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내적인 생명이 실제로 활동하면서 ‘생명 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도 넷째 날까지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과 광명체들이 나타났지만, 다섯째 날에 이르러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를 인간의 거듭남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에서도 사람은 이미 경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AC.9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것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AC.10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 뒤, AC.11에서는 이제 신앙이 실제로 그 사람의 말과 생각에서 활동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러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임을 검증한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1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배워 받아들였던 진리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신앙으로 활동하며 그의 생각과 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AC.9와 AC.11을 비교하면 중요한 변화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AC.9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선을 행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11에서는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두 표현의 대비는 거듭남에서 단순히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생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AC.11에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게 하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의 ‘생명 있는 것들’ 역시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 있는 산출물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20-23의 다섯째 날과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상응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각각 무엇을 세밀하게 의미하는지를 미리 확정하기보다, 넷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로부터 이제 처음으로 ‘생명 있는 것들’이 산출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조의 순서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날에는 식물이 나타나고, 넷째 날에는 광명체들이 나타나며, 다섯째 날에는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외적인 변화가 먼저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것을 차례로 질서 있게 하시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부터 살아 있는 결과들이 산출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 역시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에서는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진리와 선 안에서 사람이 확고해져 가는 것이 중심이라면, 다음 상태에서는 사랑이 더욱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차이를 남겨 두어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의 경계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확증’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문맥에서는 사람이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 안에서 확고해지는가입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확증은 자기주장의 완고함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신앙이 활동하면서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생명’과 ‘확고해짐’이라는 두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배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만큼 활동하기 시작하며, 사람은 그 신앙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이 이제 ‘생명 있는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창조의 다섯째 날에 나타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표현합니다. 다음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이 사랑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C.11 해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 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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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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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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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며, 이것들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었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상태에서는 회개하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상태에서는 한층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불붙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이전 상태에서도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에서 비로소 외적으로 선한 행동이 처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선의 내적인 근원과 상태에 있습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AC.9가 덧붙여 보여 준 것처럼 그는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행하고 있던 선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과 연결되기 시작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먼저 ‘사랑에 감동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인 감정이 강해지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뜻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선을 외적인 압박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 자체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잠잠하게 하는 과정에서 선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사람은 ‘신앙으로 밝아집니다.’ 신앙은 여기서 단순히 알고 있는 교리나 기억 속의 신앙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AC.8에서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신앙의 지식들이 언급되었고,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이 사람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진리가 단지 밖에서 주어진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실제로 빛의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 ‘불붙게 된다’(enkindled)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도록 이끄시며, 사람이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준비 가운데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9와 AC.10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AC.9의 사람도 선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두 상태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의 내적인 생명과 근원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14-18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그 광명체들의 세부적인 상응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창조 이야기의 두 광명체가 바로 이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1장의 거듭남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첫째 날에 이미 나타났지만,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처음부터 어떤 빛과 신앙의 지식이 주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상태를 거치게 하시면서 사람 안의 것을 질서 있게 준비하시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가 내적으로 살아 움직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AC.10에서 말하는 네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심이 강해지는 단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이제 사람의 내적 삶에서 실제로 생명을 가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단지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데서 점차 벗어나 선에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진다’고 표현한 변화입니다.

 

또한 이 상태를 인간의 성취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AC.7부터 이어지는 거듭남의 모든 상태에서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실제로 회개하고,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며,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점차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선의 공로를 돌리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앞선 세 상태에서 준비되어 온 것이 속 사람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리메인스로 저장되어 있던 것, 시험과 곤경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한 것, 회개와 선행으로 나타났지만 아직 자기에게 귀속되던 것이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내적 원리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의 넷째 날에 나타난 두 ‘광명체’로 표현합니다. 이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 내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한 살아 있는 결과들을 낳게 됩니다. (AC.10 해설)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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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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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를 ‘세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과 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이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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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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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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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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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러한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AC.8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아직 ‘혼돈’, ‘공허’, ‘흑암’ 가운데 있지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상태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이 이전보다 종교적이 되거나 도덕적으로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인지를 점차 구별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리메인스 전체에 대한 완전한 정의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기서는 특별히’라고 한정하면서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리메인스는 신앙의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선한 정서와 관련된 훨씬 풍성한 의미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8에서는 우선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저장하고 보존해 두신 것’이라는 핵심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리메인스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유아기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선과 진리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즉시 그의 의식적인 신앙과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감추어진 채 저장되어 있다가 거듭남의 과정에서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AC.8은 리메인스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에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그의 거듭남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번째 상태가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불행을 보내신다거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더 잘 거듭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도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거의 없다’고 표현합니다. 핵심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일을 통하여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평소 자기의 판단과 능력, 세상에서의 성취와 안정, 몸의 욕구와 외적인 조건을 매우 강하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삶에서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도 필요하고 세상에서 맡은 일과 관계와 책임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릴 때입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은 때때로 사람이 의지하던 외적인 것들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자기 자신만으로 모든 것을 붙들 수 있다는 확신을 잠잠하게 합니다. AC.8에서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지배력이 잠잠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뒤섞여 있어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것들이 드러날 수 있게 되고, 사람은 이전에는 구별하지 못했던 두 근원을 조금씩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분리’는 거듭남에 필요한 영적 구별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말이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입니다. Potts의 영어 ‘proper to man’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앞으로 매우 중요해지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의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선과 진리는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바로 이 구별이 처음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이나 불행이 자동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원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AC.8의 중심을 ‘고난을 받아야 거듭난다’로 잡으면 안 됩니다. 중심은 주님께서 이미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8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시험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거듭남을 의식하기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필요한 것을 저장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하신 것을 적절한 때에 사용하시면서 거듭남을 이끌어 가십니다. 리메인스는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되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에서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던 사람은 AC.8에 이르러 처음으로 하나의 구별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며, ‘내 생각’과 ‘주님의 진리’ 역시 저절로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생겨야 이후의 회개와 신앙의 삶도 가능해집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는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두신 것을 사용하시면서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시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8 해설)

 

심화

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 심화 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 심화1. ‘왜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져야 하는가?’ AC.8에는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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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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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혼돈과 흑암 위에 먼저 움직이시는 주님의 자비: 거듭남의 출발점’

AC.7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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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7은 AC.6에서 예고한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 가운데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첫 번째 상태는 아직 본격적인 거듭남이 시작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에 ‘앞서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까지로 잡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란 어느 한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아기에서 시작하여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지나온 상태를 포괄합니다. AC.6에서 여섯 날을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이라고 한 직후, 그 첫 상태를 이렇게 거듭남에 앞서는 긴 상태로 설명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상태를 창1:2의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7에서는 아직 이 세 표현이 각각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혼돈은 선의 부재이고 공허는 진리의 부재이다’와 같이 각각의 의미를 미리 확정하여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첫 상태 전체를 이 세 표현으로 묘사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아직 거듭나기 전이며, 창세기 문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하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바탕으로 이후의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자체보다 그 위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움직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움직임을 놀랍게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창1:2의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무엇을 알고 믿거나 행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듭남의 첫 상태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움직임은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AC.7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십니다.

 

따라서 AC.7에서는 이후의 교리를 너무 많이 앞당겨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수면’을 곧 리메인스라고 확정하거나, ‘운행하다’를 어미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자세히 해설하거나, 이 첫 상태가 이후 거듭남의 모든 국면에서 반복된다고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들은 이후 번호들을 따라가면서 차례로 확인하면 됩니다. AC.7 자체가 지금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충분히 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는 인간의 첫 상태는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포함하며, 그것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 위에서 최초로 움직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창조의 첫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된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거듭남의 첫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 해설)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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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여섯 날, 여섯 상태: 거듭남의 질서를 여는 해석의 문’

AC.6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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