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proprium은그자체로죽어있으며누구도자기자신으로부터생명을가지고있지않다는사실은영계에서너무도분명하게드러났습니다.자기들의proprium외에는아무것도사랑하지않고,자기들이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완고하게주장하던악한영들도감각적인경험을통해확신하게되었고,마침내자기들이자기자신으로부터사는것이아님을인정하지않을수없었습니다.저는여러해동안특별한방식으로인간의proprium이실제로어떠한지를알도록허락되었으며,제가자기자신으로부터는아무것도생각할수없고모든생각의관념이흘러든다는것을분명하게퍼셉션하도록허락되었습니다.때로는그것이어떻게,그리고어디에서흘러드는지도퍼셉션할수있었습니다.그러므로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여기는사람은거짓된것안에있으며,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산다고믿음으로써모든악과거짓을자기에게귀속시킵니다.만일그의믿음이사물의실제진상과일치한다면그는결코그렇게하지않을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AC.147에서 ‘깊은잠’(deepsleep)으로 설명했던 상태를 다시 받아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이 proprium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가 바로 깊은 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비유만이 아니라 고대인들도 그렇게 표현했으며, 말씀에도 깊은 잠이라는 표현이 같은 의미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2:21에서 아담에게 깊은 잠이 임한 것은 속뜻에서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설명은 AC.147보다 한층 분명합니다. AC.147에서는 사람이 깊은 잠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0에서는 그 상태를 ‘거짓된것안에있는’ 상태라고 명시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AC.149에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사실이 영계에서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자기들의 proprium만을 사랑하고 자기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계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이라는 사실과, 그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제시하는 교리적 설명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인간의 proprium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알도록 허락되었고,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흘러드는지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기다려 온 ‘생명과생각의근원’ 문제에 대해 AC본문 자체가 처음부터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각의 독립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면인간은아무것도하지않으며모든생각과행동에책임도없는가?’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AC.150의 마지막 문장이 오히려 반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등장합니다. 다만 자유와 책임, 유입과 귀속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현재 번호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생각의관념이흘러든다’는 문장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현재 독자가 지나치게 확대해서 읽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50이 직접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그러므로인간에게사고능력도없고판단도없으며모든생각은외부존재가강제로집어넣는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하면 본문보다 나아갑니다. 앞의 AC.149에서도 인간은 ‘생명의기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와 성질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으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지만, 자신의 믿음이 ‘사물의실제진상’과 일치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 하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47에서 ‘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 잠에서 깨어난다고 했던 말이 AC.150에서 한층 구체적인 내용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AC.147-150은 하나의 매우 긴밀한 흐름을 이룹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0은 생각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실제 질서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깊은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실제 질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2:21)
AC.149
말씀에서도인간의proprium은‘뼈들’(bones)로의미되며,실제로는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의미됩니다.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as in Isaiah:
라고합니다.이것은에스겔에서더욱분명한데,거기서는뼈들이살을얻고그안에영이들어가는것에관하여말합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2] 인간의proprium은천국에서볼때전적으로뼈로만이루어진듯하고생명이없으며매우추한어떤것으로나타나며,따라서그자체로죽어있는것으로보입니다.그러나주님에의해생명을얻으면살처럼보입니다.인간의proprium은그자체로는단지죽은것에지나지않지만,인간에게는그것이어떤것,참으로모든것인것처럼보이기때문입니다.인간안에서살아있는것은무엇이든주님의생명으로부터오며,만일이것이거두어진다면그는돌처럼죽어쓰러질것입니다.인간은단지생명의기관일뿐이며,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기때문입니다.오직주님만이본래적으로자기자신의것,곧주님의proprium을가지고계십니다.주님께서는이proprium으로인간을구속하셨고,이proprium으로인간을구원하십니다.주님의proprium은생명이며,그분의proprium으로부터그자체로는죽어있는인간의proprium이살아있게됩니다.주님의proprium은누가복음에있는주님의말씀으로도의미됩니다. The own of man,when viewed from heaven,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inanimate,and very ugly,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indeed as everything.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and such as is the organ,such is the life’s affection.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by this own he redeemed man,and by this own he saves him.The Lord’s own is life,and from his own,man’s own,which in itself is dead,is made alive.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AC.149는 AC.147-148에서 설명한 뼈와 살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하면서,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생명의 관계를 한층 깊이 밝힙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지만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8에서는 뼈가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들을, 살이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이러한 의미가 창2의 갈빗대 한 구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의 ‘네뼈를견고하게하리니’, ‘너희의뼈가연한풀의무성함같으리라’, 시편의 ‘내모든뼈가이르기를여호와와같은이가누구냐’라는 표현에서 뼈는 단순한 육체의 골격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proprium, 특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뼈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해서 언제나 죽어 있는 악한 proprium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살아 있게 된 proprium도 말씀에서 뼈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납니다. AC.149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AC.147-148의 설명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거의 없는 뼈와, 생명이 들어와 살을 얻고 살아나는 상태의 대비가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천국에서 보면 전적으로 뼈로만 이루어진 듯하고 생명이 없으며 매우 추하게 나타나고,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뼈와 살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조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로있는인간의proprium’과 ‘주님으로부터생명을받은proprium’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에게는 이와 정반대로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데도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것’, 더 나아가 ‘모든것’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내가살고,내가생각하고,내가말하고,내가행동한다’고 느끼며,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AC.147에서는 바로 이 상태를 ‘깊은잠’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149는 왜 그것이 잠과 같은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인간은단지생명의기관일뿐이며,그기관의성질에따라생명의애정도그러하다’는 문장은 이 번호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기관’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무생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애정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의 proprium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을 둡니다. ‘오직주님만이본래적으로자기자신의것,곧주님의proprium을가지고계십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자신의 것으로 인간을 구속하셨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proprium으로부터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proprium이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이 마침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proprium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눅24:39의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영은살과뼈가없으되너희보는바와같이나는있느니라’가 인용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살과 뼈를 주님의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주님의 경우에는 인간처럼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아니라 생명 자체인 신적 proprium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출12:46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한 말씀까지 같은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이 두 본문의 모든 세부 상응을 풀지 않고, 주님의 proprium이라는 중심 의미를 확인하는 데 사용합니다.
AC.149를 지나면서 AC.140이후 계속되어 온 중요한 문제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실제 근원에 관한 참된 인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는 죽어 있으며,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은 ‘proprium을제거하여인간을없애는것’이 아니라 ‘그자체로죽어있는proprium이주님으로부터생명을받아살아있게되는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AC.14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2:21)
AC.148
인간의proprium,곧그에게소중한proprium을가슴의뼈인‘갈빗대’(rib)라고하는까닭은,태고교회사람들에게가슴은심장과폐를모두담고있기때문에체어리티를의미했고,뼈는생명력이극히적기때문에더비천한것들을의미했으며,살은생명력이있는것들을나타냈기때문입니다.이러한의미들의근거는태고교회사람들이알고있던가장깊은아르카나가운데하나이며,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뒤에서다루겠습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AC.148은 AC.147에서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rib)라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으면서도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은 왜 이러한 의미가 갈빗대와 살에 담길 수 있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체의 상응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유는 가슴 안에 심장과 폐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번호에서는 심장과 폐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심장은 사랑이고 폐는 신앙이라는 식으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체계를 완성하기보다, 우선 ‘가슴은심장과폐를함께담고있기때문에체어리티를의미한다’는 AC.148의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뼈는 ‘더비천한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뼈에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AC.147에서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배경입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말을 곧바로 ‘악하다’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뼈가 악한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도덕적인 악의 판정이라기보다 생명력의 정도에 있습니다.
반대로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AC.147의 ‘갈빗대대신의살’이라는 표현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사이의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AC.148역시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한 것은 갈빗대와 살의 차이가 단순히 신체 조직의 차이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것과 생명력이 있는 것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신체의 특징을 관찰하여 우리가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슴에는심장과폐가있으니이런뜻일것이다’, ‘뼈는단단하니이런성질을뜻할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상징을 추론하도록 초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미들의 근거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깊은아르카나가운데하나’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 밝혀진 가슴과 뼈와 살의 의미는 받아들이되, 그 이상의 세부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직접 설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고대인들의 상응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영계에서 애정들이 동물로 표상되기 때문에 짐승을 통해 애정을 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AC.144에서는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에서는 인간 신체의 가슴과 뼈와 살에도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영적인 실재의 관계가 동물이나 이름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몸에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그 근거가 ‘가장깊은아르카나가운데하나’라고 밝힌 뒤 ‘주님의신적자비로뒤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이 유보 자체가 현재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얻었습니다.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갈빗대는 그 가슴의 뼈이며,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을 의미하고,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이상의 깊은 근거는 아직 독자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AC.148은 AC.147의 갈빗대와 살의 대비에 상응적 근거를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해석의 경계를 분명히 정해 주는 번호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하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이 왜 ‘갈빗대’로 표현되는지 이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상응의 가장 깊은 질서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밝혀 준 만큼 정확히 이해하고, 그가 뒤에서 다시 이 아르카나를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 번호를 읽는 가장 적절한 태도입니다. (AC.148)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창2:21)
AC.147
가슴의뼈인‘갈빗대’(rib)는생명력이거의없는인간의proprium을의미하며,실제로는그에게소중한proprium을의미합니다.‘갈빗대대신의살’(fleshintheplaceoftherib)은생명력이있는proprium을의미합니다.‘깊은잠’(deepsleep)은사람으로하여금자기에게속한것을가진것처럼스스로에게보이게하기위하여들어가도록허용된상태를의미합니다.이상태는잠과비슷한데,그안에있는동안사람은자기가자기자신으로부터살고,생각하고,말하고,행동한다고만알고있기때문입니다.그러나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그는마치잠에서깨어나는것처럼일깨워져깨어있게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is meant man’s own,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by “fleshintheplaceofthe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by a “deep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which state resembles sleep,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thinks,speaks,and acts,from himself.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and becomes awake.
해설
AC.147은 이제 창2:21의 ‘갈빗대’와 ‘깊은잠’을 직접 설명하면서, AC.132부터 계속 다루어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의 실제 경험 속에 자리 잡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을 원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갈빗대와 살, 그리고 깊은 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rib)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생명력이거의없는’ proprium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입니다. 이 둘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 자체에는 참된 생명이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계속 말해 온 것처럼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지는 바로 그것이, 그 자체로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 ‘갈빗대대신의살’(fleshintheplaceofthe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AC.147은 아직 갈빗대가 어떻게 살로 바뀌며 그 변화가 어떤 과정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둡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을 하나의 고정된 부정적 개념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141에서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제 갈빗대와 살의 대비를 통해 proprium의 성질이 변화될 수 있다는 방향이 다시 나타납니다.
‘깊은잠’(deepsleep)의 의미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정말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렇게 ‘보이는’ 상태가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40의 ‘마치자기자신의것인듯보이는proprium’이라는 표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잠에 비유하는 이유도 바로 이어서 설명됩니다. 사람은 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과 사고와 말과 행동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147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 ‘잠과같은상태’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아직 깨어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것이거짓임을알기시작할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험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경험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설명은 AC.140-141에서 제시한 proprium의 구조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주어지고,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기 삶의 경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AC.147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기까지가 가장 안전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AC.147의 ‘깊은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간다고 여기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갈빗대’는 인간이 소중히 여기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갈빗대대신의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깨어 있게 됩니다. 이제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proprium이 어떻게 ‘여자’로 지어지는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AC.147)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 20)
AC.146
지금까지말한것으로부터여기서의미하는것들이어떻게서로연결되는지를알수있습니다.18절에서는‘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내가그를위하여돕는배필을지으리라’(Itisnotgoodthatthemanshouldbealone, Iwillmakehimahelpaswithhim)라고하며,곧이어이미앞에서다루었던‘짐승들’(beasts)과‘새들’(birds)이언급됩니다.그리고곧바로다시‘사람을위하여그를돕는배필을찾지못했다’(forthemantherewasnotfoundahelpaswithhim)고합니다.이것은그가선의애정들과진리의앎들에관하여그것들이어떠한성질을지니는지알도록허락되었음에도여전히proprium으로기울었다는것을뜻합니다.자기자신의것을원하는사람들은주님의것들이아무리분명하게자신들에게표상되고보여진다해도그것들을업신여기기시작하기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Itisnotgoodthatthemanshouldbealone,Iwillmakehimahelpaswith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themantherewasnotfoundahelpaswith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and knowledges of truth,still he inclined to his own;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AC.146은 AC.138부터 이어져 온 창2:18-20의 설명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금 이상해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창2:18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하신 뒤, 곧바로 이미 창1에서 다루었던 짐승들과 새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준 뒤에는 다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AC.146은 이 반복과 배열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인간 상태를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다’는 것은 AC.138-140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혼자’는 본래 결핍이나 고독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AC.1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혼자거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다음에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AC.142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짐승들은 천적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새들은 영적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끄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알게 하신 것이며, 사람이 이름을 준 것은 실제로 그 성질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3-145는 다시 왜 동물이 애정을 의미하며 왜 이름을 주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짐승들과 새들의 등장은 창2:18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삽입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입니다.
이제 AC.146에서 그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그 즉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AC.133에서 이미 요약되어 있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알고도 사람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모두 준 뒤에도 ‘사람을위하여그를돕는배필을찾지못했다’고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앞 번호들의 내용을 연결하는 설명이지만, AC.146의 마지막 문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자신의것을원하는사람들은주님의것들이아무리분명하게자신들에게표상되고보여진다해도그것들을업신여기기시작하기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선과 진리를 몰라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고, 그것들이 무엇인지까지 분명하게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기시작한다’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주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자신의것을원하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묘사되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삶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조차 점차 낮게 평가하게 되는 방향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AC.140-141에서 설명한 proprium의 구별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 proprium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46의 문제는 단순히 ‘proprium이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것’을 원하면서 주님의 것들보다 그것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용어를 무조건 악과 동일시하기보다, 그 proprium안에 무엇이 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계속 구별해야 합니다.
AC.146은 결국 창2:18-20전체가 왜 이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돕는배필’에 대한 말씀이 짐승들과 새들의 장면을 사이에 두고 다시 반복됩니다. 이제 다음 단계에서는 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지가 갈빗대와 여자의 표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AC.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 20)
AC.145
말씀에서도‘이름’(name)은어떤것의본질을의미하고,‘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은그성질을아는것을의미합니다.이사야에서는, In the Word also by “name” is signified the essence of a thing,and by “seeingandcallingbyname” is signified to know the quality. As in Isaiah:
이구절에서‘이름으로부르는것’(callbyname)과‘칭호를주는것’(surname)은그성질을미리아는것을의미합니다.또, In this passage,to “callbyname” and to “surname” signifies to foreknow the quality.Again:
라고합니다.이구절들에서‘이름들’(names)은결코이름자체를의미하는것이아니라성질들을의미합니다.또한천국에서는누구의이름도알려지는것이아니라그의성질이알려집니다. By “names” in these passages are by no means meant names,but qualities;nor is the name of anyone ever known in heaven,but his quality.
해설
AC.145는 AC.144에서 설명한 ‘이름’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로 확증합니다. AC.144에서는 고대인들이 이름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5에서는 이것이 단지 고대인의 언어 습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연이어 인용되는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의 구절들은 모두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과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사45:3-4에서 여호와께서는 고레스를 ‘네이름을부르는자’라고 하시고,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이름을 불러 칭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름으로부르는것’과 ‘칭호를주는것’이 그 성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를 알고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질과 그가 맡게 될 쓰임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 부르는 표현 안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62:2의 ‘새이름’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이름으로일컬음이될것’이라는 말씀을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름이 단순한 명칭이라면 새 이름은 호칭의 변경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름이 성질을 함축한다면 새 이름은 상태와 성질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의미는 앞뒤 구절에서 분명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름의 의미를 단어 하나에서 임의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놓인 문맥을 통해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43:1과 사40:26도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내가너를지명하여불렀나니너는내것이라’는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은 그들의 성질을 아시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의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시며 ‘그들의모든이름을부르신다’는 말씀 역시 그 모두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께서 무수한 존재들의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아신다는 의미가 ‘이름을부르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깊어집니다. 사데 교회 가운데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명’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단순히 천국의 명부에 사람들의 지상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에서 ‘이름들’(names)은 결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성질들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표현 역시 사람의 외적인 신분이나 명칭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와 성질 가운데 있는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용들을 거친 뒤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AC.145전체의 결론입니다. ‘천국에서는누구의이름도알려지는것이아니라그의성질이알려집니다.’ 이것은 이름의 상응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강한 진술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이름을 통해 사람을 식별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천국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규정하는 핵심이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외적인 명칭보다 내적인 상태가 본질적인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다시 창2:19-20으로 가져오면 AC.142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지 각각의 동물에게 명칭을 붙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를 그가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4가 고대인의 이름 짓는 관습을 통해 이것을 설명했다면, AC.145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같은 원리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AC.142-145는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결국 다시 proprium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성질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AC.142가 말하듯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흥미로운 성경 상징 하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AC.145)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20)
AC.144
‘이름으로부르는것’(callbyname)이그성질을아는것을의미하는까닭은,고대인들이‘이름’(name)을어떤것의본질로이해했고,‘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을그성질을아는것으로이해했기때문입니다. 그까닭은그들이의미되는것들에따라아들과딸들에게이름을지어주었기때문입니다.모든이름에는그이름에고유한어떤것이들어있어서,그것으로부터그리고그것을통하여그들은자녀들의기원과성질을알수있었습니다.이에대해서는앞으로이저작에서주님의신적자비로야곱의열두아들을다루게될때살펴보게될것입니다. 그러므로이름들이그이름으로지칭되는것들의근원과성질을함축하고있었기때문에,‘이름으로부르는것’(callingbyname)으로다른어떤것도이해하지않았습니다.이것이그들사이에서관습적으로사용되던말하는방식이었지만,이것을이해하지못하는사람은그러한것들이이런의미를가진다는사실을이상하게여길수있습니다. That to “callby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and by “seeingandcallingby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from which,and by which,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when,of the Lord’s Divine mercy,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byname.”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AC.144는 AC.142에서 사람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왜 그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이 되는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름은 대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지칭하는 명칭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name)을 어떤 것의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했고, 그래서 ‘보고이름으로부르는것’(seeingandcallingbyname)을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름 짓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과 딸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이름을 통하여 자녀의 기원과 성질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지금 모두 설명하지 않고, 앞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독자는 우선 ‘고대인의이름은그사람의기원과성질을드러내는의미를지니고있었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 설명은 AC.142의 창2:19-20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셨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동물들의 명칭을 정했다는 장면만을 속뜻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고, 사람이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것이 ‘이름을주는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AC.144는 바로 이 해석의 언어적·고대적 배경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름’, ‘본질’, ‘근원’, ‘성질’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리키는 소리를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지를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이름이 중요하게 사용될 때에는 오늘날의 명칭 개념만 가지고 읽기보다, 그 이름이 그 대상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에나오는모든이름은하나의고정된뜻을가지고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144가 말하는 핵심은 이름이 본질과 근원과 성질을 함축한다는 것이지, 이름 하나마다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한 가지 의미만 적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의 표현은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의미를 살필 때에도 그 이름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어떤 사건 가운데 등장하는지, 그리고 말씀에서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43과 AC.144를 나란히 놓으면 고대인들의 언어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을 말하면서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4에서는 그들이 이름을 통하여 사물과 사람의 본질과 성질을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그 이름이 단순히 외적인 사물과 호칭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질을 드러내는 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관습적인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4는 창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직접적인 해설인 동시에, 앞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을 읽는 데 필요한 하나의 기본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름으로부르는것’은 그저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AC.142에서 사람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AC.144)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2:19-20)
AC.143
고대에‘짐승들’(beasts)과‘동물들’(animals)이인간안의애정들과그와같은것들을의미했다는사실은오늘날에는이상하게보일수있습니다.그러나그시대사람들은천국적인관념안에있었고,또그러한것들이영계에서는동물들로,실제로는그것들과닮은그러한동물들로표상되기때문에,그들이그런식으로말할때에는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았습니다.말씀에서도짐승들이일반적으로또는구체적으로언급되는곳에서는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습니다.예언서전체가그러한것들로가득하기때문에,각각의짐승이구체적으로무엇을의미하는지알지못하는사람은말씀이속뜻에무엇을담고있는지를도저히이해할수없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짐승들은두종류가있는데,악하거나해로운짐승들과선하거나해롭지않은짐승들입니다.선한짐승들은선한애정들을의미하는데,예를들면양과어린양과비둘기가그러합니다.그리고여기서는천적인간,곧천적영적인간을다루고있으므로이러한짐승들을의미합니다.‘짐승들’(beasts)이일반적으로애정들을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말씀의몇몇구절들을통해확증한바있으므로(AC.45-46),여기서는더이상확증할필요가없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But,as before observed,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as for instance by sheep,lambs,and doves;and as it is the celestial,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who is treated of,such are here meant.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n.45–46),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AC.143은 AC.142에서 ‘짐승들’(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새들’이 영적 애정들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짐승이왜인간의애정을의미하는가?’라는 해석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점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고대에 ‘짐승들’(beasts)과 ‘동물들’(animals)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 사람들이 ‘천국적인관념’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08에서 고대인들의 말하는 방식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인간 안의 영적인 상태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영적인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러한 관념 속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말하면서 인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표현도 그들에게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애정과 같은 것들이 영계에서 실제로 동물들로 표상되며, 그것도 그 애정의 성질과 닮은 동물들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짐승과 애정의 관계는 단순히 고대인이 동물의 성격을 관찰하고 ‘양은온순하니선한마음을상징한다고하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 안에서는 영적인 상태와 그것을 표상하는 형상 사이에 실제적인 질서가 있고,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그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동물들이 속뜻을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짐승들도 같은 원리로 읽습니다. 짐승이 일반적으로 언급되든 특정한 종류가 언급되든 그 안에는 인간의 애정과 관련된 속뜻이 있으며, 특히 예언서에는 이러한 표현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예언서의 속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7에서 역사적인 말씀에도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했던 설명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천국적인 실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동물은곧애정’이라는 하나의 공식만 만들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43자체가 이미 짐승들을 악하거나 해로운 것과 선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구별합니다.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을 의미하며, 그 예로 양과 어린양과 비둘기를 듭니다. 반대로 악하거나 해로운 짐승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다른 성질의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동물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하나의 의미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성질과 그것이 놓인 말씀의 문맥, 그리고 현재 다루는 주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42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등장하는 짐승들의 의미도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에 맞추어 이해됩니다. AC.103에서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서 다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AC.45-46에서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참고 번호가 아닙니다. 창1에서 동물들을 다룰 때 제시했던 상응의 원리가 이제 창2의 짐승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창1과 창2의 해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의 속뜻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AC.143의 핵심은 ‘짐승은애정을뜻한다’는 대응 하나를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의미가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함께 보았고, 영계에서도 인간의 애정은 그 성질에 상응하는 동물의 형상으로 표상됩니다. 말씀의 동물 표상도 이러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사람이 성경의 사물에 임의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적인 표현과 영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를 말씀 안에서 읽어 내는 방식이라는 점이 AC.143에서 한층 분명해집니다. (AC.143)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창2:19-20)
AC.142
‘짐승들’(beasts)은천적애정들을의미하고,‘하늘의새들’(fowlsoftheheavens)은영적애정들을의미합니다.다시말하면,‘짐승들’(beasts)은의지에속한것들을,‘새들’(fowls)은이해에속한것들을의미합니다.‘그것들을사람에게로이끌어그가무엇이라부르는지를보시는것’(bringthemtothemantoseewhathewouldcallthem)은그로하여금그것들의성질을알게하시는것이며,그가‘그것들에게이름을주는것’(givingthemnames)은그가그성질을알았음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는주님께서자신에게주신선의애정들과진리의앎들의성질을알고있었음에도여전히proprium으로기울었으며,이것은앞에서와같은말,곧‘그를돕는배필을찾지못했다’(therewasnotfoundahelpaswithhim)는것으로표현됩니다. By“beasts”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and by“fowlsoftheheavens,”spiritual affections;that is to say,by“beasts”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and by“fowls”things of the understanding.To“bringthemtothemantoseewhathewouldcallthem”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and his“givingthemnames”signifies that he knew it.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still he inclined to his own,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therewasnotfoundahelpaswithhim.”
해설
AC.142는 AC.133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9-20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2는 창2:19-20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끄시는 일,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는 일이 바로 그 과정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짐승들’(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새들’(fowls of the heavens)은 영적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더 분명하게 풀어 ‘짐승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새들’은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인간 마음의 두 능력과 연결됩니다. AC.116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도 서로 구별된다고 했고,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의미도 각각 의지와 이해에 연결했습니다. 이제 창2:19-20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애정들이 다시 의지와 이해라는 두 영역 안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을 막연히 같은 종류의 좋은 감정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AC.142가 직접 설명하듯 천적 애정은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되고, 영적 애정은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됩니다. 앞에서 사랑과 선은 의지의 영역에, 신앙과 진리는 이해의 영역에 연결되어 설명되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모든 차이를 완성하여 정의하기보다, 현재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의지에속한것들’과 ‘이해에속한것들’이라는 구별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어 주님께서 짐승들과 새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그가 무엇이라 하는지를 보시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의 ‘성질’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성경의 ‘이름짓기’는 단순히 대상에 임의의 명칭을 붙이는 행위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그가 그것들의 성질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그 의미를 결정하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들의 성질을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이 점은 ‘주님께서자신에게주신’이라는 뒤의 표현 때문에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이 그 성질을 아는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주셨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이 이름을 준다는 사실을 인간이 스스로 진리와 선의 주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122-125에서 계속 설명된 것처럼, 인간 안에 있고 인간이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는 것이라 해도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AC.142의 핵심적인 긴장은 바로 그 다음에 있습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은 선과 진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갈 어떤 것을 원했습니다. AC.133에서 간략히 제시했던 이 사실이 이제 창2:19-20의 각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지막의 ‘그를돕는배필을찾지못했다’는 표현은 바로 이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미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주시고 그 성질까지 알게 하셨지만, 그는 그것들만으로 자신의 proprium에 대한 기울어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알맞은 상대를 찾으려고 여러 피조물을 시험해 보셨으나 실패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제 그 상태에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AC.142는 따라서 창2:19-20을 창2:18과 21-23사이에 놓인 단순한 동물 명명 장면으로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자 먼저 그에게 이미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은 그것들의 성질을 알지만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먼저 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proprium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고유한 것으로 느껴지는 삶을 원했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다음에 이어지는 ‘갈빗대’와 ‘여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배경이 됩니다. (AC.142)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찬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창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참고로 잠깐 창2 중간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여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2장 1절로 17절까지는, 태고교회 사람 안에 형성된 ‘천적 상태’와 그 생명의 질서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장면은, 단순히 창조 활동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싸움과 분리가 멈추고 사랑과 평안이 자리 잡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어지는 에덴동산과 네 강의 묘사는, 천적 인간 안에 흐르는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 지식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가장 바깥의 기억 지식까지도 위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그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 계속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 곧 퍼셉션으로 접해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독립적 proprium 쪽으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첫 단락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적 인간의 질서와 평안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반면 창세기 2장 18절로 끝 절인 25절까지는, 인간 안에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기 시작하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외로움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이제 ‘자기 스스로 느끼고 선택하고자 하는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돕는 배필’을 만드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외적 배우자 이전에,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시작으로 설명합니다. 이어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은, 인간이 자기 안의 다양한 애정들과 상태들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돕는 배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여자의 창조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인간 안에 자기감과 자유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직 이 proprium이 완전히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았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순수하게 결합되어 있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둘째 단락은, 천적 인간 안에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정, 곧 이후 타락의 가능성과 동시에 참사랑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17, 18, 두 구절뿐이지만, 이 두 구절이 두 큰 부분, 곧 전, 후반의 마침과 시작에 걸쳐 있어서, 그리고 해설 및 심화를 통한 많은 깊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어서 여전히 원고량이 제법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7-18)
이 본문을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이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 리딩보다는 전체 범위에서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및 ‘돕는 배필’, 그리고 오늘 전체를 관통하는 ‘proprium’(프로프리움)을 키워드로 각각 요약, 아래 요약본을 리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선악과’입니다.
AC.128-130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금지된 과일이나 도덕 시험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기억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 ‘내 기준에 맞아야 받아들이겠다’라는 내적 자세 자체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입니다.
AC.128은 특히 이 상태를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감각과 학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천적이고 신적인 것까지 감각으로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오히려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결국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핵심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욕망’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확증합니다. 즉, 같은 지식과 같은 이성도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AC.129는 이 문제를 ‘원리’(principle)의 문제로 더 깊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전제가 거짓이어도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감각과 상상으로 붙잡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먼저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에 학문과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중심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면 죽음이고, 주님이 중심이면 생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AC.130에서는 이 상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에덴동산’으로 삼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기의 ‘에덴’으로 삼습니다. 그의 ‘동쪽’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강처럼 흘러와야 할 지식과 이성이, 이제는 자기 사랑을 섬기는 체계로 뒤틀립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애굽’이 되고, 거짓 추론은 ‘앗수르’가 되며, 결국 지혜처럼 보이는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려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28-130이 말하는 ‘선악과’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을 생명의 근원 자리에 앉히려는 것,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점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죽음’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이성과 지식을 사용할 때에만 참된 생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 것인가’라는 영적 방향의 문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를 매우 깊은 내적 의미로 읽는데, 여기서 ‘혼자’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미세한 내적 방향의 변화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안에서 처음 생겨나는 ‘독립 욕구’이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역시 단순한 외적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프로프리움, 라틴, 영어로는 own), 곧 자기성(自己性)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은 처음부터 악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주님의 인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처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감(自己感)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이 proprium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돕는 배필이던 것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 욕구가 됩니다.
심화에서는 이 상태를 ‘내적 방향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노골적 반역은 아니지만,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향할 가능성 자체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 때문에 proprium도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독립하고자 하는 가능성조차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AC.139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다시 한번 더 깊게 재정의됩니다. 놀랍게도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천적 인간의 가장 복된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침해를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거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발람의 예언인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악을 뜻하며, 홀로 거함은 세상적 자기중심 질서와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이런 ‘홀로 있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민족들 가운데에’,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가기를 원하면 그 길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래 참된 ‘홀로 있음’은 주님 안에서만 사는 천적 평안의 상태였지만, 인간은 그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바로 거기서 proprium과 이후의 타락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AC.140-141에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인간 안에 허락된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기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이 사람의 proprium이라고 직접 밝히며,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는가’입니다. 이 시점의 인간은 아직 ‘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매개 구조’입니다.
AC.140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자유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닫힌 독립성이 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감’으로 기능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이라는 뜻의 ‘a help as with him’(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개역 개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힘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응답하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proprium의 변화가 ‘새로운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proprium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될 때, 같은 자기감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 proprium’, 혹은 ‘천적 proprium’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자기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41에서는 proprium이 육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가 정리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proprium을 잃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어느 정도 알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것이 완전히 마음의 퍼셉션으로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proprium이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 곧 직접적인 지각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이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닫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들로 충만한 proprium입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행복, 평안이 모두 그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그래서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proprium 없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AC.140-141이 말하는 ‘돕는 배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으로 재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근원으로 삼는 proprium은 지옥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받아들이는 proprium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깊은 자기성의 구조입니다.
다음은 끝으로 ‘proprium’입니다.
AC.128-141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주제는 ‘proprium’, 곧 ‘자기의 것’, ‘자기성’(自己性)입니다. 이 본문들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처럼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기감이 어떻게 타락과 천국의 갈림길이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단순한 악행 이전에,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느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128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와 ‘내 것이라 주장하는 상태’가 대비됩니다. 인간이 감각과 기억 지식과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자기 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이며, 에스겔의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AC.130 부근에서는 이 proprium의 본질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기억 지식도, 이성도,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질서를 거꾸로 세웁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 지혜 → 지성 → 이성 → 기억 지식’의 흐름인데, proprium은 맨 아래 단계가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황폐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옥의 본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AC.138-140에 이르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proprium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앞에서는 타락과 자기중심의 근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허락된 어떤 필요한 구조처럼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근원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게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AC.140은 ‘a help as with h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것이 ‘그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proprium은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지는 타락한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가 되는 proprium입니다. 후자의 proprium은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외적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自己感)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만약 proprium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처럼 될 것입니다. 반대로 proprium이 자기 폐쇄적 중심으로 굳어지면, 인간은 주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proprium 자체가 아니라, 그 방향과 귀속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변화가 ‘새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나’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 proprium은 자기감의 제거가 아니라,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도 여전히 기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heavenly proprium’, 곧 ‘천적 proprium’입니다.
마지막으로 AC.141은 proprium을 세 인간 유형 안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이 입술의 고백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여전히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마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proprium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행복과 평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주님은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AC.141의 결론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수록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습니다.
proprium이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 자식’으로 사랑합니다. 비록 말로는 ‘이 아이는 주님의 자녀이며, 저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고백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가 거기서 이 proprium 시험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 움켜쥐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꺼이 주님께 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것,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각 사람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조차 그 사람의 악한 기억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proprium입니다. 이 proprium이 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장치가 없어야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모든 내용, 모든 이야기가 저희에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창2 ‘돕는 배필’ 이야기를 무슨 결혼 본문 정도로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속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 주님, 저를 새롭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주신 이 proprium 역시 거듭나 부디 천적 인간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