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날’(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단 한 문장입니다. ‘저녁’, ‘아침’, 그리고 ‘날’의 의미는 앞서 창1:5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하고 곧바로 다음 절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별다른 내용이 없는 단순한 참조 문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은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이미 설명된 상응의 의미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창1:5에서도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첫째날이니라’고 했고, 창1:8에서도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둘째날이니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첫째 날과 둘째 날이라는 시간의 진행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창조의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저녁’, ‘아침’, ‘날’도 단순한 하루의 시간대를 넘어 영적인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됩니다.
앞서 창1:5에 대한 설명에서 ‘저녁’은 선행하는 상태 일반을, ‘아침’은 뒤따르는 상태 일반을 나타내며, ‘날’은 상태 자체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둘째 날의 끝에서도 같은 말들이 다시 등장하자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새로 설명하지 않고 앞의 설명을 그대로 참조합니다. 첫째 날에서 사용된 상응의 원리가 둘째 날이라고 해서 갑자기 다른 뜻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저녁’을 언제나 단순히 악하거나 어두운 상태, ‘아침’을 언제나 밝고 완성된 상태라고만 고정해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저녁’과 ‘아침’이 자연계의 시각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거듭남 가운데 서로 이어지는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태가 지나가고 그 뒤를 새로운 상태가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날’, 곧 하나의 영적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AC.26에서 이것을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가장 자연스러운 답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위의5절에서이미설명했습니다’라는 한 문장은 독자에게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가지고 계속 읽으라는 안내 역할을 합니다. ‘저녁’, ‘아침’, ‘날’이 앞으로 반복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정의할 필요 없이, 앞서 밝혀진 상응을 바탕으로 각각의 날에 해당하는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작은 독법 하나를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한 번 설명한 뒤, 뒤에서는 그것을 반복하여 자세히 풀기보다 앞의 설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짧은 글을 만났을 때 ‘여기에는내용이없다’고 지나치기보다, ‘앞에서설명한어떤의미를여기에서도계속적용하라는것인가?’를 확인하며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AC.26은 바로 그런 연결점입니다. 첫째 날에서 밝혀진 ‘저녁’, ‘아침’, ‘날’의 의미가 둘째 날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며, 창세기의 ‘날’들이 자연적 시간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상태들을 담고 있다는 앞선 설명을 다시 붙들게 합니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독자가 앞에서 얻은 해석의 열쇠를 놓치지 않고 다음 상태로 넘어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42:3)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오류들을깨뜨리거나욕정들을꺼버리시는것이아니라,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신다는뜻입니다.그러므로이어서말씀하시기를,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앞선 AC.24에서 제시한 거듭남의 중요한 원리를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시며, 사람이 아직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 심지어 감각의 오류와 욕정까지도 사용하여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굽히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5는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표현 역시 바로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44:24가 인용됩니다. ‘나는만물을지은여호와라홀로하늘을폈으며나와함께한자없이땅을펼쳤고.’ 문자적으로 읽으면 천지 창조를 말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에도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24에서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땅’과 연결했으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면 주님께서 그 안의 잘못된 것들을 모두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AC.25는 놀랍게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사42:3을 인용합니다. ‘상한갈대를꺾지아니하며꺼져가는등불을끄지아니하고.’ 그리고 이 말씀을 ‘오류들을깨뜨리거나욕정들을꺼버리시는것이아니라,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오류’와 ‘욕정’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류와 욕정 자체가 좋은 것이므로 그대로 보존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단번에 파괴하여 다른 존재로 바꾸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미 설명했듯이, 거듭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통하여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것을 통하여 올바른 것으로 인도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좋은일을했다’는 만족감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AC.25가 직접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불완전한 동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면서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게 하지 않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굽히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굽히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현재 상태를 무시하고 강제로 선한 사람을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들을 통하여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AC.24에서 ‘천국의아르카나’라고까지 한 내용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 주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류와 욕정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사42:5가 이어지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창조하여펴시고땅과그소산을내시며’라고 다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AC.25가 사42:3과 사42:5를 이어 인용하는 것은 ‘상한갈대를꺾지않고꺼져가는등불을끄지않는’ 주님의 방식과 ‘하늘을펴고땅을펼치는’ 거듭남의 일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인간을 단순히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시면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44:24에서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신다고 하고, 사42:5에서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펼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의 근원과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AC.24-25의 흐름은 오히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에게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AC.25에서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창조의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거듭남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무시한 강제적 파괴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붙드시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이끄시고 굽히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사42장의 ‘상한갈대를꺾지아니하며꺼져가는등불을끄지아니하고’라는 말씀이 AC.25에 인용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오류와 욕정을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우리를 버리거나 단번에 부수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상태에서부터 우리를 이끄셔서, 마침내 사람에게 속한 것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삶을 이끌도록 하십니다. AC.25가 보여 주는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인도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창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주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주2.‘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27번,896번,1486번,2718번,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7, 8)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이 속하는 차원과 쓰임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