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를 정리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멍멍하고, 갈피를 못 잡겠는 한 가지가 있으니, 곧 30년 지기 친구 목사님의 갑작스런 사별입니다. 지난 달 아들 결혼식 때도 다녀가고, 또 통화도 몇 번 하고... 그런데 지난 17일(목)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는 충주봉쇄수도원에 있었고, 하산 후에야 알았습니다. 코로나 검사 후, 19일, 전주 예수병원으로 내려가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그의 흔적만 보입니다. 가까운 세종이 집인 그는 수시로 저를 찾아와 밥 같이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지금도 그의 전화가 올 것 같습니다... 그의 주변을 보면 모두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 뿐입니다. 한 사람의 빈 자리가 이렇게나 클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이렇게 훌쩍, 마치 무슨 정말 나그네처럼 살다 간 목사님이십니다...
주님은 신(神, the Divine)이십니다. 주님과 우리의 차이는 주님은 무한(無限, Infinite)하신 반면, 우리는 유한(有限, Finite)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천사들 중 가장 내적 천사들조차 주님의 신성, 그 자체에 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유한은 무한을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계적 존재들조차 주님을 그 본래, 신성 그 자체로는 만날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어떤 형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며, 그리고 주님과 분리된 상태 가운데 있는 인류를 다시 자신과 결합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렇게 오심이 바로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이며, 이렇게 입으신 인성이 바로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73. 앞 두 장에 걸쳐 천국은 그 전체로 봤을 때, 천국 내 각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 모습임을 확인했습니다. In the two preceding chapters it has been shown that heaven in its whole complex, and likewise each society in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그리고 그 내용에서 나오는 일련의 이유로, 각 천사 역시 이와 같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From the sequence of reasons there set forth it follows that this is equally true of each angel.
천국은 가장 큰 형태의 사람이고, 천국 내 한 공동체는 작은 형태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각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As heaven is a man in largest form, and a society of heaven in a less form, so is an angel in least.
천국 형태처럼 가장 완벽한 형태에서는 전체는 부분과, 부분은 전체와 그 모양이 같습니다. For in the most perfect form, such as the form of heaven is, there is a likeness of the whole in the part and of the part in the whole.
이것은 천국은 일종의 소유공동체이기 때문인데, 천국은 그 가진 모든 것을 모두와 공유하며, 모두는 그 가진 모든 것을 공유를 통해 받기 때문입니다. This is so for the reason that heaven is a common sharing, for it shares all it has with each one, and each one receives all he has from that sharing.
각 천사는 그래서 하나의 그릇이며, 그는 위 해당 장에서 본 것처럼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입니다. 그리고 사람 또한 그가 천국을 수용하는 만큼, 그도 그릇이요, 천국이고, 천사입니다. (위 57번 글 참조) Because an angel is thus a recipient he is a heaven in least form, as shown above in its chapter; and a man also, so far as he receives heaven, is a recipient, a heaven, and an angel (see above, n. 57).
이런 사실을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This is thus described in Revelation: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계21:17) He measured the wall of the holy Jerusalem, a hundred and forty and four cubits, the measure of a man, which is that of an angel. (Rev. 21:17)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城, Jerusalem)은 주님의 교회, 더 높은 의미로는 천국을(주64), ‘성곽’은 진리, 거짓과 악의 폭행에 맞서 방어하는 진리를(주65), ‘백사십사’는 모든 선과 진리 전체를(주66), ‘측량’은 그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주67),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그래서 천국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Jerusalem” means here the Lord’s church, and in a more eminent sense, heaven;(C64) the “wall” means truth, which is a defense against the assault of falsities and evils;(C65) “a hundred and forty and four” means all goods and truths in the complex;(C66) “measure” means what a thing is,(C67) a “man” means one in whom are goods and truths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thus in whom is heaven.
그리고 이런 이유로 천사가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에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이라 하신 것입니다. And as it is from this that an angel is a man, it is said “the measure of a man, which is that of an angel.”
이것이 위 말씀의 영적 의미입니다. This is the spiritual meaning of these words.
이런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곽’의 의미가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인 것68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Without that meaning how could it be seen that “the wall of the holy Jerusalem” is “the measure of a man, which is that of an angel”?68
74. 이제 경험 이야기를 하지요. Let us now turn to experience.
천사들이 사람 모습, 곧 사람들임을 저는 수천 번 보아오고 있습니다. That angels are human forms, or men, has been seen by me a thousand times.
저는 그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어떨 땐 혼자, 어떨 땐 여럿과 함께 대화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과 다른 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가끔 그들이 사람과 너무 똑같아 놀라곤 했습니다. I have talked with them as man with man, sometimes with one, sometimes with many together; and I have seen nothing whatever in their form different from the human form; and have occasionally been surprised to find them such.
이런 일이 무슨 환상이나 환각 상태에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까 봐, 저는 완전히 깨어 있는 중에 제 온몸의 감각이 다 정상인 상태, 그래서 아주 선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런 경험을 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And that this might not be said to be a delusion or a vision of fancy, I have been permitted to see angels when fully awake or in possession of all my bodily senses, and in a state of clear perception.
저는 종종 그들에게 기독교계 사람들은 천사와 영에 관하여 믿기를, 그들은 형태가 없는 정신적인 존재들, 심지어는 순수한 생각들이라는 것, 그 안에 무슨 기운이 좀 있는 아주 가벼운 것들인 점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And I have often told them that men in the Christian world are in such blind ignorance in regard to angels and spirits as to believe them to be minds without form, even pure thoughts, of which they have no idea except as something ethereal in which there is some vitality.
그렇게 그들은 천사들은 생각하는 거 말고는 아무 인간적인 게 없다고 보기 때문에 믿기를, 그들은 볼 수 있는 눈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없으며, 말할 수 있는 입이나 혀도 없다고 믿고 있는, 거의 장님 수준의 무지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And as they thus ascribe to angels nothing human except a thinking faculty, they believe that having no eyes they do not see, having no ears they do not hear, and having no mouth or tongue they do not speak.
[2] 이 말에 천사들은 자기들도 세상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음을, 특히 배운 사람들, 심지어 성직자들 중에 더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To this the angels replied that they are aware that such a belief is held by many in the world, and is prevalent among the learned, and to their surprise, even among the clergy.
그 이유를 그들은 말하기를, 지식인들, 이들은 리더들이며, 천사와 영에 관한 이런 아이디어를 처음 만든 자들인데, 이들이 겉 사람의 감각만 가지고 그런 관념들을 만든 거라고,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빛이나 누구에게나 심긴 보편적 아이디어로는 생각하지 않고 대신 이런 어처구니 없는, 남이 만든 관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엉터리 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왜냐하면, 겉 사람의 감각만 가지고 만든 관념들은 오직 자연계에 속한 것만 받아들이고, 그 이상의 것은 전혀, 그래서 영계에 속한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기69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The reason, they said, is that the learned, who were the leaders and who first concocted such an idea of angels and spirits, conceived of them from the sense conceptions of the external man; and those who think from these, and not from interior light and from the general idea implanted in everyone, must needs fabricate such notions, since the sense conceptions of the external man take in only what belongs to nature, and nothing above nature, thus nothing whatever of the spiritual world.69
천사들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그들의 리더십들로부터 온 이런 거짓된 생각들을 채택, 안내받은 사람들은 그 결과,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정하며, 그걸 믿고, 그리고는 그게 이치에 맞다 여기게 되어 나중엔 그 입장에서 쉽게 물러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고정관념에 안주하게 됩니다. From these leaders as guides this falsity of thought about angels extended to others who did not think from themselves but adopted the thoughts of their leaders; and those who first take their thoughts from others and make that thought their belief, and then view it with their own understanding, cannot easily recede from it, and are therefore in most cases satisfied with confirming it.
[3] 천사들 말이, 오히려 신앙과 하트가 단순한 사람들은 천사에 대한 그런 아이디어는 없고, 대신 단순히 하늘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하늘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심긴 걸 세상 학문으로 지워버리지 않았으므로 형태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어떤 관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The angels said, furthermore, that the simple in faith and heart have no such idea about angels, but think of them as the men of heaven, and for the reason that they have not extinguished by learning what is implanted in them from heaven, and have no conception of anything apart from form.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천사들이 조각상이든 그림이든 왜 항상 사람 모양인가 하는 이유입니다. This is why angels in churches, whether sculptured or painted, are always depicted as men.
천국으로 말미암은 이런 인사이트에 관하여 천사들의 말은, 그것이 신앙과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신성이라고 합니다. In respect to this insight from heaven they said that it is the Divine flowing into such as are in the good of faith and life.
※ 각주
64.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Jerusalem” means the church (n. 402, 3654, 9166).
65. ‘성곽’은 거짓과 악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The “wall” means truth defending against the assault of falsities and evils (n. 6419).
66. ‘열둘’은 모든 선과 진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Twelve” means all truths and goods in the complex (n. 577, 2089, 2129, 2130, 3272, 3858, 3913). ‘칠십이’와 ‘백사십사’ 역시 같습니다. 열둘(12)의 배수들이기 때문입니다. Likewise “seventy-two,” and “a hundred and forty-four,” since this comes from twelve multiplied into itself (n. 7973). 말씀에 나오는 모든 숫자는 그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All numbers in the Word signify things (n. 482, 487, 647, 648, 755, 813, 1963, 1988, 2075, 2252, 3252, 4264, 4495, 5265). 배수들은 곱하기 전 그 본래의 수가 상징하던 것과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Multiplied numbers have a like signification as the simple numbers from which they arise by multiplication (n. 5291, 5335, 5708, 7973).
67. 말씀에서 ‘측량’은 진리와 선 측면에서 본 어떤 것의 퀄러티를 의미합니다. “Measure” in the Word signifies the quality of a thing in respect to truth and good (n. 3104, 9603).
68. 말씀의 영적 혹은 속뜻에 관하여는 계시록 백마에 관한 설명이나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In regard to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see the explanation of the white horse in Revelation, and the appendix to 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69. 사람은 겉 사람의 감각 관념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지혜로 머물게 됩니다. Unless man is raised above the sense conceptions of the external man he has very little wisdom (n. 5089).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감각 관념들을 넘어선 생각을 합니다. The wise man thinks above these sense conceptions (n. 5089, 5094). 사람이 이런 걸 극복하면 그는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며, 마침내 천국의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When man is raised above these, he comes into clearer light, and finally into heavenly light (n. 6183, 6313, 6315, 9407, 9730, 9922). 이런 걸 극복하고 위로 올라감이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Elevation and withdrawal from these was known to the ancients (n. 6313).
1486.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Verse 17.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and his house,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그 집에’, 그가 모았던,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어야 했던 진리 때문에를 각각 의미합니다.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and his house”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우리처럼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 안의 천사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비록 우리 눈을 통해 겉 글자로, 사람의 언어로 읽지만 말입니다.
※ 말씀의 아케이나에 접근 혹은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쓴 것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이 아파트만한 돌더미, 흙더미를 죽을힘을 다해 뒤져 겨우 엄지손톱만 한 금광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발견이라도 하면, 아니 반드시 발견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라틴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포츠(Potts, 1888-1902)는 왜 클라우즈(Clowes, 1774-1806)의 초역을 재역했을까요? 그리고 NCE(2010)를 낸 쿠퍼(Cooper)는 왜 바로 라틴 원전(1749-1756)으로 갔을까요? 책 ‘천국과 지옥’을 번역한 김은경은 수많은 영역본이 있었음에도 왜 바로 라틴 원전으로 한(韓)역했을까요? 번역은 가급적 원전을 가지고 직접 해야지 역본을 가지고 하면 아주 엉뚱한 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 전달 게임’처럼 말이지요. 한글 성경도 개역의 경우, 영역, 한(漢)역을 가지고 한 결과, 많은 오역이 있어 이번 개역개정의 경우는 직접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입니다.
※ 위 괄호 안 연도들은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특히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주석) 저술 및 번역에 소요된 기간을 뜻합니다.
1487.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이것이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으로는 기억-지식이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식에 속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을 보면, 그리고 ‘큰 재앙을 내리심’의 의미가 파괴됨이라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in general, consequently the memory-knowledges that belong to such knowledge;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ing “smitten with plagues” as being to be destroyed.
기억-지식들과 관련하여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the case is this.
어린 시절, 이 기억-지식들은 그저 단순히 알려는 목적 외에 무슨 다른 거 없이 습득되지만, 주님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기쁨과 애정으로 습득되었습니다. In childhood they are acquired for no other end than that of knowing; with the Lord, they were acquired from the delights and affection of truth.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은 그 수가 엄청나지만, 나중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치됩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하시려고, 두 번째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끝으로, 이게 그 원하시는 건데요,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쓰임새로 구성되며, 쓰임새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The memory-knowledges acquired in childhood are very numerous, but are disposed by the Lord into order so as to serve for use; first, to give the ability to think; then that they may be of use by means of thought; and lastly that this may take effect, that is to say that the very life may consist in use, and be a life of uses.
※ 쓰임새의 삶을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좋은 예는,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등이 있겠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게 없으면, 겉 사람은 결코 속 사람과 상호결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These are the things performed by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acquired in childhood; and without them the external man can never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t the same time become use.
사람이 쓰임새의 사람이 될 때, 즉 그가 모든 걸 그 쓰임새에 따라 생각하고, 그 쓰임새대로 행할 때, (만일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신 그런 쓰임새의 실천을 통해 습득된 성품에서 나오는 조용함 가운데 있다면, 그 처음 용도,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하려던) 기억-지식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파괴됩니다. When man becomes use, that is, when he thinks all things from the end of use, and does all things for the end of use—if not by manifest reflection, still by tacit reflection from a nature acquired by so doing—then the memory-knowledges which have served the first use—that the man may become rational—being no longer of service, are destroyed; and so on.
※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지식의 습득과 추구를 자기 사랑을 위해 한다는 것이며,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 지식이 머리에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 ‘기억-지식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쓰임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회유와 저급한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공동선 앞에서는 세속과 세상의 얄팍한 잔머리는 설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here meant by the words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1484a.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Verse 16.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을,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signifies all the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knowledges.
1485.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이 말씀이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이라는 것은, ‘후대하다’의 의미가 풍성해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oing well unto” as being to enrich.
이것은 어린 시절 주님의 모습인 아브람을 후대한 ‘바로’, 곧 기억-지식에 관해, 그리고 이것은 또 사래, 즉 주님이 원하셨던 지적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This is said of the memory-knowledge that is signified by “Pharaoh,” that it did well unto Abram, that is to the Lord when a child; and this for her sake, that is,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truth that he desired.
이런 풍성함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t was this desire for truth from which the enriching came.
1486.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 표현이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함은, 이것들이 말씀에 나올 때의 의미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words signify all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ll these things in the Word.
하지만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자세히, 즉, ‘양과 소’, ‘수나귀와 남종’, ‘여종과 암나귀’ 및 ‘낙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습니다. But it would be too tedious to show what is signified by each in particular, as what by the “flock and herd,” the “he-asses and menservants,” the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the “camels.”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Each has its own peculiar signification.
일반적으로 이들은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 및 기억-지식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In general they signify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to memory-knowledges.
그 각각을 좀 보면, 기억-지식은 ‘수나귀와 남종’으로, 그 즐거움은 ‘여종과 암나귀’로, ‘낙타’는 일반적으로 섬기는 일을, ‘양과 소’는 소유물을 각각 의미하는 등, 말씀 전반에 걸쳐 그렇습니다. Regarded in themselves, memory-knowledges are “he-asses and menservants”; their pleasures are “maid-servants and she-asses”; “camels” are general things of service; “flock and herd” are possessions; and so in the Word throughout.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건 그게 무엇이든 오직 섬김에 관한, 즉, 속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All things whatever that are in the external man, are nothing but things of service, that is, they are for the service of the internal man.
그래서 그것은 모두 기억-지식에 관한 것이며, 기억-지식은 오직 겉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기억-지식은 몸의 오감을 통해 땅과 세상에서 애써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모은 이유는, 이 기억-지식이 속 사람이나 합리적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영적인 사람을, 그리고 다시 천적인 사람, 최종적으로는 주님을 섬기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So it is with all memory-knowledges, which belong solely to the external man; for they are procured from earthly and worldly things by means of sensuous impressions, in order that they may serve the interior or rational man, and this the spiritual man, this the celestial, and this the Lord.
그렇게 이 지식은 그 질서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더 외적인 것일수록 더 내적인 것에 종속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 질서에 종속되어 결국 주님을 향합니다. Thus are they subordinated one to another, as are the more external things to the more internal, in their order; and thus all things whatever,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in their order, subordinated to the Lord.
그래서 기억-지식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 거기는 그거보다는 더 내적인 것의 종점입니다. 기억-지식의 위치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이기 때문에, 기억-지식은 봉사와 섬김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Memory-knowledges are therefo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in which are terminated in their order the things that are more interior; and because they a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they must be pre-eminently things of service.
누구나 다 이 기억-지식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거나 자문을 해보면 이 기억-지식이 왜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지식의 쓰임새를 깨닫게 되면, 그 쓰임새의 퀄러티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veryone may know for what such knowledges may be serviceable, if he reflects or inquires in himself for what use they are; and when he is thus reflecting upon their use, he can also apprehend the quality of the use.
모든 기억-지식은 나름 어떤 쓰임새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그것의 존재 이유입니다. Every memory-knowledge must be for the sake of some use, and this is its servi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6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천적 진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연적, 지적 진리를 구하셨고, 그래서 관련된 모든 것, 곧 기억-지식과 그 즐거움, 그리고 그 지식의 쓰임새 등으로 풍성해지셨다.
1481.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Verse 15. And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and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들이 즐거워하였음을,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그들이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animus].
1482.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이 말씀이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의미함은 ‘고관들’과 ‘바로’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inces,” and of “Pharaoh.”
말씀의 두 가지 측면, 곧 역사서술 및 예언적인 면에서, ‘고관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의미하고, ‘바로’는 ‘애굽’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은데, 여기서는 ‘애굽’ 혹은 ‘바로’가 가장 좋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처음 습득한 지식 중 기억-지식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In both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princes” signify the things which are primary; and “Pharaoh” signifies the same as “Egypt”; and here “Egypt,” or “Pharaoh,” is used in the best sense, because predicated o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the Lord first acquired in childhood.
이들이 말씀에서는 중심계율들의 의미인 것은, 이런 것들이 그 속뜻 상으로 가지는 상징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primary precepts from the W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바로’나 ‘애굽’이나 같은 걸 상징한다는 건 많은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다른 나라 군주들이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듯 군주들 또한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고관들’은 이사야에서처럼 제일 중요한 걸 상징합니다. That, speaking generally, by “Pharaoh” in the Word is signified the same as by “Egypt” may be confirmed from many passages; as also that by the kings of other kingdoms, who are named, the same is signified as by the names of the kingdoms; but by “princes” are signified their primary things, as in Isaiah:
11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3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사19:11, 13) The princes of Zoan are foolish,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how say ye unto Pharaoh, I am the son of the wise, the son of ancient kings? The princes of Zoan are become fools, the princes of Noph are deceived. (Isa. 19:11, 13)
여기 ‘소안의 방백’과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는 가장 중요한 기억-지식을 가리키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애굽에서는 지혜가 가장 번창하였으므로, 지혜를 가리켜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 ‘옛 왕들의 후예’라 부르고 있습니다. Here “the princes of Zoan,” and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denote the primary memory-knowledges; and as wisdom first flourished in Egypt, as before said, it is called “the son of the wise,” and “the son of ancient kings.”
이렇게 말씀에 자주 나오는 ‘고관(高官)’(프린세스, 백관 (百官), 방백(方伯), 대신(大臣) 등)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So “princes” frequently denote in the Word primary things.
1483.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이 말씀은 그들이 기뻐하였다는 건데요, 굳이 무슨 설명이 필요 없지 싶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may be seen without explication.
1484.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이 말씀이 그들은 마음의 더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다라는 의미임은 ‘여인’의 의미와, ‘궁’(house)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house.”
‘여인’은 진리, 여기서는 기억-지식들 안에 있었던, 어린 시절 주님이 사로잡히실 정도로 즐거워했던 진리를 의미합니다. A “woman” signifies truth, here the truth that was in the memory-knowledges with the delights of which the Lord was captivated in childhood.
진리에 관한 즐거움은 ‘누이’로 상징된 지적 진리(the intellectual truth)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The delights of truth are those which come from the intellectual truth which is signified by a “sister.”
‘궁’은 앞서 710번 글에서 보여드린 대로, 사람, 특히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마음의 더 낮은 부분, 곧, 앎과 배움에 관한 애정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 “house”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in man, especially those which are of his will, as before shown (n. 710); here therefore those which are of the lower mind, or of the affection of knowing and learning.
※ 710. 창7:1,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Enter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이 말씀이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이 그래서 분명한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of the will is therefore evident.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는 전장에서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요, 즉, 18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8) In the preceding chapter, where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re meant, it is expressed differently, namely: “Thou shalt come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verse 18)
‘집’이 의지와 의지에 속한 것을 상징함은 말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That a “house” signifies the will and what is of the will is evident in various plac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렘6:12) Their houses shall be turned over unto others, their fields and their wives together. (Jer. 6:12)
여기 ‘집’과 ‘밭’, 그리고 ‘아내’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관련됩니다. Here “houses” and also “fields” and “wives” relate to things which are of the will.
다시 Again: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29:5, 28)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Jer. 29:5, 28)
여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기’는 의지에 관련되고, ‘밭을 일구기’는 이해와 관련됩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ere “building houses and dwelling in them” relates to the will; “planting gardens” to the understanding: and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아주 자주 사랑이 중심원리인 교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언급되는데, 특별히 ‘유다의 집’은 천적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And the “house of Jehovah” is frequently mentioned as signifying the church wherein love is the principal; the “house of Judah” as signifying the celestial church; and the “house of Israel” as signifying the spiritual church.
‘집’이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한 사람의 마음 또한 ‘집’으로 상징됩니다. (의지와 이해에 속한, 혹은 체어리티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As “house” signifies the church, the mind of the man of the church (wherein are the things of the will and of the understanding, or of charity and faith) is also signified by “house.”
68. 저는 허락을 받아 천국 각 공동체는 한 사람을 반영하며, 사람 모양임을 그동안 자주 보아왔습니다. I have frequently been permitted to see that each society of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and is in the likeness of a man.
빛의 천사로 위장하는 법을 아는 몇몇이 슬그머니 잠입하는 어느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There was a society into which several had insinuated themselves who knew how to counterfeit angels of light.
그들은 위선의 영들이었습니다. These were hypocrites.
저는 그들이 천사들에게서 분리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그 공동체 전체가 어렴풋한 한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점점 사람 형태로, 그러나 여전히 어렴풋하다가, 이윽고 아주 또렷한 사람 모양이 되었습니다. When these were being separated from the angels I saw that the entire society appeared at first like a single indistinct body, then by degrees in a human form, but still indistinctly, and at last clearly as a man.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었던 구성원들은 그 공동체의 선 안에 있었던 반면, 그 사람 안에 있지도, 그 사람을 구성하지도 않았던 자들은 위선의 영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내쳐졌고, 그 공동체는 그 전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천사 공동체와 위장 잠입한 영들 간 분리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Those that were in that man and made up the man were such as were in the good of that society; the others who were not in the man and did not make up the man were hypocrites; these were cast out and the former were retained; and thus a separation was effected.
위선자들은 말도 잘하고 선행도 하지만 모든 걸 자기를 위해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Hypocrites are such as talk well and also do well, but have regard to themselves in everything.
그들은 주님과 천국, 사랑과 천국의 삶에 관해 천사들처럼 말하며, 또 올바른 행동을 합니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려고 말입니다. They talk as angels do about the Lord, heaven, love, and heavenly life, and also act rightly, so that they may appear to be what they profess to be.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며, 그들은 자신들 말고는 아무의 행운도 빌지 않습니다. But their thinking is different; they believe nothing; and they wish good to none but themselves.
그들의 선행은 그저 자신을 위한 것이거나, 설령 타인을 위한 것이어도 그건 겉보기에만 그럴 뿐,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Their doing good is for the sake of self, or if for the sake of others it is only for the appearance, and thus still for the sake of self.
69. 저는 또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어느 천사 공동체에 눈에 보이게 임하실 때, 그 공동체 전체가 한 사람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I have also been permitted to see that an entire angelic society, where the Lord is visibly present, appears as a one in the human form.
거기 높이 동쪽을 향해 뭔가 구름 같은 것이 나타나 하얗게 빛나다가 붉게 변하며, 주변에 작은 별들과 함께 내려오면서 점점 환해지더니, 마침내 완벽한 사람 형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There appeared on high toward the east something like a cloud, from glowing white becoming red, and with little stars round about, which was descending; and as it gradually descended it became brighter, and at last appeared in a perfect human form.
구름 주변 작은 별들은 천사들이었는데,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아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The little stars round about the cloud were angels, who so appeared by virtue of light from the Lord.
70. 어느 천국 공동체 내 모두가 다 함께 하나로 보여 한 사람 모습으로 나타날지라도, 어느 공동체든지 그 사람 모습이 서로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It must be understood that although all in a heavenly society when seen together as one appear in the likeness of a man; yet no one society is just such a man as another.
한 가족 식구들의 얼굴이 다 다르듯 공동체들도 다 다릅니다. 이는 앞서 47번 글에서 말씀드린 내용, 곧, 그들의 어떠함과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선의 다양함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Societies differ from one another like the faces of different individuals of the same family, for the reason given above (n. 47), that is, they differ in accordance with the varieties of good in which they are and which determines their form.
천국의 가장 안쪽, 곧 높은,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공동체들은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 형태입니다. The societies of the inmost or highest heaven, and in the center there, are those that appear in the most perfect and beautiful human form.
71. 천국에서 어느 공동체 구성원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그 모두가 모여 하나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 공동체의 사람 형태는 더욱 더 완벽합니다. 천국 형태로 배열된 다양성에서 그 완벽성이 나오기 때문인데, 이 내용은 앞서 56번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다양성은 숫자에서 나옵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the greater the number in any society in heaven and the more these make a one, the more perfect is its human form, for variety arranged in a heavenly form is what constitutes perfection, as has been shown above (n. 56), and number gives variety.
게다가 천국 모든 공동체마다 날마다 그 구성원 수가 증가하며, 그럴수록 각 공동체는 더욱 완벽해져 갑니다. Moreover, every society of heaven increases in number daily, and as it increases it becomes more perfect.
그렇게 각 공동체뿐 아니라 천국 전체도 더 완벽해져 가는데요, 천국은 공동체들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Thus not only the society becomes more perfect, but also heaven in general, because it is made up of societies.
천국은 그 구성원의 수적 증가로 완벽해진다는 이 사실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천국은 가득 차 닫히게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오류 가운데 있나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로, 천국은 결코 닫히지 않으며, 오히려 더 확장하고 더 확장함으로써 완벽해지기 때문입니다. As heaven gains in perfection by increase of numbers, it is evident how mistaken those are who believe that heaven may be closed by becoming full; for the opposite is true, that it will never be closed, but is perfected by greater and greater fullness.
그래서 천사들은 신입 천사가 오는 것만큼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Therefore, the angels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have new angel guests come to them.
72. 각 공동체는 그 전체가 하나로 보일 때, 한 사람 형태입니다. 그 이유는, (앞장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천국 전체가 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천국과 같은 가장 완벽한 형태에서는 전체와 부분 사이 유사성이 있어 가장 큰 형태와 작은 것 사이가 그렇습니다. Each society, when it appears as one whole, is in the form of a man, for the reason that heaven as a whole has that form (as has been shown in the preceding chapter); moreover, in the most perfect form, such as the form of heaven is, there is a likeness of the parts to the whole, and of lesser forms to the greatest.
천국의 더 작은 형태와 부분들은 천국을 구성하는 공동체들인데, 이 역시 더 작은 형태의 천국들입니다. (HH.51-58 참조) The lesser forms and parts of heaven are the societies of which it consists, which are also heavens in lesser form (see 51–58).
이 유사성은 반복되며, 항구적인데요, 그 이유는, 천국의 모든 선은 하나의 사랑, 곧,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is likeness is perpetual because in the heavens the goods of all are from a single love, that is, from a single origin.
이 유일한 사랑, 곧, 천국 모든 선의 기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주님 사랑입니다. The single love, which is the origin of the good of all in heaven, is love to the Lord from the Lord.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가, 대략적으로는 각 공동체가, 그리고 특별하게는 개별 천사가 주님을 닮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며, 이는 앞서 58번 글에서 보여드렸습니다. It is from this that the entire heaven in general, each society less generally, and each angel in particular, is a likeness of the Lord, as has been shown above (n. 58).
1474.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Verse 13.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지적(知的, intellectual) 진리, 이해하기 쉬운(intuitive) 진리를 말하며, 그게 ‘누이’(sister)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그럴 경우, 천적인 것(天的, the celestial)이 해를 입지 않을 것임을,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그럴 경우, 천적인 것이 보존될 것임을 각각 의미합니다.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and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1475.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Say, I pray, thou art my sister.
이 표현이 지적 진리, 이해하기 쉬운 진리를 상징하며, ‘누이’가 바로 그런 뜻이라는 것은, ‘누이’의 상징, 곧, 천적 진리가 ‘아내’(wife)일 때, ‘누이’는 지적 진리라는, 이후 이 상징에 대한 계속될 내용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intellectual truth, which is a “sist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when celestial truth is a “wife,” concerning which hereafter.
상황은 이렇습니다. 즉, 기억-지식, 곧, 세속적 지식의 본성은 천적인 것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저 조사하는 게 전부라는 것, 그러나 이것은 질서에 반(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천적인 것들에 대한 일종의 폭력,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se things stand thus: it is the nature of memory-knowledge to desire nothing more than to introduce itself into celestial things and explore them; but this is contrary to order, for it thus does violence to celestial things.
천적인 것, 곧, 천국과 주님에게 속한 것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왕이나 대통령 앞에서는 극진한 예를 갖추듯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곧, 주님 자신이므로 최상의 예를 갖춰야 합니다. 영적 질서, 순서를 우습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천적인 것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며,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질서란 이런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통해 이성적인 것(理性, the rational) [인 스피엔티피쿰 in scientificum]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기억-지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 속한 것이 세속적인 것 속에 깃드는 것이며, 이런 순서, 이런 질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Order itself is that the celestial by means of the spiritual introduces itself into the rational, and thus into the memory-knowledge [in scientificum], and adapts this to itself; and unless this order is observed, there cannot possibly be any wisdom.
또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는 주께서 어떻게 모든 질서에 따라, 곧, 철저히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으셨는가, 그 다음, 어떻게 주님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결합하셨나, 즉, 어떻게 신성(Divine), 곧 속 사람이 되셨나,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신성, 인성 양쪽 다 그 퀄러티에 있어 여호와가 되셨나 하는 아케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식을 통해 일어났으며, 이렇게 지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구인 것입니다. In the passage before us are also contained the arcana as to how the Lord was instructed by his Father according to all order; and thus how his external man was conjoined with his internal, that is, how his external man was made Divine, like the internal; thus how he became Jehovah as to each essence; which was done by means of knowledges, which are the means.
도구로서의 지식이 없으면, 겉 사람은 심지어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Without knowledges as means, the external man cannot even become man.
지식은 가장 바깥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이 있어야 무슨 출발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76.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That it may be well with me for thy sake.
이 표현이, 그러면 천적인 것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건, 위에서 말씀드린 걸로 분명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질서, 순서라는 건, 먼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 안으로, 그리고 끝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곧 실제 지식, 일상 지식의 내용 안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so the celestial could have no violence done to i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above; for as has been repeatedly said, the order is that the celestial flows into the spiritual, the spiritual into the rational, and this into the faculty of memory-knowledge.
이런 순서, 질서라야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에, 이성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그리고 기억-지식은 이성적인 것에 각각 그 목적에 따라 수용됩니다. When there is this order, then the spiritual is adapted by the celestial, the rational by the spiritual, and the memory-knowledge by the rational.
그래서 보통 기억-지식,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지식은 가장 바깥 용기가 됩니다. 같은 말이지만, 기억-지식은 개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이성적인 것, 곧, 생각(ideas)을 담는 가장 바깥 용기가 되며, 그렇게 순서대로 이성적인 생각은 영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은 천적인 생각을 담는 용기, 그릇이 됩니다. The memory-knowledge in general then becomes the ultimate vessel; or what is the same, memory-knowledges, specifically and particularly, become the ultimate vessels which correspond to rational things, rational things to spiritual things, and spiritual things to celestial things.
이런 순서일 때는, 천적인 것이 해를 입을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천적인 것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When this is the order, the celestial cannot suffer any violence; otherwise, it does so suffer.
어린 시절, 주님의 훈육, 교육이 여기 본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 본 절은 주님의 성장 과정이 어땠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s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s instruction is here treated of, the method of his progress therein is here described.
1477.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이 표현이 그렇게 해서 천적인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것은, ‘목숨’(soul)의 상징이 천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적인 것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목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us the celestial could be sa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soul” as being the celestial; for this is the soul itself, because the very life itself.
그래서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지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내용, 곧 천적 혹은 신적인 것(Divine things)은, 주님이 영적 시험들을 견디시고,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유전하신 악을 떼어내실 때까지는 본성상 하나 되기 위해 주님과 인접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Hence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at my soul may live because of thee.” It will be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celestial or Divine things were not so adjoined to the Lord that they made one essence, until he endured temptations, and thus expelled the evil heredity from the mother.
한편, 본 절과 이어지는 절에서는 천적인 것, 곧 주님의 천적 코어가 어떻게 해를 입지 않고, 보전되는지 하는 내용이 다루어집니다. Here and in the following verses it is described how meanwhile the celestial itself suffered no violence, but was save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도 어린 시절, 무엇을 배우실 때, 바로 천적인 단계로 점프하지 않으시고, 대신 이성(理性)과 합리(合理)를 거치셨다. 그래서 여호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셨다.
1471.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Verse 1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at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지식들 중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즉, 기억-지식의 눈에는 천적 지식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대한 묘사입니다.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 말은 지식 중 기억-지식을 상징합니다. 기억-지식이 천적 지식을 볼 때, 어떨 것인지 하는 설명이지요. 위 표현이 바로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애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중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또 분명한 건,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가 곧, 이 기억-지식이 본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로 그런 거라는 말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is described as to what it is when they see celestial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Egypt,” which is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s before shown; and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ee,” namely, that this memory-knowledge is such as is described in this verse.
즉, 종교적 개념에 대한 스터디를 상징합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 말씀 공부를 하는 게 아닌, 그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적 추구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관한 사실들을 접하는 바로 그때 이런 스터디가 발생하는데, 위 표현은 바로 이런 걸 묘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건,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온 우리 역시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 표현이 이런 의미임은 ‘애굽’의 의미가 종교적 개념에 관한 스터디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앞서 글 번호 1164-1165, 1194-1195 및 1462번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이제 ‘애굽 사람이 볼 때에’라는 말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본 절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스터디의 속성,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NCE)
기억-지식은 그 안에 뭔가 자연적인 게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할 때, 잘 보면, 뭔가 하나의 흐름, 곧, 더 좋은 게 있으면 더 그걸 원하는, 심지어 그게 천국 및 하나님에 관한 거라는 말을 들어도 여전히 더 원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attended with this, and it is something natural in it, as is manifested in children when they first begin to learn, namely, that the higher things are, the more they desire them; and still more when they hear that they are celestial and Divine.
그러나 어린애들의 이런 순박한 욕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즐거움은 자연적이며, 겉 사람에 속한 욕망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But this delight is natural, and arises from a desire that is of the external man.
종교적 개념들에 관한 지식에는 이런 특성이 내재해 있으며, 이런 특성은 그런 지식에 속한 일종의 땅에 속한 요소입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애들이 배우기를 막 시작할 때 두드러지는데요, 어떤 주제가 확 눈에 띄면 띨수록 그들은 그걸 더욱 알고 싶어 하지요. 그 주제가 천국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그럽니다. 어린애들의 이런 모습이 얼핏 참 순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거기 들어 있는 흥분은 땅에 속한 것이요, 겉 사람에 속한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NCE)
주님과 달리 여느 사람들의 경우, 이 욕구로 인해 단지 지식 중 기억-지식에 있는 즐거움만 느끼게 됩니다. 그 이상의 무엇 없이 말이죠. 그리고 설령 무슨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이 지식 중 기억-지식은 단지 어떤 용도로 사용된다는 목적밖엔 없는, 뭘 전달하는 도구요, 매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지식이란, 하나의 그릇으로서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섬기는 것이며, 그런 때에야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쓰임을 받는 것이고, 그런 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참된 기쁨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With other men this desire causes them to feel delight in the mer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ithout any further end; when yet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n instrumental agency having for its end a use, namely, that the knowledges may serv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s vessels; and when they are thus serving, they are then for the first time in their use, and receive from the use their delight.
주님과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탐욕은 그들로 하여금 그저 종교적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스터디로만 만족하게 합니다. 무슨 다른 좀 더 나은 목적 없이 말이죠. 실상은 이렇습니다. 이런 지식에 대한 학습의 결과, 지식이란 그저 무슨 도구, 곧, 어떤 용도를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지식은 천적, 영적인 것들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섬기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지식이 이런 목적으로 쓰임 받을 때, 비로소 지식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지식이 제공하는 모든 참된 기쁨은 이처럼 지식이 올바로, 제대로 쓰임 받을 때 오는 것입니다. (NCE)
누구라도 만일 그가 주의만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식 중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사람은 이것으로 합리적이 되며, 이어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그런 거라는 걸 말입니다.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인접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그가 지식의 올바른 용도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Anyone can see, if he pays attention, that in itsel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is nothing but a means whereby a man may become rational, and thence spiritual, and at last celestial; and that by means of the knowledges his external man may be adjoined to his internal; and when this is done, he is in the use itself.
신중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종교적 지식의 축적 그 자체는 그저 이성적이 되며, 영적이 되고, 마침내 천적이 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지식은 우리의 겉으로 하여금 우리의 속과 접촉할 수 있게 하며,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적 탐구는 그 참된 목적을 섬기게 됩니다. (NCE)
속 사람은 오직 그 용도, 쓰임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The internal man regards nothing but the use.
결국, 속 사람은 쓰임새 있는 지적 탐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NCE)
또한 이를 위해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지각하는 기쁨을 기억-지식에 서서히 주입하십니다. For the sake of this end also, the Lord insinuates the delight that childhood and youth perceives in memory-knowledges.
같은 이유로, 주님은 어린 시절과 청년기, 사람이 뭔가를 배울 때 즐거움을 느끼게 하십니다. (NCE)
하지만 사람이 그의 기쁨을 기억-지식으로만 구성하기 시작할 때, 그런게 바로 육체적 탐욕이며, 그걸로 그는 휩쓸리게 됩니다. 그 휩쓸리는 정도만큼, 즉, 기억-지식에서만 기쁨을 찾으려 하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그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끊어지며, 그에 정비례하여 그 기억-지식들로 인해 그는 주님을 향하여는 닫히고, 결국 물질적 존재가 되고 맙니다. But when a man begins to make his delight consist in memory-knowledge alone, it is a bodily cupidity which carries him away, and in proportion as he is thus carried away (that is, makes his delight consist in mere memoryknowledge), in the same proportion he removes himself from what is celestial, and in the same proportion do the memory-knowledges close themselves toward the Lord, and become material.
하지만 우리가 그저 배우는 데에만 우리의 즐거움을 두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육체적 욕망이어서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그저 배움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한, 그만큼 우리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천국으로부터 끊어질수록 우리가 아는 사실들은 셔터 내리듯 주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 물질의 세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NCE)
반대로,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들을 가지고 습득된 기억-지식들, 곧, 인간 사회를 위해, 지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천국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보다도 주님 자신을 위해 쓰임 받아야지 하는 목적에 비례하여 더 많은 지식이 주님을 향하여 활짝 열립니다. But in proportion as the memory-knowledges are learned with the end of use—as for the sake of human society, for the sake of the Lord’s church on earth, for the sake of the Lord’s kingdom in the heavens, and still more for the Lord’s own sake—the more are they opened toward him.
또한 이런 이유로 천사들 역시 그 가진 모든 지식에도 불구, 만일 그것이 제대로 된 사용과 거리가 먼 그런 지식이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지게 됩니다. 천사들의 지식 역시 모든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들로서, 인간과는 차원이 달라 그 만 분의 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On this account also the angels, who are in the memory-knowledge of all knowledges, and indeed to such a degree that scarcely one part in ten thousand can be presented to the full apprehension of man, yet esteem such knowledge as nothing in comparison with use.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로, 오늘 본문,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see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When the Egyptians shall see thee,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이런 내용을 말씀드린 건, 어린 시절 주님은 이걸 아셨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셨다는 것, 곧, 만일 주님이 기억-지식 추구에만 관심이 있어 거기에만 골몰하셨다면 이 기억-지식은 더 이상 천적인 것을 위한 지식이 아닌, 즉, 주님은 더 이상 천국에 관한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우리 같은 어린이로 성장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things were said because the Lord when a child knew this and thought in this way, namely, that if he should be carried away by a mere desire for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this memory-knowledge is of such a character that it would care no mo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which the desire for memory-knowledge would carry away.
이 주제들에 관하여는 뒤에 계속 됩니다. On these subjects more follows. (AC.1472)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그들, 즉, 기억-지식들은 이 지식들을 보고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천국에 관한 지식들이다 할 거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천적인 것들과 인접한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는 그의 아내라’가 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And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ill call the knowledge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adjoined to celestial things; hence “this is his wife” signifies that which is celestial. (AC.1473)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하지만 그들, 곧 기억-지식들은 이런 천적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종교적 개념들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몰두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다룬 내용입니다. And they will kill me, and will make thee to live.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ould not care for celestial things, but only for mere knowledges is evident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AC.1474)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2절의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지식들도 주님과 함께 있는 진리들이 천적인 것을 알아보지만 그러나 거기엔 관심이 없고, 오직 종교적 지식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전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