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아벨의 죽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살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들을 교회의 중심적인 영적 생명과는 별개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체어리티를 말하는 것과 신앙이 실제로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리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사람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선과 삶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은 신앙의 결과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취급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가 굳어질수록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면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해결은 아닙니다. ‘사랑만 있으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선과 진리의 또 다른 분리가 일어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이웃의 참된 유익인지, 어떤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차이를 다룰 때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웃으로 보는 일을 잃어버리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고, 그의 말을 공정하게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비판이나 분별을 체어리티의 결핍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해로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때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동의나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와 함께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말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참된 유익을 구할 수 있고,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가족에게는 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더 예민해지며 자신의 잘못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문제는 진리를 너무 많이 배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문자적 의미만 아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께 의지하며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벨이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말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운 사람이 악을 더 분명히 보고 피하려 하는가, 자기 맡은 일을 더욱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는가, 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가,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실제 쓰임을 행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벨을 죽였다’, ‘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쉽게 선언하는 것은 이 심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아벨이 죽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4의 이야기는 아벨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갔지만, 주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에서 아벨을 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과 봉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 교리와 삶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지혜로운 사랑과 실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AC.329의 짧은 한 문장은 그래서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가인은 살아 있는데 아벨은 죽어 있지 않은가? 교리와 신앙 고백과 예배의 외형은 풍성한데 체어리티가 그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형제로 함께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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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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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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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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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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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루면서도, 매우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아벨의 제물이라는 서로 다른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를 뜻합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만으로는 신앙의 내적인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 삶에서 어떤 선을 낳고 있으며,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개로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창4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만 남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principal)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보다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고 체어리티의 질을 결정하려 할 때 본래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것을 신앙은 낮은 것이고 체어리티만 높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결합 안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필요하고 신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도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도 새롭게 보입니다. 아벨이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주된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둘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다음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살아 있으며,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기 전까지는 결합의 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 앞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앞의 AC.327에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했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돌아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4:7은 바로 아벨의 죽음 직전에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C.328은 또한 신앙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통하여 신앙의 질이 드러납니다.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며 많은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를 알고 있는지가 신앙의 질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우리가 배우는 아르카나도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AC.325부터 이어진 흐름을 정리하면 이제 매우 선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으며,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가 결정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AC.329에서 우리는 그 비극적인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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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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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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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심화

1.  분리가 결국 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로 변할 때입니다. 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 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무엇이 옳은 교리인가?’, 더 나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 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악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 AC.325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 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327 상태가 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 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 AC.327이 보여 주는 것은 분리의 위험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과 어떤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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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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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심화

1.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생각하도록 허락하실까?

 

AC.39에서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허락하십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지 않으실까요? 왜 사람이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AC.39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속여 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말은 허락하신다(permit)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처음부터 자기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시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깊은 인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AC.39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실제로 내가 공부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AC.39은 그런 인간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그 근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정말  자신인가?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먼저 믿게 됩니다. AC.39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중에는 그것을 퍼셉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퍼셉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상태를 지나, 마침내 그것을 더욱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9은 바로 이 과정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선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9의 관심은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행동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선으로 여기지 않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AC.39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노력해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도 AC.39이 향하는 방향과 다릅니다. 사람은 실제로 배우고 선택하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글들에서는 이것이 나중에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 행한다는 중요한 원리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39 자체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허락하시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퍼셉션하는 데까지 이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하신다는 한 단어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상태에서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참된 근원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정말 내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안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감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우리가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9이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에게서 찾던 상태에서 그것을 주님에게서 인정하는 상태로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39의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미숙함을 정죄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미숙함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끄시는 주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내가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도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은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내가 한다는 자기 공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인정으로 옮겨 가는 것, AC.39이 보여 주는 살아남의 과정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변화가 들어 있습니다.

 

 

 

AC.39, 창1:20, ‘비로소 살아나는 신앙 : 주님이 행하심을 알 때 시작되는 생명’(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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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2.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하는가?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나아가 퍼셉션,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진술은  놀랍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행복, 만수무강하게  ,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알기 때문이지요...

 

 

AC.37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alternations) 다양함(varieties)이 있으며, 만일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고 합니다. 변화가 없으면 단조롭다는 말까지는 쉽게 이해되는데, 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말하는 단조롭다는 것을 단순히 지루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원문은 `uniform`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한결같아서 차이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재미가 없으니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는 본래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있다는 훨씬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7은 그 이유를 바로 이어서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거나 구별될  없고,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왜 교대와 다양함을 생명과 연결하는지 중요한 실마리를 얻습니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은 선과 진리가 아무런 차이 없이 하나의 평평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별하고 구별하며 퍼셉션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을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도 빛의 상태가 달라지고, 한 해에도 열과 빛이 달라집니다. 봄의 자연과 한여름의 자연, 가을과 겨울의 자연은 서로 다릅니다. 바로 그 변화 속에서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때를 준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AC.37에서 자연계의 날과 해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하는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나쁜 상태를 겪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곧바로 선과 악의 반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악에 빠지는 것 자체가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거나, 신앙이 무너지고 사랑이 식어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차이가 있어야 선을   있으니 악을 경험해야 선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악을 경험해야만 선을 퍼셉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거나 퍼셉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양함 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생명도 교대가 있다는 뜻일까요? AC.37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고 말하므로, 적어도 영적 생명을 언제나 똑같은 강도의 빛과 사랑과 기쁨이 끝없이 지속되는 정지된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다만 천국에서 그 교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는 AC.37의 설명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천국의 상태 변화를 직접 다루는 다른 글들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완전함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적 상태라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최고조의 사랑과 빛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7은 영적·천적 생명 자체에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곧 불완전함이나 실패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주님께서 주신 좋은 변화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는 자기 사랑 때문에 생기는 후퇴도 있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있으며,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도 있기 때문입니다. AC.37 교대를 이런 모든 상태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악을 영적 성장 과정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안전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생명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명에는 다양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들은 서로 구별되며, 바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다양함을 자연계의 날과 해, 빛과 열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7 결국 생명이 전혀 없게 된다는 표현도 조금 이해됩니다. 생명은 단순히 어떤 좋은 상태 하나를 얻은 뒤 그것을 영원히 얼려 놓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양한 상태를 가지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구별되고 퍼셉션됩니다. 적어도 AC.37이 보여 주는 영적 생명은 변화 없는 정지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볼 때도 이 원리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적 상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상태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주님 앞에서 더욱 분명히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결국 AC.37이 말하는 교대와 다양함은 영적 생명이 죽은 평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바로 그 다양함 속에서 선과 진리가 분별되고 구별되며 퍼셉션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변화가 있으니 생명이 있다는 단순한 말보다, ‘살아 있는 영적 생명에는 선과 진리가 퍼셉션될  있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AC.37의 뜻에 더 가깝겠습니다.

 

 

 

AC.37, 창1:14-17, ‘영적 생명의 리듬 : 낮과 밤, 계절처럼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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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심화 1.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위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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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 ‘사랑 = 행동하는 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천적인 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31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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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보리는 진리에 굳이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을 붙였을까요?

 

먼저 영어 표현을 그대로 보면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입니다. 여기서 regards는 단순히 관찰한다는 뜻보다 향한다’, ‘목적으로 삼는다’, ‘관련되어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라는 번역은 진리가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살린 표현입니다.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여기서 쓰임이 현대적인 의미의 실용성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가?’, ‘생활에 바로 써먹을  있는가?라는 뜻의 usefulness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쓰임은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어떤 것이 선한 목적을 섬기며,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다른 것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가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거나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안다고 해봅시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원어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는 결국 실제로 이웃을 선하게 대하고, 무엇이 그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 분별하며,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즉시 행동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진리는 먼저 생각을 바로잡고, 어떤 진리는 오랜 시간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며, 어떤 진리는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가 듣자마자 곧바로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행동만 하면 진리가 쓰임을 이룬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서 매우 열심히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가 함께 중요하다는 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지만, 선 또한 진리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7의 표현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가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삶과 결합하는 방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쓰임은 단지 내가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했다는 개별 행동보다 넓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는 인간의 직무, 관계, 사회생활, 천국의 질서까지 모두 쓰임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각 존재가 전체를 위해 어떤 선한 기능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AC.57 한 문장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맺는 채소가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쓰임을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맺는 채소일까요? 현재 심화에서는 채소가 빨리 자라고 낮게 자라므로 초기의 진리’, 나무는 오래 살고 깊이 뿌리내리므로 성숙한 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7은 이런 자연적 특징들을 근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채소 = 초보 단계’, ‘나무 = 성숙 단계라는 고정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은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열매 맺는 나무 = 신앙의 입니다. 그 이상은 문맥에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만 더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씨가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자연적 특징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씨 자체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풀지 않습니다. ‘ 맺는 채소라는 전체 표현이 진리를 뜻한다고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쓰임을 향하지 않는 진리도 있을까요? 이 질문은 조금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참된 진리는 본래 선한 질서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자기 지식과 우월감, 논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지식으로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서 본래의 선한 쓰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주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성실하게 삶에 적용하여 이웃의 선을 섬기는 사람은 그 진리가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쓰임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에게 눈에 띄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쓰임은 자녀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임의 규모가 아니라 선한 목적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큰 종교적 사역이나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쓰임은 사람의 자기 공로를 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쓰임을 하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쓰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그 중심은 자기 사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AC.57의 문맥에서 영적 음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향하고 그 쓰임이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이것이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진리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한 목적과 결합하여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아는  사는 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은 이론은 필요 없고 행동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른 행동을 위해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 있으려면 선한 목적과 쓰임을 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AC.57의 표현을 가장 간단하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자기 안에서 끝나는 진리가 아니라 선한 삶과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맺는 채소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많은 사실과 교리를 축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선한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AC.57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아는 진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확증을 향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이웃의 유익을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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