사람은 영적이고, 겉 사람은 자연적이다. 또한 양쪽은 천국이 이 세상과 다른 것처럼 서로 구별된다. 나아가서 겉 사람, 즉 자연적 사람 안에 형성되고 지속되는(take place and come forth) 모든 것은 속 사람, 즉 영적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HH.92)

 

속 사람, 즉 영적 사람과 겉 사람, 즉 자연적 사람 간의 상응에 대해서는 이만 줄이고, 이제 천국 전체와 사람의 각 부분과의 상응을 다루겠다.

(HH.93)

 

앞에서 천국에 관해 말한 것을 상기해 보자. 천국 전체는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이라 불린다. 천국을 이루는 천사 공동체들은 사람의 사지와 기관과 내장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머리, 가슴, 팔 등과 그 안의 세부를 이루는 공동체가 각기 다르다 (위 59 - 72 참조). 결과적으로, 천국의 어느 한 부위를 이루는 공동체는 사람의 그 부위에 상응한다. 즉 천국의 머리 부분에 있는 공동체는 사람의 머리에, 가슴은 가슴에, 팔은 팔에, 이런 식으로 몸 각 부분이 천국과 상응한다. 이 상응으로 인해 사람은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permanent existence) 것이다. 사람에게는 천국 아닌 어떤 존재의 근원도 없기 때문이다.

(HH.94)

 

또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어 각각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불린다는 것도 앞서 밝혔다. 천적 나라는 사람의 심장과 심장에 관계된 몸 안의 모든 것에 상응한다. 영적 나라는 폐와 폐에 관계된 몸 안의 모든 것에 상응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렇게 천국의 두 나라로 말미암은 심장과 폐는, 심장은 동맥과 정맥을 통해, 폐는 신경과 운동섬유를 통해 연합하여 모든 작동과 움직임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의 영적 사람, 즉 영계에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의지이고, 또 하나는 사고력(the understanding)이다. 의지는 선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사고력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다스린다. 이 두 나라는 실제로 몸속 심장과 폐에 상응한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천적 나라는 천국의 의지 부분(the voluntary part)이고, 거기서는 사랑의 선이 주관한다. 영적 나라는 천국의 지성(the intellectual part)을 담당하고, 거기서는 진리가 다스린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심장과 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 상응으로 인해 성경 말씀의 심장은 의지와 사랑의 선을, 폐의 호흡은 사고력과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 같은 이유로, 애정이 실제 심장 안에 있지도, 거기서 나오지도 않는데도 사람들은 애정이 심장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주73

 

주73. 심장과 폐와 가장 큰 사람, 곧 천국 간 상응, 경험으로부터 (AC.3883–3896) 심장은 천적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폐는 영적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AC.3885–3887).심장의 것과 같은, 그리고 폐의 것과 같은, 그러나 내적인(interior) 맥박과 호흡이 천국에 있다 (AC.3884, 3885, 3887). 심장의 펄스는 사랑의 상태에 따라, 그리고 호흡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다 (AC.3886, 3887, 3889). 말씀에서 ‘심장’은 의지를, 그리고 ‘심장으로부터’는 의지로부터를 의미한다 (AC.2930, 7542, 8910, 9113, 10336). 말씀에서 ‘심장’은 또한 사랑을, 그리고 ‘심장으로부터’는 사랑으로부터를 의미한다 (AC.7542, 9050, 10336).

(HH.95)

 

천국의 두 나라와 심장과 폐와의 상응은 천국과 사람 간의 일반적인 상응이다. 그보다 덜 일반적인 상응이 몸의 사지와 기관과 내장에 이루어진다.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머리 부분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덕목(every good)에서 남보다 뛰어나다. 즉 그들은 사랑, 평화, 순수, 지혜, 지성,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과 행복 속에 있다. 이런 것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에 속하는 것들로 유입되고, 그에 상응한다.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가슴 부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과 신앙의 선에 거하고, 위와 같은 식으로 사람의 가슴에 유입되며, 그에 상응한다. 한편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허리와 생식 기관(the organs devoted to generation)을 이루는 사람들은 결혼애(marriage love) 안에 산다. 발 부위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의 가장 낮은 선인 영적-자연적 선 안에 있다. 팔과 손 부위에 있는 이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의 능력을, 눈 부위의 사람들은 사고력을, 귀 부위 사람들은 주의력과 복종을, 코 부위 사람들은 지각을, 입과 혀 부위 사람들은 사고와 지각을 이용한 대화 능력을 담당한다. 신장 부위 사람들은 조사하고, 분별하고, 교정하는 진리 안에 거한다. 간장, 췌장, 비장 부위 사람들은 선과 진리의 다양한 정화 능력 안에 있다. 그 밖에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같은 부위에 유입되고, 그 부위와 상응하는 것이다. 천국의 이러한 입류는 몸의 각 부위의 기능과 쓰임새 안으로 들어간다. 쓰임새는 영계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연계에 있는 사물을 통해 형체를 갖추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결과 안에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인해 상응이 존재한다.

(HH.96)

 

이런 까닭에, 성경에 나오는 사지, 기관, 내장에도 위와 같은 의미가 있다. 성경 안의 모든 것은 상응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리’는 지성과 지혜, ‘가슴’은 이웃 사랑, ‘허리’는 결혼애, ‘팔과 손’은 진리의 힘, ‘발’은 자연성, ‘눈’은 사고 능력, ‘코’는 감지 능력(perception), ‘귀’는 순종, ‘콩팥’은 진리의 검토를 각각 의미한다.주74 또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도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보통 ‘머리가 있다’고 하고, 인자한 사람을 ‘가슴이 푸근하다’, 사고력이 뛰어나면, ‘눈이 날카롭다’, 느낌으로 알아채기를 잘하면, ‘냄새를 잘 맡는다’, 능력이 있으면, ‘팔이 길다’, 사랑으로 바라는 것을 ‘심장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일반적 표현이 상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영계에서 온 것이다.

 

주74. 말씀에서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 (AC.3934, 10081, 10087). ‘허리’와 생식 기관(organs of generation)은 결혼애(結婚愛, marriage love)를 의미한다 (AC.3021, 4280, 4462, 5050–5052). ‘팔’과 ‘손’은 진리의 능력을 의미한다 (AC.878, 3091, 4931–4937, 6947, 7205, 10019). ‘발’은 자연성(the natural)을 의미한다 (AC.2162, 3147, 3761, 3986, 4280, 4938–4952). ‘눈’은 이해(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 이성)를 의미한다 (AC.2701, 4403–4421, 4523–4534, 6923, 9051, 10569). ‘코’는 퍼셉션(perception, 지각하는 능력, 통찰력)을 의미한다 (AC.3577, 4624, 4625, 4748, 5621, 8286, 10054, 10292). ‘귀’는 순종, 복종을 의미한다 (AC.2542, 3869, 4523, 4653, 5017, 7216, 8361, 8990, 9311, 9397, 10061). ‘콩팥’은 진리에 관한 정밀한 조사와 교정을 의미한다 (AC.5380–5386, 10032).

(HH.97)

 

천국의 모든 것이 사람의 모든 것과 그렇게 상응한다는 것을 나는 많은 체험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체험이 셀 수 없이 많아서 이것이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모든 체험을 다 기록할 필요도 없지만, 분량 때문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이라는 책에 상응, 표상(representations), 영계에서 자연계로의 입류(influx), 영과 육의 상호 작용 등을 다룬 부분에 이미 기록한 바 있다.주75

 

주75. 몸의 모든 지체와 가장 큰 사람, 곧 천국 간 상응,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경험에 의한 기록 (AC.3021, 3624–3649, 3741–3750, 3883–3895, 4039–4054, 4218–4228, 4318–4331, 4403–4421, 4523–4533, 4622–4633, 4652–4660, 4791–4805, 4931–4953, 5050–5061, 5171–5189, 5377–5396, 5552–5573, 5711–5727, 10030). 영계에서 자연계로, 즉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의 입류 및 영혼에서 몸의 모든 것으로의 입류, 경험을 통한 기록 (AC.6053–6058, 6189–6215, 6307–6326, 6466–6495, 6598–6626). 영혼과 육체 간 상호 작용, 경험에 의한 기록 (AC.6053–6058, 6189–6215, 6307–6327, 6466–6495, 6598–6626).

(HH.98)

 

사람 몸에 속한 모든 것이 천국의 모든 것과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천국의 형상인 까닭은 외적 형태 때문이 아니라 내적 형태(internal form) 때문이다. 사람의 내면(interiors)은 천국을 받고, 외면은 세상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내면이 천국을 받아들이면, 그는 가장 큰 형상을 따르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이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천국이 아니고, 가장 큰 형상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외면은 세상을 받기 때문에, 물질계의 원리(the order of the world)를 따를 수 있고, 따라서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 몸에 속한 외적인 아름다움(outward beauty)은 부모와 태내에서의 형성으로 비롯되고, 그 후 세상의 일반적 입류(general influx from the world)에 의해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그의 영체의 모습과 크게 다를 수가 있다. 나는 여러 번 사람 속의 영을 보도록 허락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겉모습은 아릅답고 매력적이었지만, 그 영은 일그러지고, 어둡고 괴물 같아(deformed, black and monstrous) 가히 지옥의 형상이라 할 만큼 결코 천국 형상은 아니었다. 한편 다른 이들은 겉모습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 영은 매우 아름답고 맑고 천사 같았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세상에 살 때 몸 안에 있던 영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HH.99)

 

그러나 상응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훨씬 광범위하게 확장된다. 천국들 사이에 상응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내적인 삼층천에 중간인 이층천이 상응하고, 그 이층천에 가장 외적인 일층천이 상응하며, 이는 사람의 사지, 기관, 내장 등 몸의 형태에 상응한다. 따라서 천국이 최종적으로 끝맺는 곳, 즉 천국이 확립되는 바탕이 사람의 몸인 것이다. 이 신비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다룰 것이다.

(HH.100)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 천국과의 모든 상응은 바로 주님의 신적 인성(the Lord’s Divine human)과의 상응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있고, 주님이 천국이시기 때문이다. 신적 인성이 세상의 모든 것에 유입되지 않으면, 사람도 천사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보아도 왜 주님이 사람이 되셨고, 당신의 신성을 완전히 인성으로 입히셨는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천국의 기초인 인간이 질서를 약화시키고 파괴하여 주님 오시기 전의 신적 인성으로는 더 이상 만물을 유지하실 수 없게 되었었기 때문이다. 주님 오시기 전의 신적 인성이 어떠했고, 당시 천국의 상태가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부록에 발췌되어 있다.

(HH.101)

 

모든 것의 근원이 신성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여기고, 천국의 수많은 경이가 집결된 사람의 몸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사들은 매우 놀란다. 사람이 조금만 그 마음을 고양하면, 모든 것이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연계는 단지 영계의 옷이자 영계가 그 상응하는 형태로 질서의 외적인 최종단계(the outmost of order)에 드러난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사람의 지성(the rational part of man)이 자연에서 발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천사들은 더욱 놀란다. 천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는 보지만 빛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올빼미에 비유한다.

(HH.102)

 

내용이 너무 길어져 지치실 것 같아 여기서,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 12장으로 끊겠습니다. 혹시 갑작스런 중단이 아쉬우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그다음 내용들을 향해 계속 나아가시기를 권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12장 제목처럼,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 사이에 어떤 상응이라는 게 있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이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초창기, 그러니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한 그다음 해, 그러니까 7년 전이네요. 제가 속했던 어느 수도원의 새해 원단 금식 프로그램에 참석, 그 수도원을 도우시던 참 신실하신 장로님과 천국 이야기를 하던 중, 제가 너무 천진난만하게 ‘장로님, 천국 전체 모습은 우리 사람처럼 생겼어요’라는 말씀을 드렸다가 그만... 이후 그분이 저를 계속 피하시는 바람에 다시는 그분과 교제할 수 없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입니다. 어휴...

 

다음은 이 ‘상응’ 관련, 제게 한 발 더 성큼 나아가게 한 아르카나입니다.

 

상응에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는데요, 이 상응을 따라 땅에서 행해지는 것은 하늘에서도 소용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the Divine)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상응 안에 있는 건데요, 그래서 신성, 곧 주님이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신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천국에 있는 것들과 상응하도록 기록되었고, 그 결과 말씀에 신성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천국과 이 세상, 곧 하늘과 땅을 결합하게 하는데요, 땅에서 말씀이 읽힐 때, 천국 천사들은 그 속뜻 안에 있는 거룩함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 곧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AC.8615:3, 출17:12, ‘해가 지도록’)

 

특히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All the miracles recorded in the Word were done by means of correspondences)이라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이때가 지난 6월 22일 주일예배 설교이니 이제 한 달쯤 되어가네요. 지난 한 달 매 순간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솔직히 저는 아직 상응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상응에 대한 기술, 기록을 읽을 땐 이해가 되는 듯하나 일상 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원합니다. 오, 주님, 저로 하여금 상응 아래 살게 하여 주세요. 남은 삶을 상응으로 살게 하여 주세요. 그래서 저의 영육간 모든 것이 상응의 권능, 곧 천국의 해당 공동체들의 활기와 생명 힘입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기도를 시작한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 나중에 절대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님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나누는 걸 좀 자제하겠습니다.

 

끝으로, 쓰임새는 상응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이와 관련된 글 하나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천국과 세상이 상응에 의해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언급하겠다. 주의 나라는 목적의 나라(a kingdom of ends)이고, 그 목적은 쓰임새(uses)다. 쓰임새의 나라(a kingdom of uses)이고, 그 쓰임새가 목적이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어디에서나 쓰임새가 물질의 옷을 입고 행동, 또는 결과로 나타나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은 먼저 천국에, 그 다음엔 이 세상에, 단계적이고 연속적으로 내려와 자연계의 최종단계에 이른다. 따라서 쓰임새를 통해 자연계와 영계, 즉 세상과 천국이 상응하고 결합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쓰임새가 입고 있는 형상은 그것이 쓰임새의 형상인 정도만큼만(just to the extent that they are forms of uses) 상응이 되고, 결합의 수단이 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 중 질서에 맞는 것은 모두 쓰임새의 형태이고, 쓰이기 위해 그 용도대로 형성된 결과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계의 존재들이 상응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신적 질서(Divine order)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만큼만 그의 행위는 쓰임새의 형상이 되고, 또 그를 천국과 연결시켜 주는 상응물이 된다.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to perform uses).주83 나아가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자연계를 영계에 연결하는 수단, 즉 결합의 매개체(the medium of conjunction)라는 사실이다 (위 57번 글 참조).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인 정도에 따라 그만큼 결합의 매체가 되고, 반면 자연적이기만 하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결합의 매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을 통하지 않아도 따로 신성의 입류(a Divine influx)가 계속 세상으로 흘러들며, 이 입류는 사람의 물질적 측면 안으로는 유입되지만, 사람의 합리적 기능(man’s rational faculty) 안으로는 유입되지 않는다.

 

주83. 모든 선은 쓰임새로부터, 그리고 쓰임새를 따라 그 즐거움과 퀄러티를 가지는데, 그래서 이런 게 쓰임새이고, 이런 게 선이다 (AC.3049, 4984, 7038). 천사들의 생명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즉 쓰임새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AC.454). 주님이, 그리고 그 결과 천사들이 사람에 관해 보는 것은 오직 그 목적, 곧 쓰임새다 (AC.1317, 1645, 585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의 나라, 곧 목적의 나라이다 (AC.454, 696, 1103, 3645, 4054, 7038).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이다 (AC.7038). 사람한테 있어 개별적인, 그리고 전체적인 일이란 쓰임새를 수행해 온 일이다 (AC.3626, 4104, 5189, 9297). 또한 쓰임새로부터, 즉 쓰임새는 사람 안의 장기(臟器)들, 바로 쓰임새가 수행되는 장기들보다 우선하는데, 쓰임새란 주님의 흘러들어오심으로부터 천국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AC.4223, 4926). 더욱이 사람의 내면은, 이는 그의 마음으로 구성되는데, 그가 성숙해지면서 쓰임새로 말미암아, 그리고 쓰임새를 위해 형성된다 (AC.1964, 6815, 9297). 결론적으로, 사람은 쓰임새와 함께하는 그런 존재이다 (AC.1568, 3570, 4054, 6571, 6935, 6938, 10284). 쓰임새란 쓰임새를 위한 목적이다 (AC.3565, 4054, 4104, 6815). 쓰임새는 처음이자 나중, 곧 사람의 모든 것이다 (AC.1964).  

(HH.112)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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