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own)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 곧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 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 ‘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의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표’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것,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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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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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그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와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빛’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그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그 교리가 내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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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고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는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 불리는데,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때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악’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문’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곧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더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더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과 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 체어리티가 없음 →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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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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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 대접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 향하여 열리는 삶’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 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 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두 가지를 잊지 말라. 주는 것과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 주는 삶’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줌’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남에게 하나를 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을 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으실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부터가 주님에게서 온 것이므로 필요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고, 나중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 다시 여는 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 것’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았음을 잊지 말고,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기를 잊지 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 것은 내 것이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도록 받은 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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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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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 행위 →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선’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은 ‘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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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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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막12:28-35; 마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막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막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막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이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데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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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은 ‘toward’를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그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와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와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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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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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창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마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가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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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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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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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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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out...

황교안 무소속 후보밖에는 길이 없네요

 

이토록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없다니...

 

윤 대통령님도 창당 안 하고, 헌재 결과 받아들인다라고 윤상현 의원 통해 언급하셔서, 윤 대통령님 역할도 계엄까지로 막을 내린다고 하네요

 

이재명 관련 재판들은 법원에서 출석 통보 포기하고, 김만배는 오늘 무죄판결 나고... 대 놓고 법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치 모압-암몬-마온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심정이랑 비슷하네요

 

중국이 깊게 쳐들어와서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국민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있고... //

 

 

이상은 어젯밤 받은 어느 우국충정 지사의 카톡입니다. 아래는 제가 보낸 답신입니다.

 

 

주님 복음서 시절, 자기 지상 조국 유다의 운명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때에도, 의롭고 올바름을 사랑할 때에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안에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 밖으로는 로마의 식민 통치, 안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꾀하는 끊임없는 움직임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가로이(?) 천국 이야기만 하시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니실 뿐이셨습니다. 그 덕에 나라 안팎 권력 잡은 자들, 정치인들의 시선을 피하실 수 있었지만... 아마 대제사장들을 비롯, 당대 종교 리더십들의 시기, 질투만 아니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일은 없으셨을 뻔할 정도였습니다.

 

만일 주님이 지금 이 대한민국 상황에 오셔서 저 복음서 시절처럼 동일한 사역에 힘쓰고 계시면... 지금은 뭐 좀 달라질까요? 아마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위 종교 리더십이라는 사람들의 수많은 지적질 때문에 말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든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잘, 그러니까 주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처럼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로마에 아부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타도를 외치시지도, 그렇다고 로마에 부역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아예 그런 현실 정치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22:21)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겉을 보지만, 주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적 상황이 겉이라면, 유다를 비롯, 온 세상에 만연한 지옥의 기운, 곧 속을 주님은 상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든, 공산, 전체주의, 사회주의든 사실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 때문에 주님의 일과 계획, 영원하신 섭리가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상 어떤 정치 제도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재명 같은 사람 하나 때문에 주님이 곤란을 겪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마27:11) 하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입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겉과 속 상황이 전개되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께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어떠하심을 위해 굳이 사람들의 예배와 영광, 찬송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시고. 그런 걸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신도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예배, 영광, 찬송 없이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비유하자면, 저 하늘의 해와 같은 분이셔서 우리의 무슨 찬송과 영광 돌림은 그저 성냥개비 하나 켜서 그 빛에 보태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더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섬기라 하시는 건 뭐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정말 크신 분이십니다. 천국보다 크셔서 천국 밖에 계신 분입니다. 천국을 비롯한 모든 영계와 이 세상 자연계, 온 우주 만물 등, 이 피조 세계 전체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한, 그런 신이십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아주 가까이 모시는 삼층천 한 가운데 천사들조차도 주님이 얇은 보호막을 입혀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의 그 기운에 해를 입으며, 주님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천국이나 지옥을 방문하시면, 그곳은 주님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신성(the Divine)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소멸되고 맙니다. 그 속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겉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그리고 신적 진리(Divine Truth)이신 성령이 해처럼 방사되시는,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이신 주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금은 분명 엄중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이런 신, 이런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26:51-54)

 

그 능력의 천사들조차 주님 뒤에서 잠자코 수종 들었음을 생각합시다. 그 정말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일을 사모하며 오직 주님의 선(Divine Good)과 진리(Divine Truth), 그 아름다우신 신성(the Divine)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상의 조국 유다의 엄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나를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역시 중심을 잡고, 주님처럼 우리도 속에 주목하고 집중, 우리 신앙의 기본으로,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고, 철저히 주님 사랑, 이웃 사랑 가운데 모든 걸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 사랑, 나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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