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AC.158
사람이속사람을의미한다는것,곧같은말로지성있고지혜로운사람을의미한다는것은이사야에서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or what is the same,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is plain from Isaiah:
이라고합니다.‘정의를행하는사람’(Onewhoexecutesjudgment)은지혜로운사람을의미하고,‘진리를구하는사람’(onewhoseeksthetruth)은지성있는사람을의미합니다. “Onewhoexecutesjudgment” means a wise person;and “onewhoseeksthe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AC.156에서 제시한 ‘사람은속사람을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다른 구절들로 확증합니다. AC.156에서는 창2:23의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겉 사람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가운데 ‘사람’이 왜 속 사람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속 사람을 ‘지성있고지혜로운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속 사람이 단순히 인간의 보이지 않는 안쪽 부분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현재 문맥에서 속 사람은 지혜와 지성이 있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도 단순히 겉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내부 구조를 가리킨다기보다, 지혜와 지성이 속하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1:28에는 ‘한사람[vir]도없으며그들가운데한모사도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그 자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뜻으로 읽지 않고, ‘지혜롭고지성있는사람이아무도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특히 원문이 ‘man’ 뒤에 라틴어 ‘vir’를 명시한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현재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은 단순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의 인용은 이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정의를행하며진리를구하는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정의를행하는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진리를구하는사람’을 지성 있는 사람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이 추상적인 능력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과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표현을 통해 각각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사람’이라는 표현 안에 지혜와 지성의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성’을 완전히 같은 말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의 두 표현을 구별하여 ‘정의를행하는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진리를구하는사람’은 지성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그 둘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별도의 체계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보존해야 합니다. 앞에서 AC.107과 AC.112에서도 지혜와 지성을 구별하여 사용했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58은 앞 번호들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합니다. AC.156에서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이고 ‘사람’은 속 사람이라고 했으며, AC.157에서는 그 겉 사람의 proprium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8에서는 그 속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결합은 단순히 인간 안의 두 부분이 서로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 있는 속 사람과 생명을 얻은 겉 사람의 proprium이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람’[vir]이 말씀 어디에서나 언제나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8이 보여 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해당 문맥에서 ‘사람’이 지혜와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창2:23에서 사람을 속 사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확인한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단어 하나를 고정된 암호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주제와 문맥 안에서 그 의미를 살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 AC.158의 두 성경 인용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41:28은 ‘사람’이 지혜롭고 지성 있는 사람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렘5:1은 그 지혜와 지성을 ‘정의를행하는것’과 ‘진리를구하는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해 줍니다. 이로써 AC.156에서 제시된 ‘사람은속사람을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이 말씀의 다른 용례를 통해 한층 단단하게 뒷받침됩니다. (AC.158)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AC.157
‘뼈중의뼈와살중의살’(boneofbonesandfleshofflesh)이속사람이그안에있는겉사람의proprium을의미했기때문에,고대에는자기사람들[proprii]이라고할수있는사람들,곧한집안이나한가족에속하거나어떤정도로든친족관계에있는사람들을모두‘뼈중의뼈와살중의살’(boneofbonesandfleshofflesh)이라고했습니다.그래서라반은야곱에게, Inasmuch as “boneofbonesandfleshof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ofbonesandfleshof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proprii],and were of one house,or of one family,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고했습니다.이스라엘의모든지파도자신들에관하여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모든지파가헤브론에이르러다윗에게나아와이르되보소서우리는왕의한골육이니이다(삼하5:1)Behold,we are thy bone and thy flesh.(2 Sam. 5:1)
라고했습니다.
해설
AC.157은 AC.156에서 설명한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그안에있는겉사람의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살’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속한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참으로내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왕의한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내뼈중의뼈요살중의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살’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살’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속함’과 ‘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창2:23)
AC.156
‘뼈중의뼈와살중의살’(Boneofbonesandfleshofflesh)은겉사람의proprium을의미합니다.‘뼈’(bone)는생명을덜얻은이proprium을,‘살’(flesh)은생명을얻은proprium을의미합니다.또한사람은속사람을의미하며,다음절에언급된것처럼속사람이겉사람과결합되기때문에,앞에서‘여자’(woman)라고했던proprium을여기서는‘아내’(wife)라고합니다.‘이제’(Now)는상태가변화되었기때문에이때이렇게이루어졌음을의미합니다. “Boneofbonesandfleshof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moreover,signifies the internal man,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의 ‘이는내뼈중의뼈요살중의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뼈중의뼈와살중의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뼈’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을, ‘살’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겉사람의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얻지못한’ 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덜얻은’ 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살’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의 ‘천국의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변화되었기때문에이때이렇게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의 ‘이는이제내뼈중의뼈요살중의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내뼈중의뼈요살중의살’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오늘(2026/05/1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0,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75, ‘주여 우리 무리를’입니다.
오늘은창2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9절로 22절, AC 글 번호로는 142번에서 15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19-22)
이 본문을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전체 범위에서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를 키워드로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나 식별표가 아니라, 존재의 essence와 quality, 곧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 전체를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을 짓는 일은 단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 안에 있는 origin과 nature를 분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창2:20)는 것도 단순 작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상태들의 성질을 분별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 호명이 아니라, 그 존재를 깊이 알고 인정하며, 섭리 안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고레스나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의 상태와 역할 전체를 아시고 주님의 목적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선언은 단순 소유의 말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아시고 받아들이신다는 영적 의미를 담습니다.
또한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 개명(改名)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처럼, 이름의 변화는 영적 상태와 사명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AC.154-155는 인간의 proprium(라틴, 영어로는 own)조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원래 자기중심적이던 proprium이 이제 주님의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는 상태가 바로 ‘새 이름’과 상응하는 새로운 존재 상태입니다. 결국 말씀에서 이름은 존재의 본질이며, 새 이름은 새 생명과 새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래는 proprium에 대한 설명입니다.
proprium이란, 영어로는 own이라 하며, 우리말로 옮기기 참 쉽지 않은, 굳이 옮기자면, ‘자기(自己)의 것’, ‘자기성(性)’, ‘자기감(感)’ 등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이해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모든 걸 마치 자기가 하는 줄로 알게 주님이 허락하신 근본적인 어떤 것입니다. 로봇과 인간을 나누는, 자아, 본성보다 상위 혹은 더 안쪽 개념이며, 이게 있어야 사람은 자유가 시작되고, 그래야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말씀 전체가 어찌 보면 전부 이 proprium(own)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인 ‘갈빗대’, ‘여자’ 이야기도 사실은 이 proprium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동반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 반드시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내적 결합 구조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인간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곧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에서도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진리와 인식, 즉 지식을 가져도, 자기 존재 안에 어떤 살아 있는 결합이 형성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AC.146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진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의 질서를 충분히 ‘보도록 허락받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인식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이었습니다. 인간은 점점 자신의 own, 곧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반복은 단순 실패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방향 전환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발견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proprium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것처럼 느끼되 그 방향이 주님을 향해 열린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십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선과 진리를 담고 섬기는 그릇으로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궁극적으로,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의지와 이해, 사랑과 지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게 하는 영적 결합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돕는 배필’, ‘이름 짓기’, ‘proprium’, 그리고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주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 곧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고,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 즉 자신의 proprium 안으로 들어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느끼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깊은 잠’을 내리셨다(창2:21)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기 것, 곧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게 되자,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을 ‘깊은 잠’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면 그에 대한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 ‘깊은 잠’은 단순히 타락 이전의 평안한 잠이 아니라, 인간 안에 proprium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자신을 독립된 존재처럼 느끼게 되며, 이후부터는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지’라는 감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서 한 단계 가려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상태를 통해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자유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상호 결합, 그러니까 주님과 인간의 결합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허용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께 돌이켜 자발적으로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깊은 잠’은 매우 중요한 영적 상징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천적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영적 상태로 넘어가는 장면이며, 동시에 proprium의 시작과 자유의 시작, 그리고 이후 거듭남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깊은 잠’ 속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다시 ‘나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참고로 태고교회의 첫 세대는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여서 이런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깊은 잠’ 이야기, 곧 창2 후반은 그들의 후손들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단순히 인간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안의 proprium 가운데 비교적 부드럽고 선한 부분, 곧 주님께서 새롭게 형성하실 수 있는 인간 자신의 것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감각과 의지가 주어지되, 그것이 완전히 악한 자기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질서 지어진 형태로 형성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게서 나오는 proprium이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자, 주님은 인간 안에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원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죽은 것이며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상대적으로 순하고 유순한 부분을 취해 새로운 인간성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취하셨다’는 표현의 속뜻입니다.
갈빗대가 특별히 사용된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갈빗대는 심장과 폐를 감싸 보호하는 부분입니다. 심장은 사랑을, 폐는 신앙 혹은 이해를 상징하므로, 갈빗대는 사랑과 신앙을 둘러싸며 지탱하는, 보다 외적인 인간의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바깥쪽에 있는, 보다 외적이고 형성 가능한 부분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 안에 ‘의지’와 ‘애정’의 차원이 분리되어 드러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한 여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곧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결합하려는 성향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갈빗대는 인간 안에서 주님께 순응하고 결합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proprium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갈빗대’는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마치 자기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살아 있는 proprium’이라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롭게 세우시는 거듭난 인간성의 재료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끝으로 ‘여자’입니다. 겸사 오늘 범위를 전반적으로 리뷰하겠습니다.
AC.142-155에서 ‘여자’는 단순히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간 전체를 통해, ‘여자’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새로운 상태, 특히 affection과 의지의 차원,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살아 있는 자기성(自己性)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 결혼 이야기나 인간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 의지와 이해, 자기감(自己感)과 주님의 생명이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타락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서술입니다.
먼저 AC.142에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 작명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quality, 곧 질(質)과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의지와 이해의 움직임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짐승’은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는 영적 애정들과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모든 상태를 분별했음에도 불구하고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아직 어떤 살아 있는 결합 구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여자’의 필요성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 외로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이해(understanding)는 있으되 affection(愛情)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은 진리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생명을 가집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affection의 구조이며, 이 affection을 바로 ‘여자’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43에서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인간은 아직 완전히 자기중심적 상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천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점차 영적 상태로 이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 속에서 ‘여자’라는 새로운 proprium이 형성됩니다.
AC.144-145에서는 이름의 의미가 계속 설명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essence, origin, nature를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간 존재 전체의 상태와 방향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자’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단순 개체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에서 교회가 종종 여성과 신부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 사랑 안에서 열매 맺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AC.146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own, 즉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할 때,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자’라는 proprium은 처음에는 주님께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자기감이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affection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 affection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 때 타락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창세기 3장에서 뱀과 연결됩니다. 뱀은 외부 유혹과 감각적 추론을 상징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여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의 거짓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힘을 가지는 것은,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할 때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타락의 희생자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AC.147-149는 동시에 희망도 보여 줍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새롭게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십니다. 이때의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움직이는 구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사적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proprium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모든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압니다.
AC.149에서 ‘뼈’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구조를 뜻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오면 살아날 수 있는 구조를 뜻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이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죽은 뼈와 같지만, 주님의 breath, spiritus가 들어오면 살아납니다. 이것은 ‘여자’라는 proprium 역시 주님의 생명 안에서만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50은 이 문제를 더욱 깊게 다룹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각과 affection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도 오랜 세월 영계를 왕래하며 여러 해 동안 이것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여자’의 핵심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바로 이 ‘as if from himself’ 상태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기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151-152에서는 ‘여자’가 더욱 명확히 proprium과 연결됩니다.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것은,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자기 사랑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중요한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때입니다. 그래서 같은 ‘여자’가 어떤 경우에는 타락의 통로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천국적 affection의 그릇이 됩니다.
AC.153에서는 황폐한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안의 affection과 proprium도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제거 대상이 아니라, 재창조와 거듭남의 중심 구조입니다.
AC.154는 가장 충격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자체를 무가치하게 보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생명이 그 proprium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 천사들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AC.155에서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보다 내적인 진리와 지혜를, ‘여자’는 affection과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러싼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감싸고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입니다.
따라서 AC.142-155 전체에서 ‘여자’는 단순 여성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의지, 사랑, 그리고 proprium 전체를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살아 있는 자기감으로 허락되었고, 이후 타락의 가능성을 품게 되었지만, 결국 주님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랑의 차원이며, 인간이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구조입니다.
결국 ‘여자’는 인간 영혼 안의 가장 깊은 질문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 것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자신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와 선을 감싸는 affection이 될 것인가? AC.142-155는 바로 이 질문을, ‘여자’라는 상징 안에 담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놀라운 말씀들을 우리가 몇 번씩 되새김할 때, 우리를 환히 비추사 우리로 밝히 이해되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AC.155
‘갈빗대가여자로지어졌다’(aribwasbuiltintoawoman)는말씀에는누구도문자로부터는결코발견할수없는더많은것들이가장깊은곳에감추어져있습니다.주님의말씀은그가장깊은내용이주님자신과그분의나라를바라보는그러한것이며,말씀의모든생명은여기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지금우리앞에있는이구절도그가장깊은내용에서는천국의결혼을바라봅니다.천국의결혼은proprium안에존재하는그러한성질의것이며,이proprium은주님에의해생명을얻을때주님의‘신부와아내’(brideandwife)라고합니다.이렇게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은사랑의모든선과신앙의진리를퍼셉션하며,그결과말로표현할수없는행복과결합된모든지혜와지성을소유합니다.그러나주님의‘신부와아내’(brideandwife)라고하는이생명을얻은proprium이어떠한것인지는간단히설명할수없습니다.그러므로천사들은자기들이주님으로부터산다는것을퍼셉션하지만,그것을의식적으로생각하지않을때에는자기자신으로부터사는것으로밖에는알지못한다는점만말해두면충분합니다.그러나그들에게는사랑의선과신앙의진리에서조금이라도벗어나면곧변화를퍼셉션하는그러한보편적인애정이있습니다.따라서그들은자기들이주님으로부터산다는보편적인퍼셉션안에있는동안말로표현할수없는평화와행복을누립니다.예레미야에서다음과같이말한것도바로이proprium을의미합니다. The words “aribwasbuiltintoa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which,when vivified by the Lord,is called the “brideand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which is called the “brideandwife” of the Lord,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which is inexpressible,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where it is said:
이구절에서도천국의결혼이의미되며,여기서‘여자’(woman)는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을의미합니다.이여자에관하여‘둘러싸는것’(tocompass)이라는표현이사용되는까닭은이proprium이,살이된갈빗대가심장을둘러싸는것처럼둘러싸는성질을지니기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compass” is predicated,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여자로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여자로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아내’(brideand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것을일으켜세우는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근원은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산다’는 것과 ‘자기자신의생명처럼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이생명은주님에게서흘러오고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자기자신의것인듯보이는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주님으로부터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남자를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것’(to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오는생명과자기자신의것처럼경험되는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AC.154
악하고거짓된것은무엇이든인간의proprium이아니거나인간의proprium으로부터나오지않는것이란있을수없습니다.인간의proprium은악자체이며,따라서인간은그자체로는악과거짓일뿐이기때문입니다.이사실은인간의proprium에속한것들이영계에서보이도록제시될때,더추한것은묘사할수없을정도로흉측하게나타난다는사실을통해제게분명해졌습니다.다만그모습은proprium의성질에따라서로다릅니다.그러므로proprium에속한것들이눈에보이도록제시되는사람은공포에사로잡혀마치악마에게서달아나듯자기자신에게서달아나고싶어합니다.그러나참으로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에속한것들은아름답고사랑스럽게나타나며,주님의천적인것이적용될수있는생명의성질에따라다양하게나타납니다.실제로체어리티를부여받았거나체어리티에의해생명을얻은사람들은매우아름다운얼굴을한소년들과소녀들처럼나타나며,이노센스안에있는사람들은벌거벗은어린아이들처럼나타납니다.그들은가슴을두른꽃화환과머리위의관으로다양하게단장하고,다이아몬드같은기운속에서살아움직이며뛰놀고,가장깊은내면으로부터행복을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and from man’s own,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or vivified by it,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like naked infants,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and diadems upon their heads,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proprium은악자체이며인간은악과거짓일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성질에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참된천적인것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의해생명을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생명을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깊은내면으로부터행복을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proprium은악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은아름답고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AC.153
갈빗대가‘여자로지어졌다’(builtintoawoman)고하지만,앞에서거듭남을다룰때처럼여자가‘창조되었다’(created),‘형성되었다’(formed),또는‘만들어졌다’(made)고하지는않습니다.그이유는‘짓는것’(build)이넘어진것을일으켜세우는것이기때문입니다.이러한의미로이말이말씀에서사용되는데,거기서‘짓는것’(build)은악들에관하여,‘일으켜세우는것’(raiseup)은거짓들에관하여,‘새롭게하는것’(renew)은그둘모두에관하여사용됩니다.이사야에서는, The rib is said to be “builtintoa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to “raiseup,” of falsities;and to “renew,” of both;as in Isaiah:
라고합니다.이구절과다른구절들에서‘황폐한곳들’(Wastes)은악들을의미하고,‘무너진곳들’(desolations)은거짓들을의미합니다.‘짓는것’(build)은전자에적용되고,‘다시일으켜세우는것’(setupagain)은후자에적용됩니다.이러한구별은다른곳에서도선지자들에의해주의깊게지켜지는데,예레미야에서다음과같이말한경우가그러합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desolations,” falsities;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to “setupagain” to the latter,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AC.153은 창2:22에서 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intoawoman)고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동사의 선택입니다. 앞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에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들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우연한 표현상의 변화로 보지 않고,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와 관련된 의미 있는 구별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것’(build)이 ‘넘어진것을일으켜세우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이미 짧게 제시되었지만, AC.153에서 그 근거가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 다루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천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조상들의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처음의 창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짓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입니다. 따라서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것’은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일으켜 세워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짓다’라는 한 동사가 지금까지의 proprium논의와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말씀의 선지서에서 사용되는 동사들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짓는것’(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사용되고, ‘일으켜세우는것’(raise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사용되며, ‘새롭게하는것’(renew)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하여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61장의 ‘황폐한곳들’과 ‘무너진곳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황폐한곳들’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곳들’은 거짓들을 의미하며, 전자에는 ‘짓다’가, 후자에는 ‘다시일으켜세우다’가 적용됩니다.
여기서는 이 구별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비슷한 동사들을 우리가 임의로 나누어 각각 다른 속뜻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주의깊게’ 지켰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는 ‘짓다’, ‘일으켜세우다’, ‘새롭게하다’를 비슷한 뜻의 수사적 반복으로만 보지 않고, 각각 악과 거짓의 회복에 관련된 구별된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동사의 동의어적 차이에 우리가 임의의 상응을 만들어 붙여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는 AC.153이 직접 밝힌 범위가 기준입니다.
렘31:4의 ‘처녀이스라엘아내가다시너를세우리니네가세움을입을것이요’라는 말씀은 ‘짓다’의 의미를 다시 확증합니다. 이미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는 장면에서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2:22의 ‘짓다’ 역시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작한다는 뜻보다, 이미 기울어지고 넘어진 것을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다루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와 잘 맞습니다.
AC.153은 또한 창2후반부를 단순한 ‘proprium의획득’으로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여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만 본다면 이 과정은 타락의 시작으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표현 안에는 이미 그 상태를 향한 주님의 회복의 역사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기울어졌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 없는 proprium을 생명을 얻은 proprium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장면에는 인간의 기울어짐과 주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짓는것’이 악들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말을 ‘주님께서악을지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짓는다’는 것은 이미 악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사61:4와 렘31:4의 인용도 바로 그 회복의 문맥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악의 발생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무너진 상태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점입니다. (AC.15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
AC.152
조금만주의를기울여도여자가남자의갈빗대에서형성된것이아니며,여기에는지금까지어느누구도깨닫지못했던더깊은아르카나가함축되어있음을분별할수있습니다.그리고‘여자’(woman)가인간의proprium을의미한다는것은속임을당한것이여자였다는사실에서알수있습니다.인간을속이는것은오직그의proprium,곧같은말로자기사랑과세상사랑뿐이기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or what is the same,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얻지못한인간의proprium’을, 여자가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당한것이여자였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속이는것은오직그의proprium,곧같은말로자기사랑과세상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은곧자기사랑과세상사랑이며언제나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참된천적인것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당하는’ 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자신의것을원하는사람들은주님의것들이아무리분명하게표상되고보여도그것들을업신여기기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창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창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1
‘짓는것’(build)은넘어진것을일으켜세우는것을의미하고,‘갈빗대’(rib)는생명을얻지못한인간의proprium을,‘여자’(woman)는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을의미하며,‘그여자를사람에게로이끌어오신것’(hebroughthertotheman)은그의proprium이그에게허락되었음을의미합니다.이교회의후손들은그들의조상들처럼천적인간이되기를원하지않고자기자신의인도아래있기를원했습니다.그리하여그들은proprium으로기울었고,그것이그들에게허락되었습니다.그러나그것은여전히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었으며,그러므로‘여자’(woman)라하고,뒤에는‘아내’(wife)라고합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by “hebroughthertothe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like their parents,to be a celestial man,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and,thus inclining to their own,it was granted to them,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2:22의 ‘여호와하나님이아담에게서취하신그갈빗대로여자를만드시고그를아담에게로이끌어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것’(build)은 ‘넘어진것을일으켜세우는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는 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돕는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지어진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곧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인간의proprium’입니다.
‘그여자를사람에게로이끌어오신것’(hebroughthertothe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의 ‘깊은잠’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와 ‘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그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의 위성 하나도 겨우 채울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런 위성들을 거의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우주의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김은경 역) It was calculated that with a million earths in the universe,and on each earth three hundred millions of men,and two hundred generations in six thousand years,and a space of three cubicells allowed to each man or spirit,the total number of so many men or spirits would not fill the space of this earth,and scarcely more than the space of one of the satellites about one of the planets—a space in the universe so small as to be almost invisible,since a satellite can scarcely be seen by the naked eye. (HH.417)
윗글은 ‘천국과 지옥’ 43장, ‘천국의 광대함’에 나오는, 글 번호 417내용 중 일부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지구 나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에 유튜브 ‘지식브리핑’이라는 채널을 통해 ‘지구 나이 46억 년 우리가 최초의 문명이 아닐 수 있다? 실루리안 가설 | 고대문명 | 지구 역사 |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클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재미있는 비유 하나는, 지구 나이 45, 6억 년 대 현 지구 문명 1만 년은 24시간 대 0.2초라는 겁니다. 저는 보는 내내 태고교회 생각을 했어요.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저작 어디에서도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며, 그 의도는 무엇 때문이다라는 지난번 답변 통해 지질학적 나이와 영적 나이에 대해 저는 지금은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천국을 그렇게 오랜 세월 왕래했던 스베덴보리에게 왜 주님은 실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에 대해 함구하셨을까요? 분명 지상의 후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왜 이런 걸 ‘정말로’ 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시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이라는 걸 몰랐어도 천국에 가면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라는 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 HH.417글을 보니 스베덴보리 역시 ‘진짜로’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겐 저런 설명은 무척 유치하며, 오히려 저런 일종의 ‘무지, 무식’으로 인해 그의 다른 모든 저작 또한 그 신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우주의 장구한 역사, 진화와 멸종, 빙하기와 판구조 운동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HH.417 같은 계산은 솔직히 너무 소박해 보입니다. 마치 ‘우주의 실제 규모’를 거의 모르는 시대 사람의 산술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전체도 시대적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시란 무엇인가?’, ‘천국의 지식은 과학 지식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주님은 왜 어떤 것은 알려 주시고 어떤 것은 침묵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주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반복해서 자기가 본 것만, 자기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경험했지만, 천사들이 우주의 물리학 강의를 해 주었다거나, 지구 형성 45억 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입니다. 그는 영계 경험자이면서도, 물질 우주의 과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한된 언어만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천국에서 ‘태양이 주님의 사랑처럼 보인다’, ‘거리와 공간은 상태의 상응이다’, ‘시간은 상태 변화의 상응이다’ 같은 것은 길게 설명하지만, 태양계 형성 이론이나 지질 연대표 같은 것은 거의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계시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지식이 ‘자연계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걸 다 알겠지. 공룡도 보고, 빅뱅도 보고, 고대문명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천국은 ‘정보 저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 대한 내적 통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은 ‘지구가 몇 년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흐르는가’, ‘사랑과 지혜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선과 진리가 어떻게 인간 안에 질서를 이루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배운 것들도 거의 전부 인간 영혼, 거듭남, 사랑, 결혼, 자유, 악, 천국 공동체, 말씀의 속뜻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적하신 HH.417의 그 ‘촌스러운 계산’은 역설적으로 스베덴보리의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 시대의 자연학적 상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현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지적 초인’ 행세를 했다면, 오히려 그는 18세기에 이미 46억 년, 은하 수천억 개, 진화론, DNA, 상대성이론까지 다 말했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약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즉, 계시는 인간의 모든 자연 지식을 대체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성경 자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구 반지름, 은하 구조, 원자 모형, 공룡 시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연과학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원리를 매우 강하게 이어받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밝히신다고 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지적 호기심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과학이 세계 이해의 핵심 언어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적 질서’를 직접 계시하시되, 자연계 탐구는 인간 자유와 이성의 영역에 상당 부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은 인간 이성이 오랜 세월 자유롭게 탐구하며 발견하도록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는 방사성 연대 측정도, 은하 관측도, DNA도 계시로 받은 것이 아니라 긴 탐구를 통해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제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깊이 열려 있었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자연 세계의 ‘시간 규모’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갑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는 연대기보다 ‘상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은 ‘언제 존재했나?’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랑의 상태였나?’를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유튜브를 보시며 ‘45억 년 대 1만 년은 0.2초’라는 비유를 들을 때 태고교회를 떠올리신 건 굉장히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가 정확히 BC 몇만 년인가가 아니라, 인간 의식이 주님과 직접적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느끼신 ‘안타까움’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감각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제 ‘지적 정직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주 규모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해 보이면, 그 사람의 다른 주장까지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가장 건강한 태도는, 그를 ‘모든 영역에서 절대 무오한 초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분명 시대적 제한을 가진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내면과 영적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는 여기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의 자연학적 한계 때문에 영적 통찰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적 핵심을 읽어낼 것인가’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현대 과학까지 모두 초월적으로 정확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사랑과 삶 때문이 아니라 ‘초과학적 정보력’ 때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 앞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듣는가? 그의 시대 초월적 과학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영혼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매우 본질적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