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영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그리고 천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그의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그의 proprium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앎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합니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곧 그들의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이 proprium이야말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이며,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 믿는 것’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proprium을 원하지 않는 것’과 ‘proprium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을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AC.142, 창2:19-20, ‘짐승과 하늘의 새 -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하시다’ (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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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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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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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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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proprium의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한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은 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그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내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것’과 ‘자기의 것’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은 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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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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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낸 뒤 혼자 거하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가 ‘혼자’(alone)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렘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신명기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신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합니다. 여기서 ‘민족들’(nations)은 악들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곧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한 것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AC.139는 AC.138에서 설명한 ‘혼자’(alone)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혼자’가 본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고립되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된 천적 인간의 상태와도 잘 연결됩니다. AC.84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싸움이 그친다고 했고,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39에서 말하는 ‘혼자 거함’은 외적인 고독이 아니라 악의 침입과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께 인도받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는 오히려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가 유대교회에서도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고 혼자 거하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홀로 사는 국민’을 말하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말하며, 민수기의 발람의 예언에서는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리적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거함’이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특히 민23:9의 ‘민족들’(nations)이 여기서는 악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 자체를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속뜻에서 ‘민족들’이 악들을 나타내므로, ‘홀로 산다’는 것은 악들과 뒤섞여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현실의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창2:18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문자만 읽으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에서 ‘혼자’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139에 따르면 본래 ‘혼자 거하는 것’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더 이상 그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천적 상태 자체를 좋지 않다고 판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39은 그들이 이미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132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혼자 거하는’ 천적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의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라는 문장은 이 변화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넣어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인간 쪽에서 주님의 인도만을 원하지 않는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 자체가 이미 악의 방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없애어 천적 상태에 붙들어 두시는 대신 그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인간을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앞서 말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AC.139는 창2:18의 ‘혼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번호입니다. ‘혼자’는 고독이나 결핍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창2:18의 전환점은 ‘혼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왜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AC.139)

 

 

 

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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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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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창2:18)

 

AC.138

‘혼자’(alone)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이것은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합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AC.138부터는 AC.132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8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먼저 ‘혼자’(alone)는 단순히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여기서 ‘혼자’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이 문맥에서 사회적 고독의 문제보다 먼저, 주님의 인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 설명은 AC.131부터 이어져 온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그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고 했으며, AC.134에서는 마침내 그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38의 ‘혼자’는 지금까지 설명된 이 상태를 창2:18의 한 표현 안에서 다시 짚어 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마련하시는 장면이지만,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proprium이 중심에 놓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돕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138은 이 proprium을 뒤에 나오는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와도 직접 연결합니다. AC.134에서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장면 전체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2:18의 ‘그를 돕는 배필’과 창2:21-23의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는 서로 떨어진 두 표상이 아니라 동일한 proprium의 문제를 이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왜 하필 ‘갈빗대’이며, 그것이 ‘여자’로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다음 번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 proprium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낳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것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2:18에서는 바로 그 proprium에 해당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루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둘 수 있게 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AC.138은 아직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의 개요에서는 이미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주어졌습니다. AC.134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다고 했으며,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AC.136에서는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를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여기서 ‘여자’를 곧바로 proprium의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창2:18-23의 특정한 문맥입니다. AC.103에서 확인했듯이 말씀의 표현은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을 떠나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표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가 주제이므로 ‘그를 돕는 배필’과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가 그 proprium을 묘사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여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의미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8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은 세 가지 표현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를 돕는 배필’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proprium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로 묘사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그를 돕는 배필’이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앞질러 답하기보다 이어지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며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38)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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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다루며, 여기서는 이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창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창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창2 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 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 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그 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은 ‘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 번성한 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 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두 천적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 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 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창1의 거듭남, 창2 앞부분의 천적 인간,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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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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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25절)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해설

AC.136은 창2:25의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면서, AC.132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 데 이어,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이노센스의 근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의 proprium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확인해 온 질서와 일치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이 주님의 것이며,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도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proprium 안에 들어오는 이노센스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옮겨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노센스가 proprium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AC.134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고,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AC.136에서도 proprium 자체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려는 성향을 단순히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이노센스가 함께할 수 있도록 다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proprium 그 자체를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어야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36까지 읽은 단계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을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단순히 제거하시는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결합하시며 이노센스를 스며들게 하시는 과정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를 읽는 방향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벌거벗음’과 ‘부끄러워하지 않음’ 각각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지만, AC.136에 따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은 곧바로 수치나 죄의 상태를 뜻한다고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3에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상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후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132부터 AC.136까지를 함께 보면 이제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신이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질서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6에서 아직 ‘이노센스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후대의 교리까지 끌어와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영적 생명이 결합되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스며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2:25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상태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AC.136)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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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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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해설

AC.135는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는 ‘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는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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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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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AC.134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그에게 proprium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21-23절)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해설

AC.134는 AC.131부터 시작된 짧은 개요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주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이제 그들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창2:21-23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어가도록 허용되고’와 ‘주어집니다’라는 두 표현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proprium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만,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며 proprium도 그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본문을 읽을 때에는 인간의 proprium을 주님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시며 어떤 의미에서 proprium을 ‘주신다’고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AC.134는 창2:21-23의 ‘여자’를 해석하는 방향을 미리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 문맥에서 여자는 우선 자연적 성별로서의 여성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남성과 여성의 가치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속뜻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갈빗대가 여자로 만들어지는 장면 전체가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내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 AC.134의 요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자 곧 proprium’이라는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AC.1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AC.131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이므로, 창2:21-23의 여자가 그 proprium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갈빗대’이며, 왜 그것을 ‘여자’로 만드셨는지는 아직 AC.134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proprium이 주어졌다’는 말을 곧바로 ‘악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132에서도 ‘허락된 proprium’이라고 했고, AC.134에서는 다시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성향이 이 과정의 배경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고 어떤 proprium을 주시는지는 아직 설명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proprium의 성질에 대한 최종 판단은 다음 번호들을 읽은 뒤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32-134에는 하나의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그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요구를 주님께서 단순히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구를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루시는 과정으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AC.134는 아직 그 과정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창2:21-23이 무엇을 묘사하는지만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갈빗대가 왜 proprium인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은 인간이 처음 원했던 proprium과 같은 것인가’ 같은 질문을 열어 둔 채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이 질문들이 이어지는 본문을 읽게 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AC.134)

 

 

 

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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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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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절)

 

AC.133

그리고 먼저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19-20절)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절)

 

해설

AC.133은 창2:19-20의 동물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 장면이 앞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요약합니다.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곧 proprium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에게 곧바로 proprium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에게 있기는 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원문도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AC.122-124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도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는 애정이 있고 진리를 아는 앎이 있지만, 그것들의 최초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창2:19-20에서 사람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장면도 아직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계의 동물들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제시됩니다. AC.133이 먼저 해석의 열쇠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각각의 표현이 어떻게 풀리는지는 기다려야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과 관련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는 까닭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 부족해서라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proprium의 문제는 단순히 무지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향과 연결되어 있음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133은 AC.123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사라진 뒤 proprium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하는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33에서는 아직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독립성과 자유를 위한 좋은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말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분명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먼저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 이 기울어짐을 어떻게 다루시며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시는지는 이어지는 본문이 설명할 것입니다.

 

AC.133은 짧지만 창2:18-25의 진행 순서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자 곧바로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서 이미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중심 질문은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보다 ‘주님께 받은 모든 것 가운데 있으면서도 왜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했는가?’에 있습니다. (AC.133)

 

 

 

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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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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