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한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그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것’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때’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수 있는가?’, ‘우리가 틀릴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더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것’,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 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더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는 ‘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내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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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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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잃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뒤 문맥에서 떼어 내지 않고 읽으면 강조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전투가 그친다고 했고, 이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움직이신다’보다 ‘그때’입니다. 어떤 때인가 하면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거듭남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를 잃고 수동적인 도구가 된다는 뜻을 이 문장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양으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3은 이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인간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주님처럼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받아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형상과 모양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AC.63 한 문장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 상태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자유이다’ 같은 결론까지 이번 글의 직접적인 뜻으로 확정하기보다, 관련 AC들이 자유와 의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면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AC.63은 주님의 역사와 인간의 존재를 서로 없애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움직이십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움직임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주님이 전부 하시니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주의로 읽는 것도, 반대로 ‘결국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읽는 것도 본문의 균형을 놓치게 됩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일상적인 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움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진리와 사랑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진리와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삶의 주된 원리가 된다면, 그가 선을 행하는 생명의 근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63을 이해하기 위한 예이지,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의 모든 의미를 이 한 사례로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표현이 지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기보다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이끌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는 이 한 문장보다 훨씬 큰 주제이므로, 이번에는 AC.63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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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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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 주님께서 특별한 영적 전투를 하고 계신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 미세하고 정교한 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 전투가 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 주가 되면 모든 선한 행동이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거나 ‘그 뒤로는 내적 갈등이나 시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이제 악한 영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 영들은 여전히 똑같이 주변에 있지만 영향력만 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형성되는 천국 상태일 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 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 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입니다.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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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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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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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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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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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것’, ‘사랑 =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의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과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날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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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창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와 ‘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됨’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과 ‘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의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날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의 ‘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 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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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과 천적 : 이해의 신앙과 의지의 사랑이라는 인간 구조의 두 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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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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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 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 = 질, 번성 = 양’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 모든 초기 단계에서는 반드시 지식의 양이 먼저 늘어나고 나중에 선이 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곧 ‘결혼한 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 땅’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딸’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 = 진리에 속한 열매’, ‘딸 = 선에 속한 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의 ‘땅에 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 차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 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 한 알’을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 주어진 작은 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 작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선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풀’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씨 = 진리’, ‘풀 =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진리’, ‘나무 = 완전히 안정된 영적 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선’이라고 했습니다. ‘풀’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 천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 인간일 때’와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 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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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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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창1:27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곧 ‘자기 형상’(His image)은 ‘이해에 속한 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 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상은 아직 사람이 자기 이해와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 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와 ‘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 있는 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 인간 = 신앙 → 사랑’, ‘천적 인간 = 사랑 → 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아직 중심이 사람 쪽에 있는 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 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 형상 →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중심 → 하나님 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을 ‘하나의 형상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두 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은 ‘형상이 둘인가 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 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인가?’ 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또 ‘천적 인간은 사랑이 앞서므로 진리를 배우거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 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한다’거나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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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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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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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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