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2 심화

1.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사람은 AC.12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심화 1)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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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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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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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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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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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상태에서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tender grass,and also theherb yielding seed,and afterwards the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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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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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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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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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9:3)

 

 

기쁨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기쁨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이 이른바 즐거움이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자체로 물질이고, 생명이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그러나 질서에 따라 내적인 것에서 비롯한 기쁨과 그 기쁨에 바탕은 둔 즐거움은 생명을 지닌다. (천국의 비밀 995, 이순철 역) Pleasure without delight is not pleasure, but is something without life, and only from delight is and is called pleasure. Such also as is the delight, such is the pleasure. Corporeal and sensuous things are in themselves only material, lifeless, and dead; but from delights which come in order from the interiors, they have life. (AC.995)

 

※ 윗글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창9:3 중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입니다.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서울 새 교회 전 담임 이순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 저와 동생을 앉혀 놓고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가끔 물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생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장래에 뭐가 되겠다든가, 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의 집에 갔다가 일제 릴 테이프 녹음기로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일반 녹음기와는 소리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음향기기로 음악을 듣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또는 거창한 무슨 이상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 때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일도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저의 경우는 어릴 때의 꿈을 한동안 좇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꿈을 좇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는데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이나 귀, 입 같은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새 교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질이나 감각을 통해 얻는 기쁨은 차원이 낮은 기쁨, 즉 외적인 기쁨이고, 그보다 차원이 높은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로부터 얻는 내적인 기쁨이다. 외적인 기쁨은 내적인 기쁨과 연결될 때 진정한 기쁨이 된다.

 

그러니까 내적이지 않고 그저 외적이기만 한 기쁨은 찰나적이고 공허한 기쁨이며, 그러므로 죽은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창세기 9장 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영어 성경의 번역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땅을 기는 모든 살아있는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먹을 수 있는 풀도 내가 다 너희에게 주노라 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 shall be food for you; as the esculent herb have I given it all to you.

 

이 말씀은 홍수가 끝난 뒤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아담교회, 즉 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 생긴 고대교회와 그 교회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홍수가 끝난 후,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교회 사람들이 영적 시험을 모두 이기고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듭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두 가지 먹을거리를 주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는 ‘모든 산 동물’(Every creeping thing that liveth)이고, 다른 하나는 ‘채소’(the esculent herb)입니다.

 

먼저 ‘모든 산 동물’(creeping thing, 땅을 기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차원 낮은 기쁨, 즉 감각의 기쁨을 뜻합니다. 땅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래서 사람을 이루는 몇 가지 중 감각과 관련된 것(the sensuous part)을 ‘’(창3:1)이라 하였고, ‘발꿈치’ 역시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25:26) 등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각의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든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감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들은 자칫하면 신앙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노아교회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저속한 외적 기쁨을 내적 기쁨으로 승화(昇華, 한 단계 더 높은 상태가 됨)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감각의 기쁨까지도 내적인 것, 즉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그렇게 내적인 것을 위해 쓰임 받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땅을 기는 동물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기는 살아있는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신 것입니다. 먹을거리로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기쁨을 마음껏 즐기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섬기려고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 좋은 집을 주시고, 때로는 좋은 곳을 여행하게도 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기쁨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물질이나 감각의 기쁨을 어느 정도 허락하십니다. 마치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때로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 즐거움을 허락하십니다.

 

최근 어느 스님이 젊은 나이에 좋은 집에 살면서 값비싼 전자기기를 가지고 일을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는데 그것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종교인이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고 호사를 부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새 교회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직자라도 지나치게 재물을 많이 모으거나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재산이 있다는 게 큰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락한 삶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속의 것들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에 빠지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선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홍수를 통과하면서 거듭난 사람들은 이 단계의 삶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The Rich and the Poor in Heaven)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먼저 얘기해 둘 것은, 사람은 술책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부를 얻고 쌓아도 되며, 너무 빠져들지 않는 한 고급 음식을 즐겨도 되고, 조건에 따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조건이 같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오락을 즐기고 세상사를 얘기해도 된다는 사실이다. 또 경건한 사람처럼 슬프고 애통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활기에 넘칠 수 있다. 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사람이 세상 사람과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살아도, 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올바로 가지며, 이웃에게 신실하고 공정하게 대하기만 하면,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HH.358)

 

사람이 신을 인정하고, 이웃을 선의로 대하기만 한다면, 겉으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도 되고, 부자가 될 수도 있으며, 형편과 역할에 따라 풍성한 식탁과 우아한 집과 좋은 옷을 갖추고 살 수도 있고, 즐거움과 만족을 누려도 되며, 직무와 사업을 위해, 그리고 정신생활과 육신 생활을 위해 세상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결론을 낳는다. 즉 천국에 가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저항하고, 그 두 사랑이 지배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두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주의 말씀은 이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 30)

 

주의 멍에는 쉽고 주의 짐은 가볍다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에 저항하는 정도만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HH.359)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HH.361)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천국에 간다. 모든 사람의 생활은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없이 그 사람을 따른다.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특별한 자비는 없다. 선하게 산 사람은 들어가고, 선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가난도 재물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형편에 불만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며, 재물이 축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재물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며, 신의 섭리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품는다. 또한 그들은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질투하고, 기회만 오면 누구든 속일 태세이며, 불결한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자기 형편에 만족하고, 성심껏 부지런히 일하며, 태만함보다 일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신용 있게 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을 믿었고, 공정하고 바르게 자기 일을 행한 농부들이나 서민층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체어리티와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신앙에 대해서, 저세상에서는 체어리티에 대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체어리티는 모두 생활에 속한 것이고, 신앙은 모두 교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체어리티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하고 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이며, 신앙은 공정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리와 그에 따른 생활처럼, 또는 생각과 의지처럼 서로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것을 의도하고 행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체어리티가 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매우 기뻐했다. 믿는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생활임을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HH.364) //

 

다음은 ‘채소’(the esculent herb), 즉 먹을 수 있는 풀도 함께 주셨습니다. ‘’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풀을 먹을거리로 주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기쁨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거듭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선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배우는 기쁨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먼저 선을 행하고 그러다 보면 진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진리를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는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노아에게 풀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냥 풀이라고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있는 기는 동물’을 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풀은 내적 기쁨과 연결된 진리의 기쁨을 뜻합니다. ‘내적인 기쁨’이란 쓰임(use)의 기쁨, 쓰임 받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리의 기쁨은 진리 자체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고, 쓰임 받으려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그럴 경우, 주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이라도 진리의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풀을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니면, 쓰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진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선을 행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 위 인용글들 중 특히 쓰임새가 나오는 다음 글처럼 말입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기쁨은 감각의 기쁨이든 진리에 대한 기쁨이든 반드시 내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기쁨이 됩니다. 모든 내적인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기쁨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적인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인애(仁愛), 즉 이웃에 대한 사랑,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체어리티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걸 베푸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사기꾼이나 도둑처럼 악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체어리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교회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새 교회에서는 진정한 체어리티는 이웃의 진실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지 악과 거짓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어리티는 한편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어리티는 또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체어리티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체어리티를 행한다면 그건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정한 체어리티는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와 선을 사랑해야 합니다. 체어리티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체어리티의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사랑하고 감각에 속한 걸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사랑입니다. 또한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지식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은 읽지 않는 책을 사 모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또 체어리티 없는 상태에서 감각의 기쁨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럴 경우, 점점 더 자극적인 기쁨을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결국 타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쁨을 추구하든 체어리티의 기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 또는 체어리티와 신앙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몸의 감각과 서로 연결 되어 죽어있던 감각의 기쁨이 살아있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부디 새 교회 모든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세상 기쁨을 누리고 즐기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체어리티로부터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아멘

 

2020-11-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3-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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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3-16(D1)-주일예배(2589, 창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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