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늘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개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양,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이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과 쾌락(pleasures)을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 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들이 동물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 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 = 악’, 또는 반대로 ‘짐승 = 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 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 자체는 여기서 ‘동물이 움직이므로 애정도 인간을 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을 ‘그 땅의 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 본래 중립적이므로 없앨 필요가 없고 방향만 바꾸면 된다’거나, 반대로 ‘몸과 관련된 모든 쾌락은 악하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태고 시대’

 

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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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으로 읽는 인간 : 애정의 재창조와 주님을 향한 생명'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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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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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더 큰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라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가 있었습니다.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해’(sun)는 사랑, 곧 어두워지는 사랑을, ‘달’(moon)은 신앙, 곧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the knowledges of faith), 곧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뜻하며, 이것들이 바로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합니다.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습니다. 모든 천국의 행복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그 크기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그 결과 모든 생명, 곧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 곧 ‘해’(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은 ‘해’(sun),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더 작은 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 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 큰 광명체’, 신앙을 ‘더 작은 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던 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어떤 신앙도 알지 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 = 사랑, 달 = 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 해설)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가리켜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라고 말합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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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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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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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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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 불리는 에덴동산과,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에 관한 것뿐입니다. 누가 그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이 내용들이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아르카나(arcana)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와 ‘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 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과 ‘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 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그 안에 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과 ‘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 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는 AC 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 속뜻과 생명이 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이 창조 이야기는 속뜻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 해설)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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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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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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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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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으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얻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것과 같은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은 쓰임(use)을 행할 때, 곧 쓰임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생명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십니다. 쓸모없는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쓸모없는 것은 무엇이든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모양(likenesses)이었으며,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는 주님의 형상(images)이 되었습니다.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것,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AC.503은 퍼셉션에 관한 설명을 한층 더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앞의 AC.502에서는 태고교회의 완전성이 선과 진리를 얼마나 ‘명료하게 퍼셉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참된 퍼셉션에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할 때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머리로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 아니라, 선을 알고 그 선을 행하기를 사랑하며 실제로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퍼셉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분별하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싫어하고,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살아 있는 퍼셉션과는 다릅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과 ‘그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는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중심 개념인 ‘쓰임’(use)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은 단순히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이 마음속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이루는 행동과 섬김으로 나타날 때 사랑은 ‘쓰임’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이 바로 쓰임을 행할 때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삶에서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쓰임이라는 실제적인 형태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는 문장은 AC.503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아 다시 선한 쓰임으로 흘려보낼 때 살아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흘러갈 때, 인간은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쓰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흘러가고 나타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왜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이었으며 퍼셉션 능력에 있어 ‘주님의 형상’이 되었는가 하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을 베풀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낄 때 그는 자신의 작은 범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반영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과 형상이었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 그 내적인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뜻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매우 선명하게 압축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이것은 지식과 삶의 관계를 정확히 자리매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퍼셉션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앎은 목적이 아니라 행함을 위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은 많아져도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503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말씀과 AC를 읽는 목적까지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더 많이 알고, 상응을 더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더 정교하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앎은 결국 ‘나는 이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누구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것인가’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기쁨은 마침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리는 사랑과 결합하고, 신앙은 삶이 되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AC.503 해설)

 

 

 

창5:9, AC.500-503 심화 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창5:9, AC.500-503 심화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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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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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는 열매나 그 씨앗에 관하여, 그리고 뇌에 관하여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런데 퍼셉션이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될 때 그 능력은 감소합니다. 그러면 더 분명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더 흐릿한 퍼셉션이 뒤따르게 되고, 이와 같이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AC.502는 지금까지 말해 온 태고교회의 ‘쇠퇴’가 구체적으로 무엇의 쇠퇴였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사람’,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따라서 셋이나 에노스가 나타났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끝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세 교회 모두 같은 태고교회의 큰 계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AC.500의 ‘덜 천적’이라는 표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셋이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고,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나빠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인 퍼셉션 능력이 점차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매우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의 쇠퇴는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의 쇠퇴’입니다.

 

특히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표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퍼셉션의 대상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세밀하고 분명하게 구별하던 것이 점차 뭉뚱그려지고 희미해졌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여러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각각의 성질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면,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막연하고 포괄적으로만 퍼셉션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501에서 사용한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의 비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장 내적인 중심에는 본질적인 생명이 가장 충만하고, 거기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이 점차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가장 내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는 그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 → 셋 → 에노스’라는 계승은 단순히 세 교회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이 ‘명료한 상태에서 덜 명료한 상태로’, 그리고 ‘구체적인 상태에서 더욱 일반적인 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퍼셉션의 쇠퇴를 ‘있음’과 ‘없음’의 두 단계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분명한 퍼셉션이 있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이 되고, 더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하는 방식이 대개 점진적이라는 AC.497의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같은 태고교회이고, 퍼셉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질과 명료함이 이미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사라질 때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분별하던 것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구체적인 선과 진리의 차이를 알아보던 것이 점차 막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외적인 형태는 상당 기간 남아 있어도 그 안의 내적 생명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AC.501의 표현대로 하면 아직 열매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점차 그 속보다 껍질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95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의 영적 교회에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양심이라는 다른 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내적 감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받아들여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 간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점점 더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02 해설)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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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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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한가운데, 곧 가장 내적인 곳에는 말하자면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부분들이 마치 일정한 질서를 따라 생명을 얻습니다. 가장 내적인 곳에서 둘레를 향하여 멀어질수록 그 안에는 열매나 씨앗의 본질이 점점 적어져, 마침내 열매나 씨앗이 끝나는 얇은 껍질이나 덮개만 남게 됩니다. 또는 뇌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뇌의 가장 내적인 부분에는 피질이라 하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들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혼의 작용들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먼저 더 순수한 덮개들이 차례로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더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지며, 마침내 뇌막이라 하는 일반적인 덮개들이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다시 더욱 일반적인 덮개들로 끝나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덮개인 두개골에 이릅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해설

AC.501은 앞의 AC.497과 AC.500에서 말한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한다’는 원리를 두 가지 놀라운 비유, 곧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와 그 덮개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핵심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교회가 낡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최초의 교회에는 가장 내적인 생명과 본질이 풍성하게 있었지만, 거기서 후대의 교회들이 차례로 이어져 나오면서 그 본질이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가고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창5의 계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열매와 씨앗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가장 안쪽에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과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품고 다음 부분들을 발생시키는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열매나 씨앗의 본질은 점점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면,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는 교회를 참으로 교회이게 하는 내적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퍼셉션이 중심에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생명이 점차 약해지고 외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내적인 것’과 ‘가장 외적인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의 껍질도 열매에 필요하고, 씨앗의 덮개도 씨앗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껍질만 남고 그 안의 본질이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 예배 형식, 제도, 언어와 전통 같은 외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인 생명을 담고 보호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사라지고 외적인 형식만 남는다면, 그것은 마치 열매의 속과 씨앗은 없어지고 껍질만 남은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뇌의 구조는 이 원리를 더욱 정교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내적인 곳에 있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인 피질에서 영혼의 작용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순수한 덮개, 더 조밀한 덮개, 뇌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개골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정한 질서’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무질서한 붕괴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 교회들이 앞선 교회와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으로부터 차례로 이어져 나온다는 AC.500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5의 ‘낳음’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질 때 각각의 교회는 앞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이어받지만, 최초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교회의 본질적인 천적 생명은 점차 감소합니다. 이것이 AC.500에서 에노스를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창5의 계보는 결국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인 퍼셉션이 후대로 갈수록 어떻게 변화하고 약해지는지를 하나의 연속적인 구조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단순한 비관적인 쇠퇴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내적인 것에서 시작된 생명이 여러 단계의 덮개를 거쳐 바깥까지 전달되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이전처럼 내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도 그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최초의 상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교회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5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쇠퇴인 동시에 보존이며, 변화인 동시에 연속입니다.

 

AC.501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도 제공합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겉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가보다 그 모든 것의 ‘가장 안쪽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교리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형식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구하는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새 열매 자체보다 그 껍질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형식이 소박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생명이 살아 있다면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껍질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있는 ‘씨앗의 씨앗’, 곧 모든 진리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입니다. (AC.501 해설)

 

 

 

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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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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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게난’(Kenan)은 앞선 교회들의 뒤를 이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해설

AC.500은 창5의 계보를 따라가면서 태고교회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점차 달라지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자체가 첫 번째라면 셋은 두 번째 교회였고, 이제 에노스는 세 번째, 게난은 네 번째 교회입니다. 따라서 창5의 이름들은 단순한 족보상의 인물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차례로 이어진 교회들을 나타내며, 스베덴보리는 그 순서까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창5가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기록한 장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한층 선명해집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AC.497에서 셋은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고, 그것은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에노스에서는 그 감소가 한 단계 더 진행됩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내려오면서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생명, 특히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점차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단절이나 배교라기보다 동일한 큰 계열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상태 변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역시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 덜 천적’이라는 말만 보면 에노스가 이미 태고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에노스 역시 태고교회 계열에 속한 교회였고, 그 천적 성격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충만함과 비교하면 그 상태가 낮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쇠퇴는 ‘천적 교회에서 전혀 다른 교회로 갑자기 바뀜’이 아니라, 천적 상태 자체가 점차 약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게난’(Kenan)은 ‘앞선 교회들의 뒤를 이은 네 번째 교회’라고만 설명됩니다. 이 글에서는 게난의 구체적인 상태를 아직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승의 연속성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교회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낳았다’는 족보의 반복은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승을 표현하며, 각각의 교회는 앞선 교회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상태를 지닙니다.

 

여기서 창5와 창4의 차이도 조금씩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창5에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셋을 ‘두 번째 교회’,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순서대로 명시하면서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한 계열의 교회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4에서 가인으로부터 여러 이단과 분파가 전개되는 모습과는 서술의 성격이 다릅니다. 다만 이 차이가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떤 방식과 시기로 서로 병존했는지까지 곧바로 확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창5가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진 후대 교회들의 연속적인 계승을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계승 가운데 반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쇠퇴만이 아니라 주님의 보존입니다. 최초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천적인 것이 점차 감소하지만, 주님께서는 곧바로 교회의 계보를 끊지 않으십니다. 셋이 있고, 에노스가 있으며, 다시 게난이 이어집니다. 완전했던 처음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한편으로는 퍼셉션을 지닌 태고교회의 점진적인 쇠퇴를 보여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쇠퇴 가운데서도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AC.500 해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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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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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AC.498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창5 전체를 읽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다시 못 박습니다.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씀의 속뜻은 한 개인에게서 한 개인이 태어났다는 족보상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셋’이라 하는 교회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AC.470에서 제시된 창5의 기본 원리가 이제 실제 계보의 각 이름에 계속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begat)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앞 교회가 끝난 뒤 전혀 무관한 새 교회가 등장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뒤의 교회는 앞의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물려받습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로부터 천적 성격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에서는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에노스 역시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왔으면서 셋과는 구별되는 교회적 상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음’에는 ‘계승’과 ‘변화’라는 두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97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합니다. 그렇다면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차례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로부터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조금씩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연속적인 역사입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짧은 한 문장 안에도 이전 교회로부터의 계승과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이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창5의 이름들을 해석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속뜻에서 각각 하나의 교회 또는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각 이름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더 본질적으로는 ‘이 이름으로 표현된 교회의 상태는 어떠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창5의 반복적인 족보 형식이 교회의 내적 역사를 담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다만 ‘에노스’라는 이름이 교회를 뜻한다고 해서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까지 AC.498 하나만으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우선 ‘에노스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해석의 틀을 확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어떠함은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더 밝혀집니다. 이것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이나 한 글에 이후의 내용을 미리 모두 집어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표현을 하나씩 열어 가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의 흐름에는 주님의 섭리라는 더 큰 배경이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전보다 낮아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곧바로 그 교회를 끊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오도록 하시면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십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짧은 계보는 그래서 단순한 쇠퇴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의 연속성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98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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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말한 것(3절)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경우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앞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해 간다는 것입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AC.497은 바로 앞의 AC.496에서 ‘셋은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다’고 한 이유를 한 걸음 더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5:3에서 다룬 셋에 관한 설명을 다시 가리킵니다. 특히 AC.481-485에서 셋은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교회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가 태고교회 자체와는 달랐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덜 천적’이라는 말은 셋 교회가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천적 질서 안에서도 그 본질적인 생명과 퍼셉션의 충만함이 이전보다 감소했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표현은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먼저 외형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와 형식도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본질,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생명이 약해지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점차 이전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는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던 천적 생명이 그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서 언급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절 하나만을 가리키기보다, 앞에서 설명해 온 교회 쇠퇴의 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AC.494에서는 유전적 악이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자기 삶으로 만들어 갈 때 그것이 다시 후대의 유전적 성향에 더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대를 거치면서 쇠퇴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부모인 태고교회’라는 표현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으면서도 부모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셋 교회 역시 태고교회로부터 그 천적 성격을 이어받았지만 동일한 정도의 퍼셉션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이름만 바뀌는 기록이 아니라, 같은 큰 계열 안에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대일수록 무조건 더 악하다’는 식의 단순한 역사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지금 다루고 있는 일련의 교회들이 그 최초의 천적 상태로부터 점차 멀어져 간 특정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은 교회를 단번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셋으로부터 에노스가 나오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여러 교회가 계속되는 창5의 구조 자체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7은 교회의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을 외적인 규모나 제도의 지속에 두지 않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은 ‘본질적인 것들’이 살아 있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고, 신앙의 진리가 그 사랑과 결합되어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쇠퇴하는 시대 속에서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그러한 쇠퇴와 보존, 그리고 계승의 역사를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97 해설)

 

 

 

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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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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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AC.496은 창5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주는 글입니다. 창5:6의 문자적 본문은 셋이라는 사람이 백오 세에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족보 기록이지만, 속뜻에서는 ‘셋 → 에노스’가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이 태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나온 과정입니다. AC.470에서 이미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밝힌 원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태고교회 이후 여러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차례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셋을 ‘두 번째 교회’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승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제되어 다음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상태에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앞서 AC.481-485에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닮았지만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는 교회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교회’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후대라는 뜻뿐 아니라, 태고교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 교회를 이미 태고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하면서도 곧이어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적 교회의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기본 질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생생함과 완전함이 최초의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표현 역시 실제 연령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닙니다. AC.482-483과 AC.487-488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와 ‘연수’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백오 년은 셋 교회가 어떤 상태를 지나 다음 교회인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105’라는 수 자체의 세부적인 의미를 풀지 않고, 앞에서 확립한 원칙대로 ‘때와 상태들’을 뜻한다고만 밝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의 개별 상응을 억지로 풀기보다는, 창5의 연수가 교회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기록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은 창5의 ‘낳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에서 또 하나의 교회가 ‘태어난다’는 것은 앞선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무관한 것이 새로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교회만의 고유한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가 생겼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창5의 족보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계승의 연속입니다.

 

이 점에서 AC.496은 앞으로 이어질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의 이름을 읽는 기본 틀을 마련합니다. 각각의 이름은 단순히 족보상의 한 사람을 지나가는 표지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 이름으로 나타난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그 상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창5의 긴 족보가 단순한 이름과 연수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역사가 됩니다. (AC.496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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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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