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셋을낳고,셋은에노스를낳고,에노스는게난을낳고...’ 하는 식으로 이름과 나이,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 이름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AC.46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이장의이름들은사람을뜻하는것이아닌,다른어떤것들을뜻하는데,여기서는교리들또는교회들을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5의 문자적 형태를 부정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속뜻으로는 이 족보가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본문이족보형식으로기록되어있다’는 것과 ‘속뜻으로그이름들이무엇을의미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AC.460-468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읽습니다. 따라서 AC.461의 ‘사람’은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AC.462의 ‘셋’은 그보다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를, AC.463의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를, AC.465의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AC.466의 ‘노아’는 열 번째 교회이자 새로운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창5의 족보 전체가 속뜻으로는 ‘교회의계승과상태변화의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와 창5를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등장한 뒤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창5의 속뜻에서는 셋이 태고교회에 바로 이어지는 ‘두번째교회’라고 합니다. 만일 창4와 창5를 하나의 평면적인 연대기적 족보로만 읽으면서 동시에 각 이름을 교회의 순번으로 대응시키려 한다면 이 둘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읽는 속뜻의 층위에서는 창4와 창5가 각각 교회의 서로 다른 영적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어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나온다는 문자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창5의 ‘첫번째교회,두번째교회...’라는 영적 계승 순서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68은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앞 장, 곧 창4에서 이름들이 ‘이단과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창5의 이름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어떤것들’, 여기서는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이름으로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상태를 담을 수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에녹’, ‘라멕’, ‘노아’라는 이름을 만날 때 속뜻이 묻는 첫 질문은 ‘이사람에게역사적으로무슨일이있었는가?’가 아니라 ‘이이름을통하여말씀은어떤교회상태를나타내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아담,셋,에녹,노아라는역사적인물은존재하지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AC.460-468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속뜻으로는이이름들이사람을의미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성 자체에 관한 질문과 속뜻으로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AC를 따라갈 때 우선 붙들어야 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문자적 본문은 족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속뜻은 교회와 교리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5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적인 형식도 새롭게 보입니다.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고, 낳았다고 하고, 다시 살았다고 하고,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동일한 구조가 계속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족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서 시작된 어떤 영적 상태가 다음 교회로 전달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쇠퇴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각 이름과 수, 그리고 ‘낳음’과 ‘죽음’의 표현은 이후 본문 해설에서 각각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라는 관점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창5의 이름들을 교회와 교리로 읽는 것은 문자적 본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더 깊은 말씀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표면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낳는 족보가 있고, 그 안에는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의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끝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리메인스가 남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고대인의 명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어 가시고 쇠퇴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게 하는 열쇠입니다. (AC.460-468심화)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빛’, ‘물’, ‘땅’, ‘나무’, ‘동산’, ‘뱀’,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불’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이책은처음부터계속선과진리이야기인가?’선과 진리,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그리고 이제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창세기에는 빛과 어둠,물과 땅,풀과 나무,해와 달,물고기와 새,짐승이 나오는데,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그러나 이것을‘진리=이해,선=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말씀을‘듣는것’은 이해의 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내가아는진리가내가사랑하고행하는선과하나가되어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지식이 생기고,그 지식들이 살아나며,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사랑과신앙’, ‘의지와이해’, ‘선과진리’, ‘행함과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그래서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이것은선,저것은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지와 이해,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선과진리는둘중어느것이더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착하면진리는별로중요하지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또같은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이번에는선과진리의관계가거듭남의어느단계에서,어떤모습으로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이둘이어떻게만나고있으며,아직무엇이분리되어있고,거듭남이그것을어떻게하나로만들어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처음부터끝까지선,진리이야기만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천국과천국의기쁨이가장큰자가되는데있다고생각하는영들과대화를나눈적이있습니다.그러나그들은천국에서는가장작은자가가장큰자라는말을들었습니다.왜냐하면가장작은자가되고자하는사람이가장큰행복을누리며,따라서가장큰자이기때문입니다.가장큰자가된다는것이가장행복한자가되는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권세있는자가권세를통하여추구하고부자가재물을통하여추구하는것도바로이것입니다.그들은또한천국은가장큰자가되기위하여가장작은자가되기를원하는데있는것이아니라는말을들었습니다.왜냐하면그런경우그사람은실제로가장큰자가되기를열망하고원하는것이기때문입니다.오히려천국은마음으로부터다른사람들이우리자신보다더잘되기를바라며,다른사람들의행복을증진하기위하여그들에게쓰임이되기를원하는데있습니다.그리고이것은어떠한이기적인목적을위해서가아니라사랑으로부터하는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AC.452는 AC.450-451에서 계속되어 온 ‘천국에서의높고낮음’이라는 주제를 그 내적 핵심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AC.450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공상을 바로잡았고, AC.451에서는 세상의 권세가 영계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AC.45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천국에서참으로큰사람은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가장작은자가되고자하는사람이가장큰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능력을 일부러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신의 높음과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바라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가장큼’의 기준 자체가 세상과 달라집니다.
특히 ‘가장큰자가된다는것이가장행복한자가되는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 그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큰 권세에서, 부자는 더 많은 재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천국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작은자가큰자가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다면내가가장작은자가되어가장큰자가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겉모습만 낮아졌을 뿐 내적 목적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큰자가되기위하여가장작은자가되기를원하는것’ 역시 천국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조차 자기 높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천국적 상태는 무엇인가?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다른사람들이우리자신보다더잘되기를바라는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자체가 자기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자신의 위치가 낮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과 행복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이기적인목적을위해서가아니라사랑으로부터’라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칭찬받기 위해 돕거나, 인정받기 위해 섬기거나, 훗날 보답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면 아직 자기 자신이 목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국적 쓰임은 상대방의 선을 그 자체로 기뻐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52는 ‘천국에서누가가장큰가?’라는 질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사랑으로 그 행복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는 ‘누구든지첫째가되고자하면뭇사람의끝이되며뭇사람을섬기는자가되어야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막9:35)이 가리키는 천국의 질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AC.452해설)
육체로사는동안권세(authority)를가지고있었던어떤영이다른삶에서도여전히명령하고지배하려는욕망을가지고있었습니다.그러나그는이제영원한다른나라(anotherkingdom)에있으며,땅에서누리던그의통치는이미끝났다는말을들었습니다.그리고그가지금있는곳에서는그사람이지니고있는선과진리,그리고그가그안에있는주님의자비(themercyoftheLord)에따라서만존중받는다는말을들었습니다.또한그나라에서도땅에서와마찬가지로모든사람이자신의부와군주의총애에따라평가되는데,그곳에서는선과진리가부(wealth)이며군주의총애는주님의자비라는말을들었습니다.그리고만일그가다른어떤방식으로명령하고지배하기를원한다면그는반역자(rebel)인데,이는그가이제다른분의나라에있기때문이라는말을들었습니다.이말을듣고그는부끄러워하였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possessed authority, retained in the other life the desire to exercise command.But he was told that he was now in another kingdom, which is eternal; that his rule on earth was dead; and that where he was now no one is held in estimation except in accordance with the good and truth, and the mercy of the Lord, in which he is; and further, that it is in that kingdom as it is on earth, where everyone is rated according to his wealth, and his favor with his sovereign; and that there good and truth are wealth, and favor with the sovereign is the Lord’s mercy; and that if he desired to exercise command in any other way, he was a rebel, seeing that he was now in the kingdom of another.On hearing this he was ashamed.
해설
AC.451은 바로 앞 AC.450의 ‘다른사람들보다더큰자가되기를원하는것은천국이아니라지옥이다’라는 가르침을 한 걸음 더 구체화합니다. AC.450이 ‘높아지고지배하려는욕망’ 자체를 보여 주었다면, AC.451은 세상에서 실제 권세를 누렸던 사람이 사후에도 그 권세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사람의 지배욕까지 자동으로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은 세상에서 권세를 행사하던 습관과 즐거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사후에 전혀 다른 인격으로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성품을 가지고 다른 삶으로 들어간다는 AC의 일관된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죽음은 몸을 벗는 것이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을 즉시 바꾸는 사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먼저 알려지는 것은 ‘너는이제다른나라에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직책과 권한은 그 나라 안에서만 효력이 있었으며 죽음과 함께 끝났습니다. 영계에서는 세상의 신분, 직위, 명성 자체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선을 사랑했으며, 어떠한 진리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특히 ‘선과진리가부’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부유하다고 하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가진 사람이 부유합니다. 여기서도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사랑과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부는 소유하여 자기를 높이는 재산이 아니라, 주님께 받아 이웃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더욱 깊은 표현은 ‘군주의총애는주님의자비’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이나 권력자의 총애를 얻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자격으로 주님의 총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 구원과 천국의 생명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내가무엇을이루었는가’보다 ‘주님께로부터무엇을받아그것으로어떻게살고있는가’가 근본적인 질서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방식대로 계속 지배하려는 사람을 ‘반역자’라고 한 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는 이제 ‘다른분의나라’, 곧 주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것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점이 아니라, 천국의 통치 질서 자체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섬기며 이웃에게 쓰임이 되기 위한 권위입니다.
마지막의 ‘이말을듣고그는부끄러워하였다’는 짧은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단순히 권력을 빼앗겨 굴욕을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세상의 질서를 천국에까지 가져오려 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AC.451은 결국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세상에서 맡은 직분과 영향력과 능력을 ‘내것’으로 여기며 사람들 위에 서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이내게맡기신것’으로 여기며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얼마나 선과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받아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AC.451해설)
세상에사는동안말씀에관하여특별히밝은깨달음을가진것처럼보였던어떤사람들은천국에대하여너무나잘못된생각을품고있어서,자신들이높은곳에올라가있으면천국에있는것이라고생각하였으며,그위치에서아래에있는모든것을다스릴수있고,그리하여자기영광(self-glory)을누리며다른사람들보다높은지위에있을수있다고상상하였습니다.그들이이러한공상(fantasy)가운데있었기때문에,그리고그들이잘못되어있음을보여주기위하여,그들은높은곳으로올려졌으며거기서아래에있는것들을어느정도다스리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그러나그들은부끄러움가운데이것이공상의천국(aheavenoffantasy)임을깨달았으며,천국은높은곳에있는데있는것이아니라사랑과체어리티안에있는사람이있는곳,곧그안에주님의나라(theLord’skingdom)가있는사람이있는곳이면어디에나있다는것을깨달았습니다.또한천국은다른사람들보다더높은자리에있기를원하는데있는것도아닙니다.왜냐하면다른사람들보다더큰자가되기를원하는것은천국이아니라지옥이기때문입니다. Som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seemed to be preeminently enlighte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conceived so false an idea about heaven that they supposed themselves to be in heaven when they were high up, and imagined that from that position they could rule all things below, and thus be in self-glory and preeminence over others.On account of their being in such a fantasy, and in order to show them that they were in error, they were taken up on high, and from there were permitted in some measure to rule over things below; but they discovered with shame that this was a heaven of fantasy, an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being on high, but is wherever there is anyone who is in love and charity, or in whom is the Lord’s kingdom; and that neither does it consist in desiring to be more eminent than others, for to desire to be greater than others is not heaven, but hell.
해설
AC.450은 천국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생각, 곧 ‘공간적으로높은곳이천국이다’라는 생각과 ‘다른사람보다높은자리에서는것이천국의행복이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바로잡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뿌리는 같습니다. 천국을 주님과 사랑의 상태가 아니라 ‘높음’이라는 외적인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말씀에관하여특별히밝은깨달음을가진것처럼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설명하며 영적인 것에 밝아 보이는 것과 실제로 천국적 성품을 지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조차 자기 영광과 우월감을 위해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여도 그 사람의 내면은 천국의 질서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단순히 말로 반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원하던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고 아래의 것들을 어느 정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꿈꾸던 것을 실제로 얻고 보니 그것은 참된 천국이 아니라 ‘공상의천국’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가 스스로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AC.450은 천국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천국은사랑과체어리티안에있는사람이있는곳,곧그안에주님의나라가있는사람이있는곳이면어디에나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을 다스리는 곳에 이미 천국의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사람들보다더큰자가되기를원하는것’이 지옥이라고까지 말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여기서 모든 책임이나 지도력, 혹은 뛰어난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다른사람보다위에있고싶어하는사랑’입니다. 천국에서는 받은 능력과 지위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use)을 위한 것이지만, 자기 사랑이 지배하면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도 그 권한을 움직이는 사랑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질서와도 정확히 통합니다. ‘너희중에누구든지크고자하는자는너희를섬기는자가되고’라는 말씀처럼(마20:26), 천국에서 ‘높아짐’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천국의 기쁨은 ‘내가얼마나높은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받은것으로얼마나기쁘게쓰임이되는가’에서 옵니다.
결국 AC.450은 천국을 먼 곳에 있는 어떤 높은 세계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의 내면과 삶으로 돌립니다. ‘내안에주님의나라가있는가?내가알고있는말씀과진리는나를높이는가,아니면이웃을사랑하고섬기게하는가?’가 천국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가 다스리도록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AC.450해설)
지금까지천국과천국의기쁨이어떠한것인지아는사람은아무도없었습니다.그것들에관하여생각해본사람들도너무나일반적이고너무나거친개념을형성해왔기때문에,그것은거의아무런개념도없는것이나마찬가지였습니다.사람들이이주제에관하여어떠한생각을품고있었는지는,세상에서다른삶으로갓건너온영들을통하여저는매우정확하게알수있었습니다.왜냐하면그들은자기들끼리있도록내버려두면,마치아직이세상에있는것처럼세상에서와같은방식으로생각하기때문입니다.몇가지예를들어보겠습니다. Hitherto the nature of heaven and of heavenly joy has been known to none.Those who have thought about them have formed an idea concerning them so general and so gross as scarcely to amount to any idea at all.What notion they have conceived on the subject I have been able to learn most accurately from spirits who had recently passed from the world into the other life; for when left to themselves, as if they were in this world, they think in the same way.I may give a few examples.
해설
AC.449는 창5앞에 놓인 ‘천국과천국의기쁨에관하여’라는 경험편 전체의 문을 여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들이 천국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들조차 실제로 ‘천국이어떤상태이며,천국의기쁨이무엇인가’를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무나일반적이고너무나거친개념’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이라는 것은 천국을 그저 ‘좋은곳’, ‘고통이없는곳’, ‘죽은뒤행복하게사는곳’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거친’이라는 것은 천국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육체적·감각적 행복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제 천국의 본질에는 거의 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기쁨은 장소나 환경에서 먼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후 AC.449-459와 창5뒤의 경험편에서 계속 밝혀지듯이, 천국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때 경험되는 기쁨과 평화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천국을 단지 아름다운 장소나 끝없는 안락함으로 상상한다면 천국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사실을 ‘세상에서다른삶으로갓건너온영들’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갓 세상을 떠난 사람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서 형성한 생각과 사랑과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 하나의 관찰 자료가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자신의 속생각을 감추거나 신학적으로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새로 온 영들이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실제로 어떤 천국관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AC.449의 마지막 ‘몇가지예를들어보겠습니다’는 이후 글들을 읽는 중요한 안내입니다. 이제부터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관한 추상적인 정의부터 제시하기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품고 있던 잘못된 천국관과 그들이 영계에서 겪은 경험을 하나씩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뒤따르는 사례들은 단순한 신기한 영계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의기쁨은과연무엇인가’를 바로잡아 가는 일종의 단계적 교육입니다.
결국 AC.449는 독자에게 먼저 자신의 천국관을 점검하도록 합니다. ‘나는천국을무엇이라고생각하고있는가?고통이사라지고내가원하는것을마음껏누리는곳이라고생각하는가,아니면주님의사랑과생명이내안에서온전히받아들여지는상태라고생각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천국에 대한 참된 준비는 천국을 상상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삶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가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AC.449해설)
첫째,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면 대략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듯 천국 또한 그렇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주님을 알기 위한 건데요, 천국 또한 알면 알수록 천국을 포함, 영계 전체를 그렇게 설계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 하늘의 해를 공부하겠다고 맨눈으로 해를 볼 수는 없듯 주님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이렉트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불덩어리 그 자체인 해에서 나오는 열과 빛으로 우리가 사는 것처럼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열과 빛, 곧 선과 진리로 만물이 존재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불덩어리에서 나오는, 주님의 이 신적 진리(Divine Truth)는 여섯 단계, 등급(degree)이 있는데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처음 두 단계의 진리는 심지어 삼층천 천사들조차 이해 불가한 진리입니다. 세 번째 단계부터 차례로 삼층천, 이층천, 그리고 일층천 천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각 단계마다 수천수만 배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에 사는 우리는 마지막 여섯 번째에 해당,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The Word)입니다. 그러니까 각 천국, 각 대상마다 자기 역량에 따라 맞추고 조절된, 허용된 진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일생은 그 목적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이를 위한 일종의 가이드로 주신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일생은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일생인데요, 어디서 태어나 무슨 삶을 살든 말입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지만 세상 편하기만 한 꿀 보직 같은 건 없습니다. 겉보기엔 그래도 결국은 어디나 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쓴맛 단맛이 있습니다. 군 뿐이겠습니까? 세상일이 다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로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커 보이는 남의 떡 때문에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 낭비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 시간에 천국 공부에 집중, 지름길 인생을 사시길 권합니다. 결국 우리가 갈 곳을 미리 공부, 거기에 맞춘 맞춤식 인생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험문제도 그 출제자의 의도를 얼른 읽는 게 중요하듯 우리네 인생 역시 창조주의 의도를 얼른 파악, 거기에 맞춘 삶을 사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아무렴 창조주께서 우리를 세상에 내신 이유가 우리 맘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우리 거실 요만한 소품 하나도 무슨 이유가 있는 건데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으로 세월 낭비하라고, 그리고 최종 목적지도 아닌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지음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랬다간 결국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아궁이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이 그런 곳이며, 그래서 그것이 천국 입국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면 삶이 또렷해집니다.
셋째, 천국을 알아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결국은 저마다 자기 사는 동안은 좀 평안한 삶, 형통한 삶 살기를 원하는데요, 이는 주님도 원하시는 바이며, 이 역시도 그러려면 천국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우리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천국에 들어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싶으면 그 사람의 상태, 그러니까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이 자기 안에 흘러들어오며, 그것은 곧 천국의 모든 것, 즉 모든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능력과 부요가 자기 삶 가운데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 역량만큼만이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복의 정체입니다. 누가 내게 안수하여 복을 빌어도 정작 내 속 사람의 역량이 그 복을 수용할 수 없으면, 내 속 사람이 하늘의 어떤 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10:5, 6)
그러니까 기도응답의 정체, 비밀도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속 사람의 역량이 넉넉하다면? 그렇다면, 천국의 지혜와 평안, 능력과 부요가 내 삶 가운데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속 사람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요? 즉 어떻게 해야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네, 그래서 천국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매인 바 된 우리의 이 시야, 이 가치관에서 철저히 물러나 천국에 오리엔티드된,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철저히 사로잡힌 그런 새로운 시야, 새로운 가치관을 옷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끝으로, 천국을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특별히 주님의 은혜로 어느 날 기도 중에 불쑥 들림받아 천국을 다녀오지 않는 한, 천국을 다녀온, 그리고 주님의 허락을 받아 그 사실을 잘 기록한 어떤 사람의 기록을 접하는 것이 무난하지 싶습니다. 물론 유튜브도 있지만, 그게 좀... 워낙 중구난방 다양해서 말이지요. 뭐, 어쨌든 자기에게 끌리는 것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시다 보면, 아, 이건 좀... 싶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아지니까요. 저 역시 지금 이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걸 두루 경험해야 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현재 8년째 늘 곁에 두고 읽는 책입니다. 제가 무슨 책 광고? 뭐 그런 거 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저는 이 책으로 천국 공부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걸로 하셔도 됩니다. 참고로, 아래 첫 번째는 릴리즈된 영문이고요, 그 아래 두 번째는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여러 번역 중 저한테는 이게 제일 낫더군요. 저는 이 출판사나 번역자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아래 링크들은 혹시 도움 되실까 달았습니다. 그럼...
글 제목을 보면, 이미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함인지 다들 아시겠지요? 맞습니다. 바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인데요, 가짜들은 평소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해오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면 안 믿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인데요, 평소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미 오랜 세월 온 국민의 수 대, 수십 대, 수백 년을 이어온 염원이었지만, 정작 주님이 실제로 오시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유대인들 거의 전부가 몹시 불편해했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이 있겠지만, 일단 저들은 가짜여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겁니다.
※ '가짜'라는 거북한 표현을 써서 좀 그러시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5-27)
말씀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즉 너희는 가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너희 역시 가짜다 하고 계십니다.
이런 케이스가 성경에 참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그 속사도들, 즉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또한 그랬는데요. 어쩌면 태고교회부터 고대, 유대, 기독 등 교회사 전체를 이 주제로 기술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 숨은 동기에 있습니다. 가짜는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역시 그 모든 겉보기와는 달리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주님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습니다. 내적 존재인 천사들한테는 사람의 겉은 안 보이고, 사람의 속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볼 때 사람은 곧 그의 의지이며, 어떤 일을 하는 그 숨은 동기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지만, 천사들은 속, 곧 그 숨은 동기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주님에 관해서는 가짜들도 좀 그 혀가 뻣뻣해지는지 주님에 대한 직접적인 사랑의 고백 같은 거를 어색해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저런 분이십니다’ 하는 얘기를 잘 못해요. 아마 주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아무개가 주님에 대해 이런 책을 썼는데 저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개는 평생 주님과 동행했는데, 그 기록을 저는 읽어 보았습니다’ 식으로 그 핀트를 살짝 틉니다. 그리고 그런 책 많이 읽은 걸 자랑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짜가 되셨겠지만... 문제는, 이런 분들의 많은 말과 글을 접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천국 해서 정말 천국에 대해 알고픈 모양이구나 싶어 주님의 허락으로 천국을 오랫동안 왕래한 사람이 천국에 대해 알려주려고 하면, 정작 이 사람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천국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 연구하고, 기술한 책만 잔뜩 읽고 있습니다. 엉뚱합니다. 천국, 천국 하는 그 숨은 동기가 정말 천국을 사랑하여 거기 가 살고픈 게 아니라 천국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자기도 잘 모르는 무슨 목적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런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혀 그럴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제 나이 57세 되던 어느 날 주님이 천사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무려 27년간 영계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 중 기록으로 남기라 하신 것만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말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은 자원병을 쓰지 않으시고, 차출병을 쓰신다는 적확한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고 없는 지금, 주님의 지시와 허락으로 그가 남기고 간 책을, 특히 그중에 ‘천국과 지옥’을, 신기하게도 저 역시 57세 때 접한 이후, 지난 8년 여의 세월, 집안 행사 등 부득이한 날만 빼고, 거의 하루도 낭비 없이 이 길을 달려왔습니다. 마치 뭐에 이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주변, 가족이며, 친지며, 교계 지인들이며...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 우리 큰아들 포함, 몇 분 계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1%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디에 적기를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사람도 쉽지 않다 했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몇몇 분한테서는 주님이 서둘러 저를 떼어놓으셨고, 대부분은 선량하신 분들입니다. 그 가운데 온유하신 분들과 다소 강한 분들의 차이만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과 이건 다른 건가 봅니다.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은 각 사람에게 맞춘 철저한 맞춤식이라 절대 획일적일 수도, 일률적일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 사람이 붙들고 있는 나름의 교리적 입장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아 주님조차 그걸 무조건 새것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지금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인데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헤아려 그에게 무슨 표를 주어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이단적 입장 역시 나중을 위해, 후손을 위해, 인류가 결국은 신앙에서 사랑을 분리하는 길로 걸어갈 걸 아시고, 그런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시지 싶고, 그래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지상에 머무르게 될까요? 사실 천국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을 향한 경외감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지며, 그래서 그냥 오늘 밤에라도 훌쩍 떠난들 무슨 아무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처음 얼마 동안 좀 힘들어할까요? 제가 그동안 가정경제에 거의 보탠 게 없어 그 부분은 참 많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 부분을 많이 주님께 구하고 있어요. 제 아내와 두 아들, 특히 작은아들에게 주님이 경제적으로 조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신 주님 말씀이 전에 제게 들렸듯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61년 소띠입니다. 올해로 만 63세네요. 저는 100세는 바라지도 않고, 소명으로 받은 지금 이 일을 어느 정도 마치면 그저 깔끔하게 이 육신을 벗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더욱 바람이 있다면, 천국에서도 제 아내와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인데요, 제 아내는 틀림없는데 저는 암만 생각해도 좀 간당간당하거든요. 웬만큼 제 아내와 주님 속을 썩였어야 말이죠 ㅎㅎㅎ 참고로, 천국은 서로의 선이 비슷해야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30년대 전후반 태생이신 분들은 슬슬 떠날 생각들을 진지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여전히 이 세상 삶에 더욱 마음 기울이고 계신가요? 이제는 슬슬 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한데... 그런데 이런 말씀드린다고 언짢아들 하실까 봐 좀 걱정됩니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말씀에 보면, 이 글 제목처럼 ‘나이가 많아 늙었고’,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 오세라’, ‘기운이 다하여 죽어’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표현들은 그 겉뜻으로도 그냥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지만, 그러나 그 속뜻이 참 놀라워서 오늘 특별히 제가 이해하는 데까지만 좀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주님의 표상(表象, representative)입니다. 즉 지금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내면 상태와 그 변화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의 속뜻은, 주님 안의 인성(human) 상태가 머잖아 신성(Divine) 상태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육의 어머니 마리아로 말미암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생은 이 인성을 벗고 신성을 입는 과정이었습니다. 거듭 주님은, 속 사람으로서는 여호와 하나님, 겉 사람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활동하시는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한 분 주님이시며, 이것을 생각하면, 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 되셔야만 하셨나를 살짝 깨닫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주님의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대로는 이 피조세계에 나타나실 수 없어 반드시 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신적 인간(Divine Human)의 형태로만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들은 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라는 표현을 지금 자기들이 와있는 사람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나이가 많다’, ‘늙었다’ 같은 지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여기 지상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영적 존재라 지상 언어는 못 읽고, 다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 곧 말씀의 영인 속뜻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런 표현을 접하면, 상태와 그 변화, 곧 인간을 벗고, 천국을 입는 것(to put off what is human, and put on what is heavenly)으로 이해합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나 천국 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실 테니까요. 팔십 평생 이룬 게 많아 덕스럽고 복 받은 인생 살아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와 눈물만 남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두 인생이 사후 그 상태가 그 속 사람이 어떤지 여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국은 속 사람 상태로 들어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고, 눈을 들어 천국을 옷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세상을 꽉 쥐고 살아오셨다면 이젠 놓으시고, 천국을 바라보시며 천국 옷으로 새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이 드는 것’이며, ‘늙는 것’입니다. 말씀 생활에 힘쓰시고, 그동안 이런저런 아쉬웠던 모든 관계를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시고, 진리의 삶으로 마무리하시고요. 천국 가는 건, 흐릿한 데 있다가 밝고 또렷한 데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