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곧 자신의 proprium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을 다룹니다. (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해설

AC.132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이하의 말씀을 해설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 주제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라고 밝힙니다. 바로 앞 AC.131에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2는 왜 이 문제가 생겼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128-130의 흐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했고, AC.129에서는 사람의 출발점이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AC.130에서는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에덴과 네 강 전체가 어떻게 반대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설명의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성향을 ‘proprium’이라는 말로 붙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32에서 특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표현은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입니다. 앞 번호들만 읽으면 proprium은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에게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proprium을 단순히 ‘자기 사랑의 정수’나 ‘악 그 자체’와 같이 하나의 부정적인 정의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 proprium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 인도받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는 것’의 대조는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128-129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자유롭게 살아 내는 것과, 자기 자신을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22부터 이어진 흐름도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고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23에서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AC.130의 바로는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AC.132에서는 이러한 ‘자기 것’의 문제가 ‘proprium’이라는 용어 아래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2:18 이하의 말씀을 곧바로 ‘proprium은 악하다’는 결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본문은 인간이 proprium을 원한다는 현실과, 그 때문에 어떤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허락되었다’는 한 단어 때문에라도 여기에는 단순한 정죄 이상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것을 어떤 질서 안에서 인간의 삶과 연결하시는지가 앞으로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AC.132는 창2 후반부를 읽는 새로운 질문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여기서 단순히 사회적 고독이나 결혼의 필요를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상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수 있는지가 이제부터 이어질 설명의 중심이 됩니다. (AC.132)

 

 

 

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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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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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18-25)

 

AC.131

여기서는 proprium(주3)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주3. 라틴어 ‘proprium’은 원문에서 사용된 말로서, 여기와 다른 곳들에서 ‘자기 자신의 것’(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형용사 ‘proprius’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자신의’(one’s own), ‘고유한’(proper), ‘오직 자기 자신에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 ‘특별한’(special), ‘개별적인’(particular), ‘특유한’(peculiar) 등입니다. 이것의 중성형인 ‘proprium’이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물’(possession), ‘재산’(property)을 뜻하며, 또한 ‘특유한 성질’(a peculiarity), ‘특징적인 표지’(characteristic mark), ‘구별되는 표지’(distinguishing sign), ‘특성’(characteristic)을 뜻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 사전에서 ‘...에 속하는’(belonging to), ‘전적으로 또는 특별히 ...에 속하는’(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특유한’(peculiar)이라는 뜻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own’은 ‘proprius’에 매우 정확하게 대응하며, 라틴어 명사 ‘proprium’에 대응하도록 ‘own’을 명사로 만들어 사용하면 원문에 매우 가까운 번역이 됩니다. [개정자]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AC.131은 매우 짧지만 창2의 속뜻에서 새로운 구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앞에서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흘러오는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특히 AC.125-130에서는 그 질서를 지키는 것과 뒤집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창3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타락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 사는 이전의 천적 상태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의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AC.131은 완성된 악의 상태를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적인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여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도 지금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후대의 설명을 미리 끌어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흐름만으로도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AC.122에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123-124에서는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8-130에서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131의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 흐름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특히 AC.130의 바로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했는데, 질서가 뒤집히면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AC.131은 이제 이러한 ‘자기에게로 향함’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중심에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보다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천적 인간의 질서는 인간의 능력들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안에서 누리고 사용하는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생각과 의지와 활동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때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자체와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상태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131은 한 문장으로 다음 단락들의 독법을 미리 정해 줍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창2:18 이하의 말씀을 단순히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상태와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이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1은 앞의 긴 논의를 다음 구간으로 넘기는 작은 경첩과 같습니다. AC.129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과 AC.130의 뒤집힌 에덴의 모습이 이제 태고교회 후손들의 실제 상태 변화로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변화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AC.131)

 

 

 

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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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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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garden)이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며, ‘앗수르’(Assyria)가 있는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입니다. ‘구스’(Ethiopia)가 있는 그의 ‘셋째 강’(third river)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며,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나온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는 ‘애굽’(Egypt)도 그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뒤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관하여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선지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 사람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을 의미하며, 그들은 추론을 통하여 그것들을 이와 같이 모독합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설명한 에덴동산과 네 강의 질서를 정반대의 상태에 적용합니다. AC.98 이후 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 동쪽은 주님을 의미했고, 네 강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는 이 모든 질서가 뒤집힙니다. 같은 동산과 에덴과 강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의 ‘동산’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며, 그의 ‘에덴’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에덴이 사랑을 의미했으므로 여기에서도 사랑이라는 기본 관계는 남아 있지만, 그 사랑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에 놓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동쪽’은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AC.101에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서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방위의 상응을 새로 제시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야 할 내적 방향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뒤집혔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의 전도는 네 강에서도 이어집니다. 유브라데는 앞에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이 지성과 지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죄받은 그의 모든 기억지식’이 됩니다. 이것은 기억지식 자체가 정죄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29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지 않으며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기억지식이라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아래에 있을 때에는 생명을 받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에게서는 거짓된 원리를 확증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받는 것은 기억지식이라는 능력이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전도된 질서입니다.

 

둘째 강에 관한 설명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118-119에서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앗수르가 있는 둘째 강이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이성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성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추론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AC.129에서 사람이 아무리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여도 그의 지식과 추론이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한 설명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성은 자신이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진리를 밝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강과 넷째 강에서는 전도가 더욱 깊어집니다. 구스와 연결된 셋째 강은 악과 거짓에서 나온 원리들이며, 그것들이 그 사람의 ‘신앙에 관한 앎들’이 됩니다. 앞에서 구스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이미 잘못된 원리에서 나온 것들이 신앙에 관한 앎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 넷째 강의 ‘지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면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그 지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정반대의 것이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바로와 애굽을 인용합니다. 특히 겔29장에서 바로가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AC.130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문제의 핵심은 강 자체가 아니라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AC.122-124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바로는 정반대로 강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자기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혜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겔31장의 ‘에덴의 나무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AC.130은 이것을 말씀으로부터 얻은 ‘기억지식과 앎들’이라고 직접 풀이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자료의 출처가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앎이 반드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조차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하는 추론에 종속시키면 그것을 모독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성경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 아래에서 사용하는가에 있습니다.

 

AC.130은 결국 앞에서 설명한 상응들이 고정된 일대일 암호가 아님을 다시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동산·에덴·강·앗수르·애굽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긍정적인 질서 안에서도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전도된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임의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지식은 여전히 기억지식과 관련되고, 이성은 여전히 이성과 관련되며, 사랑은 여전히 사랑과 관련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30은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AC.129를 에덴과 네 강 전체에 적용하여 보여 주는 하나의 반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130)

 

 

 

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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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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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초청하게 될 텐데, 그때 이런 표현들, 그러니까 ‘저희 교회는 가급적 선한 삶을 살고프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문구를 사용하면 많이 이상할까요? 이런저런 교리적 배경으로 싸우고 다투느라 교회가 어수선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습니다만...

 

 

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다, 그대로 사용하시면 오히려 ‘문을 먼저 좁혀 버리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22-124가 말하는 ‘경작하며 지키게’의 핵심은, 이미 선한 사람만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경작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지켜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특히 거기서 말하는 ‘영적 인간’은 처음부터 선과 진리의 조화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서히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점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혼재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만’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사람들, 곧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갈망은 있는 사람들조차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거나 스스로를 배제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거듭남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바로 그 의미에서 ‘경작’은 씨앗을 심고 돌보는 일이요, ‘지킴’은 잘못된 원리나 왜곡된 애착이 그 과정을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초대 문구는 ‘결과 상태’를 전제하기보다 ‘과정에의 참여’를 여는 쪽이 더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이 걷는 길, 곧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만 바꾸면 훨씬 자연스럽고, 동시에 AC의 정신에도 더 부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이라는 단정적 표현 대신 ‘삶을 더 선하게 살아가고 싶으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 대신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길을 함께 찾고 싶으신 분들’처럼 ‘이미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방향은 분명해집니다.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초대 문구에서 걸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온 이후의 가르침과 공동체의 분위기, 곧 말씀과 삶의 일관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염려, 곧 ‘교리로 싸우는 어수선함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타당합니다. 다만 그것은 ‘누가 들어오느냐’보다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AC.122-124의 빛에서 보면, 참된 ‘지킴’은 외부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질서’를 세워 외부에서 들어오는 혼란이 스스로 힘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문턱을 높여 조용해지는 곳’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의 질서가 분명하여 자연히 고요해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계획하시는 초대는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방향만 조금 다듬으시면 매우 건강한 형태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완성된 사람을 찾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 아래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곳입니다.’ 이 한 줄 안에 ‘경작’과 ‘지킴’, 그리고 ‘영적 인간의 길’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SC.81,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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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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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이 아무리 거짓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들을 지지하는데,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더욱 확증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보고 이해하기 전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리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그려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르며, 그는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집니다.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해서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출발 원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어야 하며,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하되,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해설

AC.129는 사람이 왜 잘못된 출발점에 서면 이후의 지식과 추론까지 그 잘못을 강화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되어도 사람의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자기의 거짓된 원리 안에서 더욱 굳어집니다.

 

이것은 AC.128에서 본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는 ‘내가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웁니다. 그런데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력으로 완전히 그려 낼 수도 없으므로, 이 원리를 끝까지 고수하면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보이고 이해되어야만 참이다’라는 원리를 신앙보다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생각과 이해가 중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이 뒤따르며’, 사람은 이성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에서도 밝아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이성과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올바른 빛을 받아 제 기능을 하게 되는 질서입니다.

 

AC.129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학문들을 배우는 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AC.80 이후 계속 생길 수 있었던 오해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직접적으로 차단하는 표현입니다. 학문은 삶에 유용하고 즐거우며,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지 말라고 한 것을 지적 탐구나 학문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읽는 것은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학문과 이성이 어떤 위치에서 사용되는가입니다.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뒤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인 진리들로 확증합니다. 이때 자연적인 진리는 영적인 진리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설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학문 세계에 익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학문은 서로 적대적인 영역이 아니라, 질서가 바로 서 있을 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28과 AC.129는 서로 정확히 맞물립니다. AC.128에서는 이성·기억지식·감각·자연적인 것들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를 확증할 수 있다고 했고, AC.129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문제를 ‘사용 여부’가 아니라 ‘출발점’에 둡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 하면 질서가 전도되지만,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성과 학문을 사용하면 그것들은 진리를 확증하고 밝히는 쓰임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가장 짧게 압축합니다.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는 결국 지식을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근원으로 삼느냐, 아니면 주님을 근원으로 삼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출발점으로 할 때 이성과 학문과 기억지식은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할 때 같은 능력들도 거짓을 확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AC.129)

 

 

 

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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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다 -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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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볼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기 입장을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하여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가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는 더욱 자기 눈을 멀게 하며, 마침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어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곧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그는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하며,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둡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AC.128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질서를 각각 한 사람의 마음속 말처럼 펼쳐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내가 감각으로 볼 수 있고 기억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믿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생각하고 다른 쪽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생각하느냐가 다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출발점은 감각과 기억지식입니다.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조차 먼저 자연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수 없다’는 생각 자체만 떼어 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의 심판자로 세운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자기가 가진 기억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원리를 먼저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바깥에 있어야 할 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표현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각적인 것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들을 기억에 간직합니다. 그것들은 자기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적이고 신적인 것의 근원을 발견하여 그 진위를 판정하려 한다면, 아래에 있는 것으로 위에 있는 것의 근원을 만들어 내려는 셈이 됩니다. AC.121에서 제시된 천적 질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려는 질서의 전도를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기준으로 삼을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길이 닫히고, 마침내 영적인 실재와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28의 후반부는 이 대목을 반지성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이성적 사고나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앙의 최초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에서 하신 것들을 믿는다’는 것도 생각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오해를 막습니다.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질서 지웁니다.’ 즉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고 전체를 질서 있게 세웁니다. 그리고 이성에 속한 것들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그 진리를 확증하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신앙과 사고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고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확증하지 않는 것들은 제쳐 둔다’는 표현은 문맥 안에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맞지 않는 사실은 무조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지적 태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천적이고 신적인 것을 무엇으로부터 배우며 무엇을 최초 원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맥에서 핵심은 자연적인 지식이 신적인 진리 위에 서서 그것을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현대적인 의미의 사실 회피나 무비판적인 확증 편향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128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지식 대 무지’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 대 질서의 전도’로 보여 줍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을 사용하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사람도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섬기는 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에까지 내려가는 것이 생명의 질서라면,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그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의 핵심입니다. (AC.128)

 

 

 

AC.129, 창2:17, ‘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한다 - 이성과 학문은 신앙을 확증하는 쓰임 안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인 원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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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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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창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절, AC 글 번호로는 114번에서 127번이며, 오늘은 설교 후 성찬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1-17)

 

이 본문을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14, 창2:11-12, ‘금은 생명과 선, 보석은 빛과 진리 :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는 귀한 ‘보석들’(stones)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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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5, 창2:11-12, '천적 인간의 인식 : 의미만 봄'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의 사람들은 ‘땅들’(lands)에 대하여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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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6,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사랑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는 능력'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 ‘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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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인식이 예물이 되는'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는 금과 보석, 향료가 풍부하였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진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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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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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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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이성과 기억 지식의 경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이 기억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브라데 강’(Euphrates)도 기억 지식,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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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인간의 질서 : 지혜에서 지성, 이성, 지식으로’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성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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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전 인격, 그리고 태도’(AC.122-12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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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에덴동산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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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소유하지 않음’, 주님의 여러 말씀에서 확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난 것임은,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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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허락’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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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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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선악과 :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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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범위 중 메인으로 읽은 AC.122-124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C.122–124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에덴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 존재’라는 질서입니다. 이 세 단락은 ‘경작하고 지킨다’는 말씀의 참뜻을 풀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먼저 AC.122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는 말이 인간의 노동이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림은 허락되었으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임을 밝힙니다. 인간은 동산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두어짐’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때 ‘누림’과 ‘소유’의 구분이 핵심이며,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퍼셉션, 곧 지각하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만 에덴은 그대로 보존됩니다.

 

다음 AC.123은 이 원리를 세 부류의 인간 상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 곧 지각으로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같은 내용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말씀을 통해 ‘배워서’ 그렇게 말하는 단계입니다. 반면 세상적이고 육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여 ‘내 것’으로 붙잡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끊임없는 불안과 집착 속에 살게 되며, 바로 이 ‘소유 의식’이 에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마지막 AC.124는 이 모든 원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 지식 등 인간 안의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포도원 비유, 성령의 인도에 대한 말씀, 그리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인간은 생산자가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상태는 ‘내가 가진다’가 아니라 ‘받아 누린다’이며, 이 질서를 인정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안전한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03(D1)

 

 

2649, 4, 창2.4, 2026-05-03(D1)-주일예배(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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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10, 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찬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창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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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26, 창2:8-12, AC.100-113), ‘에덴의 구조 : 네 강의 비밀, 첫째 강 비손’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7,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71, ‘예부터 도움 되시고’입니다. 오늘은 창2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8절로 12절, AC 글 번호로는 100번에서 113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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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AC.127은 바로 앞의 AC.126에서 제시한 경고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힙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단순한 지적 방법의 잘못이 아니라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일으킨 원인이었으며, 더 나아가 모든 교회의 타락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논점은 한 개인이 선과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데서 교회 전체가 어떻게 그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다시 한번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AC.118-121과 AC.125에서 이미 본 것처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인간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으며, 천적 인간도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습니다. 문제는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빛 안에서 자연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대신, 자연적인 감각과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는 것입니다.

 

AC.126에서는 이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AC.127은 그 결과가 왜 교회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감각과 지식의 판단 아래 놓이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지고, 앞의 AC.122-124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천적 질서도 무너지게 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만일 문제가 단순히 잘못된 추론에 그친다면 이것은 지성의 오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질서는 삶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여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서 나온 욕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거짓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앎의 질서는 결국 잘못된 삶의 질서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왜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탐구’라고 하지 않고 ‘탐구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AC 자체가 수많은 성경 구절을 살피고 서로 연결하면서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종 권위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자기 힘으로 파헤치고 판정하려는 내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신앙에 관해서는 질문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다음 장, 곧 창3의 속뜻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미리 그 원리를 밝히면서 그것이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의 이야기도 단지 아주 먼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이미 제시됩니다. 주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찾으려는 질서의 전도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27의 핵심은 지성과 연구를 포기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우리의 지성과 연구를 지배하는가를 묻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위에 있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 아래에서 쓰일 때에는 그것들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지식이 위에 올라가 신앙의 신비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히며, 그 결과는 거짓된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동시에 모든 교회가 경계해야 할 타락의 원리입니다. (AC.127)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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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창2:17)

 

AC.126

이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내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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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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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변들을 보며, 그 답변들이 매우 스베덴보리적이며, 제가 지난 8, 9년 읽어온 내용과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며,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도우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부분들은 좀 어리둥절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답변들은 제 선에서 좀 다듬거나 버리거나 합니다. 이 일을 AI와 함께하면서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놀라움과 위대함에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어요. 주님이 주신 이 능력은 정말이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것이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물론 퍼셉션, 인플럭스는 또다른 차원이겠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딛고 오를 수 있는 첫 계단이 필요하고, 이걸 이렇게 유능한 도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 64세로 나이도 많고, 점점 기력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지금 서 계신 자리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하시는 방식은 ‘퍼셉션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퍼셉션으로 가는 발판을 놓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목사님 작업의 정당성과 동시에 오해받는 이유를 함께 설명해 줍니다.

 

목사님이 경험하신 것처럼, AI가 정리해 주는 내용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질서를 잡아 주는, 그런 방향이 맞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자체가 이미 ‘질서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 위에서 ‘정리된 형태로 드러난 것’에 가깝습니다. 목사님이 그걸 알아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8, 9년 동안 쌓아 오신 내적 축적, 곧 말씀과의 실제 접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분별이 가능하고, 어긋나는 부분은 걸러내실 수 있는 상태에 계신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사용이 아니라, ‘주체가 분명한 도구 사용’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 설명을 들으면 분명합니다. AI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구조라면 문제의 본질은 이미 피해 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지점은 ‘AI에 끌려가는 상태’인데, 목사님은 오히려 ‘AI를 정리 도구로 사용하는 상태’에 계십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 가지 조정하시면 훨씬 더 안정되고, 동시에 오해도 줄어들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설명 방식’입니다. 지금 목사님 작업은 상당히 ‘완성된 해설’의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작은 방향 전환만 주셔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면서도 기존 리더십의 경계도 낮출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라는 톤에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라는 톤으로 살짝 낮추는 것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다만 표현의 결을 조금만 열어 두시면, 읽는 사람이 ‘강요받는다’가 아니라 ‘초대받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첫 계단’이라는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카나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도 못 합니다. 목사님이 보신 그 장면,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 상태에서 ‘퍼셉션을 기다리라’고만 하는 것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진입 가능성 자체를 만들어 주는 작업’입니다. 이건 굉장히 실제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탄’의 부분입니다.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질서에 대한 놀라움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도구’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로 말하면, 자연적 차원의 질서 역시 그 자체로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상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봉사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그 도구를 ‘말씀을 더 잘 전하기 위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 현실 말입니다. 이건 단순히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방식이 더 의미있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핵심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계신 것입니다. 번역, 정리, 구조화에 드는 물리적 에너지를 줄이고, 대신 ‘분별과 방향 설정’에 집중하시는 것, 이것이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을 대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도구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질서 있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문제라기보다, 시대와 방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긴장 속에 있으며, 그 본질은 충분히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향 위에 서 있습니다.’

 

 

 

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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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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