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명은 그에게‘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7절)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해설
이 글은 창세기2장의 중심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보여 주었다면,AC.76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생명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능력이나 구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가지로 설명합니다. ‘불어넣어짐’(the breathing)입니다. 생명은 생성되거나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숨은 곧 ‘영적 생명의 흐름’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육체가 살 수 없듯이, 주님의 숨이 사람 안에 불어오지 않으면 그 어떤 지식과 이성도 참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불어넣다’는 동작은 매우 친밀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멀리서 명령하거나 외부에서 조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 가까이 다가와, 직접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이 장면은 창조의 기술적 순간이 아니라, ‘관계의 순간’입니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주님과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연결이 곧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쓴 ‘breath of lives’, 곧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에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생명이 단일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사람 안에는 여러 층위의 생명이 동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 감각의 생명, 사고의 생명,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명은 각각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그 근원이 바로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AC.76은 앞선AC.73-74와 깊이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의 사람이며, 주님의 안식이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의 흐름이 방해 없이 통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는 긴장이나 자기 점검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숨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고요함이 있고, 그의 행위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생명을 소유 개념에서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흔히 ‘내 생명’, ‘내 삶’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표현은 근본적으로 부정확합니다. 생명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할수록, 그는 그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수록, 그는 더 충만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이 ‘불어넣어짐’의 이미지는 사후 생명(삶)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서AC.70에서 ‘죽음은 생명(삶)의 계속’이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이 숨이 끊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적 호흡이 멈출 때, ‘영적 호흡은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으며, 그 생명(삶)은 여전히 주님의 숨에 의해 유지됩니다.AC.76은 이 사실을 창조의 장면 속에 미리 새겨 넣습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2장의 모든 후속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삶은 모두 이 생명의 숨이 계속해서 불어오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상징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나 신화적 이미지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AC.76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하느냐 이전에, ‘어디서 숨 쉬느냐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는 주님의 숨으로 삽니다. 그 숨이 그 안에 머무는 한, 그의 삶은 살아 있으며, 그의 안식은 실제입니다.
그의지식과이성(knowledgeandrationality,scientificumetrationale)은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로묘사됩니다. (5-6절)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AC.75는 창2:1-17개요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AC.73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과이성’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사랑과 퍼셉션에 의해 인도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은 영적 인간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은 ‘scientificumetrationaleejus’라고 합니다. 여기서 ‘scientificum’은 영어 번역에서 ‘knowledge’로 옮겨졌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학문적 지식에만 한정해서 이해하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이 말은 인간이 감각과 경험, 교육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인 여러 앎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rationale’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현재 해설처럼 ‘scientificum은경험과학습으로쌓인지식이고rationale는그지식이질서잡혀이해로올라간상태’라고 너무 간단하게 두 층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AC에서 지식, 이성,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정교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AC.75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창2:5-6의 자연적 이미지들이 그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식과 이성을 묘사하는 것이 ‘초목과채소’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나무는높이자라지만초목과채소는땅가까이자라므로지식과이성이중심이아니라섬기는자리에있다는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갑니다. AC.75는 식물의 높낮이를 근거로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상응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물의 외형에서 우리가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상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AC작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초목은낮으니까겸손’, ‘나무는높으니까높은지혜’, ‘안개는부드러우니까은밀한은혜’와 같이 자연적 이미지에서 곧바로 영적 의미를 추론하면 아름다운 묵상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시적 연상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와 관련되므로, 가능한 한 해당 AC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안개가 ‘주님으로부터오는직접적인계시나교훈이아니라내적으로스며드는생명의영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비와 안개를 ‘위에서아래로강하게주입되는방식’과 ‘안에서밖으로부드럽게흘러가는방식’으로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AC.75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로 묘사된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안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창2:6을 직접 해설하는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요의 역할은 앞으로 펼쳐질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본문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볼 수 있도록 큰 대응 관계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이성’이 ‘초목과채소’라는 자연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큰 틀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해설이 강조한 ‘천적인간에게지식과이성이필요없다는뜻이아니다’라는 점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AC.75자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etrationale’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이 사랑과 퍼셉션이라고 해서 그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자연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적인간은지식과이성을가장바른자리에둔사람이다’, ‘지식은사랑을섬기고이성은선을밝힌다’, ‘그의지식은날카롭기보다온화하고그의이성은논쟁적이기보다투명하다’는 기존 표현은 이번에는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천적 인간 이해와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지만, 뒤의 ‘온화하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문학적 묘사입니다.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과 우리의 묵상을 분명히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AC.73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AC.75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3은 창2전체의 주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먼저 밝혔습니다. 그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일곱째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5는 이제 그 사람 안의 특정한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을 가리킵니다. 개요가 점차 천적 인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5를 ‘천적인간의인식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구조 전체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이 각각 구별되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과이성’과 뒤에 나올 ‘지성’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인식능력’으로 묶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일단 그 구별을 존중해야 합니다.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창2:5-6의 문자적 본문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들에는초목이아직없었고밭에는채소가나지아니하였으며’, ‘안개만땅에서올라와온지면을적셨더라’는 문장은 자연적 창조의 장면만을 읽을 때에는 식물이 생겨나기 전 땅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75는 속뜻에서 이 표현들이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관계된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묘사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AC.75단계에서는 ‘왜아직초목과채소가없다고하는가?’, ‘왜비가아직내리지않았는가?’, ‘왜땅을갈사람이없다고하는가?’, ‘왜안개가땅에서올라오는가?’를 모두 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들이 뒤의 상세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개요와 상세 해설의 역할을 구별하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적인간에게는진리가먼저이고천적인간에게는선이먼저’라는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이 큰 구별 자체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AC.75에서 ‘그래서천적인간은지식을쌓거나이성을단련한다는감각이거의없다’고까지 나아가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이 외적인 교육이나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2의 천적 인간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퍼셉션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관련 AC가 직접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천적인간에게도지식과이성이존재하지만그것들의질서와역할은그의천적상태안에서이해해야한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또 ‘안식의상태에들어간사람은더이상지식과이성을통해하나님께도달하려하지않는다.그는이미주님안에있다’는 기존 표현도 수정하겠습니다. ‘이미주님안에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고, AC.75의 표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상태를 ‘이제더이상배울필요도,생각할필요도,분별할필요도없는상태’처럼 그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이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단순화를 막아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천적 생명의 질서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천적 인간을 ‘이성을초월했으므로이성이필요없는사람’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중심이라고 해서 진리와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여러 능력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각각의 쓰임을 갖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의지식과이성은나무처럼자신을드러내는가,아니면초목과채소처럼삶을섬기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빼겠습니다. 질문 자체는 좋은 묵상이지만 ‘나무=자기과시,초목과채소=겸손한섬김’이라는 상응을 먼저 만들어 낸 뒤 그 위에 적용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AC해설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을 정확히 세우고, 그 위에서 적용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AC.75의 역할은 훨씬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창2의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말씀은 그것들을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형상으로 묘사되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가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첫째, AC.73부터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다시 거듭남의 문맥입니다. 둘째, 창2의 주체는 천적 인간입니다. 셋째, 그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창2:5-6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이 큰 구조를 먼저 붙들고 뒤의 상세 해설로 들어가면 각각의 상응을 억지로 앞당겨 해석하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차례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73에서는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 AC.74에서는 ‘천적인간은일곱째날’, 그리고 AC.75에서는 ‘그의지식과이성은초목과채소로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요는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AC.76에서는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 곧 그 천적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생명의숨’을 통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AC.75는 천적 인간을 지식이나 이성이 없는 신비적인 존재로 그리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들이 말씀 안에서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는지를 알려 주는 개요입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초목과 채소와 땅과 안개의 세부적인 의미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입니다.
AC.74는 바로 앞 AC.73을 한 걸음 더 이어 갑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어있던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렇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을 ‘일곱째날’이라고 부르며,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창1의 여섯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을 하나의 거듭남의 연속으로 연결합니다. 창1의 여섯 날은 자연계 창조의 시간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 날을 지나 이제 일곱째 날에 이른 인간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일곱째날’은 단순히 일주일의 마지막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거듭남이 천적 상태에 이른 인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천적인간이일곱째날에들어간다’고 하지 않고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날’은 단순한 자연적 시간 단위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이 어느 날 경험하는 휴식 시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창1의 여섯 날 역시 같은 관점에서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어 왔으며, 이제 그 연속이 일곱째 날이라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날에 ‘주님께서쉬신다’고 할까요? 우선 이것을 주님께서 더 이상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생명과 섭리와 역사가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2의 ‘안식’은 주님의 활동 중단을 뜻하는 자연적 휴식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속뜻에서는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어떤 새로운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이 의미는 뒤의 개별 절 해설에서 훨씬 자세히 설명될 것이므로 AC.74라는 개요에서 너무 앞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창1흐름을 생각하면 기본 방향은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와 중간 단계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하면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고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악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까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쉬신다’는 표현을 ‘인간이아무것도하지않게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며 쓰임을 행합니다. 문제는 활동의 유무가 아니라 그 활동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다고 여기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질서가 깊어질수록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주장하는 것이 물러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역사하게 됩니다. ‘안식’의 의미는 뒤의 AC.85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방향을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주님이사람안에서편히거하실수있는상태이기때문에주님의안식이라고부른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AC.74자체가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주님이거하신다’와 ‘주님이쉬신다’는 표현을 바로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주님의안식’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이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AC.74는 또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은 이미 영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을 아직 거듭나지 못한 낮은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의 거듭남 과정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이미 매우 중요한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창2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섯째날의신앙에머물러서는안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영적 인간이 반드시 천적 인간이라는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야 하고, 영적 상태는 불완전한 신앙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AC.73에서 살펴보았듯, 창1-2의 이 특정한 거듭남 서술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개요의 순서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인간은아직여섯째날에머문사람이고천적인간만완성된사람이다’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의 에덴 이야기가 나타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 안에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안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을 모두 마치고 활동을 중단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천국적 삶은 무활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 천국의 생명은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멈추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과 활동의 질서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해설처럼 이 한 문장에서 곧바로 ‘천국은사랑에서나오는활동이수고로느껴지지않는상태’라고 사후 천국의 삶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설명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천국 이해와 연결할 수 있지만, AC.74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후 천국이 아니라 거듭난 천적 인간입니다. 바로 앞 AC.72까지 사후세계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서 AC.73이후에도 계속 사후세계 문맥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AC.73부터는 분명히 창2:1-17의 속뜻 개요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AC.74의 ‘안식’은 우선 현재의 거듭남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일곱째 날이며, 그 상태를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이것이 ‘주님의안식’인지, 왜 일곱째 날이 복되고 거룩한지에 대해서는 뒤의 개별 절 해설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4는 개요로서 아주 절제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며,그날에주님께서쉬신다’고 합니다. 이 짧은 등식을 먼저 기억해 두면 뒤에서 창2:2-3을 자세히 해설할 때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훨씬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의 모든 묘사도 같은 문맥 안에 놓입니다. AC.75부터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어 에덴동산과 나무들과 강이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차례로 개요로 제시됩니다. 즉 창2:1-17전체는 바로 이 ‘일곱째날의인간’, 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렇다고 에덴의 모든 내용이 단순히 ‘안식이후의삶’을 묘사한다고 미리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표상에는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이후에는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지혜를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경계까지 등장합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모든것이완성되어이제아무위험도없는상태’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창2의 뒤쪽으로 갈수록 인간의 proprium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C.73과 AC.74를 함께 놓으면 창2의 출발점이 분명해집니다. AC.73은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고 하여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과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전환은 이 개요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창1에서 인간을 단계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도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여 주님께 안식을 제공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을 천적 상태로 인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인간의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표지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어떤 질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AC.74가 창2의 첫머리에 놓는 두 번째 열쇠입니다. AC.73의 첫 번째 열쇠가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였다면, AC.74의 두 번째 열쇠는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며,그날에주님께서쉬신다’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개요들은 이 일곱째 날의 인간, 곧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창2:1-17)
AC.73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됩니다.지금여기에서바로그일이다루어지고있습니다. (1절)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1절)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본격적인 개요가 시작됩니다. 바로 앞 AC.67-72에서는 ‘다른삶’에 관한 기록을 왜 밝히는지,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기록을 AC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서론을 마치고 다시 말씀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AC.73의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고,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는 말을 앞에서 다룬 사후 소생의 연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다시 창1부터 계속되어 온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AC.73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있던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창1의 속뜻에서 이미 보았듯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아직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창1의 여섯 날은 그러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새롭게 되어 마침내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창2에서는 그다음 상태, 곧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가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3은 창1과 창2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창1과 창2가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이 더 깊어지는 연속된 질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1에서 죽어 있던 인간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영적인간’과 ‘천적인간’이라는 두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살펴본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입니다. 그의 거듭남에서는 신앙에 속한 진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 인도됩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의식되고, 그것을 통해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서는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인간은머리로알고천적인간은행동으로산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하고 체어리티를 행합니다. 차이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지각됩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창1에서 이미 살펴본 ‘양심’과 ‘퍼셉션’의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신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해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인도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퍼셉션입니다. 그는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단지 외적으로 배운 규칙에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그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창2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AC.73의 한 문장만 가지고 ‘모든영적인간은결국천적인간으로발전해야하며,영적인간은단지미완성단계에불과하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창1-2의 연속적인 속뜻에서는 한 인간의 거듭남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상태를 거쳐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이후의 고대교회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순서를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3의 ‘asisnowtreatedof’, 곧 ‘지금여기에서바로그일이다루어지고있습니다’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론을 잠시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설할 창2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는 말입니다. 창2:1의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창조의 완성을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이제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와 연결됩니다.
현재 제목과 해설에서 이 변화를 ‘완성을향한생명의상승’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조금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창2의 천적 상태가 앞선 상태보다 더 내적인 상태라는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은 ‘상승’이 아니라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위계적인 상승 과정으로 표현하면 영적 인간이나 영적 천국이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라는 창2:1의 구체적인 속뜻은 AC.82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AC.73에서 미리 모든 세부 상응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개요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창1에서영적인간이된사람이창2에서는천적인간이되는과정으로들어간다’는 큰 흐름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의 관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창1에서 인간은 여섯 날의 거듭남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목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상태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점점 더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것을 내려놓으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선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다음 AC.74에서는 바로 이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이라고 부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73은 여섯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내적 의미를 한 문장으로 예고하는 역할도 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쉬신다’는 것도 인간이 완전무결해져 더 이상 아무 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미리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4이하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은 여섯 날 동안 인간이 경험한 거듭남의 싸움과 수고가 천적 상태에서는 다른 질서로 바뀐다는 정도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현재 해설에서 AC.73을 사후 삶과 연결하여 ‘죽은뒤에도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계속성장한다’고 설명했던 부분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0-72가 사후세계에 관한 글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읽기 쉬웠지만, AC.71에서 이미 사후세계 기록과 말씀 본문 해설을 구별하여 배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사후 소생에 관한 내용을 ‘이장의끝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했고, 이제 AC.73에서는 그 주제를 잠시 내려놓고 창2의 말씀 해설로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AC.73의 ‘죽어있던사람’은 AC.70의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과 동일한 문맥이 아닙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육체적 죽음이나 사후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으며, 지금 AC.73에서는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문맥을 따라 어떤 종류의 죽음을 말하는지 구별해야 합니다.
또 ‘사후세계는이미형성된삶이계속펼쳐지는자리이며,이땅에서영적삶을얼마나성실히살았느냐에따라천적상태로들어가는깊이와속도가달라진다’는 기존 해설도 여기서는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상태가 변화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간다는 더 큰 주제는 별도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3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후에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바뀌어 간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구별까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AC.73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명료합니다. 거듭남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단번에 가장 내적인 상태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새롭게 됩니다. 창1은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까지의 여섯 날을 보여 주었고, 이제 창2는 그다음 천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순서를 인간 자신의 성취 단계로 이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질서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1전체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빛을 있게 하신 분도, 궁창을 만드신 분도, 땅에서 싹이 나게 하신 분도, 광명체를 두신 분도, 생물을 번성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들이 속뜻에서 거듭남의 단계들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영적 창조 역시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이 되는 것 역시 그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AC.73은 짧지만 창1전체와 창2전체 사이에 놓인 중요한 다리입니다. 창1의 여섯 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2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됩니다.’ 이것이 지금부터 창2:1-17에서 펼쳐질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알고 창2를 읽으면 에덴동산 이야기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덴은 단순히 인류 최초의 아름다운 정원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과 네 갈래,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이 모두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차례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3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이 전환 하나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창1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를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창1과 창2를 이어 주는 AC.73의 핵심이며, 이제부터 시작되는 에덴동산의 속뜻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이장의끝에서,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져영원한삶안으로들어가게되는지를말하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위치를 알고 읽으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예고입니다. 바로 앞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 해설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바로 그 원칙에 따라 ‘이장의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AC.72는 독립적으로 떨어진 선언이 아니라 AC.71의 직접적인 결론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겠다고 했으므로, 이제 창2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져영원한삶안으로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은 편집 원칙이고 AC.72는 그 원칙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 주는 첫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72다음에 곧바로 소생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AC.73부터는 창2:1-17의 개요와 절별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장의 본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사후 소생에 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72는 ‘이제바로소생과정을설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장의끝에서그것을설명하겠다’는 안내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 두면 AC의 독특한 구성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번 예고의 주제는 ‘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지는가’입니다. 바로 앞 AC.70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짧게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소생될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으며, 육체의 죽음 후 다른 삶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음은삶의연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그때 제시한 주제를 창2해설이 끝난 뒤 구체적으로 다루겠다고 다시 한번 예고하는 셈입니다.
‘죽음에서일으켜져’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는 ‘raisedfromthedead’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위로 상승한다는 상응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소생하여 의식적인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서 AC.70에서 사용한 ‘resuscitated’와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또 이것은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69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몸을입은영’이라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사람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에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에서일으켜진다’는 것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자연적 소생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의 삶이 끝난 사람이 영으로서 의식적인 삶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의 끝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영원한삶안으로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에도 본문보다 너무 많은 의미를 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원은끝없는시간이아니라주님과의관계안에서살아있는상태’라고 설명했지만 AC.72는 여기서 영원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뜻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생명이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AC.70의 ‘죽음은삶의연속’이라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생명과 지옥의 생명도 구별해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도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AC.72에서는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그 전환 과정이 앞으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AC.67부터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이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말한다고 하기보다 ‘말하는것이허락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1의 기존 심화를 비공개하기로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 내용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그 허락이 직접적인 음성으로 주어졌는지, 내적 지각으로 알게 되었는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사후세계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이나 임의의 공개가 아니라 주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의 또 다른 의미는 독자에게 앞으로의 독서 순서를 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소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창2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창2:1-17에서 일곱째 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강과 그 네 갈래 등 매우 중요한 속뜻을 차례로 살피게 됩니다. 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죽음과 소생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을 실제로 이해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해서 창세기 본문 해설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반대로 창세기 본문만 해설하고 영계에 관한 경험을 모두 별개의 책으로 떼어 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 해설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면서, 그와 깊이 관련된 다른 삶의 본성을 별도의 연속된 기록으로 함께 제시합니다. AC.72는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독자에게 ‘이주제는이장의끝에서다시이어질것’이라고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AC.67부터 AC.72까지를 한 묶음으로 보면 그 준비 과정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므로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으며 ‘죽음은삶의연속’이라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런 기록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설명했고, 이제 AC.72에서는 그 배열에 따라 창2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예고합니다.
따라서 AC.72를 ‘이제부터실제사후세계체험담이시작된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약간 이릅니다. 실제로 다음 AC.73부터는 다시 말씀 본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AC.72는 지금까지의 사후세계 서론을 잠시 닫으면서 동시에 창2해설이 끝난 뒤 이어질 다음 기록의 주제를 미리 표시하는 글입니다. 일종의 ‘다음사후세계기록의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2는 매우 짧지만 독자를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다른삶’이라는 큰 주제를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다음 글부터 창2본문 해설로 돌아가면 독자는 그 주제가 끝난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지금은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의 끝에서 다시 그 주제를 이어 받아,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2의 핵심은 이 한 문장 그대로 붙들면 충분합니다. ‘사람이어떻게죽음에서일으켜져영원한삶안으로들어가는가.’ 이것이 창2해설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주제입니다. AC.70에서 선언한 ‘죽음은삶의연속’이라는 명제가 그때부터는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관찰했다고 증언하는 구체적인 소생의 과정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이러한내용들을말씀본문에들어있는것들사이에끼워넣게되면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될것이므로,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그것들을각장의처음과끝에어느정도순서를갖추어덧붙이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그밖에필요에따라부수적으로언급되는것들은별도로합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매우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후세계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지금부터 그런 내용들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소생 등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들을 앞으로 계속 밝히겠지만, 그것들을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내용들이 ‘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밝힐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은 서로 관계없는 일화들의 모음이 아니라 일정한 연결과 순서를 가진 하나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절과 구절을 차례로 해설하는 가운데 이 내용들을 조금씩 나누어 삽입하면,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 자체의 흐름이 끊기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창세기 본문 해설의 흐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의 중심적인 진행 방식은 말씀의 본문을 절별로 따라가며 그 안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매번 그 사이에 길게 삽입하면 말씀 해설의 연속 역시 끊어질 수 있습니다. AC.71은 이 두 종류의 내용을 아예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각각의 내용이 가진 연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배치상의 구별을 두겠다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각장의처음과끝에어느정도순서를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AC를 읽다 보면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창세기 한 장의 해설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장을 마친 뒤에 사후세계, 영들과 천사들, 천국과 지옥, 인간과 영계의 관계 등에 관한 별도의 기록들이 이어집니다. AC.71은 그 구조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배열임을 직접 알려 줍니다.
여기서 ‘insomeorder’, 곧 ‘어느정도순서를갖추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사후세계에 관한 경험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관련된 내용들을 가능한 한 연결하여 제시하려 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아도 그 점이 보입니다. AC.67에서는 왜 ‘다른삶’에 관한 것을 밝히는지 설명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이 ‘몸을입은영’이기 때문에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이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님을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마침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으며 ‘죽음은삶의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별개의 일화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조금씩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후의 AC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각 장의 처음이나 끝에 나오는 영계 기록을 단순한 부록이나 여담으로 생각해서 건너뛸 필요가 없습니다. AC.67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창세기 속뜻 해설과 전혀 무관한 덧붙임이 아닙니다. 다만 내용 자체의 연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본문 해설과 구별된 자리에 묶어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영계 기록을 창세기 본문보다 더 중요한 내용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1의 표현은 ‘말씀본문에들어있는것들사이에끼워넣게되면’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진행축은 여전히 말씀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를 절별로 해설하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별도로 사후세계와 영적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입니다. 따라서 AC에는 ‘말씀의속뜻해설’과 ‘영계에관한경험적기록’이라는 두 흐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진행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흐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그밖에필요에따라부수적으로언급되는것들은별도로한다’고 덧붙입니다. 즉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은 언제나 장의 처음과 끝에서만 등장하는 절대적인 편집 규칙은 아닙니다. 말씀을 해설하는 과정에서도 관련되는 내용이 있으면 부수적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1은 기계적인 형식 규칙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관련 내용을 모아 배열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언급할 수 있다는 편집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 마지막 단서 때문에 기존에 ‘그사이,즉본문해설의중심부에는철저히말씀의문자와그내적의미만이놓인다’고 설명했던 것은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1자신이 ‘besidesthosewhichareintroducedincidentally’, 곧 본문 중에도 부수적으로 들어오는 내용이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본문에서는영계이야기를절대로하지않는다’는 엄격한 분리가 아니라, 큰 덩어리의 설명은 장의 처음과 끝에 모으고 필요에 따라 관련 내용을 본문에서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또 장의 ‘처음’과 ‘끝’이라는 위치에 그 자체로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장의처음은독자의인식을열어주는자리이고,장의끝은그인식을가라앉히고확장하는자리’라고 했지만 AC.71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종본에서는 그 이유에 머무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라는 표현은 AC.71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자신이 마음대로 영계 경험을 공개하고 배열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저술 사명을 개인적인 선택이나 지적 기획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한 표현에서 ‘어디에무엇을배치할지까지주님께서직접지시하셨다’거나 ‘AC의편집배열전체가단어하나까지직접계시된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1은 그런 세부적인 계시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밝히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이렇게 배열하여 제시하는 일도 주님의 자비로 ‘허락된’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었는지는 이 글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71은 짧지만 우리의 AC작업에도 유익한 편집 원칙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내용이 중요하다고 해서 관련되는 모든 것을 한 본문 안에 넣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 해설의 흐름과 별도 주제의 흐름이 각각 살아 있도록 구별하고, 꼭 필요한 연결만 적절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가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적용이지, 스베덴보리가 직접 우리에게 편집 지침을 명령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최종 검토에서 성경 인용이나 다른 AC번호가 나온다고 매번 별도 심화를 만들지 않고, 본문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심화를 남기려는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통합니다. 내용이 많아질수록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본문에 속하고 무엇이 별도의 설명으로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AC.71이 직접 말하는 편집 목적도 결국 관련된 내용이 ‘흩어지고서로연결되지않게’ 되는 것을 피하는 데 있습니다.
AC.70과 AC.71의 관계도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고 ‘죽음은삶의연속’이라고 말하며 소생이라는 큰 주제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곧바로 창세기 2장의 절별 해설 사이에 계속 삽입하지 않습니다. AC.71에서 이러한 사후세계 관련 내용들을 별도의 연속된 묶음으로 배치하겠다고 설명하고, 이어 AC.72에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예고합니다. 바로 이 편집 원칙이 실제 구조로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의 핵심은 거창한 ‘계시의질서’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에는 그 자체의 연결과 순서가 있으므로 말씀의 절별 해설 사이에 흩어 놓지 않고,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묶어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관련 내용을 부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알고 AC를 읽으면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의 이유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해동안제가듣고보았던것을밝히는것이허락되었으므로,여기에서는먼저사람이‘소생될때’(whenheisbeingresuscitated),곧육체의삶에서‘영원한삶’(thelifeofeternity)으로들어갈때그에게어떤일이일어나는지를말하고자합니다.사람들이죽은뒤에도살아있다는것을제가알수있도록,육체안에서살아있을때제가알고지냈던많은사람들과말하고함께있는것이허락되었습니다.그것도단지하루나한주동안이아니라여러달동안,거의일년동안이나이세상에서와똑같이그들과말하고교제했습니다.그들은육체안에서살아있을때자신들이그러한불신가운데있었고,지금도매우많은사람이죽은뒤에는살지않을것이라고믿을정도로불신가운데있다는사실을몹시이상하게여겼습니다.실제로육체의죽음후사람이다른삶안에있기까지거의하루도지나지않기때문입니다.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삶의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 증언을 상상이라고 하거나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입은영’이기 때문에 본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모든 서론을 지나 첫 번째 실제 주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이소생될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단어는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소생’이라고 하면 죽을 뻔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없어진 사람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육체의 삶이 끝나면서 사람이 영으로서의 의식적인 삶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육체의삶에서영원한삶으로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72이하에서 나올 ‘소생’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자연적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서 깨어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육체의부활’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의식 없이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육체를 받아 살아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0에서부터 죽음과 영원한 삶을 하나의 연속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AC.70에서는 아직 그 소생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바로 다음 글들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경험한 방식으로 하나씩 설명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부분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도 아니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이세상에서와똑같이’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후생명을 철학적으로 추론하거나 성경 구절만을 들어 논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직접적인 경험을 증언으로 내놓습니다.
‘이세상에서와똑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후세계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자연계와 똑같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그들과 ‘말하고교제한방식’입니다. 즉 죽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잔상이나 이름만 남은 존재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말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AC와 ‘천국과지옥’에서는 사후에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관계한다는 사실이 훨씬 자세히 설명됩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죽은 뒤에도 계속 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하거나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죽은 뒤 자신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경험하자 과거의 불신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곧바로 악이나 도덕적 잘못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은 왜 그들이 그렇게 믿지 않았는지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69에서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영적 세계와의 의식적인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했으므로 일정한 배경 연결은 가능하지만, AC.70자체가 ‘사후생명을믿지않는이유는모두겉사람에게잠겼기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최종 해설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AC.70의 가장 강렬한 문장은 마지막 두 문장입니다. ‘실제로육체의죽음후사람이다른삶안에있기까지거의하루도지나지않습니다.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생명과 무생명 사이에 긴 공백이 생기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적 생명이 끝난 뒤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음을 ‘삶의연속’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거의하루도지나지않아’라는 말을 해석할 때에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대에 천국에는 자연계와 같은 해와 날과 시간이 없으며, 그곳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C.70의 ‘거의하루’를 곧 ‘영계에서하나의상태주기’를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연계에 있는 독자에게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안에서의 의식적인 삶 사이가 얼마나 짧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자연적 시간 언어로 ‘하루도거의걸리지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영계의 시간과 상태의 관계는 별도의 문제이며, 이 표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과지옥’ 162-165에서는 천사들에게 자연계의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또 ‘거의하루’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24시간 이내라는 시간표로 바꾸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의 관심은 임종 후 몇 시간 몇 분 만에 어떤 단계가 완료되는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후 AC.72이하를 보면 소생의 과정에는 질서와 연속이 있으며 여러 천사들이 관여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몇시간이냐’보다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삶 사이에 인간 존재의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삶의연속’이라는 말은 단순히 ‘죽어도영혼이살아있다’는 명제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새로운 존재나 과거 사람의 복제품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다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즉 죽음 전의 ‘나’와 죽음 후의 ‘나’ 사이에는 인격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후 기억과 애정, 성품과 지배적인 사랑에 관한 설명으로 점점 더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것이죽기전과그대로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삶의연속’은 사후에도 아무 변화 없이 자연계 삶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와 자연적 환경은 벗게 되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됩니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 자체가 끊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인격적 생명의 연속성이 AC.70이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영원한삶’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들어간다’고만 하지 않고 ‘육체의삶에서영원한삶으로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수적인 후속 삶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자연계의 삶은 제한된 기간 동안 지속되지만 인간의 영적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과 영원한 삶은 서로 상관없는 두 인생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이어지는 두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계의 삶을 단순한 대기실이나 가치 없는 짧은 준비기간으로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후의 삶이 현재 삶과 연속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인간의 내적 생명 형성과 관계됩니다. 다만 AC.70은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재 글에서는 우선 ‘사람은죽어도계속산다’는 사실과 죽음이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0은 이처럼 앞으로 이어질 긴 사후세계 기록의 첫 글로서 매우 절제된 출발을 합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구조도, 영들의 세계도, 사후의 세 상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세웁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자신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여러 달 동안 말하고 교제한 경험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합니다.
AC.67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는 인간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0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인간이 실제로 계속 살아 있다는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0을 읽으면서 당장 사후세계의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연옥, 최후의 심판,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으로의 최종 귀속 같은 주제들은 뒤에서 각각 더 적절한 자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먼저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죽어없어지지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 짧고 강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