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62,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 지금부터 나오는 '여자'의 속뜻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262

지금까지 교회가 ‘여자’로 상징됨을 보여드렸다면, 여기서는 그랬던 교회가 이제는 오운(own)으로 왜곡되었음을 보여드리는데요, 이 오운은 앞서 '여자'에 의해 그 자체로 상징되었던, 그래서 순수했던 오운입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내용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이야기, 오랜 세월 왜곡되어 망가진 후손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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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6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 '창3:16 속뜻 개요'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261

지금 이 ‘여자’는 교회, 특히 자신의 프로프리움(라틴, proprium, 固有本性, own)을 사랑했던 교회를 말합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는 전투,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 염려를, ‘임신(conception)은 모든 생각을,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는 그녀가 그 결과, 낳게 될 진리를, ‘남편’은 여기서도 앞서 살핀 대로, 교회가 복종하게 될,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게 될 래셔널(the rational, 합리적, 이성적 능력)을 상징합니다. By the “woman” is now signified the church as to proprium, which it loved; by “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 is signified combat, and the anxiety it occasions; by “conception,” every thought; by 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 the truths which she would thus produce; by “man,” here as before, the rational which it will obey, and which wil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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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60,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창3:15의 결론'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it was revealed to the church of that time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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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59,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발꿈치'의 속뜻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59

발꿈치(the heel)가 가장 낮은 자연적, 혹은 육적(the lowest natural or corporeal)인 걸 의미한다는 것은, 사람 안의 다양한 것에 대한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을 알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건데요, 그들은 사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로, 체어리티(charity), 자비처럼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건 가슴으로, 자연적인 것들은 발로, 더욱 자연적인 것들은 발바닥으로, 가장 자연적이고 육적인 것들은 발꿈치로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나타내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유(思惟, reason)의 가장 낮은 단계, 곧 기억-지식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That by the “heel” is meant the lowest natural or corporeal cannot be known unless the way in which the most ancient people considered the various things in man is known. They referred hi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to the head and face; what comes forth from these as charity and mercy, to the chest; natural things, to the feet; lower natural things, to the soles of the feet; and the lowest natural and corporeal things, to the heel; nor did they merely refer to them, but also so called them. The lowest things of reason, that is, memory-knowledges, were also meant by what Jacob prophesied concerning Dan:

 

※ ‘사유의 가장 낮은 단계가 기억-지식’인 이유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세상 지식, 오감(五感)으로 습득하는 감각적 사실들)은 가장 날 것이요, 거칠고 투박하기 때문입니다. 식재료 식으로 말하면 껍질도 까지 않은, 아직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양파나 부추, 파, 당근, 무, 배추 상태와 같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49:17)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s rider falls backward. (Gen. 49:17)

 

시편에서도 Also in David: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마찬가지로 야곱 관련,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에도, In like manner by what is related of Jacob, when he came forth from the womb,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s heel, whence he was called Jacob, (Gen. 25:26)

 

야곱’이라는 이름이 ‘발꿈치’에서 나오기 때문인데요, ‘야곱’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뱀은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것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높은 차원인, 사람 내면의 자연적인 것은 물론, 더욱 그의 영적인 것과 더더욱 천적인 것은 절대 상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이런 천적, 영적, 내면의 자연적인 것을 주님은 당사자도 모르게 그의 안에 보존하시고, 보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보관, 간수해 오신 것을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리메인스, remains)라 하고 있습니다. 뱀이 사람 안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을 파괴하되, 홍수 전 사람들한테서는 감각의 원리와 자아 사랑을 가지고, 그리고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들 및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가지고, 오늘날에는 감각과 기억-지식 및 철학에 속한 것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으로 역시, 그리고 여전히 같은 짓을 반복하는 이런, 뱀이 일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제부터 쭈욱 들으시게 되는데, 이는 주님의 허락, 곧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for the name “Jacob” comes from the “heel,” because the Jewish church, signified by “Jacob,” injured the heel. A serpent can injure only the lowest natural things, but unless it is a species of viper, not the interior natural things in man, still less his spiritual things, and least of all his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preserves and stores up in man without his knowledge. What are thus stored up by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The mode in which the serpent destroyed those lowest natural things in the people before the flood, by 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 and among the Jews, by 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how at this day he has destroyed and continues to destroy them by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at the same time by the same loves, sha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old here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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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58,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상하게 할 것이요, 상하게 할 것이니라'의 속뜻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58

상하게 할 것이요(trampling on), 혹은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ing)는 디프레션(depression, 암담함)을 의미하며, 그 결과,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도 이와 같은데요, That by “trampling on” or “bruising” is meant depression, so as to compel it to “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is now evident from this and the preceding verses. So likewise in Isaiah: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사26:4-6) Jehovah hath cast down them that dwell on high; the exalted city he will humble it; he will humble it even to the earth; he will prostrate it even to the dust; the foot shall tread it down. (Isa. 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28:2-3) He shall cast down to the earth with the hand; they shall be trampled on by feet—a crown of pride. (Isa. 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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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57,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뱀의 머리'의 속뜻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57

뱀의 머리(the head of the serpent)가 일반적으로는 악이 지배적인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적인 상황을 의미한다는 건 그 본성(its nature)을 보면 분명한데요, 이 본성은 단지 지배적이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지상의 모든 걸 지배하고자 할 정도로 무서우며, 그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자 열망하는, 더 나아가 이걸로도 만족이 안 되어 급기야는 주님 자신까지도! 그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그런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불꽃이 일어나는 곳마다 거기에는 이런 게 잠재해 있습니다. 사후,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와, 그토록 열망하는 데까지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각해야 합니다. That by the “head of the serpent” is meant the dominion of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of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its nature, which is so direful as not only to seek dominion, but even dominion over all things upon earth; nor does it rest satisfied with this, but aspires even to rule over everything in heaven, and then, not content with this, over the Lord himself, and even then it is not satisfied. This is latent in every spark of the love of self. If it were indulged, and freed from restraint, we should perceive that it would at once burst forth and would grow even to that aspiring height.

 

※ ‘규제가 풀려(freed from restraint)는 아직 몸 안에서 사는 이 지상 생활에서는 남의 이목과 사회적 도덕과 윤리, 체면 등이 있어 마음대로 못 하지만, 사후 이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이 ‘’, 곧 자기 사랑이라는 이 악은 지배하기를 정말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그리고 이런 거에 휘둘리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높이는 뱀의 머리’이며, 주께서 상하게(tramples down), 심지어 땅으로까지 짓밟아 뭉게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인 것이며,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이를 루시퍼라고 하는, ‘이나 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how the “serpent,” or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desires to exercise dominion, and how much it hates all those who refuse its sway. This is that “head of the serpent” which exalts itself, and which the Lord “tramples down,” even to the earth, that it may “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 as stated in the verse immediately preceding. Thus also is described the “serpent” or “dragon” called “Lucifer” in Isaiah:

 

12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사14:12-15) O Lucifer, thou hast said in thy heart, I will ascend the heavens, I w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 and I will sit upon the mount of the congregation, in the sides of the north, 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 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 yet thou shalt be brought down to hell, to the sides of the pit. (Isa. 14:12–15)

 

계시록에서는 ‘’이나 ‘’이 자기 머리를 어떤 식으로 높이는지에 대하여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The “serpent” or “dragon” is also described in the Revelation in regard to the way in which he exalts his head: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3, 9) A great red dragon,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many diadems upon his heads; but he was cast into the earth. (Rev. 12:3, 9)

 

시편에서는 In David: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110:1-2, 6-7) The saying of Jehovah 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Jehovah shall send the rod of thy strength out of Zion, he shall judge the nations, he hath filled with dead bodies, he hath bruised the head over much land; he shall drink of the brook in the way, therefore shall he lift up the head. (Ps. 110:1–2,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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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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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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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살면서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형제들, 처가,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들, 서울침례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 지구촌교회를 비롯, 침신대 신대원 동기들, 늘사랑교회 성도들과 그 외 개척 시절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신 평책사 목회자 부부들, 그리고 수도원이나 4014 금식 운동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지인들 등, 제가 지난 4, 5년 꾸준히 틈틈이 글 공유를 하는 카카오톡 명단이 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한 번이라도 저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들을 대상으로 초창기 처음 명단을 선정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슨 대신 갚을 것 없는 때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글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는 이 스베덴보리의 낯설고 생소한 말씀 풀이와 이질적 교리로 그마저 많이들 소원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 분 한 분 저희를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신 기억들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제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실제로 그 고마움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일에는 저희가 너무 서툴러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드리는 경우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한분 한분이 사실은 그분들 모습으로 저희를 도우신 주님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경우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왜 보통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이 갈릴리를 출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즉 그 속뜻으로는, 이 말씀은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점차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시는 과정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조금 어려우실 듯 합니다만... 주님이 빛을 더하사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고, 사마리아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도 처음에는 교회 밖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계시다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영유아 시절이셨겠지요, 점차 진리의 인도를 받아 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주님의 영화의 과정을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화, 즉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주님 안의 신성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거기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뜻하고, 부활은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주님의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아직 신성과 완전히 결합하지 않으신 주님이 그러면 어떻게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분리된 상태일 때도 있었는데요, 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결합한 상태를 주님의 영화의 상태라 하고, 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를 겸비(humiliation)의 상태라고 합니다. 겸비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하나가 된 상태일 때, 즉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때 신성의 능력이 인성을 거쳐 병자들에게 전해져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영적 의미로 나병환자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더럽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영적 나병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정하지는 않는 걸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환자의 경우, 시대적으로, 즉 유대 정결법이 우선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거나 세상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주님 앞에 나오면 영적인 복과 자연적인 복을 주님께 구합니다. 나병환자가 멀리서 주님께 병의 치유를 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십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병환자가 생기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를 통해 나병의 유무와 그 상태를 판단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제사장은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보이라 할 때, 몸은 겉 사람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선의 관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악을 행하는지, 아니면 아직 선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에 있다가 악을 행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상태가 후자보다는 내적인 나병이고, 그러므로 위중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속까지 병드는 게 겉만 병든 것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한 양파나 감자, 사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병의 상태를 진단한 후, 악에서 돌아설 때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주닙의 말씀대로 하면,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5절과 16절에는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사람이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또한 그에게서 자아가 제거된다. (이순철 역) when man thinks that the Divine in respect to power and wisdom is everything, and man in comparison is nothing, or that from the Divine is all good and from man nothing but evil.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from the heart he comes as it were out of himself, and thence falls upon his face, and when he is thus out of himself he also is removed from the proprium [what is his own], which in itself is wholly evil; when this is removed, the Divine fills him and raises him up; (AE.77)

 

주님께 감사드리는 나병환자는 자신은 아무 힘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발아래 엎드린 그 사람을 향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열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홉은 결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인애(仁愛, charity)의 신앙을 버리고, 자아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 및 세상과 결탁, 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겨우 숨통이 트여 살만하게 되면 금방 또 제힘을 의지하여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그런 버릇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루거나 모아놓은 건 전혀 없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맴 도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요. 이런 못된 버릇이나 습관은 아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할 줄 믿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 9:1 비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발견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데요, 가령, 제가 몇 년째 대략 100여 분께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 오지만, 그 가운데 꾸준히 답신을 보내오시거나 무슨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대략 열 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처음엔 좀 서운함이 있었으나 ‘아,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에는 그를 사마리아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교회 밖의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하신 주님의 비유에 기꺼이 동의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겸손한 믿음이며, 부잣집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하듯 진리에 갈급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믿음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아의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걷는 것이나 가는 것은 삶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요, ‘구원하였다는 것’은 그의 병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게 아니라 영원히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인간의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인애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영달(榮達)을 위한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신앙, 즉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앙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후자의 신앙, 즉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네가 나를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의 그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에 따라 자아의 신앙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질병인 나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주님의 발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일시적으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기적인 신앙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아멘

 

 

 

원본

2021-09-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맞춤 설교

2024-03-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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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원리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김은경 역) 총 63장 목록 중 앞부분입니다.

 

1.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시다 (The God of Heaven Is the Lord)

 

2.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3. 천국 안의 주님의 신성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In Heaven the Divine of the Lord Is Love to Him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

 

4.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5. 세 천국이 있다 (There Are Three Heavens)

 

6. 천국은 무수한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The Heavens Consist of Innumerable Societies)

 

7. 각 공동체는 더 작은 천국이며, 각 천사는 가장 작은 천국이다 (Each Society Is a Heaven in a Smaller Form, and Each Angel in the Smallest Form)

 

8.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9. 천국의 각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 보인다 (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10. 천사는 완전한 사람 형태로 있다 (Therefore Every Angel Is in a Complete Human Form)

 

11.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Extracts from Arcana Coelestia relating to the Lord and His Divine Human)

 

12.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13. 천국은 지상의 모든 것과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the Earth)

 

33.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 (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

 

등의 내용들, 그리고 악한 영들이 자기 위장 근처로 오니 우울증이 시작되다가 떠나니 회복되는 걸 보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여러 증상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진술,

 

또 사람은 그 내면에 두 개의 창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을, 하나는 지옥을 향한 창이 있어 어느 한 쪽이 열리면 다른 쪽은 닫히게 되어 한 쪽의 것만 흘러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이 창문을 열고 닫는 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 마치 창문 밖 햇볕이 아무리 따스하고 환해도 정작 본인이 커튼을 쳐버리면 방안으로 못 들어오는 것과 같다는 것,

 

천국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건데, 그런 거처럼 지상의 사람도 천국, 곧 주님을 향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며, 그래야 천국을 향한 창이 열려 천국의 모든 좋은 것과 능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비로소 내가 그걸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내면이 열리지 않으면, 즉 사람이 천국을 향하지 않으면, 아무리 누가 기도를 해 주거나, 안수해 주거나 예언 기도, 치유 기도, 무슨 기도, 무슨 기도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저는 영육 간에 무슨 연약함이나 비정상이 시작될 때, 의도적, 의식적으로 천국하고의 연결을 생각합니다. 만일 몸 특정 부위의 연약함, 아픔이 시작되면, 의식적으로 천국 해당 공동체들하고의 연결을 생각하고, 주님이 해당 공동체들을 통해 제게 그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더욱 흘려보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제 온 몸이 늘 천국과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플럭스란 주님으로부터 나와 피조세계에 더하여지는 어떤 영원한 영적 흐름인데요, 그러면 대부분은 상태가 호전되며,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영육 간에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치유의 원리가 아닌가 하는데요, 늘 군중에 둘러싸이셨지만 정작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수였는데, 그 소수만 그 내면이 열려, 아니 정확히는 ‘열어’ 주님의 능력, 곧 치유하시는 인플럭스가 자기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즉 심령의 커튼을 확 열어젖힌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믿습니다!’, ‘주여!!!’ 소리소리 지르더라도 이 원리를 모르고 애를 쓰는 사람한테는 대부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봅니다. 이 자기 내면을 여는 거,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라야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815번 글 5번 항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는 계시록 13장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를 속뜻으로 주석한 내용 일부입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 이럴 수 있는 사람이 곧 위에서 말씀드린, '자기 내면을 여는 사람, 곧 내면의 창문을 여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천국을 사랑하고 지상의 삶, 겉 지향적이고 세속적 가치관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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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56,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의 속뜻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56

신앙뿐 아니라 주님 자신도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이라 하는 이유는, 주님은 홀로 신앙을 주는 분이시며, 그래서 주님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이고, 또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인데, 다만 이 교회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 아주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오운(own)으로 완전히 굴러떨어진 그런 교회였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신적 천적 오운과 주님의 휴먼 에센스에 있어서의 오운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결합, 자기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런 하나 됨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피조 세계는 완전히 소멸될 뻔하였습니다. Not only is faith but also the Lord himself is called the “seed of the woman,” both because he alone gives faith, and thus is faith, and because he was pleased to be born, and that into such a church as had altogether fallen into an infernal and diabolical own through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in order that by his Divine power he might unite the Divine celestial own with the human own in his human essence, so that in him they might be a one; and unless this union had been effected, the whole world must have utterly perished.

 

※ 부분적으로는 주님의 인성이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이 되셔야만 했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태생적 인성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한, 악을 유전한 인성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벗고 전혀 새로운 신적 인성이 되셔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으로서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사유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it)이 아닌, ‘(he)라 하신 것입니다. Because the Lord is thus the seed of the woman, it is not said “it,” but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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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55,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 '여자의 후손'의 속뜻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255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이 주님 신앙을 의미한다는 건, ‘여자’가 교회를 의미하며, 그 ‘후손(seed)은 신앙 말고는 없다는 점에서 분명한데요, 교회를 교회라 하는 건 주님 신앙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신앙을 경건한 자손(the seed of God)이라 하고 있습니다. That the “seed of the woman” signifies faith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s being the church, whose “seed” is nothing but faith, for it is from faith in the Lord that the church is called the church. In Malachi, faith is called the “seed of God”: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말2:14-15) Jehovah hath witnessed between thee and the wife of thy youth; and not one hath done so who had a residue of the spirit; and wherefore one, seeking the seed of God? But observe ye in your spirit, lest he deal treacherously against the wife of thy youth. (Mal. 2:14–15)

 

이 구절에서, ‘어려서 맞이한 아내(the wife of youth)는 고대 및 태고 교회들이며, 그 ‘후손’(seed, 혹은 신앙)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역시, 교회와 관련하여 In this passage the “wife of youth” is the ancient and most ancient churches, of whose “seed” (or faith) the prophet speaks. In Isaiah also, in reference to the church: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사44:3) I will pour waters upon the thirsty, and floods upon the dry [land]; I will pour my spirit upon thy seed, and my blessing upon thine offspring. (Isa. 44:3)

 

계시록에서는 In Revelation: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The dragon was wroth with the woman, and went to make war with the remnant of her seed, who were keeping the commandments of God, and have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Rev. 12:17)

 

그리고 시편에서는 And in David: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시89:3-4, 29, 36) I have made a covenant with mine elect, I have sworn unto David my servant, even to eternity will I establish thy seed, and his seed will I make to endure forever, and his throne as the days of the heavens; his seed shall endure to eternity, and his throne as the sun before me, (Ps. 89:3–4, 29, 36)

 

여기서 ‘다윗’은 주님을, ‘왕위’는 주님의 나라를, ‘’는 사랑을, ‘자손’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where by “David” is meant the Lord; by “throne,” his kingdom; by the “sun,” love; and by “seed,”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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