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제가 있도록,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제가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와 똑같이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자신들이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의 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 증언을 상상이라고 하거나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기 때문에 본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모든 서론을 지나 첫 번째 실제 주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단어는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소생이라고 하면 죽을 뻔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없어진 사람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육체의 삶이 끝나면서 사람이 영으로서의 의식적인 삶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72 이하에서 나올 소생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자연적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서 깨어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육체의 부활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의식 없이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육체를 받아 살아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0에서부터 죽음과 영원한 삶을 하나의 연속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AC.70에서는 아직 그 소생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바로 다음 글들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경험한 방식으로 하나씩 설명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부분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도 아니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세상에서와 똑같이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후생명을 철학적으로 추론하거나 성경 구절만을 들어 논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직접적인 경험을 증언으로 내놓습니다.

 

세상에서와 똑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후세계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자연계와 똑같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그들과 말하고 교제한 방식입니다. 즉 죽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잔상이나 이름만 남은 존재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말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AC천국과 지옥에서는 사후에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관계한다는 사실이 훨씬 자세히 설명됩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죽은 뒤에도 계속 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 이상하게여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하거나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죽은 뒤 자신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경험하자 과거의 불신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곧바로 악이나 도덕적 잘못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은 왜 그들이 그렇게 믿지 않았는지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69에서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영적 세계와의 의식적인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했으므로 일정한 배경 연결은 가능하지만, AC.70 자체가 사후생명을 믿지 않는 이유는 모두 사람에게 잠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최종 해설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AC.70의 가장 강렬한 문장은 마지막 두 문장입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생명과 무생명 사이에 긴 공백이 생기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적 생명이 끝난 뒤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음을 삶의 연속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말을 해석할 때에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대에 천국에는 자연계와 같은 해와 날과 시간이 없으며, 그곳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C.70거의 하루를 곧 영계에서 하나의 상태 주기를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연계에 있는 독자에게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안에서의 의식적인 삶 사이가 얼마나 짧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자연적 시간 언어로 하루도 거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영계의 시간과 상태의 관계는 별도의 문제이며, 이 표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과 지옥162-165에서는 천사들에게 자연계의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의 하루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24시간 이내라는 시간표로 바꾸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의 관심은 임종 후 몇 시간 몇 분 만에 어떤 단계가 완료되는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후 AC.72 이하를 보면 소생의 과정에는 질서와 연속이 있으며 여러 천사들이 관여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시간이냐보다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삶 사이에 인간 존재의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단순히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는 명제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새로운 존재나 과거 사람의 복제품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다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즉 죽음 전의 와 죽음 후의 사이에는 인격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후 기억과 애정, 성품과 지배적인 사랑에 관한 설명으로 점점 더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죽기 전과 그대로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삶의 연속은 사후에도 아무 변화 없이 자연계 삶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와 자연적 환경은 벗게 되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됩니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 자체가 끊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인격적 생명의 연속성이 AC.70이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영원한 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들어간다고만 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수적인 후속 삶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자연계의 삶은 제한된 기간 동안 지속되지만 인간의 영적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과 영원한 삶은 서로 상관없는 두 인생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이어지는 두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계의 삶을 단순한 대기실이나 가치 없는 짧은 준비기간으로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후의 삶이 현재 삶과 연속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인간의 내적 생명 형성과 관계됩니다. 다만 AC.70은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재 글에서는 우선 사람은 죽어도 계속 산다는 사실과 죽음이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0은 이처럼 앞으로 이어질 긴 사후세계 기록의 첫 글로서 매우 절제된 출발을 합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구조도, 영들의 세계도, 사후의 세 상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세웁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자신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여러 달 동안 말하고 교제한 경험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합니다.

 

AC.67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는 인간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0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인간이 실제로 계속 살아 있다는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0을 읽으면서 당장 사후세계의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연옥, 최후의 심판,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으로의 최종 귀속 같은 주제들은 뒤에서 각각 더 적절한 자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먼저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이 짧고 강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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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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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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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고,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 말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말할  있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중요한 것부터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AC.69는 여기서 사후에 육체를 벗으면 누구나 영들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1차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며 바로 다음 AC.70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AC.69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고, 그러한 것들이 물러나면 다시 열린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를 곧바로 죽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도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라고 하여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연계의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의 직접적인 문맥 역시 그러한 개방과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이제 반대편으로 가서 그러면 우리도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을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목표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과 지옥 HH.249에서는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드물게 허락되는 일이며 위험할 수 있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들이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인간의 생각과 애정에 위험하게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69는 영계 개방을 위한 수행법이나 영적 기술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면 길이 다시 열린다고 했을까요? 이것은 영적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입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연적 감각과 육체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을 지각하지만, 그 내적인 생명은 영에 속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감각이 영적 지각을 가리고 있는 상태가 특별히 제거되거나 완화될 경우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AC.69의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바로 그런 특별한 경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인 욕망을 충분히 정복하거나 어떤 높은 영적 수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 길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67부터 그의 표현은 일관되게 허락되었다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것을 세상에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경험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한 영적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개방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후대 설명을 보면 사람은 이러한 의식적인 개방이 없어도 이미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다른 영들과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람도 영들도 그 관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AC.5862에서는 영들이 보통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의 내적인 것들을 여셔서 영들이 그가 아직 육체 안에 사는 인간임을 알도록 특별히 허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보고 영들과 대화하는 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그 관계가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적으로 닫힌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체적인 것들이라는 말을 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을 돌보고, 음식을 먹고, 가족을 사랑하며,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자연계에서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적 삶은 우리가 쓰임을 수행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AC.69의 문제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하면 영을   있을까?보다  마음은 무엇에 너무 깊이 잠겨 있는가?를 묻는 쪽이 훨씬 안전하고 본질적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소유, 감각적 즐거움과 자기중심적인 관심이 마음 전체를 차지하여 말씀과 주님과 이웃과 영원한 생명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바로 AC.69이 말하는 위험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자연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자리에 두고, 주님과 영적인 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영적 시각이나 청각이 열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향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 현상을 직접 경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더 선하거나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도 있습니다. 어떤 영이 자신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주님의 말씀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자체를 신앙의 높은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적 세계와의 참된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가장 안전한 중심은 주님과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들과 직접 대화하려고 할 필요 없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이며,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은 이미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으며, 우리는 의식적인 영계 체험이 없어도 주님의 섭리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조금 방향을 바꾸어 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계가 열리도록 육체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 감각을 억제하거나 현실생활을 떠나려 하지도 마십시오. 대신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 개방을 허락하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을 보지 못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천사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해도 말씀의 진리를 들을 수 있으며, 영계를 눈으로 보지 못해도 천국의 질서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AC.6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입은 영이며, 지금의 삶은 영원한 삶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감각 너머를 억지로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어떤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이 다시 열린다는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 영들과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열린 그 길은 그의 고유한 사명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훨씬 평범해 보이지만 더 본질적입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께 의지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쓰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은 주님께 열리고, 천국의 질서는 우리 삶 안에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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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길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고,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바로 앞 AC.68에서 제기된 첫 번째 반론에 답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 천사들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그 가능성을 단순히 자신의 특별한 경험으로 변호하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라는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강한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던 것을 인간에게 원래 없던 초능력을 특별히 부여받은 것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의 내적인 생명이 육체 자체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으며, 바로 그 영으로 생각하고 의도하며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를 통해 자연계에 살면서도 자신의 영으로는 영적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다라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과 천사와 영이 아무 차이도 없는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인간은 자연계의 육체를 입고 그 육체의 감각과 기능을 통해 자연계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영들과 천사들은 자연계의 물질적 육체를 입고 있지 않습니다. AC.69의 요점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곳적은 지금까지 창1에서 계속 만나 온 태고교회의 시대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과 천국의 질서에 훨씬 더 내적으로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늘날 인간에게 닫혀 있는 영적 세계와의 교통이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말했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이후 관련 AC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본래 열려 있던 길은 왜 닫혔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단하게 답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자연계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며 쓰임을 행하는 것 역시 인간 삶의 질서에 속합니다. 본문의 문제는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이 그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corporeal and worldly things를 곧바로 ’, ‘직업’, ‘재산’, ‘사회생활같은 외적 대상 자체와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쓰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마음 전체가 잠길 수도 있습니다. AC.69에서 닫힘을 일으키는 것은 후자의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과 사랑이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몰입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면서, 이전에 가능했던 의식적인 영적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길이 닫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서 영 자체가 없어졌다거나 영적 세계와의 모든 관계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의 후대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영으로 언제나 영적 세계와 관계하며, 사람에게는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습니다. 다만 보통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영들과 함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9길이 닫혔다는 것은 인간과 영계 사이의 모든 관계가 끊겼다는 뜻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그들과 말하는 통로가 닫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그러면 나도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영적인 수행을 하면 영들과 말할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는 훗날 천국과 지옥249에서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은 드물게 허락되며 위험하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특히 영들이 자신들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69는 영들과 말하는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문맥에서는 우선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개방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연계의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도 자연적 감각에 의한 제약이 일정한 방식으로 물러나 영적 감각이 열렸고, 그 결과 그는 영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말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재현해야 할 상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개방은 주님의 허락과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후 저작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기존에 우리가 AC.69의 이 표현을 1차적으로 사람이 죽은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는 상태라고 이해했다면 그것은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후에는 물론 자연적 육체를 벗고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AC.69 자체의 직접적인 문맥은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문장부터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하고, 마지막까지 그 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것을 설명합니다. 사후에 육체를 벗는 문제는 바로 다음 AC.70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AC.69AC.70의 주제를 서로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된다는 마지막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한두 번 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보다 더 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계속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증언하며, 훗날에는 인간이 자신의 영으로 이미 영적 세계의 공동체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다른 영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통하여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일반인은 이러한 관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점은 사람은 몸을 입은 이라는 첫 설명을 다시 이해하게 해 줍니다. 인간은 지금 자연계에만 속했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영적 존재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에게는 영이 있고, 바로 그 영이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없던 영을 새로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가 벗겨지면서 그동안 육체 안에서 살아가던 영이 영적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이 흐름은 곧 이어질 AC.70 이하의 소생에 관한 설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목회적 경계가 생깁니다. AC.69를 읽고 영적 세계를 직접 보고 싶어 하거나 영들과 대화하는 체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것을 보통 인간에게 권장하는 영적 목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오늘날 그러한 대화가 위험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은 영적 감각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 거듭남을 허락드리는 것입니다. 영적 삶의 깊이는 영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잠기지 않는 역시 영계를 보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신앙생활에 적용되는 더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목적 자체로 삼지 않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세상의 성공과 소유가 마음의 지배적인 사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말씀과 주님과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곧바로 영들과 의식적으로 말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지만, 인간의 외적 삶이 내적 삶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는 AC.69의 경고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허락된 상태도 이런 일반적인 거듭남의 결과를 단순히 극대화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육체와 세상을 충분히 초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계가 열렸다고 설명하면 그의 경험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은 오히려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그의 특별한 개방은 인간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달성하면 자연스럽게 얻는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 문맥에 더 맞습니다.

 

또 현재 우리가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자연계의 저술 활동과 영계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AC.69는 그 가능성의 기본 토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며,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육체를 유지한 채 영적 감각이 열려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을 죽을 듯한 황홀경이나 장시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영계를 다녀온 뒤 깨어나 기억을 기록한 것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AC.5862에서도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내적인 것들을 열어 다음 삶의 것들을 보게 하셨으며, 영들이 자신이 아직 육체 안에 있는 인간임을 알았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그는 언제나 자연계와 영계를 정확히 동시에 보고 들으며 글을 썼다는 식으로 세부적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여러 영적 상태와 경험의 방식은 이후 기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연계에서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 영적 세계가 열려 있었으며, 그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장기간 교통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67부터 AC.69까지를 함께 놓으면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의 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선언했습니다. AC.68은 그런 증언을 사람들이 불가능하거나 상상이라고 할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9는 그 경험의 가능성이 인간이 몸을 입은 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세 글이 차례로 말하는가’, ‘ 반대에도 말하는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그러나 AC.69의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잃어버린 영적 감각을 회복하여 영들과 대화하라고 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은 인간을 자연적 육체만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더 근본적인 인간 이해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자연계에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내면에는 영이 있으며, 그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AC.69는 다음 AC.70으로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사람이 몸을 입은 이라면 죽음은 인간 자체의 소멸일 수 없습니다. 자연적 육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람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이제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넘어갈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바에 따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9인간은 누구인가를 밝힌다면, AC.70부터는 인간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게 됩니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AC.69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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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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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 및 천사들과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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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8, ‘이런저런 초대를 받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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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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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 천사들과 도저히 말할 없다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제가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일들을 이야기한다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밖의 여러 반대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때문에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8은 바로 앞 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에게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선언한 직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독자들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예상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고,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자신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여러 반대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이어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예상되는 반론을 스스로 먼저 꺼내 놓는 글입니다.

 

여기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독자의 의심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것임을 알고 있다고 시작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는 주장은 보통의 인간 경험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상상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반응을 피하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계 경험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 그 의심을 독자 앞에 먼저 올려놓습니다.

 

그가 예상하는 반응에도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능성 자체의 부정입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험의 성격에 대한 의심입니다. 실제 경험이 아니라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저자의 동기에 대한 의심입니다.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 외에도 밖의 여러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짧은 한 문장 안에서 자신의 주장에 제기될 수 있는 대표적인 의심들을 상당히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러한 반론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서 어떻게 영들과 말할 수 있는지 철학적으로 증명하지도 않고, 자신이 상상한 것이 아니라는 외부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변론을 길게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에 매우 짧은 말만 남깁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때문에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세 동사는 AC.68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각각에 너무 많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추측이나 이론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상상이라고 하며, 자신의 동기까지 의심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증언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직접 경험했다고 말했으므로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곧바로 결론 내리는 것도 AC를 읽는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진실하게 확신하는 것과 그 경험에 대한 모든 해석이 객관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68도 독자에게 내가 경험했다고 말했으니 이상 의심하지 말라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계속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 방대한 기록 자체를 읽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일관되며, 말씀의 내적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고,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67AC.68은 서로 잘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왜 다른 에 관한 것을 밝히는지가 설명되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고 그것을 묘사하며 포함하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많은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바로 그 증언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말하겠다고 합니다. 앞글이 이것을 말하는가를 설명한다면, 이번 글은 어떤 반대가 있어도 계속 말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태도를 단순히 대담한 신앙이나 반대에 굴하지 않는 용기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는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물론 그런 면을 생각할 수 있지만, AC.68의 핵심은 그의 인격적 용기보다 증언의 성격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철학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글을 읽을 때에도 먼저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가, 무엇을 들었다고 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다룰 때 우리에게도 필요한 균형을 보여 줍니다. 한쪽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일은 있을 없다고 가능성을 닫아 버릴 수 있습니다. 반대쪽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했으므로 모든 문장을 아무 검토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깊이 읽으려면 어느 쪽의 성급함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선 그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 정확하게 읽고, 관련된 다른 글들과 전체 문맥을 살피며, 무엇보다 그 설명이 말씀의 속뜻과 주님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AC.68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뒤 영들과 천사들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연계에서 육체로 살아가는 동안 그들과 교통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럴 없다고 할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AC.69에서는 이 문제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본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68의 첫 번째 반론은 다음 글에서 바로 더 깊은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점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기서 느꼈다는 표현을 지나치게 심리적인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어 felt가 정확히 어떤 경험들을 포함하는지는 이 한 문장만으로 세세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계 경험을 단순히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이나 추론으로 제시하지 않고, 보고 듣고 느낀 직접적인 경험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통해 하나씩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68은 그래서 독자에게 당장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몰아붙이는 글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이 일반적인 경험과 크게 다르며, 많은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기록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AC의 영계 기록을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말을 미리 변호하기 위해 모든 반론을 무리하게 물리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현대인의 일반적인 경험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도 전에 폐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경험했다고 말하는지, 그 경험이 어떤 질서를 보여 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차근차근 따라가면 됩니다.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하는 일도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증언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글의 마지막은 오래 기억할 만합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그 자체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주장을 증명하는 논증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 우리가 읽게 될 기록을 저자 자신이 어떤 성격의 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그것을 상상이나 철학적 추론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허락된 경험에 대한 증언으로 제시합니다. AC.67다른 에 관한 기록의 필요성을 밝히는 서문이라면, AC.68은 그 기록을 시작하는 증언자의 입장을 짧고 분명하게 밝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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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삶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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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란 무엇인가?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을 알지 못하면 알려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뜻인가? 단순히 사람은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요?

 

먼저 다른 은 육체가 죽은 뒤 인간이 들어가는 완전히 낯선 두 번째 생명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 형성된 자신의 내적 생명, 특히 자신이 실제로 사랑하고 의도하는 것과 연결된 상태를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다른 은 지금의 삶과 아무 관계가 없는 별세계의 삶이 아니라, 자연계의 육체를 벗은 뒤 계속되는 인간 생명의 다음 상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단지 자연계에서 사는 동안 종교적으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셔서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과 죽음 이후의 삶은 서로 끊어진 두 주제가 아닙니다. 지금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어떤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안다는 것은 그 세계가 단순히 희미한 영혼들이 떠다니는 추상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영들과 천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며 서로 교류하고 공동체를 이룬다고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이후 AC.68 이하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사후의 삶은 현재의 인간적 생명이 거의 사라지는 희미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내적 생명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상태입니다. 자연계에서는 거리와 장소가 사람들을 외적으로 구분하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의 사랑과 생각, 곧 내적 상태가 관계와 가까움의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그래서 서로 비슷한 사랑과 애정을 가진 이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들은 멀어집니다. 그렇다고 천국과 영계를 단순히 공간이 전혀 없는 심리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장소와 거리처럼 나타나는 것들을 실제로 묘사합니다. 다만 그러한 공간적 나타남의 근저에는 영적 상태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인간의 속과 겉의 관계가 점차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외적 행동과 내적 의도가 서로 다를 수 있고, 오랫동안 자신의 진짜 사랑을 감춘 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의 삶에서는 외적인 것이 점차 내적인 것과 일치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며, 결국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심판과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여기서 천국과 지옥을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상이나 벌로 배정되는 장소로만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에게 천국의 생명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과 연결되고,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생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것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서 자신의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다른 삶의 본성에는 인간과 영계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도 영적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며, 인간의 내적 삶은 천국과 영계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자연계에 사는 동안 그 관계를 직접 의식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는 특별히 영적 시각과 청각이 열려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AC.67에서 그 경험을 밝히겠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말씀의 속뜻과 이 영적 세계의 질서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을 알아야 말씀의 속뜻이 더 잘 이해될까요? 말씀에는 천국, 천사, , 생명과 죽음, 올라감과 내려감, 가까움과 멂, 빛과 어둠, 집과 성과 나라 등 자연적인 언어로 표현된 수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속뜻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영적인 실재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다룹니다. 그런데 영적 세계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 이러한 표현들을 자연계의 개념만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꼭 필요합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많이 알면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여는 주체는 인간의 영계 지식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AC.67 첫머리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시작합니다. 따라서 천국과 영계에 관한 지식은 속뜻을 인간 스스로 해독하기 위한 비밀 열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배경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또한 다른 을 안다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연속되어 있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자연계의 삶은 잠시 있다 사라져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시키시는 매우 중요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AC.67 다른 삶의 본성은 단순한 사후세계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은 무엇인가?’, ‘거듭남은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는가?’, ‘천국은 어떤 질서인가?’, ‘지금의 삶과 영원한 삶은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들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AC의 영계 기록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을 하나씩 보여 줄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삶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많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은 일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의 내적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 천국의 질서가 사랑과 진리와 쓰임의 질서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거듭남이 그 영원한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AC를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왜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을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하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삶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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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알지 못하면 알려질 수도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삶에 관계되고,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동안 영들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 가운데 제가 듣고 것들을 이제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AC.67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이 끝난 뒤, 창세기 2장 본문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 곧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삶에 관한 긴 기록을 시작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는 글입니다. 내용은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그 안에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은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과 관계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발견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던 것도 허락되었다고 하고, 그때 듣고 본 것을 밝히는 일 역시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 안에서 인간 자신의 발견이나 성취보다 주님의 허락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제부터 밝힐 내용을 자신의 지적 추론이나 독창적인 성경 해석의 결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으며, 영들과 천사들과의 오랜 교통 가운데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말씀의 내적 의미다른 삶의 본성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단지 사후세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앞으로 계속 보게 되듯 주님과 그분의 왕국, 교회, 인간의 거듭남, 천국의 질서 등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천국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고, 천국은 다른 의 실제이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말씀의 속뜻에 들어 있는 매우 많은 아르카나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AC.67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창세기 1장을 방금 읽고 온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1에서 빛, 궁창, , , 식물, 광명체,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은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상태들을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듭남은 단지 이 세상에서 조금 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천국의 질서에 맞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렇게 형성된 내적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남과 다른 삶은 별개의 두 주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와 죽음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는 하나의 생명의 연속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AC.67성경은 사실 사후세계에 관한 책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원문은 훨씬 신중하게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에 관계되고, 그것을 묘사하며, 그 삶에 속한 것들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very many things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의 중심을 사후세계 자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이 천국과 영계의 실제 질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계의 본성을 알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왜 스베덴보리가 창2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영계 경험을 기록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해설에서 갑자기 벗어난 긴 여담이 아닙니다. 그가 앞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계속 밝히기 위해 독자가 알아야 할 배경 가운데 하나를 먼저 제시하는 것입니다. AC.67은 그 연결을 직접 밝힙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하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 그대로 받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상상이나 꿈, 종교적 황홀경 또는 인식의 차원이 열린 상태정도로 바꾸어 설명하면 그가 실제로 주장하는 것과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 영적 시각과 청각이 열려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도록 허락되었고, 그 상태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독자가 그 증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AC를 해설할 때에는 우선 저자가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그 경험 자체를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AC.67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영계를 보았다는 신비 체험의 특별함보다 그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다른 삶의 본성을 알게 된 이유와 그 경험을 공개하는 이유를 모두 말씀의 속뜻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후 이어지는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기록도 단순한 사후세계 여행기나 기이한 체험담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AC 전체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와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도록 돕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을 이룹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삶과 완전히 끊어진 별개의 두 번째 생명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육체가 죽는다고 존재 자체가 끝났다가 다시 새로운 존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생명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다른 은 지금의 삶과 단절된 전혀 다른 생명이라기보다 자연계의 육체를 벗은 뒤 계속되는 삶입니다. 이후 AC.68 이하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 영들이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다는 사실 등을 실제 경험에 근거하여 차례로 설명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67은 창1과 창2 사이에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합니다. 1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이고 천적인 질서로 거듭나는지를 읽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형성되는 인간의 내적 생명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계속되며, 천국과 영계의 질서는 어떠한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설명은 결국 다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일로 돌아옵니다. ‘다른 에 관한 기록은 AC의 본래 주제에서 벗어난 부록이 아니라 말씀의 아르카나를 밝히는 작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AC.67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사후세계를 많이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있다는 단순한 공식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속뜻이 인간의 현재 삶만을 다루는 추상적인 종교 사상이 아니라 실제 천국의 질서, 인간의 영원한 생명, 거듭남과 사후의 계속되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이 세상의 삶과 다른 삶을 서로 끊어 놓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와 그 사람이 영원에서 어떤 상태로 살아가는가는 하나의 연속된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독자에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던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제부터 말할 것들을 단순한 성경 연구의 결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주장을 처음부터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보다, 이후 이어지는 방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그 내용과 일관성, 그리고 그것이 말씀의 속뜻을 어떻게 밝히는지를 계속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7은 바로 그 긴 여정의 문을 여는 짧고도 중요한 서문입니다.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1.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란 무엇인가?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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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 및 천사들과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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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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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7

 

말씀에서 십계명이 특별히 율법’(the law)이라 불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것이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과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또한 교리와 삶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련된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두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십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씀 전체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이것만 가르친다는 것은 주님의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It is known that in the Word the Decalogue is called by way of eminence the law, because it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or it contains both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all things that look to man. For this reason the law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treats of God, the other of man. It is also known that all things belonging to doctrine and life have reference to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nd all things pertaining to these loves are contained in the Decalogue. That in the whole Word nothing else is taught can be seen from these words of the L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 39-40) Jesus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from all thy heart, and in all thy soul, and in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 39–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the law and the prophets)는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The law and the prophets” signify the whole Word. And again: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5-28) A certain lawyer, tempting Jesus, said, Mast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And Jesus said un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readest thou? And he answering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with all thy mind, and thy neighbor as thyself. And Jesus said, This do, and thou shalt live (Luke 10:25–28).

 

이와 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말씀 전체이며, 십계명의 첫째 돌판은 하나님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고, 둘째 돌판은 이웃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으므로, 십계명은 교리와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두 돌판을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돌판에서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은 자신의 돌판에서 하나님을 향해 보는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상호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보시며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것들을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돌판에 기록된 것을 받아 행할 때 상호적인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하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This do, and thou shalt live.)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Since then, love to God and love towards the neighbor are the whole of the Word, and the first table of the Decalogue contains in a summary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God, and the second table all things pertaining to love to the neighbor, it follows that the Decalogue contains all things of doctrine and life. From these two tables so regarded it is plain that they are connected in such a manner that God from his table looks to man, and man from his table in turn looks to God, thus the looking is reciprocal, that is, it is such that God on his part never ceases to look to man and to make operative such things as relate to man’s salvation; and when man receives and does what is written on his table, a reciprocal conjunction is effected; and then comes to pass what the Lord said to the lawyer, “This do, and thou shalt live.”

 

 

해설

 

이 본문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결정적인 결론과 같습니다. 핵심은 매우 단순하지만, 동시에 가장 본질적입니다. ‘말씀 전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십계명은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즉,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교리와 삶의 문제들도 결국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로 귀결됩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돌판 = 두 사랑’이라는 대응입니다. 첫째 돌판은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 돌판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둘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입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가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 구절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성경 전체가 결국 이 두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모든 이야기, 교훈, 예언, 계명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깊은 부분은 ‘상호적 바라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본다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합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그 결합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돌판, 곧 삶 속에서 계명을 행하는 자리에서 응답할 때, 비로소 ‘상호적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체의 요약이며, 인간이 그것을 삶으로 행할 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님의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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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e and life, but in the spiritual and celestial senses it contains all precepts universally

 

 

해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의 층 구조’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한 핵심 문장입니다. 먼저 ‘글자의 의미(자연적 의미)’에서는 십계명이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 이러한 것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규범입니다. 즉, 외적인 행동과 사회적 질서를 다루는 ‘기초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로 들어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같은 계명들이 단순한 몇 가지 규칙이 아니라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보편적으로(universally)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더 많다’는 뜻이 아니라,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의 계명 안에 수많은 진리와 삶의 원리가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글자의 의미에서는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빼앗지 말라’, 천적 의미에서는 ‘선 자체를 사랑하여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계명이 단순한 행동 규칙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사랑 전체를 다루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마치 ‘씨앗과 나무’의 관계와 같습니다. 글자의 의미는 씨앗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뿌리, 줄기, 가지, 열매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영적, 천적 의미는 그 씨앗이 펼쳐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짧고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모든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겉으로는 몇 가지 기본 규범이지만, 그 안에는 신앙과 삶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진리가 깊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단순히 외적으로만 이해하면 시작에 머무르는 것이고, 그 안의 깊은 의미로 들어갈 때 비로소 ‘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TCR.286,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

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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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의 계명들은 열 말씀(Ten Words)이라 불립니다 (34:28; 4:13; 10:4). 이렇게 불리는 것은 (ten)이 모든 것을 의미하고, ‘말씀들(words)은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순히 열 개의 말씀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의미하며, 십일조(tithes, tenths)가 그러한 의미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것은 Apocalypse Revealed 101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법이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Such great holiness and power were in that law, because it wa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It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contained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the other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man. Therefore the commandments of that law are called the “Ten Words” (Exod. 34:28; Deut. 4:13; 10:4). They were so called because “ten” signifies all, and “words” signify truths; for they were more than ten words. That “ten” signifies all things, and that tithes (tenths) were instituted on account of that signification, may be seen in Apocalypse Revealed (n. 101); and that that law i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will be seen in what follows.

 

 

해설

 

이 본문은 십계명이 왜 ‘열 개의 규칙’이 아니라 ‘전체를 담은 말씀’인지 그 구조를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먼저 핵심은 이것입니다.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십계명이 신앙과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압축된 구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TCR.289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십계명은 어떤 부분적인 교훈이 아니라 ‘전체의 요약’입니다.

 

특히 ‘두 돌판’에 대한 설명이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한 돌판은 하나님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 두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전체가 됩니다. 그래서 두 돌판은 단순한 물리적 구분이 아니라, 종교의 구조 자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열 말씀’이라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십계명’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열 말씀(ten words)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속에서 ‘= 전체’를 읽어냅니다. 즉, 열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단순히 열 개의 조항이 아니라, ‘종교 전체를 담고 있는 완전한 말씀’이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십일조(십 분의 일)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말씀(words) = 진리’라는 연결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진리의 집합’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질서’, 곧 진리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따라 살 때 인간은 점점 하나님과 일치하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 전체의 요약이며, 그 안에는 진리와 삶의 모든 질서가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열 말씀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라, 신앙의 처음이자 끝이며,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이 됩니다.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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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5, ‘언약 = 결합(conjunction)’

TCR.285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conjunction)이 이루어지며, 또 인간과 주님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리고, 또한 ‘증거’(The Test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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