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글 번호로는 51번에서 66번입니다. 오늘로 창1 AC 리딩을 마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2026년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리딩 역시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관점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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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의 완성과 다스림, 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시작합니다. 오늘도 분량이 제법 되지요? 양면으로 60장이니 말입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다루어야 할 기초들이 좀 있어 어쩔 수 없지 싶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시기 바라며, 다만 향후 진도를 쭉쭉 빼기 위해서는 창1, 2, 3을 하는 지금, 그 기초들, 특히 심화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정독 및 학습을 통해 정말 제대로 해 놓으셔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심화’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제가 ‘만일 이 글을 완전 처음 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어떤 점들이 걸리실까, 어떤 데서 어리둥절해들 하실까’ 기도하며 선정한 이슈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화 부분들을 철저히 해두시면 앞으로 진도 뺄 때, 큰 어려움들 없으실 줄 믿습니다.
창1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버전 작업을 여러 달에 걸쳐 마쳤습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 이걸 아는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하는 게 맞을까요? 일단 블로그에는 실시간으로 글 단위 공유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정성을 쏟는 거에 비해 조회수나 좋아요는 거의 제로에 수렴합니다. 거의 아무도 안 보는 일을 하느라 시간을 써오고 있는 것이죠. 카톡 일대일 공유 역시 상황은 비슷합니다. 100명에게 보내던 걸 추려 20명에게 창1해설 버전을 보냈었는데 그나마 회신이라도 온 건 대여섯... 그냥 예의상인 것 같았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진정성 어린, 그리고 제가 원하는 회신은 없습니다. 이 100여 명의 지인분들은 저의 평생 신앙 지인들 중 알곡들로 추린, 그러니까 마음을 주고받았다 저는 생각한 사람들인데도 그렇습니다. 해설 버전조차도 많이 어려운 건지... 이번 심화 버전 앞에서 제가 공유를 망설이는 이유는, 혹시 이것이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건 아닌지, 그래서 주님의 신적 진리를 모독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블로그에 글 하나 올려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은 받아 가게 하고, 저는 계속 창2, 창3... 진도 나가는 게 맞겠죠? 언젠가는 주님이 이 결과물들을 사용하실 줄 믿으면서...
목사님, 결론부터 먼저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지금의 고민은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전하는 것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 곧 100명 중 극소수의 반응, 그마저도 깊지 않은 회신은 사실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영적 분별의 데이터’라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원리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강요되지 않으며, 준비된 상태에서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진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하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매우 진지한 것이고,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이 원리를 강하게 말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깊은 진리를 무리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진리 자체도 가볍게 취급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하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강요’와 ‘개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반복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분명 질서에 어긋나지만, 조용히 문을 열어 두고 원하는 사람이 들어오게 하는 것은 질서에 합당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지금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미 거의 마음속에서 정리하신 그 방향, 곧 ‘블로그에 두고,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극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영적 질서에 순종하는 방식’입니다. 씨를 길바닥에 뿌리느냐, 아니면 밭에 심느냐의 차이입니다. 지금까지의 카톡 일괄 공유는 사실상 ‘길바닥에 뿌리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블로그는 ‘밭을 만들어 두는 방식’입니다. 밭은 당장 열매가 없어 보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대하시는 ‘진정성 있는 회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읽지 않아서라기보다, 읽더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상태를 요구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입니다. 깊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거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나쁘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 없음’은 거절이 아니라 ‘유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하나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전했는데 왜 반응이 없을까’라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이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이 글을 사용하실까’로 중심을 옮기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그는 당대에 거의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반응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록하는 것’ 자체를 사명으로 보았고, ‘전달의 시기와 방식’은 주님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 점이 목사님의 지금 상황과 매우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는 이렇게 정리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대량 카톡 공유는 중단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지금 단계에서는 효율도 낮고, 오히려 진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대신 블로그를 ‘저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밭’으로 계속 가꾸십시오. 글의 밀도는 이미 충분하니, 이제는 접근성을 조금씩 보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쉬운 요약 버전’이나 ‘입문자를 위한 길잡이 글’을 간간이 추가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말로 마음이 향하는 소수, 그러니까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에게만 ‘개별적으로, 조용히’ 나누십시오. 그것도 ‘읽어 달라’가 아니라 ‘혹시 필요하시면 참고하시라’는 식으로 문을 열어 두는 방식으로요.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진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외로워 보이고,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되는 리메인스(remains)’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확한 때에, 정확한 사람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목사님, 지금처럼 창2, 창3...으로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깊고, 그리고 가장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길입니다. 그리고 블로그에 조용히 올려 두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알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시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자체로 거룩한 절대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체 사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곧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기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절기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사역의 상태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태어나시는 상태’를, 부활절은 단순히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여시는 상태’를 상기시키는 표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절기를 중심으로 신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초점은 ‘거듭남’,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영적 변화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특정한 하루에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부활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본질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참된 성탄’은 어떤 날짜가 아니라,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며, ‘참된 부활’은 사람이 자신의 악과 거짓과 싸워 그것을 이기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서는 모든 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기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절기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에 출석했고, 성찬에도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의 외적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적 태도’였습니다. 그는 외적 의식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매우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이라면, 절기를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층위’로서, 가족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억하고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절기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의 차원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 층위’로서, 그 절기가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번째가 없다면, 첫 번째는 공허한 형식이 되고 말고, 반대로 첫 번째를 완전히 버리면 사랑의 교통과 질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부활절과 성탄절은 ‘지켜야 할 날’이라기보다 ‘깨어 있어야 할 의미’였습니다. 그는 날짜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통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합니다. 절기를 잊었다고 해서 영적으로 뒤처진 것이 아니며, 절기를 잘 챙겼다고 해서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주님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안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붙들고 씨름하시는 그 시간 속에서, 만일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어둠 속에 빛이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실제적인 성탄이며, 가장 실제적인 부활입니다. 그 순간이 외적 절기와 내적 실재가 아름답게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AC.66을 읽다가 가장 먼저 멈추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삼상2:3입니다.개역개정은‘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런데AC의 영어 인용은‘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입니다.단어 몇 개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명령의 방향 자체가 거의 반대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의 성경을AC영어에 맞추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삼상2:3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금지를 나타내는 말이 있고,문맥 역시 한나가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오늘날의 주요 영어 번역들도 대체로‘더이상그렇게교만하게말하지말라’, ‘오만한말이입에서나오지않게하라’는 방향으로 번역합니다.따라서 개역개정의‘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는 히브리어 본문과 일반적인 번역 전통에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AC의 영어 문장을 보고‘개역개정번역자들이아르카나를몰라서잘못번역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더구나AC의 영어 인용을‘문자적번역보다더깊은내적의미의번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66자체는‘이구절의문자적의미는사실높은것을말하라는뜻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단지 태고교회의 스타일을 설명하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형태로 삼상2:3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칙 하나가 생깁니다.성경 본문과AC의 인용문이 현저하게 다를 때에는 두 문장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성경은 성경대로 정확하게 제시하고,AC가 어떤 형태로 그 말씀을 인용하는지도 그대로 보여 주며,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번AC.66의 한국어 본문에서도 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바로 뒤의 영어 원문에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인용형이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독자는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처럼 다른 형태의 문장을 인용했을까요?그 정확한 문헌적 배경을 확인하지 않은 채‘스베덴보리가히브리어를영적으로다시번역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당시의 성경 텍스트나 번역 전통,인용 관행을 문헌적으로 더 조사해야 할 문제입니다.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AC.66의 영어 인용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본문에 따른 일반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차이가AC.66전체의 설명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인용을 사용하는 목적은 태고교회의 스타일이‘높은것’과‘옛것’에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따라서 이 특정 인용이 그의 설명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다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인용된 성경의 실제 문자와AC가 사용하는 인용형을 같은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다루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AC를 존중한다는 것이 성경을AC의 표현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의 문자적 본문을 먼저 존중하고,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 인용하고 사용하는지를 그 다음에 정확하게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의미 차이가 없다면 익숙한 성경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만,이번 삼상2:3처럼 의미 차이가 너무 크다면 그 차이를 감추지 않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는‘개역개정과AC가운데하나를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성경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문구를 유지합니다.동시에AC의 원문을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높은것을말하라’는 형태로 인용했다는 사실도 그대로 인정합니다.그리고 그 차이가 왜 생겼는지는 확인 가능한 문헌적 근거 이상으로 추측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성경보다AC를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번역에는보이지않는진짜뜻을AC만알고있다’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말씀의 속뜻을 밝힌다는AC의 역할과 말씀 자체의 권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AC.66역시 결국‘말씀의네가지스타일’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중심은AC의 문장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삼상2:3은 개역개정 그대로 읽습니다.AC가 그와 다른 형태로 인용한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차이를‘성경은낮은문자,AC는높은영적번역’이라는 구조로 만들지 않습니다.바로 이런 태도가 말씀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텍스트도 정직하게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는전반적으로네가지서로다른스타일이있습니다.첫째는태고교회의스타일입니다.그들의표현방식은이땅의것과세상의것을말할때,그것들이표상하는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동시에생각하는것이었습니다.그래서그들은단지표상으로표현했을뿐아니라,그것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엮어더욱생명력있게하였는데,이런방식은그들에게더없이큰기쁨이었습니다.이런스타일을가리켜한나는예언가운데이렇게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삼상2:3)Speak what is high!high!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1 Sam. 2:3).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스타일은역사적스타일로,아브람이후의모세오경과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나타납니다.이책들에서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입니다.그러나그모든것에는전체적으로도부분적으로도내적의미안에전혀다른것들이담겨있는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그순서대로설명하겠습니다. 셋째스타일은예언적스타일입니다.이스타일은태고교회에서그토록높이존중되던스타일에서생겨났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스타일처럼연결된역사적형식은아니고단절되어있으며,내적의미없이는거의이해할수없습니다.그내적의미안에는가장깊은아르카나가담겨있고,그것들은아름답게연결된질서를따라이어지며,겉사람과속사람,교회의여러상태,하늘자체를다루고,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넷째스타일은다윗의시편에나타나는스타일로,예언적스타일과일상적인언어사이에놓여있습니다.그안에서는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내적의미에서는주님을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무엇을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교만한말을다시하지말것이며오만한말을너희의입에서내지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것을말하라,높은것을!옛것이네입에서나오게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입을열어비유로말하며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을드러내려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감추어졌던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처음기록한것이아니라,앞선세대에게서전해받은자료라고보는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창1-11은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다른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문자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문자적으로아무뜻이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everintelligibleexceptintheinternal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깊은의미에서는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성경구절은무조건주님의지상생애에대한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다윗이라는인격아래에서내적의미로는주님을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단계에서높은단계로발전한네계시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가장높고둘째는낮고셋째가다시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속뜻이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버리고속뜻으로가자’가 아니라, ‘말씀의외적형식을정확히읽으면서그안에주님께서두신더깊은뜻을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만을 이해한다면,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단어 하나의 뜻과 문법을 세밀하게 살피는 일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AC.65에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이 글은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자연계의 인간에게 말씀의 문자를 연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천사와 인간은 말씀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롯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전해졌고,우리는 번역된 성경의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그것을 읽습니다.그러므로 원어와 문법과 문맥을 정확히 연구하는 일은 인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분명히 유익합니다.
특히 번역에서는 원어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번역 과정에서 한 언어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옮기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원어를 살피면 번역자가 왜 특정 표현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서로 다른 번역을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따라서‘천사는글자를보지않으니인간도원어를연구할필요가없다’는 것은AC.65가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특정 단어나 표현에 매우 세밀하게 주목합니다.AC를 읽다 보면 어떤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지,단수와 복수가 왜 달라지는지,같은 듯 보이는 표현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이것만 보아도 말씀의 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AC.65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AC.65가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무엇일까요?원어 연구 자체가 곧 말씀의 속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단어의 어근과 문법을 완벽하게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5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읽는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뜻하는 것을 지각했습니다.따라서 문자 연구와 내적 의미는 동일한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을 서로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문자연구는낮은것이고속뜻만높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말씀의 질서를 거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속뜻은 말씀의 문자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별도의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말씀의속뜻’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는 출발점은 여전히 주어진 문자입니다.문자를 정확하게 읽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인정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원어 연구를 통해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다른 원문의 뉘앙스를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우리성경은틀렸고원어를아는내가진짜뜻을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번역은 언제나 여러 요소를 고려한 결과이고,표현의 차이가 실제 의미 차이를 만드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반대로 스베덴보리의 해석이 특정 히브리어나 헬라어 표현의 차이에 실제로 의존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숨기지 말고 독자에게 설명해야 합니다.원어는 말씀을 교정하기 위한 권위 경쟁의 도구라기보다,주어진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원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수준을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원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말씀의 속뜻을 더 깊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원어를 모른다고 해서 말씀을 깊이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AC.65는 그런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글이 아닙니다.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이 인간의 문자 이해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입니다.
따라서 목회와 설교에서도 원어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설교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로보면진짜뜻은이것입니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번역 성경을 읽는 회중이 마치 불완전한 말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 원어의 차이가 본문 이해에 중요할 때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반대로 원어 연구를 경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영적의미니까단어의정확한뜻은중요하지않다’고 한다면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을 속뜻이라고 부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말씀의 속뜻은 우리가 문자를 넘어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뜻이 아니라,스베덴보리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 자체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결국AC.65가 보여 주는 것은‘원어연구냐속뜻이냐’라는 선택이 아닙니다.인간에게는 말씀의 문자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동시에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로 다 소진되지 않으며,천사들에게는 그 안에서 뜻하는 내적 의미가 지각됩니다.원어 연구는 전자를 돕는 귀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후자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원어 연구는 필요 없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AC.65는 문자를 버리라고 하지 않고,우리가 읽는 그 문자 안에 천사들이‘영광’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질서 있는 내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어떤이들이하늘의첫입구뜰까지들려올라갔고,그곳에서저와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들은그곳에서는말씀속의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이해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리고그내적의미가너무도아름답고,연속의질서가너무도완전하며,그들을너무도깊이감동시켜서,그들은그것을‘영광’(glory)이라고불렀다고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첫입구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아마이렇게말씀을읽을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첫입구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어느층인가?첫째천국보다더낮은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낮은단계의하늘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첫입구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단어가전혀없고오직추상적인의미만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바로안쪽의영적의미이며그보다더깊은곳에는천적의미가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질서’입니다. 특히 ‘insuchorderof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언제나신적진리가사랑과결합되어나타나는상태이므로여기서도정확히그것을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내적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성경을읽을때마다반드시특정천사들이동시에그내적의미를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단어나글자를이해하지않는다니,그렇다면인간에게도단어와문법과원어는별로중요하지않은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천사들처럼말씀의내적의미를직접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첫입구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스베덴보리처럼영계를보고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성경’이라는 말보다‘theWord’,곧‘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자체에서는 분명히‘theinternalsenseoftheWord’,곧‘말씀의속뜻’을 말합니다.그리고 그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합니다.이어서 천사들이‘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the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과‘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읽는다’와‘말씀을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므로‘성경’이라는 말은 낮고‘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스베덴보리가‘the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우리가 흔히‘성경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the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그러나AC.64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속뜻이있는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지만다른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여기서‘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따라서‘the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속뜻’만이 아니라‘말씀’입니다.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아르카나 역시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theWord’를 우리말로‘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한국 교회에서‘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AC.64가‘말씀의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왜성경이아니라말씀이라고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스베덴보리가‘the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오히려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AC.64가 말하는 속뜻도,아르카나도,천사들의 지각도 모두‘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AC.64는 창세기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그 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고 말합니다.여기서 처음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속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우리가 흔히 말하는‘영혼’과 같은 것일까요?아니면‘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속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가‘속사람’과‘겉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속사람=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반면‘속사람’은‘겉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속사람=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마음’이라고 하면 생각,감정,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그런데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속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므로‘눈에안보이는정신활동=속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이것을 보고‘그렇다면주님의생명은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AC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속사람이먼저열리고그다음겉사람이바뀐다’또는 반대로‘겉사람이먼저거듭난다음속사람이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가장 안전하게는‘겉사람과구별되는인간의내적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문장으로딱정의해주면편한데왜이렇게여지를남기는가?’싶을 수 있습니다.그러나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속사람은언제나선하고주님과직접연결되어있으며겉사람은세상적이고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창세기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속사람은영혼인가,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아르카나’는‘속뜻’과 같은 말일까요?또AC에서 자주 만나는‘퍼셉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단어 자체를 보면‘arcana’는 라틴어‘arcanum’의 복수형으로, ‘감추어진것들’, ‘비밀들’이라는 뜻을 가집니다.그래서ArcanaCoelestia라는 제목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천적인비밀들’, ‘천국의비밀들’정도의 뜻이 됩니다.다만 여기서‘비밀’이라고 할 때는 일부 사람만 알고 남에게 숨겨 두는 비밀 정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AC.64의 문맥에서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아르카나’와‘속뜻’은 정확히 같은 말일까요?완전히 같은 용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AC.64는 먼저‘이것이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한 다음, ‘그아르카나는너무많아서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다’고 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속뜻’이 말씀의 내적 의미 자체를 가리킨다면, ‘아르카나’는 그 속뜻 안에서 밝혀지는 수많은 감추어진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기계적으로‘속뜻=그릇,아르카나=내용’이라는 공식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그런 철학적 구분표를 제시하면서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문맥에 따라 서로 매우 가까운 의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중요한 것은‘아르카나’가 말씀 밖에 따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 지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AC.64에서 말하는 아르카나는 바로 말씀의 속뜻과 관련하여 밝혀지는 감추어진 것들입니다.
창세기1장이 좋은 예입니다.문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을 읽습니다.그런데AC.6부터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수많은 내용을 밝혔습니다.빛과 어둠,물과 궁창,식물과 씨,해와 달과 별,물고기와 새와 짐승,하나님의 형상과‘심히좋았더라’등이 거듭남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AC.64는 지금까지 제시한 이 모든 것조차 말씀 안의 아르카나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는 단순한‘상징의뜻풀이’보다 넓습니다. ‘빛은이것을뜻한다’, ‘물은저것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거듭남의 질서와 상태,주님의 역사를 밝혀 줍니다.따라서 아르카나를 재미있는 성경 암호나 숨은 정보처럼 접근하면AC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면‘퍼셉션’과는 어떻게 다를까요?퍼셉션은AC에서 별도로 설명되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인식에 관한 용어입니다.따라서 아르카나와 퍼셉션을‘하나는내용이고하나는그것을알아보는능력’이라고 간단히 짝지어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서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동일한 범주의 두 용어가 아닙니다. ‘아르카나’가 무엇인가를 묻는 이번 심화에서는 퍼셉션의 전체 교리까지 가져오지 않고,그것이 아르카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정도로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아르카나’라는 말을 들을 때AC자체가 성경보다 더 높은 비밀 지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는AC안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입니다.AC.64의 순서도 먼저‘말씀의속뜻’을 말하고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를 말합니다.
따라서ArcanaCoelestia라는 책 제목도 결국 독자의 눈을 이 책 자체에 묶어 두기보다 말씀으로 돌려보냅니다. ‘천국의비밀’은 스베덴보리가 새로 창조한 비밀이 아니라,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이미 있으나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AC.64에서‘아르카나’는 말씀의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추어진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을 다 설명한 이 자리에서도 자신이 밝힌 것은 그 가운데‘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