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레6 심화

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과 ‘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레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그 일 가운데 아직 내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C.레6 심화 1)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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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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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5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들어오면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가 더해집니다. 깨달음에서 자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도 죄를 인식한 뒤 그것을 고백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는 것’과 ‘자복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한 것은 맞지만 그 사람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거짓말한 것은 맞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화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분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이 방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보다 먼저 ‘나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오히려 매우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내 것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행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 교리에서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복의 진실성은 결국 다음 삶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절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악은 피할 수 없지만 보이기 시작한 악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완벽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레5는 바로 그 순간에 ‘자복하라’고 합니다. 숨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면 미움이라고,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지배욕이면 지배욕이라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는 실제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복은 ‘저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막연한 자기비하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일을 했습니다’, ‘제가 손해 보기 싫어서 진실을 숨겼습니다’처럼 말씀의 빛에서 발견된 실제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구체적일수록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5 후반의 속건제가 보여 주듯 자복은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면 가능한 경우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레5에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깨닫는다 → 자복한다 → 피한다 → 바로잡는다.’ 이것은 죄책감의 계단이 아니라 자유의 계단입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악은 인간을 붙잡을 힘을 잃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거듭남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하였노라’ 자복하며,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가능한 것은 바로잡을 때 인간은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레5의 자복은 입술에서 끝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입니다. (SWC.레5 심화 3)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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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SW.7 심화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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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5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 일을 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창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계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 일’이 ‘충분한 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잘못에는 반드시 20퍼센트를 더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 됐지’, ‘원금은 돌려줬으니 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과 ‘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레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용서를 구한 그 일 가운데 아직 내가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 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C.레5 심화 2)

 

 

 

SW.7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SW.7 심화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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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SW.7 심화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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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4 심화

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 지은 죄도 아닌데 왜 속죄해야 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 이제 죄가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아직도 이런 것이 내 안에 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왜 지금 보여 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C.레4 심화 1)

 

 

 

SW.6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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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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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의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 certain 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 악을 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 internal pain’, 곧 ‘어떤 내적 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이 악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악이므로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는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 더 이상 제거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 이 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의 ‘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내 죄악은 너무 커서 제거될 수 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 이렇게 악하니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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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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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풀’과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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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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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저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내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좀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풀’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풀 → 씨 맺는 채소 →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 → 진리 이해 → 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풀’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땅’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1)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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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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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창1:11-13)

 

AC.29

‘땅’(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들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께서는 먼저 어떤 연약한 것이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을 ‘연한 풀’(tender herb)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더 유용한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시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합니다. 마침내 선한 어떤 것이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라고 하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상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상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땅’(earth)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마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1-15)

 

같은 뜻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모든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이 사람의 거듭남에서 세 번째로 이어지는 단계이며, 곧 그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땅’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 풀’이 나오고, 다음으로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 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 풀’(tender 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 연약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아직 매우 미약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변화는 연한 풀처럼 작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으로부터 사람 안에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씨 맺는 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 유용한 것’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실제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진행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이루어진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AC.29은 여기서 ‘종류’의 세부적인 속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선과 진리의 모든 질서, 영계의 분류, 선과 악의 분리 같은 넓은 교리 전체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소한 AC.29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무질서한 혼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고유의 성질을 따라 산출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넓은 의미는 이 표현이 이후 다시 나타날 때 함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로 표상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 있는 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가 악을 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씨 뿌리는 비유를 함께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씨와 말씀, 뿌리는 자와 씨를 받는 땅, 그리고 결실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하십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밝히고, 마가복음에서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며,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씨를 뿌리는 이를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창1의 씨와 땅을 거듭남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식물 이미지에 임의로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사용하신 씨 뿌림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도 같은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져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존하며 삶에서 결실하는가가 중요함을 보여 줍니다.

 

막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와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29에서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의 나라가 씨 뿌림에서 시작하여 사람이 그 내적 진행을 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점차 결실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사람의 눈앞에서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 점차 자라는 과정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에 속한 질서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29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 외적 장소에만 두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신앙의 삶으로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앞에서 기억 속에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이제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준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 풀’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며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AC.29 해설)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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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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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심화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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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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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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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를 ‘세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과 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이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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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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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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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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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悔改, repentance)란 무엇인가 (2025/7/27)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He who wishes to be saved must confess his sins and do repentance.

 

(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To confess sins is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evils, to see them in oneself, to acknowledge them, to regard oneself as guilty, and to condemn oneself on account of them. When this is done before God, it is to confess sins.

 

(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He who merely acknowledges that he is a sinner like all others, and who regards himself as guilty of all evils, and does not examine himself—that is, see his sins—does indeed make confession, but not the confession of repentance, for he lives afterward as he had done before.

 

(AC.8390)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은 이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시는데요,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He who leads a life of faith does repentance daily; for he reflects upon the evils that are in him, acknowledges them, guards himself against them, and supplicates the Lord for aid. For from himself man is continually falling, but is continually being raised up by the Lord. He falls from himself when he thinks what is evil with desire; and he is raised up by the Lord when he resists evil, and consequently does not do it. Such is the state with all who are in good; but they who are in evil are continually falling, and also are continually being uplifted by the Lord; but this to prevent them from falling into the most grievous hell of all, whither from themselves they incline with all their might; thus in truth uplifting them into a milder hell.

 

(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 The repentance that is done in a state of freedom avails; but that which is done in a state of compulsion avails not. A state of compulsion is a state of sickness, a state of dejection of mind from misfortune, a state of imminent death; in a word, every state of fear which takes away the use of sound reason. When an evil man who in a state of compulsion promises repentance and also does what is good, comes into a state of freedom, he returns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The case is otherwise with a good man, such states being to him states of temptation in which he conquers.

 

(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Repentance of the mouth and not of the life is not repentance. Sins are not forgiven through repentance of the mouth, but through repentance of the life. Sins are continually being forgiven man by the Lord, for He is mercy itself; but sins adhere to the man, however much he may suppose that they have been forgiven, nor are they removed from him except through a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So far as he lives according to these commands, so far his sins are removed; and so far as they are removed, so far they have been forgiven. For by the Lord man is withheld from evil, and is held in good; and he is so far able to be withheld from evil in the other life,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resisted evil; and he is so far able to be held in good then,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done what is good from affection. This shows what the forgiveness of sins is, and whence it is. He who believes that sins are forgiven in any other way, is much mistaken.

 

(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After a man has examined himself, and has acknowledged his sins, and has done repentance, he must remain constant in good up to the end of life. If however he afterward falls back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and embraces it, he commits profanation, for he then conjoins evil with good, and consequently his latter state becomes worse than his former 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12:43-45) When the unclean spirit goeth out of a man he walketh through dry places, seeking rest, but findeth none; then he saith, I will return into my house whence I came out; and when he is come, and findeth it empty, and swept, and garnished for him, then goeth he, and joineth to himself seven other spirits worse than himself, and having entered in they dwell there; and the last things of the man become worse than the first (Matt. 12:43–45).

 

(AC.8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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