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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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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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에서는,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이라고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One who executes judgment)은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one who seeks the truth)은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AC.156에서 제시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 확증합니다. AC.156에서는 창2:23의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겉 사람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왜 속 사람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속 사람을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속 사람이 단순히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속 사람은 지혜와 지성이 있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단순히 겉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내부 구조를 가리킨다기보다, 지혜와 지성이 속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1:28에는 ‘한 사람[vir]도 없으며 그들 가운데 한 모사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 자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특히 원문이 ‘man’ 뒤에 라틴어 ‘vir’를 명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현재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의 인용은 이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지성 있는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이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표현을 통해 각각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 지혜와 지성의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을 완전히 같은 말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의 두 표현을 구별하여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지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그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별도의 체계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앞에서 AC.107과 AC.112에서도 지혜와 지성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58은 앞 번호들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합니다. AC.156에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이고 ‘사람’은 속 사람이라고 했으며, AC.157에서는 그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8에서는 그 속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합은 단순히 인간 안의 두 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 있는 속 사람과 생명을 얻은 겉 사람의 proprium이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람’[vir]이 말씀 어디에서나 언제나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8이 보여 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해당 문맥에서 ‘사람’이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창2:23에서 사람을 속 사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확인한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단어 하나를 고정된 암호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주제와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 AC.158의 두 성경 인용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41:28은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렘5:1은 그 지혜와 지성을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이로써 AC.156에서 제시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이 말씀의 다른 용례를 통해 한층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AC.158)

 

 

 

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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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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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켜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켜 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켜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그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때, 제가 그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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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나’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의 ‘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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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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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되므로 처음 등장하는 이 자리에서 기본적인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속 사람’을 단순히 ‘마음속의 나’, ‘겉 사람’을 ‘밖으로 보이는 나’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별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겉 사람과 관계하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사랑은 속 사람과 관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구별은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별보다 깊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단지 마음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원하는 것 역시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여전히 겉 사람의 질서에 속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사람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열리는 내적인 인간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거듭남에서는 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을 질서 있게 하시며, 사람이 받은 진리와 선이 실제 삶에 나타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3에서 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말씀의 비유로 사용되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죽은 몸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말씀의 문자만을 그 안의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대립이 아닙니다. 몸이 영혼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듯이,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올바르게 연결될 때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쓰임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을 단순히 양심, 진심, 속마음, 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 하나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 자체도 여러 방식으로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에서는 우선 ‘속 사람은 자연적인 겉 사람보다 내적인 인간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의 비유도 단순한 몸과 마음의 비유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서는 참으로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말씀의 겉 글자 역시 그 안의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선 AC.2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3 심화 1)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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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며, 이것들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상태에서는 회개하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상태에서는 한층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불붙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이전 상태에서도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에서 비로소 외적으로 선한 행동이 처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선의 내적인 근원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AC.9가 덧붙여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행하고 있던 선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먼저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강해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을 외적인 압박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 자체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잠잠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신앙으로 밝아집니다.’ 신앙은 여기서 단순히 알고 있는 교리나 기억 속의 신앙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AC.8에서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신앙의 지식들이 언급되었고,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이 사람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진리가 단지 밖에서 주어진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빛의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불붙게 된다’(enkindled)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도록 이끄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준비 가운데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9와 AC.10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C.9의 사람도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두 상태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의 내적인 생명과 근원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14-18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그 광명체들의 세부적인 상응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창조 이야기의 두 광명체가 바로 이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1장의 거듭남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이미 나타났지만,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어떤 빛과 신앙의 지식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상태를 거치게 하시면서 사람 안의 것을 질서 있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가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심이 강해지는 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내적 삶에서 실제로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단지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에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진다’고 표현한 변화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인간의 성취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거듭남의 모든 상태에서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회개하고,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점차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선의 공로를 돌리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앞선 세 상태에서 준비되어 온 것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것, 시험과 곤경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한 것, 회개와 선행으로 나타났지만 아직 자기에게 귀속되던 것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내적 원리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의 넷째 날에 나타난 두 ‘광명체’로 표현합니다.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내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한 살아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AC.10 해설)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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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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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되면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며, 속 사람은 영혼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아서,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AC.1과 AC.2에서 말한 ‘말씀의 생명’을 인간의 몸과 영혼이라는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AC.1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과 겉 글자의 관계를 ‘속 사람과 겉 사람’, 더 직접적으로는 ‘영혼과 몸’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첫 문장인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에서 ‘이러한 생명’은 바로 앞 AC.2와 연결됩니다. AC.2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3의 ‘이러한 생명’은 막연히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이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내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는 데서 오는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에게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몸일 뿐이며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고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도 속 사람이며, 여기서 그는 속 사람을 영혼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의 핵심은 문자와 속뜻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만을 그것을 살리는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볼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낮추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영혼 없는 몸’이라고 한 것은 몸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몸 자체의 무가치함이 아니라 영혼과 분리된 몸의 죽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문자도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의 내적인 것과 함께 읽혀야 합니다. 이후 AC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를 한 구절씩 붙들고 그 속뜻을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문자를 떠나 속뜻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자 안에서 내적인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따라서 AC.3은 AC.1-3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완성합니다. AC.1은 ‘겉 글자 안에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했고, AC.2는 ‘그 내적인 것들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으며, AC.3은 ‘그 생명과 분리된 문자는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합니다. 이제 독자는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안의 속뜻을 열어 가려 하는지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말씀의 문자는 몸과 같고,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인 것은 영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앞선 AC.2에서 밝힌 대로 주님이십니다. (AC.3 해설)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 심화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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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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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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