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 ‘’, ‘’, ‘나무’, ‘동산’, ‘’,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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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 를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보존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AC.330 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 체어리티가 이후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므로 신앙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 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 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8 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 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 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남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가인의 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 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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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아벨의 죽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살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들을 교회의 중심적인 영적 생명과는 별개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체어리티를 말하는 것과 신앙이 실제로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리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사람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선과 삶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은 신앙의 결과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취급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가 굳어질수록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면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해결은 아닙니다. ‘사랑만 있으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선과 진리의 또 다른 분리가 일어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이웃의 참된 유익인지, 어떤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차이를 다룰 때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웃으로 보는 일을 잃어버리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고, 그의 말을 공정하게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비판이나 분별을 체어리티의 결핍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해로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때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동의나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와 함께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말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참된 유익을 구할 수 있고,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가족에게는 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더 예민해지며 자신의 잘못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문제는 진리를 너무 많이 배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문자적 의미만 아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께 의지하며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벨이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말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운 사람이 악을 더 분명히 보고 피하려 하는가, 자기 맡은 일을 더욱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는가, 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가,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실제 쓰임을 행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벨을 죽였다’, ‘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쉽게 선언하는 것은 이 심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아벨이 죽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4의 이야기는 아벨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갔지만, 주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에서 아벨을 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과 봉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 교리와 삶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지혜로운 사랑과 실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AC.329의 짧은 한 문장은 그래서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가인은 살아 있는데 아벨은 죽어 있지 않은가? 교리와 신앙 고백과 예배의 외형은 풍성한데 체어리티가 그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형제로 함께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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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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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루면서도, 매우 중요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아벨의 제물이라는 서로 다른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를 뜻합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만으로는 신앙의 내적인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 삶에서 어떤 선을 낳고 있으며, 사람을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개로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창4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다른 하나만 남기는 것이 주님의 질서가 아닙니다. 둘은 구별되지만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하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교회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문제는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principal)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이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보다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고 체어리티의 질을 결정하려 할 때 본래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것을 신앙은 낮은 것이고 체어리티만 높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결합 안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필요하고 신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주도하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도 새롭게 보입니다. 아벨이 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주된 것으로 만들려 할 때 둘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다음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아벨은 아직 살아 있으며,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기 전까지는 결합의 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드러내고,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 앞에 놓으십니다.

 

이것은 앞의 AC.327에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했음에도 주님께서 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악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그의 상태를 드러내시고 돌아설 길을 보여 주십니다. 4:7은 바로 아벨의 죽음 직전에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AC.328은 또한 신앙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물론 올바른 진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삶에서 무엇을 낳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선을 행하게 하며, 자기 자신보다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통하여 신앙의 질이 드러납니다.

 

특히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며 많은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이 기준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를 알고 있는지가 신앙의 질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우리가 배우는 아르카나도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AC.325부터 이어진 흐름을 정리하면 이제 매우 선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으며,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는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서는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가 결정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음 AC.329에서 우리는 그 비극적인 결과를 만나게 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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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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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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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심화

1.  분리가 결국 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구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구별이 분리로 변할 때입니다. 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 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무엇이 옳은 교리인가?’, 더 나아가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 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악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 AC.325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 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327 상태가 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 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 AC.327이 보여 주는 것은 분리의 위험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과 어떤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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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보다 ‘ 죄인이 회개하는 ’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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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주님 사랑 전치사 to  반면, 이웃 사랑 toward 쓰나요?

 

 

AC.36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스베덴보리도 신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자주 등장하는 체어리티(charity)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주님 사랑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애정과 고백을 무가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높이 여기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점은 AC.36의 문맥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있다고 말한 직후, 그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그 사랑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친절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는 것이 언제나 이웃 사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웃의 범위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보다 넓습니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여러 사람의 공동체, 사회와 국가, 교회, 더 나아가 주님의 나라까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집니다. 다만 AC.36에서는 이웃의 단계와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웃 사랑은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 체어리티(charity)는 어떤 관계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charity`는 흔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것이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의 `charity`를 보고 단순히 자선’, ‘기부’, ‘구제라고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뜻보다 지나치게 좁아집니다. 그에게 체어리티는 훨씬 넓은 영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번역에서는 `charity`를 문맥마다 곧바로 이웃 사랑으로 바꾸기보다 체어리티라고 살려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은 말 그대로 사랑의 대상을 이웃에 두는 표현이고, ‘체어리티는 그러한 이웃 사랑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삶의 원리로 나타나는 것을 폭넓게 가리키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교리적 용어로 계속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나눌 필요도 없지만, 언제나 완전히 같은 단어처럼 바꾸어 써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영어 표현 자체로는 가능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도 charity neighbor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이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하면 이웃 사랑으로, `charity`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독자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라고 하면서 `love toward the neighbor`라고 했을까요? `to` `toward`가 다르니 여기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6은 이 전치사의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to`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을, `toward`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고까지 확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영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에서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은 신학적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치사의 차이보다 두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역시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주님께 둡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을 뿌리’, 이웃 사랑을 열매라고 비유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도 AC.36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핵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6이 신앙을 설명하다가 결국 이 두 사랑으로 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무엇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 ‘체어리티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될 서로 깊이 연결된 핵심 개념들입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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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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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안에서,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사랑과 신앙이 없고,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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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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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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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인간의 proprium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 추한 것은 묘사할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모습은 proprium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 성질에 따라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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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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