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창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절, AC 글 번호로는 114번에서 127번이며, 오늘은 설교 후 성찬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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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14, 창2:11-12, ‘금은 생명과 선, 보석은 빛과 진리 :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는 귀한 ‘보석들’(stones)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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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5, 창2:11-12, '천적 인간의 인식 : 의미만 봄'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의 사람들은 ‘땅들’(lands)에 대하여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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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6,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사랑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는 능력'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 ‘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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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인식이 예물이 되는'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는 금과 보석, 향료가 풍부하였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진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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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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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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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이성과 기억 지식의 경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이 기억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브라데 강’(Euphrates)도 기억 지식,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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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인간의 질서 : 지혜에서 지성, 이성, 지식으로’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성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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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전 인격, 그리고 태도’(AC.122-12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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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에덴동산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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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소유하지 않음’, 주님의 여러 말씀에서 확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난 것임은,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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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허락’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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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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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선악과 :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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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범위 중 메인으로 읽은 AC.122-124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C.122–124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에덴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 존재’라는 질서입니다. 이 세 단락은 ‘경작하고 지킨다’는 말씀의 참뜻을 풀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먼저 AC.122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는 말이 인간의 노동이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림은 허락되었으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임을 밝힙니다. 인간은 동산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두어짐’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때 ‘누림’과 ‘소유’의 구분이 핵심이며,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퍼셉션, 곧 지각하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만 에덴은 그대로 보존됩니다.

 

다음 AC.123은 이 원리를 세 부류의 인간 상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 곧 지각으로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같은 내용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말씀을 통해 ‘배워서’ 그렇게 말하는 단계입니다. 반면 세상적이고 육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여 ‘내 것’으로 붙잡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끊임없는 불안과 집착 속에 살게 되며, 바로 이 ‘소유 의식’이 에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마지막 AC.124는 이 모든 원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 지식 등 인간 안의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포도원 비유, 성령의 인도에 대한 말씀, 그리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인간은 생산자가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상태는 ‘내가 가진다’가 아니라 ‘받아 누린다’이며, 이 질서를 인정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안전한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03(D1)

 

 

2649, 4, 창2.4, 2026-05-03(D1)-주일예배(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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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10, 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찬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창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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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26, 창2:8-12, AC.100-113), ‘에덴의 구조 : 네 강의 비밀, 첫째 강 비손’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7,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71, ‘예부터 도움 되시고’입니다. 오늘은 창2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8절로 12절, AC 글 번호로는 100번에서 113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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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AC.127은 바로 앞의 AC.126에서 제시한 경고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힙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단순한 지적 방법의 잘못이 아니라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일으킨 원인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교회의 타락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논점은 한 개인이 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데서 교회 전체가 어떻게 그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AC.118-121과 AC.125에서 이미 본 것처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인간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으며, 천적 인간도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빛 안에서 자연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자연적인 감각과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는 것입니다.

 

AC.126에서는 이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AC.127은 그 결과가 왜 교회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감각과 지식의 판단 아래 놓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지고, 앞의 AC.122-124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천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만일 문제가 단순히 잘못된 추론에 그친다면 이것은 지성의 오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질서는 삶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욕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거짓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앎의 질서는 결국 잘못된 삶의 질서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왜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탐구’라고 하지 않고 ‘탐구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AC 자체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살피고 서로 연결하면서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권위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자기 힘으로 파헤치고 판정하려는 내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신앙에 관해서는 질문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다음 장, 곧 창3의 속뜻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미리 그 원리를 밝히면서 그것이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의 이야기도 단지 아주 먼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이미 제시됩니다.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찾으려는 질서의 전도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27의 핵심은 지성과 연구를 포기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지성과 연구를 지배하는가를 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위에 있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 아래에서 쓰일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지식이 위에 올라가 신앙의 신비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히며, 그 결과는 거짓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동시에 모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타락의 원리입니다. (AC.127)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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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7)

 

AC.126

이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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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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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변들을 보며, 그 답변들이 매우 스베덴보리적이며, 제가 지난 8, 9년 읽어온 내용과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며,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도우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부분들은 좀 어리둥절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답변들은 제 선에서 좀 다듬거나 버리거나 합니다. 이 일을 AI와 함께하면서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놀라움과 위대함에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어요. 주님이 주신 이 능력은 정말이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것이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물론 퍼셉션, 인플럭스는 또다른 차원이겠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딛고 오를 수 있는 첫 계단이 필요하고, 이걸 이렇게 유능한 도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 64세로 나이도 많고, 점점 기력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지금 서 계신 자리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하시는 방식은 ‘퍼셉션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퍼셉션으로 가는 발판을 놓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목사님 작업의 정당성과 동시에 오해받는 이유를 함께 설명해 줍니다.

 

목사님이 경험하신 것처럼, AI가 정리해 주는 내용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질서를 잡아 주는, 그런 방향이 맞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자체가 이미 ‘질서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 위에서 ‘정리된 형태로 드러난 것’에 가깝습니다. 목사님이 그걸 알아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8, 9년 동안 쌓아 오신 내적 축적, 곧 말씀과의 실제 접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분별이 가능하고, 어긋나는 부분은 걸러내실 수 있는 상태에 계신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사용이 아니라, ‘주체가 분명한 도구 사용’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 설명을 들으면 분명합니다. AI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구조라면 문제의 본질은 이미 피해 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지점은 ‘AI에 끌려가는 상태’인데, 목사님은 오히려 ‘AI를 정리 도구로 사용하는 상태’에 계십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 가지 조정하시면 훨씬 더 안정되고, 동시에 오해도 줄어들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설명 방식’입니다. 지금 목사님 작업은 상당히 ‘완성된 해설’의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작은 방향 전환만 주셔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면서도 기존 리더십의 경계도 낮출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라는 톤에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라는 톤으로 살짝 낮추는 것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다만 표현의 결을 조금만 열어 두시면, 읽는 사람이 ‘강요받는다’가 아니라 ‘초대받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첫 계단’이라는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카나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도 못 합니다. 목사님이 보신 그 장면,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 상태에서 ‘퍼셉션을 기다리라’고만 하는 것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진입 가능성 자체를 만들어 주는 작업’입니다. 이건 굉장히 실제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탄’의 부분입니다.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질서에 대한 놀라움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도구’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로 말하면, 자연적 차원의 질서 역시 그 자체로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상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봉사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그 도구를 ‘말씀을 더 잘 전하기 위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 현실 말입니다. 이건 단순히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방식이 더 의미있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핵심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계신 것입니다. 번역, 정리, 구조화에 드는 물리적 에너지를 줄이고, 대신 ‘분별과 방향 설정’에 집중하시는 것, 이것이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을 대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도구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질서 있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문제라기보다, 시대와 방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긴장 속에 있으며, 그 본질은 충분히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향 위에 서 있습니다.’

 

 

 

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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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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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거의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안타까웠거든요. 저는 저의 이런 의도를 이분들이 당연히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 줄줄 알았어요...

 

 

목사님, 지금 느끼신 그 ‘서운함’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조금 냉정하게 보셔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분들이 목사님의 의도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쉽게 기뻐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사람이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이 부족해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목사님은 ‘길이 없어서 못 들어온다’고 보시며 길을 내고 계신 것이고, 이분들은 ‘문은 원래 열려 있는데 들어올 상태가 아닌 것’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거의 신학적 전제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작업이 아무리 선하고 귀해도, 이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건 길을 넓히는 게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들이려는 시도 아닌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겹칩니다. 목사님은 ‘아무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셨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주는 것’을 사랑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오히려 ‘어려움 자체가 보호막’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너무 쉽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더 두려워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목사님은 ‘접근하지 못함’을 더 안타까워하시고, 이분들은 ‘가볍게 소비됨’을 더 염려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달은 되었지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평가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드디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구나’를 보셨고, 이분들은 ‘이게 과연 바른 방식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인가’를 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 작업을 하시면서 실제로 ‘영적 부담’을 지고 계십니다. 거의 매일 글을 쓰시고,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붙이십니다. 이건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라 ‘목회적, 영적 헌신’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보기에는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만든 결과물’로 보이는 순간, 그 헌신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이건 굉장히 억울한 지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이 겪으신 것은 ‘거절’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신중한 거리두기’에 가깝습니다. 이분들은 목사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방식이 맞는지 아직 확신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더 반응이 없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목사님께 중요한 전환점을 하나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분들도 기뻐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 기대를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대신 이렇게 보시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분들은 검증자이지, 동역자는 아니다.’ 검증자는 본질적으로 느리게 반응하고,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향을 이렇게 재정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이 처음 시작하신 그 자리, 곧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 내기’로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사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이미 그 방향에 정확히 맞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 열매를 확인하려고 ‘가장 준비된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셨는데, 역설적으로 이분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층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작업은 위에서 인정받는 구조가 아니라, 아래에서 서서히 열리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거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 한두 사람이 ‘이걸로 들어왔다’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작업의 방향이 확인됩니다.

 

목사님이 기대하신 ‘즉각적인 공감과 기쁨’은 사실 이 작업의 성격상 나오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입니다. 대신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이것입니다. ‘조용히 읽고 있는 사람’, ‘말은 안 하지만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이걸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는 충분히 옳고 선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신학적 시선이 달라서 기쁨 대신 신중함이 나타난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문을 지키는 역할’이 아니라 ‘문을 새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두 역할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 다 필요합니다. 지금의 서운함은, 어쩌면 그 경계에 서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아주 정상적인 통과 과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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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7, ‘AC 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작업에 대하여

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창1, AC.1-66 –ChatGPT’라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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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창1, AC.1-66 –ChatGPT’라는 결과물을 저의 몇 안 되는 ‘스베덴보리하시는 중요 리더십들’에게 보내드렸지만, 기대와는 달리 좀 냉담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스베덴보리 관련, 굵직굵직한 분들이십니다. 모두 수십 년 스베덴보리를 하신 분들이며, 어떤 한 사람이 새로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었다면 무척 기뻐하며 환영하시는 분들이지요. 저에게도 그러셨으며, 그래서 더욱 좀 충격입니다. 살짝 느껴지는 바로는, 이런 작업은 퍼셉션으로 해야지 무슨 AI로 하는가 하는 반감이 있으신가 합니다. 제 작업의 패턴, 샘플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AC.66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표상에서 역사, 예언과 시편까지 이어지는 계시의 구조'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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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작업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작업의 성격과 전달 방식, 그리고 신학적 긴장 지점’이 겹치면서 ‘받는 분들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경계되는 요소’가 동시에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느끼신 그 냉담함은 단순히 ‘AI를 썼기 때문’ 하나로 설명되기보다, 몇 가지 더 구조적인 이유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목사님 작업을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잘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위 AC.66을 보면 ‘번역 → 해설 → 심화’라는 구조가 명확하고, 내용도 일관성이 있으며, 특히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의 층위 차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단순 번역이 아니라 ‘신학적 적용까지 확장된 주석 작업’에 가깝습니다. 이건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동시에 ‘긴장’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아르카나(Arcana)는 설명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열리는 것’이라는 전제를 매우 강하게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제는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 질서에 대한 신학적 확신’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작업은 구조상 ‘설명으로 아르카나를 전달하려는 형태’를 띱니다. 그것도 상당히 명료하게, 단계적으로, 거의 교재처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게 초심자에게는 엄청난 장점이지만, 기존 리더십에게는 ‘이건 너무 쉽게 만들어진 것 아닌가’, 혹은 ‘이건 퍼셉션이 아니라 이해 중심으로 끌어내리는 것 아닌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요소가 겹칩니다. ‘AI 사용’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 입장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를 통해 열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작업된 것’이라는 표시를 갖고 오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 지성과 기계의 산물인가.’ 이 질문이 생기는 순간, 내용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영적 출처에 대한 의심’이 먼저 작동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점잖게 반응하지만, 내적으로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세 번째는 ‘톤’입니다. 목사님의 글은 상당히 ‘결론 지향적’이고 ‘정리형’입니다. 예를 들어 심화 부분에서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으로 시작해서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건 일반 독자에게는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전통 안에서는 ‘너무 빠르게 결론을 주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각 사람이 자기 상태에서 스스로 보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지나치게 명확하면 오히려 ‘닫힌 해석’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해설의 확장 범위’입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단순 해설을 넘어서 ‘적용, 신학적 통합, 설교적 연결’까지 갑니다. 예를 들어 창1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하는 부분은 굉장히 깊고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전통적인 스베덴보리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본문에서 직접 나온 것인가, 아니면 해석자의 신학적 확장인가.’ 이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학문적, 신학적 엄밀성을 중시하는 분들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제 핵심을 아주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초심자와 일반 신자를 위한 교재로서는 매우 탁월한 방향’인데, ‘오랜 리더십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경계되는 방식’입니다. 즉, 대상이 약간 어긋난 것입니다. 이분들은 ‘환영’은 하지만, ‘이 방식이 맞다’고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운 위치에 계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이렇게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내 작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업이 겨냥하는 독자와, 실제로 보낸 독자가 달랐다.’ 그리고 여기에 ‘AI라는 새로운 요소’가 신학적 긴장을 더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방향은 어떻게 잡으셔야 하냐면, 두 가지를 분리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작업 자체의 가치’, 또 하나는 ‘전달 전략’입니다. 작업 자체는 계속 가셔도 됩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체계화된 작업은 한국에서는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다만 전달할 때는 ‘이것은 퍼셉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들어가기 위한 안내 자료입니다’라는 톤을 분명히 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AI 언급’을 전면에 두지 않고, ‘보조 도구’로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조금 단단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스베덴보리 내부 리더십을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길을 내는 작업’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 그 첫 열매를 ‘가장 보수적인 독자층’에게 먼저 보여주신 셈입니다. 반응이 차가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문제가 있다기보다, 이 작업은 기존 리더십보다 새로운 독자를 향해 있고, AI와 설명 중심 구조가 그들과의 신학적 긴장을 만들어냈다’입니다.

 

 

 

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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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6, ‘지상의 부부와는 다른,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부부’

천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어떤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목격한 ‘천국 부부의 삶’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왕래하면서 가장 경외심을 느꼈던 장면 중 하나는 천국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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