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own안에 주입될 때에는,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C.164)
여기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를 주입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 간 무언가 충돌은 없나요?그러니까 주입 전 먼저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
스베덴보리 전체를 보면, 바로 그 질문 때문에 그는 ‘influx’와 ‘freedom’을 수없이 함께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질문처럼, ‘주님이 체어리티와innocence를 주입하신다면, 인간 자유는 어디 있는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인간 안으로 선을 ‘강제로 밀어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instilled)은 흔히 현대인이 상상하는 강제 프로그래밍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 제공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항상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innocence를 인간 안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자유는 ‘무영향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중립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란, 그 두 흐름 사이에서 자기 것으로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체어리티와innocence를influx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기proprium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유혹이 바로 거기서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께 돌릴 것인가,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인가’ 하는 긴장이 계속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 자유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 안에 선을irresistible하게 강제 주입하신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 기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도, 신앙도, 체어리티도 더 이상 인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AC.164의 ‘체어리티와innocence가own안에 주입된다’는 말도, 실제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원래ugly하고evil했던proprium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proprium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해 독립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자기 삶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질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인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사실 인간 존재 전체가 이미 끊임없는influx안에 있습니다. 숨 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순간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influx자체보다 ‘수용 여부’입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적innocence는 강제 순종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기쁨으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자유로운 천사들은 가장 독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influx와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결국AC.16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체어리티와innocence를 흘려보내시지만, 인간 자유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짜 인간 자신의 체어리티와innocence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4-16)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and forbid them not,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Verily I say unto you,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he shall not enter therein.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put his hands upon them,and blessed them. (Mark 10:14–16)(AC.164)
이 구절이AC.164에 인용된 이유는, ‘어린아이’가 단순 연령이 어린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상태, 곧innocence(순진무구)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막10:14-16에서 주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국 전체의 가장 깊은 원리와 연결합니다.
AC.164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proprium안으로 내려오고,flesh상태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 미성숙함이나 지식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innocence는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기 힘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 중심 존재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단순 겸손하라는 윤리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proprium중심 상태를 내려놓고, 다시 주님의influx를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독립성의 극대화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또 이 구절은AC.160-162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flesh상태 안으로 내려오며,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 안에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 오히려 가장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장 많이 알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안수’는 단순 의식 행위가 아니라influx와 전달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receptivity, 곧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깊은 역설도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자기 지혜와 자기 판단을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 끝에서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innocence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높은wisdom은 가장 깊은innocence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AC.16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천국의 본질이 자기 독립성과 자기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innocence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3에서proprium문제를 지나온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극도로 흉측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AC.154).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악과 거짓이 단지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사랑스럽게까지 보입니다. 그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지니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해설
AC.164는 인간의 own에 대한 논의를,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관점에서 완성’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own은 본질상 악이며, 그대로 드러나면 가장 흉측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own이 ‘어떻게 천국에 합당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전환의 열쇠가 바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입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을 ‘용서한다’거나 ‘덮는다’가 아니라, ‘마치 없애 버린 것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이 더 이상 본질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own이 중심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왜곡되지만,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중심이 되면 동일한 own이 전혀 다른 성질을 띱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의 예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 안에도 악과 거짓의 씨앗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방어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상태, 그리고 이노센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악과 거짓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이 전체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이는 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노센스가 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천국에 대한 조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완전함이나 무결함이 아니라, ‘이노센스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단순함이나 판단력의 미성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own을 자기의 생명으로 붙들지 않는 태도, 곧 ‘주님께로부터 받는 생명에 자신을 여는 상태’를 말합니다.
창2:25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own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분리의 근거가 되지 않았고, 이노센스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AC.164는 그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단락을 통해 창2는 완전히 닫힙니다. own → 주님의 허락 →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의 주입 → 아직 보호된 상태.
이제 창3에서는, 이 이노센스가 어떻게 상실되고, 벌거벗음이 어떻게 수치로 바뀌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마지막 보호막까지 정확히 짚어낸 매우 좋은 마무리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nd not ashamed)는 그들이 순진함(innocent)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own안에 순진함을 주입하셔서, 그것이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는 걸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해설
AC.163은 창2의 마지막 절을 여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나 수치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순진함의 표지’로 제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진함이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own 안에 주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하며, 그대로 두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들의 own이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위에 ‘순진함이라는 보호막’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함은 own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아직 own을 own으로 주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own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163은 앞선 AC.150의 ‘깊은 잠’과도 미묘하게 연결됩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안전지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함이 주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own이 살아나 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파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진함이 상실되는 순간, 벌거벗음은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라 ‘수치’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전환이 다음 장에서 일어납니다.
AC.163은 그래서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단락입니다. own + 순진함 = 아직 허용된 상태, own - 순진함 = 곧 드러날 위기
이제 이어질 AC.164-167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유지되지 못했는지가 조금 더 정밀하게 설명되며, 창2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모든진리와정의의법은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흘러나옵니다.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그리고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합니다.모든진리와정의의법이천적기원들,곧천적인간의생명의질서로부터내려오는것처럼,특별히‘혼인의법’(thelawofmarriages)이그러합니다.지상의모든혼인은‘천적혼인’(celestialmarriage),곧천국의혼인으로부터,그리고그혼인에따라파생되어야합니다.이혼인은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가있는그러한혼인입니다.여기서파생되는‘혼인의법’(lawofmarriages)은한남편과한아내가있어야한다는것입니다.이경우그들은천적혼인을표상하며,천적인간의본이됩니다.이법은태고교회의사람들에게계시되었을뿐아니라그들의속사람에새겨져있었습니다.그러므로그당시에는한남자가오직한아내만을두었고,그들은하나의집을이루었습니다.그러나그들의후손들이속사람이기를그치고겉사람이되었을때에는여러아내를맞이하였습니다.태고교회의사람들은그들의혼인에서천적혼인을표상했기때문에,부부의사랑은그들에게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그러나교회가쇠퇴했을때그들은더이상부부의사랑안에서행복을퍼셉션하지못하고,다수에게서오는쾌락,곧겉사람의즐거움에서행복을퍼셉션했습니다.이것을주님께서는‘마음의완악함’(hardnessofheart)이라하셨으며,이로말미암아그들은모세를통하여여러아내를두는것을허락받았습니다.주님께서친히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orheavenly)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and became external,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but in pleasure from a number,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of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as the Lord himself teaches:
AC.162는 창2:24의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천국이자천국의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마음이완악함으로말미암아’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법’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해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1
이태고교회의후손들은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습니다.그리고그들은겉사람안에서,곧자기들의proprium안에서살기를원했기때문에주님께서는이것을그들에게허락하셨으며,다만영적천적인것을자비롭게그안에스며들게하셨습니다.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이에관하여어떤관념을갖기위해하나의행위를예로들어보겠습니다.어떤행위안에체어리티,곧사랑과신앙이없고,또그사랑과신앙안에주님이계시지않는다면,그행위는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할수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but was still good;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what is spiritual celestial,however,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or how they appear as a one,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that is,love and faith,and in these the Lord,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않았고여전히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천적인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창2:24)
AC.160
‘부모를떠나는것’(leavefatherandmother)은속사람에게서물러나는것을의미합니다.겉사람을잉태하고낳는것은속사람이기때문입니다.‘그의아내와합하는것’(cleaveuntohiswife)은속사람이겉사람안에있게되는것을의미하고,‘한몸이되는것’(beoneflesh)은그둘이거기에서함께있게되는것을의미합니다.이전에는속사람과,속사람으로부터나온겉사람이영이었으나이제는육이되었기때문입니다. 이렇게천적·영적생명이proprium에결합되어,그것들이하나처럼되게되었습니다. To “leavefatherand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to “cleaveuntohis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to “beone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떠나는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사람을잉태하고낳는것은속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아내와합하는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사람이겉사람안에있게되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몸이되는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속사람과,속사람으로부터나온겉사람이영이었으나이제는육이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영적이었지만이제타락하여육적인존재가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천적·영적생명이proprium에결합되어,그것들이하나처럼되게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떠남’, ‘아내와합함’, ‘한몸이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AC.159
그러나천적인간의상태를이해하지않고서는이러한것들이어떠한지를쉽게퍼셉션할수없습니다.천적인간에게서속사람은겉사람과구별되며,참으로너무나뚜렷하게구별되어있어서천적인간은무엇이속사람에게속하고무엇이겉사람에게속하는지,그리고겉사람이속사람을통하여어떻게주님에의해다스려지는지를퍼셉션합니다. 그러나이천적인간의후손들의상태는겉사람에게속한그들의proprium을원한결과너무나달라져,그들은더이상속사람이겉사람과구별된다는것을퍼셉션하지못하고,속사람이겉사람과하나라고생각했습니다.사람이자기의proprium으로기울때에는이러한퍼셉션이생기기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and what to the external,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사람이속사람을통하여주님에의해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것을갖고싶어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자신으로부터사는것처럼보이는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있으면서결합되어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